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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화.신들의 도시 (11) (469/500)

469 신들의 도시 (11)

“네가……. 광풍이 데려온 자인가?”

[공허의 광전사][Lv 568]

곁에 섰음에도 존재감이 희미하다. 만약 이런 녀석이 암살을 시도하기라도 한다면?

새삼 로칸은 공허의 존재들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방심을 버리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간신히 녀석의 기척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당신은?”

“이름을 잃은 이에게 누구냐고 묻다니, 무례하군.”

“아, 미안합니다.”

로칸은 곧바로 사과했다. 그의 말처럼 이름을 잃은 공허의존재에게 누구냐고 묻는 것은 상당한 실례라고 볼 수 있었으니까.

적이라면 모를까, 광풍의 협력자인 만큼 적당히 예의를 차릴 필요는 있었다.

‘광전사라…….’

어쩌면 그가 광전사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종족조차 알 수 없는 특이한 행색이긴 했지만 광전사라는 단어는 그에게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공허의 광전사라, 이 녀석의 전투는 어떤 모습일까?

한판 붙어 보고 싶은 호승심이 들끓었지만 간신히 억누르며 그를 마주했다.

푸쉬쉬쉬.

그때 의자에 앉아있던 광풍의 몸에서 초록 빛이 번뜩였다 사라졌다.

그가 이야기한 것처럼 세계에 공허의 존재들을 신으로 구현하고 다시 그것을 때려잡은 모양. 그와 함께 광풍에게서 느껴지는 신성이 더 불어난 것이다.

“야, 자폭. 왜 애한테 그래?”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너 같으면 네가 눈 떴을 때 네 얼굴이 앞에 있으면 안 놀라겠냐?”

일어나자마자 광풍은 농담을 던졌고, 광전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며 슬쩍 한 걸음 물러났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자폭요?”

“응. 그놈, 파괴에 미쳐서 자기 세계까지 파괴해 버린 바보거든.”

“난 바보가 아니다. 다만 내가 키운 세계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고 싶었을 뿐.”

“그래 놓고 신격에 가깝게 성장한 놈들까지 때려죽였으면 그게 바보지 뭐냐?”

“…….”

둘의 대화에 로칸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 광전사가 어찌하여 공허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제 손으로 세계를 파괴하다니, 그게 무슨…….’

궁금증과 호승심을 이기지 못해 제 손으로 세계를 이루는 구성원들과 전투를 벌인 것이다.

적당히 했다면 모르겠는데, 완전히 파괴를 해 버렸거나 그 후유증을 견디지 못한 세계가 멸망해 버린 것이겠지.

자신도 만만치 않지만 세상에는 참 별난 또라이들이 많다고 생각하며 그를 다시 보았다.

“아무튼, 이 녀석은 믿을 만한 건가?”

“아아, 걱정하지 마. 그 녀석은 ‘방문자’인 데다 전투력 자체도 꽤 쓸 만하거든. 어디 가서 객사하고 정보를 내어 줄 만한 놈은 아니야.”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는 아마도 이 거점이 들통나는 것은 우려하는 듯싶었다.

광풍이 그런 그의 걱정을 덜어 주었고, 녀석은 잠시 로칸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떼었다.

“오다보니 공허 신 놈들이 많이 줄었던데 다 어디 간 거야? 꽤 먹음직스럽게 포장까지 해 왔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네?”

“그건 아마……. 천상과 지상에서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한동안 공을 들이더군. 최근에 한풀 꺾였다고 듣긴 했는데, 신계의 신들과 연결이 된 놈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꼬셔서 그들의 세계에 숨어들겠다는 생각인 거겠지.”

이건 중요한 정보였다. 로칸이 정리한 천상의 일과 유저들 사이에서 다수 출현한 사도에 대한 이야기이니까.

‘사도를 통해 신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건가? 확실히 세계에 잠입하는 정도라면…….’

그런 거라면 가능하겠지. 적어도 사도나 일반 유저들이 반신의 지경에 오를 경우 그들의 세계로라도 파고들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만약 유저들이 제대로 세계를 다루기 전, 놈들이 선수를 쳐서 세계를 빼앗아 버리면 어떻게 될까?

다시 세계를 얻고, 신위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럼 자신의 세계를 빼앗긴 유저들은?

꽤나 무서운 일이었다.

사도와 그들의 신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는 몰라도 유저들의 세계가 공허의 존재들에게 강탈당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척 위험한 일인 것이다.

영영 레벨 업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고, 공허의 존재로 변해 버릴 수도 있으며 어쩌면 깃발 뺏기처럼 남의 것을 뺏고 뺏기는 무차별적인 분쟁 상황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대비를 해야 하나.’

때문에 로칸은 이 소식을 유저들에게 전하고 주의를 주어야 하나 고민했다.

사실 그들의 세계가 어찌되든 상관은 없지만 그런 난장판이 벌어질 경우, 자신이 통치하는 지상과 천상에 영향이 없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일단은 타락자들을 엄히 처벌하고 있으니 견제는 되고 있을 터였다.

로칸은 지상과 천상의 단속을 조금 미루고 일단 그들의 대화에 좀 더 집중했다.

“하여간 뻘짓은 잘한다니까. 그럴거면 차라리 신계랑 한판 붙고 그들 것을 빼앗을 것이지, 코찔찔이들 데리고 뭘 하겠다고…….”

“조금이라도 연명을 하기 위함이겠지. 알다시피 우리에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말이다.”

대답하는 광전사의 표정이 조금 씁쓸해 보였다.

그의 말이 얼마나 사실일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이 기회라는 것.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로칸은 즉시 보유한 신성을 확인하고 얼마나 더 날뛸 수 있을 지를 계산해 보았다.

당장 공허의 존재들을 세계에 현신시켜 잡아먹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보니 공허에서 싸우는 동안 신성을 회복할 방법은 세계와 지상, 천상에서 수급되는 신성이 전부인 것이다.

그나마 월드 크래프트로 벌어둔 신성이 막대하기에 꽤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만 광풍처럼 무한정 이곳을 돌아다니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공허의 신들이 그들에게 집중하기 전까지 날뛰기에는 충분한 양이다.

몸과 신성을 수습한 로칸은 즉시 다시 밖으로 나설 채비를 마쳤다.

“뭐, 아쉽긴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 전에 저 녀석이 좀 더 성장한다면 더 재미있는 일들을 벌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광풍 역시 같은 생각인지 로칸을 마주 보며 웃었다.

다시, 사냥의 시작이었다.

“혹시 내가 없더라도 이 녀석이 오면 문 열어 줘.”

“그러지.”

광전사에게 협조를 구한 광풍은 곧바로 장비를 챙겨 나섰다.

로칸은 일주일, 그는 1개월의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까닭에 마냥 함께 사냥을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같이 있을 수 있을 때 가르치고 재미를 보아 놓아야 향후 공허 침공 때 더 큰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런 장소가 또 있습니까?”

“응? 아, 몇 군데 있지. 조건은 비슷하고. 내가 위치를 알려 줄 테니까 혹시 내가 없거나 나와 떨어지면 그곳들을 찾아가서 쉬면 될 거야.”

광풍이 신성을 발휘하자 로칸의 마법 지도에 몇 곳의 거점이 표시되었다.

공허의 영토가 드넓으니 한 곳에만 은신처를 마련해 둔 것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런 장소들을 만들기까지 광풍의 무수한 노력이 있었을 테니 로칸으로서는 날로 먹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 역시 광풍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입장이니 미안해하지는 않았다.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일단 광풍이 이끄는 대로, 공허의 초입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

[사회봉사 기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이런, 벌써 끝인가?”

피와 살점으로 뒤범벅이 된 광풍이 로칸을 향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사회봉사 시간이 끝났을 뿐, 함께 더 돌아다녀도 상관이 없지만 초반부터 무리하게 공허의 신성을 흡수하고 다니다가는 자칫 세계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를 보내 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둘이 함께하는 동안 무수히 많은 공허의 존재들을 사냥했기에 제법 만족스러운 이유도 있었다.

더 장기적으로 재미를 보기 위해, 좀 더 사냥을 하자는 로칸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를 다시 공허의 경계로 데려왔다.

“계속 공허를 도실 겁니까?”

“그래. 저놈들이 정확히 무슨 꿍꿍이인지도 좀 알아봐야겠지.”

그의 설명에 아쉽지만 공허를 도는 것을 포기한 로칸이 작별을 고했다.

아직 사회봉사 시간이 3주나 더 남은 광풍이었지만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그 전에 자신이 또 사회봉사 명령을 받을 수도 있었기에 너무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마침 이전에 신들의 도시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일들도 남아 있었고, 이번 공허 침공을 통해 얻은 것들도 정리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럼 금방 또 뵙겠습니다.”

“그래. 금방 또 보지.”

씨익.

두 광전사는 서로를 보고 웃었다. 그리고 쿨하게 몸을 돌려 각자의 길을 갔다.

“흠, 근데 어떻게 돌아가지?”

문제는 신들의 도시로 어떻게 다시 돌아가느냐 하는 것.

텔레포트 마법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곳에 올 때는 카이스만이 강제 전송을 시키는 바람에 길조차 외우지 못하고 날아온 까닭에 방향조차 잡지 못하는 것이다.

“뭐, 급한 건 아니니까.”

가만히 생각하던 로칸은 공허의 경계에 대기하던 신들 중 하나에게 신들의 도시가 있는 방향을 물었다.

카이를 소환하는 대신 천천히 걸어서 이동을 시작했다.

사회봉사도 마쳤으니 이제 어디로 가든 그의 자유인 것이다.

당장 신들의 도시에 도착하기만 하면 다시 큰 신성을 벌어들일 일들을 벌일 수 있지만 공허의 경계를 벗어난 마당에 신성 수급을 서두를 이유도 없다.

천천히 자신의 세계를 관조하고 신성을 관조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세계 : 명무마도의 퀘스트 천상 통일이 완료되었습니다.]

[세계 : 백귀야행의 퀘스트 인간의 세계가 완료되었습니다.]

[세계 : 악귀천하의 퀘스트 빛의 세계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때마침 각 세계에 내려두었던 퀘스트가 완료되었다.

모두 각자의 대륙을 통일하는 퀘스트.

이로써 세 개 세계의 안정화가 완료된 것이다.

‘어떻게 할까…….’

덕분에 로칸은 고민에 빠졌다. 세 개의 세계를 합칠 것이냐, 좀 더 안정화를 시킬 것이냐.

각자가 확실하게 영역을 구축하고 자리 잡게 만든다면 보다 안정적인 통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만큼 서로의 피해도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에라 모르겠다.”

잠시 고민하던 로칸은 결정을 내렸다.

아직 명부마도의 경우, 지하 세계가 열리지 않았지만 승부수를 던져 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세계 합일.”

신성을 일으켜 세 개의 세계를 어루만졌다. 하나로 끌어 모아 합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명부마도와 마도제국을 통합했던 그때처럼.

다만 이번에는 하나씩이 아닌 세 개의 대륙은 하나로 합친다는 것이, 그렇기에 좀 더 세심한 접합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달랐다.

타락이나 공허의 힘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힘이 감지되는지를 면밀히 살피고, 세 개의 세계를 이어 붙이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세계 : 명부마도의 잠재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거대 세계를 달성하셨습니다.]

“어?”

거대 세계. 로칸도 알지 못했던 변화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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