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3
마왕 (1)
허무했다. 무려 칠대죄악을 가진 존재가 고작 수면 가루에 잠이 들어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다만 공격을 받으면 그 순간 일어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로칸은 전심전력의 힘을 그 한 방에 담았다.
파괴의 신성을 담은 초극.
로칸의 필살기라 할 수 있는 그 한 방에 노스토칸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세계 : 한낮의 꿈을 인수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리고 획득한 노스토칸의 신성.
사실 이건 들여다볼 것도 없었다.
그가 499레벨을 달성한 인물이기에 슬쩍 보기만 했을 뿐, 예상대로 나태하고 태만하기 짝이 없는 세계의 모습에 질겁을 하며 파괴해 버렸다.
이런 세계는 자신의 특성과 맞지도 않을 뿐더러 만약 인수했다가는 다른 세계들까지 몽땅 영향을 받을 것 같았다.
“으흐흐흠!”
이불리안과 휘하 반신들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막 잠에서 깬 그들은 영문을 모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죽어 없어진 노스토칸을 찾아 성질을 부려 댔다.
“……어?”
그러다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제 스스로가 나태에 절여진 까닭에 제대로 성질조차 부릴 수 없었던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이다.
그제야 노스토칸이 죽었음을,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깨달았다.
“로칸?”
해명을 요구하는 이불리안의 눈빛을 로칸이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미 자신의 신성이 급증한 것은 녀석도 알고 있을 터, 굳이 숨길 것이 무엇이겠나.
가슴을 쫙 펴고 놈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다 잤냐?”
“…….”
수면 가루에 갑자기 노출된 까닭인지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녀석에게 마지막 전투를 준비케 했다.
“얼른 깨고 준비해. 아무래도 여기서 끝장을 보게 될 것 같으니까.”
“뭣?”
로칸의 시선이 돌아갔다.
저 멀리, 거친 신성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역시나 분노의 캬루파가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모두 전투 준비!”
그 경고에 가까운 핀잔을 못 알아들을 리 없는 이불리안이었다.
놈은 즉시 수하들에게 전투를 준비시키고 로칸과 함께 성벽 위에 올랐다.
나태의 힘에 마냥 늘어져 있던 병사들을 수습하는 것은 나중의 일.
투항하는 자는 받아들이고, 도망치는 자는 가만 두었다.
그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쓰기에는 적이 너무 가까이에 도달한 까닭이다.
“전군 성문을 열고 나가 적을 요격하라!”
전투에 있어 성벽의 존재는 무척 중요하다.
통상 공성을 하기 위해서는 수비 측보다 3배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닐 만큼, 성벽을 끼고 싸우는 쪽의 이점이 대단한 것이다.
마법과 신성이 난무하는 이곳에서는 그 빛이 바래진 하지만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불리안은 바깥에서 적을 맞이하는 것을 택했다.
일단 아군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 뻔했고, 그 편이 분노의 캬루파와 일전을 벌이기에도 좋았기 때문이다.
“가라,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마계를 우리 발아래에 두는 것이다!”
전면전.
아군의 전력만 10만이 넘어가는 대규모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가만, 저거…….”
그러나 호기롭게 외쳤던 것과 달리 이불리안과 로칸의 표정이 굳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크아아악!”
“죽어라!”
“사, 살려……!”
전투가 시작되고 아군과 적군을 더해 수천이 한순간 죽음을 맞이했다.
첫 격돌에는 상당한 희생이 일어나는 법이니까.
그런데 압도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적들의 저항이 서겠다.
그 수도 만만치 않았고 수준 또한 상당한 것이다.
분명 이쪽 역시도 각 마계 대공의 영지에서 뽑아낸 고급 병력들일 진데.
일대일의 전투력은 적들이 오히려 한 수 위에 있었고, 피해 역시 아군이 훨씬 큰 것이다.
“분노 따위가 아니다.”
상대가 그 ‘분노’의 소유자이기에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다.
분노의 권능은 대상이 본래 가진 힘보다 더 큰 힘을 쓰게 만들어 주니까.
그 대가로 자신을 좀 먹고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긴 하지만 지금 적들이 보이는 강함은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동급의 존재를 상대로 그저 우위에 서는 정도가 아니라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버서크? 아닌데…….”
버서크면 로칸이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일단 피아 식별이 가능한 것도 이상했고, 놈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또한 뭔가 이질적이었다.
정확히는 분노의 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다른 힘이 동반되어 있는 느낌이랄까.
로칸은 전투에 끼어드는 대신 놈들을 주시했다.
그 이질적인 힘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크허허허헝!”
그렇게 적들을 노려보길 한참, 로칸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광기의 외침이 적진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나왔군!”
분노의 캬루파.
로칸과 같은 광전사 계열이면서 칠대죄악 중 하나인 분노의 힘까지 가진 녀석이 아군적군 할 것 없이 모조리 휩쓸어 가며 전면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놈! 내가 간다!”
놈을 보고 이불리안이 즉시 튀어 나갔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을 증명하겠다는 듯, 로칸에게 신성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존재감을 드러내며 놈의 시선을 끌었다.
“미친.”
그 모습에 로칸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불리안이 아니라 캬루파의 현재 상태를 파악한 것이다.
[??? 분노의 캬루파][Lv 497]
뭔가 달랐다.
한 번도 캬루파를 직접 대면해 본 적은 없지만 로칸은 알 수 있었다.
특히나 거슬리는 것은 이름과 이명 앞에 붙은 물음표들.
이것은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이 아니던가?
“설마…….”
얀켄을 제때 구원하지 못했다면 저런 모습일까.
로칸은 직감할 수 있었다.
분노의 캬루파가 공허로 추정되는 어떤 힘에 물들어 버린 것이라고.
때문에 얼른 퀘스트 창을 열어 상태를 확인했다.
[불안정한 신성 추적][퀘스트]
불안정한 신성을 지닌 ???들을 추적하여 처리하라.
???가 지닌 기운은 세상에 혼돈을 불러올 것이다.
성공 조건 : ???의 격살 32 / 108
성공 보상 : 대량의 신성, 변형된 신성에 대한 이해, 신성 저항력
실패 조건 : ???에 의한 혼돈 증식
실패 페널티 : 혼돈 시대의 개막
무려 서른두 마리! 얀켄을 구원하며 확인했던 ???의 죽음은 고작 다섯 마리뿐인데 모르는 사이 서른두 마리까지 증가한 상태였다.
어디선가 스물일곱 마리가 죽어 나갔다는 소리.
그것이 모두 캬루파가 한 일인지는 알 수 없었기에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아무리 얀켄보다 전투적 성향을 띈 반신이라지만 다섯 마리로도 얀켄을 물들일 뻔 했던 ???들을 혼자 스물일곱 마리나 처리했다고?
불가능하지도 않긴 하지만 만약 아니라면, 그와 같은 이가 천상 어딘가에 더 많이 있다는 뜻인 것이다.
“골치 아프군.”
로칸이 조급한 마음으로 전장을 다시 돌아보았다.
이제는 캬루파가 문제가 아니다.
이상 증상을 보이는 캬루파의 수하들.
분노 이상의 광기를 보이는 놈들이 더 큰 문제가 되었다.
그들 역시 ???의 기운에 물들었을 확률이 높으니까.
“전군 수비……! 제길!”
로칸이 즉시 수비와 후퇴를 명하려 했으나 상황은 이미 심각하게 변한 상태였다.
“캬아아악!”
“죽어랏!”
놈들을 상대하던 아군마저 슬슬 미쳐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랜드 마스터 이상의 존재를 사냥하면 흡수할 수 있는 신성.
놈들의 신성에는 이미 ???의 기운이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 놈들을 죽이고 신성을 흡수하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취하는 신성에는 상당한 유실이 있으니 조금은 낫겠지만 그것이 쌓이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미쳐 날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증상이 아군에게도 보이고 있었다.
적뿐만 아니라 불굴의 의지가 없이 펼치는 버서크처럼 피아 식별을 하지 않고 모든 존재를 말살하려 들었다.
아니, 공격해 온다면 본능적으로 저항하긴 하지만 오히려 같은 ???의 기운을 가진 이들에게는 적대감을 덜 보이는 것이다.
아군이 아군을 공격하는 상황.
이불리안과 반신들은 이 요상한 상황에 당혹스러워했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반역 또는 배신이라 생각하고 손수 놈들의 머리통을 깨부수는 그들 역시도 어쩌면 눈이 돌아가 미쳐 날뛰게 될 수 있었다.
“전군 후퇴! 놈들과 싸우지 마라!”
신성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반신들이라면 그나마 상황이 좀 낫다.
이상 징후를 보이는 신성의 일부를 떼어 내 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신성을 품을 뿐 다룰 수는 없는 그랜드 마스터 급의 존재들은 타격이 컸다.
되돌리기 어려웠다.
때문에 로칸은 부대 전체를 후퇴시키고 홀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라면, 자신이라면 ???의 기운에 저항할 수 있으니까.
아니 그것을 온전히 흡수해 낼 수 있으니까.
‘……괜찮겠지?’
그 또한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른다는 위험은 있었지만 일단은 자신이 나서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었다.
“크허허허헝!”
광기의 외침이 전장을 휩쓸었다.
제아무리 ???의 기운을 품은 자들이라도 폭력의 힘이 담긴 로칸의 음성에 몸을 움츠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사이 적의 기운에 물들지 않은 아군은 빠르게 후퇴했고, 로칸은 적진 한가운데에 떨어져 힘을 발했다.
“휠 윈드!”
“폭렬!”
“오러 폭격!”
이 같은 대규모 전장에서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스킬을 사용하며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이미 폭력의 왕과 절대자의 힘을 끌어올린 이상 신성은 몰라도 마나는 무한이었기에, 이불리안이 반신들과 함께 캬루파를 상대하며 발을 묶은 동안 놈의 군세를 마구 쓸어 버렸다.
“젠장, 끝이 없군.”
덕분에 로칸은 상당한 신성을 한순간에 쓸어 담을 수 있었다.
반신들은 서로 맞상대를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남은 것은 고작 그랜드 마스터들과 병졸의 역할을 맡은 하이 마스터 급의 마족들에 불과했고, 그들의 능력으로는 로칸의 일격조차 막는 것이 버거웠으니까.
힘을 아낌없이 쏟아부으며 날뛰어 대는 로칸은 불과 십여 분만에 일만이 넘는 적들을 격살하는 것에 성공했다.
[???의 신성을 흡수합니다.]
[타이틀 ‘공허를 품은 자’ 효과로 ???의 신성을 온전히 흡수 합니다.]
[당신의 신성 안에 이질적인 신성의 기운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럴 때마다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의 신성이 흡수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이대로 병력간의 전투를 벌이도록 놓아두었다가는 아군이 전멸하고 ???의 신성을 품은 존재가 전염병처럼 마구 퍼져 나가게 생긴 것이다.
그렇기에 로칸은 신성으로 스킬 지속 시간을 유지하며 자신을 잊고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한 방에 한 놈을 데려가는 것도 늦다.
최대한 힘을 광범위하게 휘둘러 공간을 쪼개고 무리를 파괴시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미 분노의 권능까지 받은 놈들인지라 도주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면서도 자신들이 살기 위해, 세상을 파괴하기 위해 누구를 먼저 죽여야 하는지 깨달은 녀석들이 꾸역꾸역 로칸을 향해 밀려들었다.
로칸은 혼자서 디펜스 게임을 하듯 그들 모두를 도륙하고 신성을 흡수하는 일을 반복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홀로 수만에 이르는 적을 괴멸시키는 단계에 이르렀다.
콰앙! 쾅! 쾅! 쾅!
“크윽!”
그러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마계 대공이자 칠대죄악 중 하나인 분노의 주인.
???의 기운마저 받아들인 분노의 캬루파가 여전히 날뛰는 중이었다.
휘하 병력과 반신들이야 시간이 지나고 코인을 소모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금세 충원할 수 있었으니, 놈을 잡지 못한다면 이 전투는 승리한 것이 아니었다.
‘어쩐다.’
동시에 캬루파 휘하의 반신들 역시 미쳐 날뛰는 것은 마찬가지.
그들 역시 로칸의 휘하 반신들이 막아 내고는 있지만 로칸의 명에 따라 죽이지는 않고 가두고 버텨 낼 따름이니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일단은.’
반신들부터 처리를 하고 캬루파 쪽으로 합류할까, 아니면 이불리안과 협력하여 캬루파부터 처리해야 할까.
잠시 양쪽을 힐끗거리며 망설이던 로칸이 더 위태로워 보이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