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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화.신들의 도시 (16) (474/500)

474 신들의 도시 (16)

“허접들은 꺼져!”

무려 중급 신들이었다. 550레벨을 넘겨 신들 중에서도 제법 대우를 받는 존재들.

공허에 물들어 버렸다고는 하지만 그 힘 자체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로칸은 그들을 허접이라 칭했다.

실제가 그랬으니까.

신성의 총량은 어떨지 몰라도 공허에 물든 탓인지 신성 활용 능력이 투박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허의 힘을 제대로 쓰는 것도 아니다.

두 가지 힘 모두 어중간하게 쓰는 괴물일 뿐이랄까.

그런 면에서 차라리 공허에 들어갔을 때 상대했던 공허의 존재들이 훨씬 매서웠다.

“쿠웩!”

반면 로칸은 전투에 특화된 고유 신성을 지녔을 뿐 아니라 광전사의 특성으로 기존의 능력을 몇 배나 뻥튀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게다가 공허에 저항할 수 있는 저항력까지 갖추었으니 비벼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양심 없는 일이었다.

로칸은 놈들을 힘으로 찍어 눌렀다.

공허로 강화된 힘? 신성? 그따위 것들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듯 압도적인 위력을 자랑했다.

원래의 힘만으로도 가능했지만 신성 성질 변환까지 슬쩍 섞어 넣자 놈들의 방어가 미묘하게 어긋나며 더 큰 피해를 준 것이다.

“언제까지 설칠 수 있는지 보자!”

그 틈에 정신을 차린 키레마가 다시 한번 힘을 일으켰다. 자신의 고유 신성에 공허의 힘을 녹여 내며 어떤 존재들을 일으킨 것이다.

‘언데드?’

놀랍게도 그것은 언데드들이었다.

신의 육체를 가지고 다시 일어난 언데드들. 좀비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강력한 존재들이 주변을 침식시키며 살광을 빛냈다.

“모든 것은 파괴될 지어다!”

거기에 신계의 대지에 녹아 있던 사념들까지 응축되어 로칸을 압박했다.

로칸 혼자서 신급의 존재 수백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

그러나 로칸은 당황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그에게 무척이나 흔한 것이었으니까.

“까고 있네.”

배틀 액스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쥐었다.

상대가 백이든 천이든 상관없다. 덤비는 놈은 베고, 뭉개고, 짓이겨 버리면 그만이다.

그것이 바로 로칸을 폭력의 신으로 만들어 준 간단한 이치였으니까.

로칸이 폭력의 신성을 발휘했다.

압도적인 폭력 앞에 무릎 꿇게 되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진정한 폭력의 신이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이런…….”

도끼자루를 지팡이 삼아 간신히 몸을 가눈 채 숨을 헐떡거리던 로칸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참상 때문에? 아니다.

시체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광경쯤은 이미 많이 보았다.

“이래서는 취조가 불가능하겠군. 아니, 죽이라고 한 걸 보면 카이스만도 애초에 기대하지 않은 건가?”

모조리 죽인 탓에 살아 있는 존재가 없는 것이다.

공허의 힘을 얻은 경위나, 침식된 정도 따위를 물어보면 꽤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저항이 완강한 탓에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나마 정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그들의 시체 위에 둥둥 떠 있는 신성 덩어리들.

신들의 신성도 아니고, 공허의 신성도 아닌 것처럼 서로의 색으로 마블링이 된 그것들이 고요히 로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걸로 뭔가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어쩔 수 없이 로칸은 그것들을 수거했다.

이미 전투 중에 흡수한 신성이 상당함에도 흡수가 필요한 신성들은 많고 많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조리 흡수했을 때, 가슴이 타는 듯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윽!”

이게 어찌된 영문일까. 전투 중에 생긴 상처는 이미 모두 회복했을 텐데 살을 후벼 파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 이유는 곧 시스템이 알려 주었다.

[공허의 신성이 강하게 태동합니다.]

[세계 : 명부마도의 지하 세계가 강제로 개방됩니다.]

“……!”

세계에 이변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전쟁을 끝내고 이제야 사후 처리와 수습, 복구 등을 하고 있던 명부마도의 땅덩어리 일부가 차게 식으며 지하 세계와의 연결 통로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튀어나온 것은 고대의 종족과 공허의 마수들. 고대의 종족이야 로칸이 설정한 대로였지만 이런 식의 만남은 원한 적이 없었다.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가 선제 타격을 입히는 방식을 원했지, 역으로 놈들이 침공하는 시나리오는 그의 계산 어디에도 없던 것이다.

만약 그럴 경우 막아 내지 못하면 지상이 멸망해 버릴 수 있으니까.

그 정도로 강력한 존재들이 공허의 힘까지 품은 채 지상으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제기랄! 카이!”

로칸은 그 즉시 카이를 소환했다. 녀석을 대붕으로 변신 시킨 뒤 자신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도록 명령을 내렸다.

당장 제 발로 이동할 시간조차 아까웠으니까.

신성을 이용하면 금방이긴 하겠지만 그사이 세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틈에 시간 가속을 멈추고 세계를 관찰했다.

세계의 대격변.

이미 명부마도의 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겪은 후였다. 아니, 그 변화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고대의 종족들까지는 괜찮다. 세 개의 세계를 합치며 병력의 손실이 있긴 했지만 세계의 힘 자체는 기대 이상으로 강력해졌으니 고대의 종족들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공허의 존재들, 그리고 고대 종족의 몸에 공허의 힘이 담긴 것이다.

아니, 그뿐 아니라 놈들이 등장함과 동시에 세계 전체에 공허의 기운이 미약하게나마 퍼지기 시작했다.

공기처럼 옅게, 그러나 마나와는 다르게.

아직은 농도가 옅지만 공허의 존재가 더 많이 나타날수록 그 농도가 진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걸 써야겠군.’

일단 명부마도의 전사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고대 종족과 공허의 존재들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살피던 로칸이 인벤토리를 열었다.

정령 신 일로네가 주었던 묘목을 꺼내 자신의 신성을 주입했다.

[정화의 나무][GOD]

천신의 능력을 이용해 신성의 성질을 조금 바꾸어 두었다.

마나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도 좋지만 이대로면 숨만 쉬어도 공허의 힘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능 : 공허를 품은 자와 권능 : 불굴의 의지가 있다지만 위험 요소는 최대한 없애는 것이 옳았다.

[세계 : 명부마도에 정화의 나무를 심으셨습니다.]

로칸은 즉시 변형시킨 세계수를 자신의 세계에 안착시켰다.

단숨에 성장하며 세계수만큼이나 거대하게 자란 정화의 나무가 대기 중에 녹아 있는 공허의 힘을 빨아들여 성질을 바꾸어 놓았다. 정화를 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공허 농도 조절과 공허의 힘 정화는 됐고…….’

대기의 농도뿐 아니라 그 근처에만 있어도 품고 있는 공허의 기운이 천천히 정화되도록 만들었으니 급격히 공허에 물들 걱정은 없어졌다.

고대의 종족과 공허의 존재들을 상대한 전사들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 다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되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고대의 존재들은 주민들을 죽였을 때 힘을 얻지만 반대로 명부마도의 주민들은 그들을 죽여도 별다른 이득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순수한 고대의 종족이라면 모를까, 공허의 힘을 머금은 탓이었다.

정화의 나무 아래에서 공허의 힘을 정화할 경우 남는 마나나 신성이 별로 많지 않은 까닭이었다.

‘흡수와 관련된 권능이 있다면 좋겠는데…….’

때문에 로칸은 추가할 만한 권능을 훑었다.

생명력 흡수와 관련된 능력? 아니면 신성을 흡수하는 능력?

모두 훑어보았지만 아무래도 공허의 힘을 함께 머금게 되다 보니 위험 부담이 컸다.

자칫 세계의 주민들이 더 빨리 공허에 침식당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딱 딱 딱 딱.

“……?”

바로 그때, 로칸의 상념을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신의 이빨 허리띠가 내는 소리였다.

“가만?”

녀석을 툭 쳐서 조용히 시키려던 로칸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이 녀석의 능력이 뭐였더라? ‘포식’이 아니었나?

아이템의 종류와 등급 따위를 가리지 않고 먹어 치워 제 능력을 키우는 아주 특별한 신성의 힘이 거기에 있었다.

가장 좋은 것은 마신을 불러 신성을 양도받는 것이겠지만 그가 순순히 양도해 줄 것이라는 보장도, 지금 바로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기에 로칸은 녀석을 움켜쥐었다.

그 안에 담겨진 마신의 신성을 뽑아내었다.

[마신의 신성을 흡수했습니다.]

덕분에 마신의 이빨 허리띠는 더 이상 다른 아이템을 먹어 치울 수 없게 되어 현재의 옵션을 쭉 유지하게 되었지만 로칸은 후회하지 않았다.

녀석에게서 뽑아낸 신성을 통해 ‘신성 포식’을 깨쳤기 때문이다.

“권능 : 승자 독식.”

로칸은 그 능력을 즉시 응용했다. 그대로 사용하는 대신, 자신에게 맞춰 살짝 변형시켰다.

승자 독식.

승자가 패자의 모든 것을 빼앗고 흡수할 수 있는 특별한 권능을 자신의 세계에 뿌렸다.

‘이걸로 된 건가.’

덕분에 세계 : 명부마도는 고대의 존재들과, 공허의 존재들과 싸울 힘을 얻었다.

지하 세계의 문이 열린 지역은 어쩔 수 없이 포기했지만 방어선을 단단히 구축하고 그들이 더 이상 땅덩어리를 차지하는 것을 막아 낸 것이다.

‘죽여 없애면 된다고 했었지.’

다행히 수비에 성공하는 모습을 확인하며 로칸이 광풍의 말을 떠올렸다.

공허의 신성을 품은 뒤, 그들이 구현화되었을 때 다시 한번 죽이면 놈들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고 신성의 파편이 되어 세계의 양분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고작해야 반신의 수준인 세계의 주민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여차하면 ‘강림’ 또는 ‘현신’하여 직접 놈들의 목을 따면 그만이다.

‘한데 그게 전부일까?’

그러나 로칸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공허의 신성을 완전히 흡수하는 방법이 정말 그것뿐일까?

천신의 신성이나 정령 신의 신성에서 획득한 정보에 따르면 정화를 하거나 봉인을 하거나, 놈들의 성향 또는 목표 등을 변형시켜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는 방식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다시 가두거나 눈속임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나마 광풍의 방법이 정공법에 가깝기는 한데…….’

그런 점에서 광풍의 방식인 공허의 존재를 두 번 죽이는 것은 오히려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였다.

다만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미세한 파편이 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당장 그것으로 신격은커녕 지성체를 탄생시키는 것조차 어렵다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언젠가 그것들이 모여 다시 한번 공허의 존재를 탄생시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그때 다시 퇴치하면 된다지만 로칸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지 죽이기만 하는 것은 자신의 스타일과 약간 차이가 있었고.

‘공허, 타락, 이름을 잃은 신…….’

때문에 궁리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 힌트들을 모아 새로운 방법을 떠올리고자 하였다.

그사이 고대의 종족들은 무리를 짓고 군락을 이루었으며 공허의 신들에게 몸을 맡기기 시작했지만, 로칸은 오히려 그들의 토벌을 미루게 했다.

저들은 선발대에 가까울 뿐이니, 시간이 지날수록 적의 군세가 더욱 강해진다는 것을 알지만 잡힐 듯 말 듯한 실마리를 놓치기 싫었다.

“이게 먹힐지 모르겠군.”

그리고 쥐어짜듯, 자신만의 가설을 만들어 내는 것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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