소설리스트

424화.마계의 왕 (3) (42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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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의 왕 (3)

“꼴이 말이 아니군.”

“흐흐, 모양새와 업적이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지.”

성공했다는 뜻이다.

여기저기 상처입어 누추한 몰골이었지만 이불리안은 하얗게 웃었다.

신성에 당한 터라 회복이 쉽지 않은 듯싶었지만 그래 봤자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

아니, 놈이 그들을 잡고 흡수한 신성의 일부만 쓰더라도 단숨에 회복하는 것 또한 가능할 터였다.

그러지 않는 것은 절약의 의미도 있었지만 로칸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고도 그 일을 해냈다는 것을 말이다.

“좋아. 계약 조건을 논의해 볼까?”

이 정도면 로칸도 인정이었다.

단신으로 해낸 것인지 아니면 수하들과 협공을 해 이루어 낸 결과인지는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어쨌든 그에게 그만한 역량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니까.

때문에 로칸은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이 새끼…….’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이불리안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제시하는 조건은 로칸에게 있어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5 대 5의 지분을 제시하며 파트너십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정작 전투에 있어서는 돌격 대장 노릇을 하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불리안도 놀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 마냥 불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겠지만 여차하면 놈은 튈 수 있는 조건이고, 유저의 특권은 부활을 몇 번이고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둔 전략인 만큼 로칸이 수락할 리 없었다.

이전이었다면 세력이 부족한 로칸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모양새이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차라리 각자 움직이지. 상황에 따라 연합하는 것으로 하고.”

때문에 아예 개별 전투를 치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불리안과 그 세력이 한 축을, 로칸과 뱀파이어들이 또 다른 한 축을 맡아 양방에서 밀고 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상대의 세력도 분산이 될 테니 일시에 모든 것이 끝나는 한 방 싸움보다는 싸움이 길어지고 지지부진해 질 수 있었지만, 상관없다. 로칸이 그렇게 질질 끌도록 두지 않을 테니까.

“크흠, 좋다. 그럼 이렇게 하지.”

뱀파이어라는 강력한 마계 세력이 로칸에게 붙은 탓에 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음을 깨달은 이불리안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한편,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서로의 요청을 꼭 한 번은 반드시 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목숨을 건 돌격이든, 구원 요청이든 말이다.

“좋아. 그럼 사인하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로칸은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서로의 목숨을 담보로 한 계약이니 만큼 지키지 않으면 놈은 영혼이, 로칸은 계정이 소멸되어 버릴 터였다.

‘내 조건을 방어에 쓰면 그만이지.’

놈이 어떤 미친 짓을 요구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요청 권한으로 그것을 방어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상대의 요구를 수락하지 않는 것을 양해해 달라고 요청해 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서로의 음흉한 속내를 뒤로한 채 계약서는 밝게 빛나며 계약의 완료를 선언했다.

“이제 어쩔 셈이지?”

“어쩌긴. 계획대로 해야지.”

계약서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마계 제패의 뜻을 모으기는 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는 아직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원래는 이불리안이 세워 놓은 나름의 계획이 있겠지만 로칸이 각개전투를 선언하면서 틀어져 버렸을 테니까.

“일단 만나는 게 좋겠지. 아니면 각개전투가 아니라 각개격파를 당할 테니까 말이야.”

로칸은 이불리안이 펼쳐 놓은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이불리안의 세력과 지금 이곳, 뱀파이어들의 영지가 있는 곳의 중간 지점이었다.

서로 같은 지점을 향해 밀고 나가면서 일단 접경 지역을 만들어 내자는 것이다.

이 경우 진영이 길게 늘어지며 공격당할 수 있는 면적 또한 넓어질 수 있었지만 감당 못 할 수준은 아니다.

일단 연합 전선을 펼칠 수 있도록 서로 맞닿은 뒤, 천천히 덩치를 불려 가는 것이 각자 깨지지 않는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무지개 전송기를 이용해 서로의 영토를 넘나들 수 있을 테고.

“나쁘지 않군. 열흘이면 되겠나?”

“일주일이면 충분하지.”

일주일 후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각자의 세력을 일으켰다.

마계를 크게 뒤흔들어 놓을 새로운 세력의 준동이 시작되었다.

***

이것은 두 번째 시험이었다.

단 일주일. 그 안에 넘어야 할, 파괴하거나 손에 넣어야 할 거점이 세 개나 되었으니까.

이불리안은 닷새 동안 다섯 명의 반신을 처죽이고 그 심장을 가져왔지만 그렇다고 이 일이 더 쉽다는 것은 아니다.

그 길목에 있는 반신들이 무소속에 가까운 인물들이고, 레벨도 470 정도로 비교적 낮다고는 하지만 신성의 총량이 강함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고 이동 거리 역시도 생각을 해야 했으니까.

오히려 470레벨이긴 해도 이 마계에서 무소속으로 영지를 차지하고 있으려면 그만한 강함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만큼 일주일보다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었고, 어쩌면 놈을 쓰러뜨리지 못해 아예 약속 장소까지 닿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시험이라는 것이다.

만약 여기서 더 늦게 당도한 이가 있다면 그는 향후의 행보에서 위축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시험이자 서로의 무력을 과시하는 자리라고나 할까.

그것을 알기에 로칸도 서둘렀다.

뱀파이어 로드를 비롯한 반신들을 수하로 이끌고 소수의 인력만을 이용해 거점부터 공략했다.

“자이언트 버터플라이 소환, 수면 가루.”

파라라라라랑.

아직 로칸과 뱀파이어들의 움직임을 모르는 놈들에게 끝없는 잠을 선사했다.

성벽 위의 병력도, 심지어 도시 안의 경비병들까지 모조리 잠들었고 로칸과 뱀파이어들은 은밀히 성벽을 넘었다.

“크하하하! 이 몸이 새로운 뱀파이어의 로드시다!”

새로운 뱀파이어 로드 후르프가 힘을 발해 상대 반신의 시선을 끌어 두는 사이, 로칸이 은밀히 적의 뒤편으로 접근했다.

신성을 일으켜 후르프와 부딪치는 적의 뒤통수를 냅다 갈겨 버렸다.

“초극.”

“커……!”

고수들의 싸움에서 방심만큼 큰 독도 없을 터였다.

일대의 패자인 뱀파이어 로드를 맞아 감히 한눈을 팔 새가 없었던 적은 제대로 된 비명조차 흘리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신성까지 가미된 초극을 제대로 받아 내고서 누가 감히 멀쩡할 수 있으랴.

샤킬란을 상대할 때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펼치지 못했지만, 제아무리 그라도 제대로 맞았다가는 멀쩡하지 못했을 터였다.

이제 로칸의 초극에는 파괴의 신성마저 깃들어 있었으니까.

“뱀파이어들을 불러서 수습해라. 우리는 다음 거점으로 곧장 이동한다.”

“예! 주인님.”

뒷정리와 수습은 뱀파이어들의 몫이었다.

수장의 목이 떨어졌으니 마족들이 의리를 지키겠다고 덤빌 일은 없었고, 살아남은 자들이 로칸과 뱀파이어들의 세력에 들어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것이 마계의 생리.

자신의 목숨에 집착하고 강자에게 절대 복종하는 이기적인 강자존의 생리를 이용해 로칸은 대가리들만 확실하게 날려 버렸다.

“유니콘 소환, 전설을 타는 자.”

콰앙!

그 방식 또한 변화무쌍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무투파들을 자이언트 버터플라이의 수면 가루를 이용해 잠재우고 시작하는가 하면, 유명계 소속이라 해도 믿을 만큼 영적 능력을 중심으로 하는 팬텀 계열의 마족에게는 대놓고 유니콘을 소환해 힘으로 찍어 눌렀다.

유니콘이 발하는 신성의 기운은 뱀파이어들에게도 독과 같았지만 로칸의 휘하로 들어오면서 시스템의 영향을 받아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반면 상대에게는 치명적인 독에 중독된 것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니 어찌 뒤를 노리기만 하겠나.

잔뜩 힘과 신성이 위축된 팬텀들을 연기 흩어 버리듯 소멸시켜 버렸고, 불과 하루 만에 세 개의 주요 영지 중 하나만을 남겨 둔 상태가 되었다.

“주인님, 찾아온 이가 있습니다.”

“찾아온 이?”

그리고 그때, 누군가 로칸을 찾아왔다.

로칸이 수락의 뜻을 비치자 곧 그들이 있는 장소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독왕 자킬][Lv 473]

“곧 찾아갈 텐데 무슨 일이지?”

이번에는 로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녀석은 그들이 공략하려고 한 세 번째 영지의 영주였으니까.

“흐흐흐, 가만히 있다가 머리가 터져 한 줌 독수가 되느니 먼저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편이 낫지요. 인사드리겠습니다. 독왕 자킬이라 합니다.”

인사와 함께 신하의 예를 갖추는 자킬.

녀석의 행동에서 로칸은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자진 항복.

로칸에게 당하기 전, 미리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 것이다.

‘흠, 이건 생각 못 했군.’

놈은 자신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만독불침에 이른 로칸이 아니던가?

자킬의 독은 뱀파이어들을 포함한 반신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강력했지만 블랙 드래곤의 포이즌 브레스까지 견뎌 낸 로칸에게는 글쎄.

그것을 아는 것인지 모르고서 그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놈이 싸우기도 전에 항복을 선언했다.

“싸움은 몰라도 수비에는 자신이 있는 게 아니었던가? 이러는 게 선뜻 이해가 되지는 않는군.”

“그래 봤자 만독이 통하지 않는 분께는 하찮은 재주입니다. 거두어 주신다면 로칸 님을 위해 제 독을 쓰겠습니다.”

본래 이처럼 비열하고 음흉한 족속들은 중히 쓰지 않는 로칸이었다.

하지만 굳이 무의미한 싸움과 희생까지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놈을 찬찬히 훑어본 후, 그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내 밑으로 들어오려면 절대복종을 맹세해야 한다.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이 마계에서 그런 것도 없이 그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거두어만 주신다면 그 누구라도 중독시켜 보이겠습니다.”

누구라도라는 말에 힘을 주는 녀석을 보니 대충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불리안과 자신의 밀약까지 알아낸 모양.

녀석은 훗날 그와의 맹약이 깨질 것까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독은 꽤 편리한 능력이지. 좋다. 사인해.”

자존심도 세지만 제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음흉한 셈에 밝은 마족들이다.

벌써 이런 자가 나올 줄은 몰랐지만 마족들의 자진 투항을 전혀 염두해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기에 로칸은 그에게 계약서를 던졌다.

오직 자신에게만 절대 복종하겠다는 약조가 담긴 계약서.

자킬은 망설임 없이 그 위에 사인을 했지만 로칸은 아주 잠깐 놈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았다.

‘역시 믿을 만한 놈은 아니야.’

그 찰나가 놈의 쓰임을 정했다.

“그럼 얼른 가서 독을 거두고 성문을 열어라. 오늘 네 성에 내 깃발을 꽂아야겠다.”

“뜻을 받들겠습니다.”

자킬은 그대로 사라졌고, 로칸은 고작 이틀 만에 약속 장소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

이 표식을 발견하기도 전에 이불리안이 자신이 당도했음을 알게 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자극이 되겠지. 로칸에게 이대로 기세를 빼앗기면 연합의 주도권이 넘어가게 될 테니까.

놈도 그것을 원치는 않을 테니 아마 피 터지게 싸우기 시작할 터였다.

그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 희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 희생이야 대의를 위해서는 소소하다 여기겠지.

그렇게 똥줄이 타서 달려올 이불리안을 기다리며 로칸은 짐짓 여유를 부렸다.

마계의 다른 파벌들의 움직임을 살피고 향후의 계획을 세웠다.

이불리안은 자신을 장기짝으로 쓸 참이었겠지만 누가 장기짝이 될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

“흐흐흐흐.”

로칸이 사악한 미소를 흘리며 멀리서 다가오는 이불리안의 군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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