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 천상 통일 (4)
“그, 그만! 항복하겠습니다. 그러니 자비를……!”
“늦었어, 인마.”
로칸이 본격적으로 신성을 발휘하자 아자르가 체면과 자존심도 잊고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로칸은 항복 따위를 받아 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결국 아자르는 다른 환수 왕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준비한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환상 세계!”
‘우주?’
순간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언젠가 보았던 우주의 풍경과도 비슷한 지형으로.
그러나 우주는 아니다. 그곳은 이름 그대로 환상 세계.
모든 환상이,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재미있네.’
어떤 의미에서는 신이 아닌 자들이 가장 신에 가까워지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신이라 불리는 이들이 신성을 활용해 그 무엇이든 해낼 수 있듯이, 그들 역시 마나와 신성을 이용해 의지와 상상을 구현할 수 있는 세계였으니까.
로칸은 그 사실을 간파했지만 진득한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한번 놀아 줘 볼까?’
파괴하고자 한다면 당장에라도 파괴할 수 있었다.
막대한 신성을 사용해야 하겠지만 이미 1백억의 신성 이외에도 상당한 여유가 생긴 상태이니 그 정도는 큰 부담이 아니다.
게다가 이것을 깨부수는 자체로 아자르에게도 타격이 갈 테고, 신성 흡수에 대해 깨우친 이상 환상 세계가 파괴되며 흩어지는 신성의 일부를 제 것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그러나 로칸은 그러지 않았다.
놈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장단을 맞춰 주고, 가장 자신하는 상황에서 박살을 낸다면 좌절감이 더 클 테니까.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놈들에게 짓쳐 들었다.
“불사의 군단!”
그런 로칸을 가로막은 것은 생존의 왕이 만들어 낸 환수들이었다. 트롤, 웨어울프를 뛰어넘는 재생력을 지닌 불사의 군단.
그들이 몸으로 로칸을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불사는 개뿔.”
반신도 죽고, 신위자라면 같은 신위자를 죽일 수도 있다.
한데 고작 스킬로 만들어 낸 환수 따위가 불사?
그런 속성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비슷한 역량의 존재를 상대할 때나 통하는 잔재주였다.
푸확!
로칸이 배틀 액스를 휘두를 때마다 불사의 힘을 믿고 덤벼들던 환수들이 두 동강이 나 쓰러졌고, 본래대로라면 골렘처럼 곧장 회복해야 할 몸뚱이가 힘을 잃고 퍼덕거렸다.
녀석이 가진 불사의 신성이 로칸의 신성에 파괴된 것이다.
“악몽의 저주!”
그 순간 아자르가 한 가지 저주를 로칸에게 걸었다.
악몽의 힘.
그것은 대상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을 나타나게 만드는 것이었다.
두려워하는 대상이 강할수록 곤란해질 수밖에 없는 강력한 저주.
그것을 로칸에게 통하게 만들기 위해 막대한 신성을 쏟아부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
[두려워하는 대상이 없습니다.]
[악몽의 저주가 무효화됩니다.]
저주에 걸린 로칸의 눈앞에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스킬의 효과를 허사로 돌아갔고 아자르가 크게 당황했다.
아무리 신격을 얻었다지만 두려워하는 존재가 단 하나도 없다니?
이전이었다면 광풍이 나타났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와 동급의 존재가 된 이상, 광풍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한판 붙어 보고 싶은 존재일 뿐인 것이다.
“나이트메어.”
대충 상황을 파악한 로칸이 나이트메어를 소환했다.
환상과 악몽 중 누가 더 강력할까? 주인인 로칸의 승격과 함께 더욱 강력해진 나이트메어가 푸힝 소리치며 아자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백수의 신이시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그때 가만히 신성을 모으던 야성의 왕이 힘을 발현했다.
“선조 회귀!”
먼 옛날 신의 반열에 올랐던 백수의 신의 힘을 자신의 몸 안에 이끌어 낸 것이다.
피 속에 녹아 있는 역사를 현실로 불러내었다.
“진화 같은 건가?”
그와 함께 녀석의 모습이 변했다. 백수의 왕 사자의 모습으로.
다만 완전히 짐승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형태를 어느 정도 유지한 수인족의 모습이라는 것이 특이했다.
“커흥!”
내는 소리까지 마치 짐승의 그것처럼 변한 채 로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다면 네 상대로 따로 있겠군. 카이!”
뀨웃!
“신화를 타는 자!”
그러나 로칸은 녀석을 상대해 주지 않았다.
신위를 획득하며 동시 소환 가능한 펫의 숫자에 제한이 사라졌기에 나이트메어와 카이의 소환을 유지한 채로 신성을 듬뿍 실어 전설을 타는 자를 개조했다.
신화를 타는 자.
전설을 넘어 신화의 영역에 다다른 존재로 둘을 동시에 탈바꿈시켰다.
“아닛!”
나이트메어와 대붕.
기존과 비슷하지만 둘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예전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돌변했다.
능히 반신을 찍어 누를 수 있을 정도.
나이트메어의 악몽이 아자르의 환상을 깨부수었고, 카이의 커다란 부리가 야성의 왕을 낚아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멍청한 녀석들! 헥사 스펠!”
어쩔 수 없이 마도의 왕이 마지막으로 나섰다.
여섯 개의 주문이 동시에 발현되며 로칸을 위협해 왔다.
마법의 형식을 통해 신성의 힘을 극도로 증폭시킨 능력.
그러나 로칸은 코웃음을 치며 배틀 액스를 들고 있지 않은 왼손을 들어 올렸다.
“마법도 나쁘지 않지.”
그 순간 로칸의 몸속에서 세계가 열렸다.
명부마도. 정확히는 그에 흡수된 마도제국의 최고위 마법사들이 일제히 힘을 일으켰다.
“이럴 수가!”
콰과과과과과과광!
마법 대 마법의 대결이었다.
설마하니 로칸이 마법을 사용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마도의 왕이 눈을 부릅떴지만 당황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쏘아 낸 것보다 강력한 마법들이 밀려들고 있었으니까.
직접 마법을 사용한 것은 로칸의 세계 속 마법사들이지만 로칸의 신성과 융합되고 증폭된 덕에 그 위력이 비할 바 없이 높아진 것이다.
“으으으윽!”
때문에 가볍게 팔을 휘저은 로칸과 달리 마도의 왕은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전력을 쏟지 않으면 안 될 지경.
하지만 이것을 막아 낸다 해서 끝이 아니었다.
그저 마법을 방출했을 뿐인 로칸은 몸이 자유로운 상태였고, 이 마법들을 해소시킨 순간 그의 배틀 액스가 머리를 쪼갤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이건…… 너무 쉽군.”
너무나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로칸은 저 스스로도 조금 놀라고 있었다.
아무리 신위를 획득했다지만 이 정도로까지 차이가 날 줄이야?
더구나 소모한 신성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타이틀 효과이기도 했지만 장비 옵션 또한 그를 보조해 주고 있었기에 실제 사용한 신성은 본래 소모량의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더 보여 줄 건 없나? 분발들 해 보지?”
득의의 미소를 지은 로칸이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놈들을 끝장 낼 수 있겠으나 이 전투를 통해 그도 배울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무려 왕이라는 칭호를 쓸 만큼 강력한 신성과 특징적인 고유 신성을 쓰는 이들이니 그 활용 능력을 흡수할 필요가 있었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
자신의 힘을 더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
로칸은 농락하듯 그들을 가지고 놀았고, 4인의 왕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필사의 저항을 하기 시작했다.
“불사자들의 세계! 나와라, 불사자들이여!”
“궁극을 쫓는 자들의 세계! 다중 연산! 더즌 스펠!”
“광기의 시대!”
“꿈을 먹는 세계! 꿈속의 꿈, 인셉션!”
각자의 세계를 드러내고, 그동안 능력 부족으로 이루어 내지 못하던 스킬들을 마구 생성해 쏟아 냈다.
울컥.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 사발씩 피를 뿜어 댔지만 어차피 여기서 패배하면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하다못해 신성을 모두 소모해 버림으로써 로칸이 이득을 보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각오로 전심전력 신성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흠, 생각보다 별것 없군.”
사실 로칸으로서도 조금 기대를 했다. 환마계라는 곳은 워낙 특이한 곳이었으니까.
일반 판타지 지식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환상 생물들이 나고 자라며 그들의 왕이 지배하는 곳이니 만큼 신성의 활용에서도 특이하고 특출한 부분들이 있을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패를 까 보니 그다지 특별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니면 너무나 특징이 강하기 때문이었을까.
녀석들은 변화가 다양성보다 자신의 특징과 강점을 강화하는 쪽에 초점을 맞춰 힘을 발현했고, 배틀 액스를 놀려 방어와 관찰에 집중하던 로칸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부서져라.”
더 볼 것이 없다면 전투를 이어 나갈 이유도 없다.
표정을 굳힌 로칸은 단 일격으로 그들을 갈라놓았다.
하늘을 가리키던 배틀 액스를 땅으로 내리긋자 세계가 쪼개지고 녀석들의 신성이 모두 허무로 돌아갔다.
소멸. 그야말로 완벽한 소멸이었다.
“크, 크헉……!”
그나마 숨이 붙어 있는 것은 생존의 왕이 유일하다.
하지만 그조차도 몸의 절반이 사라져 있는 상태.
보통이라면 신성을 발휘해 즉시 몸을 수복하겠지만 하필 그의 허리 아래를 날려 버린 것이 파괴의 신성이었기에 회복은 불가능했다. 고작해야 잠시 숨을 붙여 놓는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나 차이가 날 줄이야…….”
때문에 생존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렸다.
천상에 신위를 얻은 이가 나타난 지가 얼마나 오랜만이던가.
모두 잊고 있었던, 그래서 은연 중 가볍게 생각하던 ‘신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이제야 깨닫고 말았다.
“응. 늦었어.”
콰직.
로칸은 마저 놈의 머리를 부숴 놓았고, 환마계를 지배하던 네 왕의 신성이 모조리 그에게 흡수되었다.
“호오?”
온갖 환상수가 넘쳐나는 그들의 세계는 무척 흥미로웠지만 무턱대고 풀어놓기에는 난해한 감이 있었다.
때문에 신성 그 자체로 흡수를 했는데, 놀랍게도 이전과는 다른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신위 덕분인가?”
신성에 대한 깨달음이 더 커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위자의 특전쯤 되는 것일까?
놈들이 가지고 있던 고유 신성의 형태를 읽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마도, 환상, 야성, 생존.
그 신성이 지니고 있던 실체가 가깝게 다가왔다.
간단한 수학 문제처럼 척 보면 알 수 있도록 해체되어 머릿속에 들어왔다.
“이거 좋……?”
쐐애애액! 쩌엉!
그 순간 로칸이 몸을 비틀었다. 자신을 노리고 날아온 암습을 막아 내었다.
“너……?”
상대는 빠르게 검을 회수하며 물러섰지만 로칸은 반격하는 대신 잠시 멈추어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천마 칼튼][Lv 499]
무혼의 왕 칼튼이었다.
그를 수식하는 이름은 바뀌었지만 로칸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한 차례 자신을 꺾었던 사내이니까.
동시에 눈을 반짝였다. 복수전을 할 수 있는 기회이지 않은가?
그 전투 이후 모습을 감췄다더니 무슨 짓을 하고 온 것인지 레벨이 무려 499나 되었지만 로칸은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499레벨과 500레벨의 갭은 상상 이상으로 크지만 적이 강할수록 이 새로운 힘을 더 제대로 써먹어 볼 수 있을 테니까.
환마계의 네 왕들도 로칸의 전력을 끌어내기에는 부족함이 많았기에 로칸의 입가에 긴 호선이 그려졌다.
“뭔 짓을 하고 왔는지는 모르겠다만 너 잘 만났다. 네가 오지 않았으면 이 잡듯 뒤져 보려 했거든. 그럼 어디 한번 놀아 볼까?”
로칸이 폭력의 기운을 끌어내며 놈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