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4
마왕 (2)
쩌엉!
캬루파가 날린 일격을 로칸이 받아 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부딪쳤던 로칸의 몸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분노의 힘으로 증폭된 힘도 힘이었고, ???의 기운까지 깃들었기 때문이다.
“큭.”
그나마 다행인 것은 놈의 무기가 할버드라는 것이다.
창과 도끼, 워피크를 섞어 놓은 듯한 중병기.
운용 방법이 더 어려운 대신 더 강하고 변칙적인 공격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몹시 까다로운 무기가 아닐 수 없었다.
로칸 역시 한때 괜찮은 할버드를 획득해 주 무기로 써 본 적이 있기에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강하고 변칙적이지만 그 속도가 약점이라는 것도.
“로칸!”
이불리안이 비명 같은 경고성을 토했지만 로칸의 눈은 놈의 공격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약점인 속도를 말도 안되는 근력으로 커버하고 있다지만 이미 충분히 로칸의 예상 범위 안이었다.
할버드를 당기고, 찌르고, 휘돌리는 그 모든 과정이 두 눈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흥!”
고수들의 싸움에서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 가능하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이점이다.
그렇기에 같은 수준에서도 독특한 기형 병기를 쓰는 이들이 유리한 것이고.
그런 면에서 로칸과 캬루파의 싸움은 이불리안과 다른 반신들의 싸움과 달랐다.
부족한 정보를 메우기 위해 신성을 때려 박던 그들과 달리, 둘의 전투는 철저하게 수 싸움으로 이루어졌고 둘 모두 분노와 광기에서 비롯된 힘을 사용한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고절한 기예들이 펼쳐졌다.
“제길.”
호각지세.
갑자기 끼어든 로칸이 자신들이 어렵게 상대하던 캬루파와 호각을 이루는 모습을 보이자 이불리안이 조급해졌다.
이대로 또 로칸이 승리하기라도 하면 캬루파의 신성마저 빼앗기게 된다.
마계 대공의 신성 중 자신이 취한 것은 하나도 없게 되고, 오히려 로칸이 먼저 499레벨을 달성하게 될지도 몰랐다.
자신들이 고전하는 동안 캬루파의 군세를 홀로 쓸어버리면서 로칸의 신성 레벨이 많이 올라간 상태였으니까.
결국 마계를 둘로 나눠 먹기로 했다지만 이대로 마왕이 된다 한들 자신의 권위가 바로 설 수 있을까?
불안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스륵.
이불리안이 자신의 휘하 반신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러한 사태를 예견하고 미리 짜두었던 계획을 개시했다.
“천라지망(天羅地網).”
네 명의 반신이 로칸과 캬루파를 중심으로 사방을 둘러싼 채 신성을 발했다.
자신들의 신성을 서로 엮고 묶어 질기고 촘촘한 신성의 그물을 만들어 냈다.
“이 새끼들이!”
“크헝!”
자신들을 덮쳐 오는 신성 그물을 발견한 둘은 황급히 떨어지며 몸을 피해 봤지만, 이미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속성의 신성이 얽혀 있었다.
공간 이동이나 가속 스킬마저 제한하는 탓에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부서져라!”
위기를 느낀 로칸과 캬루파는 동시에 각각 힘을 일으켰다.
분노의 신성과 파괴의 신성이 그물을 찢어발기기 위해 쏘아졌다.
출렁.
그러나 신성의 그물은 충격에 출렁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그물을 덮어쓰는 데 잠시 시간이 지체되었을 뿐이다.
물론 신성의 그물에도 약점은 있었지만, 그것을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이불리안!”
배신이라도 한 것일까?
분명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계약서를 작성했을 텐데.
졸지에 그물에 낚인 로칸이 버럭 소리를 질러 보지만, 이불리안은 이미 그를 안중에도 없는 듯 행동했다.
자신의 모든 신성을 걸고 캬루파에게 짓쳐 들어갈 뿐이다.
“끝장을 내 주마!”
갑작스런 신성 그물에 저항하지 못한 것은 캬루파도 마찬가지.
버둥거리며 그물을 벗겨 내려 하지만 그보다 이불리안의 검이 더 빨랐다.
우우우웅!
이불리안의 신성이 한 순간 증폭되었다.
자신의 신성뿐 아니라 부하들의 신성을 한 몸에 몰아 받은 것이다.
탐욕만큼은 아니지만 놈이 가진 약탈의 신성은 다른 이들의 신성을 높은 효율로 받아들이는 효과가 있었다.
[정수 약탈자 이불리안][Lv 497]
그리고 그 신성을 모두 끌어모은 일격이 캬루파의 심장에 꽂혔다.
“커어엉!”
퍼억!
캬루파가 심장에 칼이 꽂히고도 몸부림을 치며 저항한 탓에 한 대 얻어맞은 이불리안의 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크흐흐, 끝났다.”
검마저 놓치고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꼴사납게 일어나는 모습이지만, 이불리안은 얼굴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가 꽂아 넣은 검에는 약탈의 신성마저 담겨 있었으니까.
심장을 꿰뚫었을 뿐 아니라 그 안에서 놈의 신성을 빨아들이니 의미 없는 몸부림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을 확신했다.
“캬아아아악!”
콰과과과광!
그때, 캬루파를 중심으로 대폭발이 일어났다.
티잉.
심장에 꽂혔던 이불리안의 검이 튕겨져 날아가고, 캬루파의 몸이 불룩불룩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뒤늦게 신성의 그물을 벗어 낸 로칸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건 죽기 전에 타오르는 마지막 불꽃 같은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기운과 기질.
놈의 존재 자체가 변해 가는 모습이었다.
“저게 무슨……?”
그 변화를 다른 이들도 눈치챘다.
마지막 발악이라면 그저 버티기만 해도 이긴다는 것을 알기에 잔뜩 힘을 끌어올린 상태였지만, ‘과연 버틸 수나 있을까?’ 하는 공포가 그들의 몸을 마비시켰다.
“캬악!”
휘익.
캬루파의 몸이 한순간 사라졌다.
순간이동이 아니다.
흐릿한 잔영을 남길 정도로 초신속으로 이동하며 반신들을 노려간 것이다.
신성 그물에 묶였던 게 어지간히도 열 받았던 모양.
퍼억!
그런 놈이 휘두르는 주먹질 한 방에 반신 하나의 몸이 터져 나갔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회복되지 않는 제 몸을 바라보았다.
“피해라!”
협공 따위는 감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머지 반신들이 소리치며 달아나 보지만 고함을 질렀던 반신이 오히려 다음 타깃이 되는 비극을 맞이하고 말았다.
“컥……!”
또다시 주먹질 한 방.
주 무기인 할버드 따위는 집어던지고 놈은 오로지 흉악한 힘과 기세가 담긴 주먹질만을 할 뿐이었다.
“맙소사.”
그 경악스러운 모습에 로칸도 입을 쩍 벌렸다.
놈이 강하기 때문에?
아니다. 그보다 놈의 이름 앞에 가려졌던 물음표 표시가 벗겨진 까닭이었다.
[타락한 분노의 캬루파][Lv 498]
“이게 여기서 왜 나와?”
타락의 힘!
지상에서 세상을 파멸시키려던 타이탄과 그 추종자들이 가졌던 그 파멸의 힘이 캬루파의 안에서 태동한 것이다.
반신으로서, 칠대죄악의 소유자이자 마계 대공으로서 타락의 힘마저 컨트롤하던 캬루파였지만, 숨이 끊어져야 할 상황에 직면하자 그 제어권을 놓아 버린 것이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는 것은 분노의 신성을 지닌 마계 대공 캬루파가 아니었다.
타락한 반신.
세상을 파멸로 몰아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괴물일 따름이었다.
‘신성이 더 강화되다니……!’
타락한 존재들의 경우 본래보다 더 강력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신성에까지 영향을 미칠 줄이야.
반신부터는 보유한 신성의 총량에 따라 레벨이 좌우되건만 지금의 캬루파는 레벨마저 두 단계 상승한 상태였다.
타락의 힘이 더해졌거나, 어떤 작용을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제기랄!”
콰앙!
이대로면 전멸을 면치 못한다.
로칸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날려 캬루파를 막아섰다.
“크윽!”
할버드도 아닌 주먹질과 배틀 액스의 격돌이건만 놈의 주먹에는 생채기 하나 없고 오히려 밀리는 것은 자신이었다.
더구나 로칸은 내부가 진창이 된 듯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마저 받았다.
신성을 전신에 두르듯, 타락의 힘을 전신에 두르고 휘두르는 까닭이다.
“뭉쳐서 방어해라!”
그 덕에 캬루파의 시선이 로칸에게로 돌아갔고, 로칸은 배에 단단히 힘을 주고 소리쳤다.
지금 상황에서 산개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신성을 연계하여 방어하는 것이 그나마 놈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콰앙. 쾅. 쾅. 쾅. 쾅!
캬루파가 주먹질을 할 때마다 로칸의 몸이 흔들렸다.
극에 달한 전투 센스로 어떻게든 막아 내고는 있지만 제아무리 로칸이라 해도 이걸 계속해서 버텨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자신 이외에는 막아 낼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
그나마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버티는 사이 이불리안이 좀 전과 같은 일격을 놈에게 꽂아 넣는 것뿐이었다.
“내게 신성을 모아라!”
그 뜻을 이불리안도 이해했다.
가만히 있다가는 각개격파를 당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단기 결전을 보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신성을 몰아줄 경우 레벨이 다운되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방어마저 불안해진다.
캬루파가 당장이라도 시선을 돌려 공격을 해 올 경우, 나머지 반신들로서는 도무지 방어해 낼 자신이 없었다.
때문에 망설였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신성을 끌어모아 이불리안에게로 전송했다.
“크윽?”
“이, 이불리안님……?”
그때, 이불리안이 약탈의 신성을 강화했다.
자신에게 보내는 것 이상의 힘을 갈취하기 시작했다.
[정수 약탈자 이불리안][Lv 499]
힘의 전이를 끊으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이미 신성이 연결된 상태.
이러면 힘이 더 강한 쪽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강제로 끊어 내려 했다가는 레벨이 얼마까지 떨어질지 알 수 없었으니까.
“안 돼……!”
이불리안은 그야말로 한계까지 그들의 신성을 빨아먹었다. 자신과 다시 회수한 자신의 검에 극한의 신성을 채워 넣었다.
“나는! 마계의 왕이 될 남자다!”
신성이 한데 응축되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매서운지 캬루파조차 움찔하며 돌아볼 정도.
와락!
그 틈에 로칸이 배틀 액스를 집어던지고 놈을 끌어안았다.
불사의 신성을 일으킨 채 피할 수 없도록 놈의 몸을 고정시켰다.
함께 말려들어 죽게 될 수도 있지만, 그리하여 신성의 일부를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지금 이 놈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크하아아아앙!”
캬루파가 괴성을 지르며 저항해 보지만 이미 한껏 두들겨 맞아 불굴의 의지 효과까지 발동한 로칸을 떨궈 낼 수는 없었다.
크지 않은 격차로 밀리던 로칸의 능력치가 2배가 되어 버린 상태이니까.
놈은 단단히 묶였고, 이불리안의 검이 다시 놈의 가슴을 베었다. 갑옷 같은 가죽을 베어 내고 심장을 터트렸다.
“컥!”
그것은 극에 달한 반신의 육체로도 버텨 내기 어려운 힘이었다.
부하들을 희생시켜 491에서 499까지 레벨과 신성을 끌어올린 이불리안이 모든 것을 걸고 내지른 일격이니까.
자신이 약탈한 신성이 일시적인 힘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불리안은 아낌없이 신성을 쏟아부으며 놈의 존재를 소멸시켰다.
“빌어먹을, 더럽게 아프게.”
함께 꿰뚫린 것은 로칸도 마찬가지다.
놈을 뒤에서 부둥켜안은 로칸의 몸과 심장이 꼬치 꿰듯 함께 꿰뚫렸다.
심장이 터지고 분수 같은 피가 캬루파의 등을 적셨다.
털썩.
깍지가 풀어지자 캬루파가 허망히 쓰러졌고, 로칸도 무릎을 꿇으며 간신히 숨을 유지했다.
심장이 터졌으나 그에게는 마법 심장이 있는 것.
덕분에 즉사를 면했지만 순간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들어 보니 이불리안이 당황해하면서도 안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계약에 따라 고의로 로칸을 죽이려 한다면 그 역시 소멸하게 되었을 테니까.
그러나 다행히 암묵적 합의하에 벌인 일이라는 게 인정된 것인지 별다른 전조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타락한 분노의 캬루파를 상대로 승리했다.
“제길, 그만둬!”
그러나 그 순간, 로칸의 표정이 변했다.
쓰러진 캬루파의 신성을 손에 넣기 위해 약탈의 신성을 발하는 이불리안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성 안에는 요사스러운 빛을 번들거리는 ???의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