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0화.칠대죄악 (1) (430/500)

 # 430

칠대죄악 (1)

“릴리스.”

로칸이 입 밖으로 꺼낸 이름에 이불리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칠대죄악 중 색욕의 힘을 지닌 마계 대공.

색욕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순수 마족의 혈통 중 하나인 서큐버스의 피를 이은 자.

다른 칠대죄악이나 대공들에 비해 본신의 무력이 낮은 것은 맞지만 여러모로 상대하기는 쉽지 않은 존재였다.

이를테면 발록과 정반대의 성향이랄까.

색욕의 힘에 매료되어 그를 따르는 마족들이 많았고, 그를 직접 상대할 때도 어려움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승리하지는 못해도 지지는 않는 존재라고 했던가.

겨뤄 본 이들이 입을 다물어 정확히 어떤 힘을 지녔는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불리안이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자신의 의지를, 목표를 확고히 했다.

“그리고 놈은 나 혼자 잡는다.”

“뭣?”

그러나 로칸은 달아오르는 이불리안의 의지에 찬물을 끼얹었다. 

마계 대공을 혼자서 상대하겠다고? 

물론 이미 전적이 있다지만 다소 무리인 것처럼 보이는 일이다.

혹시 놈의 신성을 독식하려는 수작일까? 

이불리안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대충 예상이 가는 게 있어서 그래. 놈과 붙기 직전까지는 병력이 좀 필요할 수 있지만 놈을 상대하는 건 나 혼자여야만 한다. 그 이유는 대충 알고 있겠지?”

이불리안의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실제 놈을 사냥하려 했던 이들 중 실패하고도 살아온 자들은 많지만, 둘 이상이 덤벼들어 모두가 살아온 적은 없었으니까.

그것으로 보아 놈에게 둘 이상의 적을 이간질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있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가장 간단한 예상은 세뇌.

하지만 그 또한 확실한 것은 아니다. 

놈이 어떤 조건을 걸어 둘이 싸우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죽은 것처럼 꾸며 신성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부딪히도록 만들었을 수도 있다.

당장 신위조차 지니지 않은 이가 490레벨 이상의 강대한 신성을 지닌 이들을 단기간에 세뇌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

기본적으로 신성을 가졌다는 것은 정신 공격에 충분히 대비하고 방어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는 것과 같으니까.

“……알겠다, 내가 뭘 하면 되지?”

“길을 열어라. 내 권능을 사용하면 일단 놈의 본진까지는 어렵지 않게 밀고 나갈 수 있을 거다.”

“좋아, 그렇게 하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이불리안은 곧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로칸의 현재 레벨을 생각할 때, 릴리스의 신성을 취한다 해도 단숨에 499레벨을 달성하고, 그것을 넘어 신위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

서로의 영혼을 걸고 불가침 조약을 맺긴 했지만 만약 로칸이 먼저 신위를 얻어 신계로 사라져 버리면 이불리안 자신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양보하기로 마음먹었다.

병력을 충원하고, 각 거점에 최소한의 병력만을 남겨 둔 채 한 곳으로 규합시켰다.

릴리스의 영토를 향해 진군을 명했다.

[권능 : 불굴의 의지를 사용했습니다.]

그런 이불리안의 군대와 자신의 군대에게 로칸은 권능을 사용했다. 

불굴의 의지. 어떠한 정신 공격에도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며 단숨에 릴리스의 영토로 밀고 들어갔다.

“크아아악!”

“릴리스 님……!”

“고귀하신 분을 지켜야 한다! 목숨을 던져 한 놈이라도 더 죽여!”

예상대로 숫자와 영토의 크기라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릴리스 영지의 마족들은 거세게 저항했다.

놈을 신앙처럼 여기며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놈들의 자살 공격에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게 일어났다.

마치 광전사 군대를 보는 것과 같은 저돌적인 공격.

누가 공격 측이고 누가 수비 측인지 선뜻 알기 어려울 만큼 놈들은 필사적으로 항전했다.

“징집.”

그러나 그뿐이다.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지만 기본 병력이야 코인을 소모해 뽑아내면 그만이니까.

그 과정에서 주머니 한쪽이 휑해질 만큼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로칸은 개의치 않고 끊임없이 병력을 일으켰다. 

점령한 거점마다 자금을 회수하고 전액 재투자하며 아예 물량으로 밀어붙였다.

“으으윽!”

릴리스의 거처로 다가갈수록 저항은 거세졌고 아군의 움직임이 둔해지기는 했다. 

어떤 정신적인 힘이 작용했는지 공격을 머뭇거리다 죽는 이들도 다수 발생했고, 그때마다 이불리안과 휘하 반신들이 가세하지 않았다면 패배를 떠올렸을 만한 순간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권능 : 불굴의 의지는 제 역할을 다해 주었고 결과적으로 수십 개의 거점을 단숨에 뚫어 내며 릴리스의 거처가 있는 본성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병력을 물려. 여긴 나 혼자 간다.”

“하지만…….”

“날 믿어. 만약 실패하면 부활해서 다시 도전하면 그만이니까.”

“근처에 대기하고 있겠다.”

하지만 릴리스의 거점 도시인 환락의 궁전에 가까워졌을 때, 나서는 것은 로칸 혼자였다.

나머지는 도시로부터 거리를 벌리며 포위하듯 멀리서 도시를 에워쌌다.

허나 이상한 것은 도시 안에서 별다른 저항이나 기세가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문마저 활짝 열린 상태였다.

들어올 테면 들어와 보라는 듯.

들어올 용기가 있느냐는 듯.

누가 봐도 함정 같은 모습이지만 로칸은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다만 뱀파이어 로드를 상대할 때와 같은 일을 막기 위해 폭력의 왕과 절대자의 힘을 끌어내고, 신성마저 겹겹이 두른 상태였다.

릴리스의 능력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확실한 것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다른 마계 대공에 비해 약하다는 평가가 있을 뿐, 얼마만큼의 강함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무패(無敗)의 신화를 가진 이이기도 하고.

“하?”

그렇게 성안으로 발을 들였을 때, 로칸의 표정이 변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환락과 난교의 현장이었으니까.

자신들을 처죽이려는 적들을 눈앞에 두고 집단 성교나 하고 앉았다고? 

그것도 성문마저 활짝 열어 놓은 채?

로칸은 생각을 바꿔 원거리 포격으로 이놈들을 몽땅 매장시켜 버릴까 고민했다.

사람을 깔봐도 유분수이지, 포기한 게 아니라면 이게 무슨 미친 짓이란 말인가?

“카이, 전설을 타는 자, 엘리멘탈 브레스!”

고오오오오오.

인상을 찌푸리며 카이를 소환하자 녀석이 입안으로 막대한 마나를 끌어모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놈들은 이쪽에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하던 일을 계속했다.

뀨웃!

쿠화와아아아!

이내 모든 속성이 버무려진 강력한 숨결의 힘이 뿜어졌다.

그러나 놈들에게 향해야 할 브레스의 방향이 마지막 순간에 틀어지고 말았다.

“카이?”

뀨…….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카이도 마찬가지. 

어떻게 된 것이냐는 로칸의 눈빛을 받은 카이가 촉촉한 눈망울로 고개를 도리질 쳤다.

“붉은 유성!”

그렇다면 직접 공격이다. 

로칸의 지시에 카이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붉은 화염에 휩싸인 구체가 되어 유성처럼 땅을 향해 몸을 내리꽂았다.

콰과과광!

“대체 왜 그래!”

그러나 이번에도 목표가 달랐다. 

놈들이 아닌 그 주변의 벽에 자해하듯 몸을 박은 것이다.

보호막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신 공격? 

분명 카이는 자신과의 연결을 통해 불굴의 의지를 공유하고 있을 텐데?

로칸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카이를 향한 분노와 원망이 아니다. 

어느 샌가 자신의 앞으로 나타난 반나체의 여인을 향한 것이었다.

“어서 와요, 로칸,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생긋 웃는 그 표정이 청초하고 풋풋하다.

도저히 색욕의 정점에 있는 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청백지신은 마구 더럽히고 싶은 욕망을 들끓게 만들었다.

“릴리스.”

로칸은 저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가슴을 억누르며 놈의 이름을 꺼냈다.

색욕의 릴리스.

마계 대공 중 하나이자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알려진 존재가 로칸을 보며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았다.

“뭔 지랄이냐?”

그러나 로칸은 넘어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덮쳐 달라는 듯 몸을 사뿐히 흔들거리며 유혹하는 릴리스의 몸을 넋 없이 바라보는 대신 배틀 액스를 강하게 꼬나 쥐었다.

권능의 힘을 받은 이들과 그 힘을 스스로 쌓아 올린 이의 저항력은 비교가 불가능했으니까.

“전신의 돌격, 점멸!”

“어맛, 난폭하셔라!”

파앙!

그러나 로칸의 기습은 허공을 때릴 뿐이었다. 

여전히 웃는 낯으로 몸을 살랑거리는 릴리스가 허깨비처럼 사라져 공격을 피해 냈다.

“정말, 저를 아프게 하실 셈인가요?”

청순가련.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그 표정과 몸짓조차도 은근한 색기가 배어난다.

이런 색기를 이용해 자신을 노리고 찾아온 이들을 홀렸던 것일까?

로칸은 마음을 다잡았다. 

TV에 나오는 여배우보다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였지만 고작 이것으로 무패의 신화를 쌓아 올렸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뭔가 더 있다.’

입술을 꾹 깨물고 배에 힘을 단단히 주었다. 

자신의 기습마저 쉽게 피해 낸 좀 전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파괴의 신성을 이끌어 냈다.

“투지의 발걸음, 급가속!”

그 음탕한 몸뚱이를 저며 놓은 다음에도 색기를 부릴 수 있는지 보자!

순식간에 접근하며 파괴의 신성을 내리꽂았다.

-저를 아프게 하실 건가요?

“큭?”

그 일격을 꽂아 넣으려는 순간, 팔이 저절로 비틀렸다. 

외부의 힘이 관여한 것은 아니다. 

저도 모르게, 저 스스로 공격을 틀어 버린 것이다.

카이가 그랬던 것처럼.

뇌리를 파고드는 어떤 환상 같은 음성이 몸을 저절로 움직였다.

“빌어먹을, 이거였군.”

결과적으로 빈 땅을 때린 로칸이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심장의 두근거림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불굴의 의지라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건만 놈의 신성은 그것을 뛰어넘은 것이다.

‘아니, 그건 아니지.’

정확히는 불굴의 의지가 작동하지 않는 범주의 정신 공격이라고 봐야 했다.

불굴의 의지는 정신에 가해지는 부정적인 힘, 즉 외부의 힘이 가하는 정신과 육체의 제약을 이겨 내는 힘이다.

하지만 지금 이것을 정신 공격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의지와 정신이 저절로 움직이게 만드는 매혹일 뿐인데?

곤란했다. 참으로 곤란해졌다. 

이래서야 제대로 된 공격을 성공시킬 수 없지 않은가?

‘카이와 협공을 해 봐?’

아니다. 그랬다가는 자칫 자신이 카이를 공격하거나 카이가 자신을 공격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놈의 매혹이 단일 대상에게 한정된다는 확신이 있다면 모를까, 여기서 수를 늘리는 것은 오히려 자신을 어렵게 만드는 결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다양한 소환수들과의 협공을 택하는 대신 소환해 둔 카이마저 돌려보냈다.

결국 스스로 해결해 내야 했다.

“투지의 발걸음.”

콰앙!

로칸이 다시 한번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혹시 눈빛일까? 

놈의 눈을 보는 대신 봉긋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에 시선을 두었다. 

그것들을 썰어 버리기 위해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오빠, 아파!

“윽.”

콰앙!

그 순간 횡으로 베어 가던 배틀 액스가 땅에 내리꽂혔다. 몸의 균형이 허물어지고 스스로 바닥에 굴렀다.

정작 릴리스는 손가락 까딱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이런 씨부럴.”

로칸은 이 상황이 못마땅했다. 

제 몸을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 어디 해 보자.”

로칸이 빠득 이를 갈며 다시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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