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 특이점 조사 (2)
로칸이 벌인 일은 꽤나 무모한 짓이었다.
1백억 신성을 가졌다 한들 신성을 유지하고 공급할 세계가 제대로 구축되고 성숙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언제든 가진 신성을 모두 소모하고 타락의 길로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더구나 제대로 세계를 구축하지 못한다면 1백억의 신성을 가진 채로 세계가 멸망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카이가 로칸에게 복속되어 있다는 것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조화와 비행의 신 카이가 하위 신으로 등록됩니다.]
[조화와 비행의 신 카이가 소유한 세계 : 조화의 비경에 간섭하실 수 있습니다.]
“……어?”
카이가 하위 신으로 등록되자 그가 가진 세계에 개입할 권리까지도 부여된 것이다.
“이거 좋은데?”
로칸은 카이의 등에 올라탄 뒤, 즉시 세계를 관찰했다.
‘녀석답군.’
세계 : 조화의 비경은 기본적으로 새와 정령들의 천국이었다. 아마도 정령계에 제법 머물렀던 것이 큰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지상에는 먹잇감인 벌레들이 그득그득 깔려 있었고, 새들은 대붕을 필두로 창공을 유영하다가 심심하면 지상으로 내려가 벌레를 쪼아 먹었다.
‘하지만 이래선 안 되지.’
카이의 입장에서는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겠지만 이미 세계의 비밀을 엿본 로칸은 생각이 달랐다.
지상에 벌레 이외에 온갖 곤충과 짐승, 몬스터들을 추가했고 심지어 그들이 역으로 새들을 사냥하는 것도 가능케 했다.
천적이나 위협이 없는 존재들은 한없이 나약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폭력과 파괴의 권능을 부여했다.
불굴의 의지도 함께 부여해 위협적인 존재들에게도 굴하지 않고 사냥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었고, 부리와 발톱에는 어떤 존재이든 사냥할 수 있는 강인함과 날카로움을 부여했다.
‘조인족은 안 돼. 카이를 믿게 만들려면 그에 걸맞은 구성이 필요하겠지.’
조인족처럼 인간의 형상을 가진 종족도 창조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카이의 세계이다. 인간의 기준에서만 생각하면 새도 인간도 아닌 것들이 세계를 지배하며 카이를 숭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때문에 종족의 형태는 유지한 채 균형을 맞추는 데 집중했다.
그것만으로도 세계에서 생산되는 신성의 양이 크게 불어났다.
초반에는 갑작스레 반항하는 먹잇감들 때문에 당황하는 놈들도 있었지만 대붕이 나서면 상황이 정리되었으니까.
대붕과 빅버드 일족에 대한 믿음은 더욱 강해지고 지상에는 지옥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하늘에서는 새들이 그들을 먹기 위해 때때로 내려오니 힘을 합쳐 저항해야겠지만 당장 자신들끼리도 먹고 먹히며 살아남아야 하니 투쟁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놈들은 생존 방식을 익히거나 전투력이 높아질 테고, 그런 놈들을 잡아먹으며 새들은 더욱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일단은 이 정도면 되겠지.’
적당히 세계를 조율하고 난 로칸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세계를 빠져나왔다.
이 정도만 되어도 카이가 신성을 펑펑 써 대지만 않는다면 그럭저럭 괜찮게 세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 가속도 걸어 놓았고, 딱히 문제가 될 만한 소지가 없었기에 새들의 숫자가 무한정 불어나는 것만 해결한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때가 되면 다시 천적 관계인 존재들을 일부 풀어놓거나 자신의 세계인 명부마도와의 통로를 이용해 옮기면 되니 걱정 없다.
세계 : 조화의 비경보다 압도적으로 커다란 그의 세계라면 그들 전부가 이주해 오더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테니까.
“응? 이 새끼들이…….”
그렇게 다시 비행을 이어 가던 로칸의 감각에 또 다른 신성이 감지되었다.
카이를 받아들이며 더욱 거대한 신성을 갖게 된 로칸이었기에 멀찍한 위치에서 은밀히 다가오는 기운까지 감지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언제부터 따라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집중하지 않았다면, 카이를 하위 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로칸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을 은밀한 기동이었다.
“카이, 데뷔전 한번 해 볼까?”
로칸은 즉시 기수를 돌렸다. 단숨에 속도를 높여 놈들에게 들이닥쳤다.
“끼엣!”
카이의 돌진에 녀석들이 화들짝 놀라 흩어졌다.
“크허허허허헝!”
그러나 그 또한 쉽지 않다. 로칸이 거친 포효로 그들의 몸을 마비시키고 허공을 격해 잡아챈 것이다.
그와 동시에 투척용 도끼를 집어 던져 다른 한 놈의 대가리에 꽂았다.
붙잡은 녀석은 그대로 지상으로 끌고 내려왔다. 목을 잡아채고 땅으로 떨어지며 놈을 처박아 버렸다.
“오?”
카이는 오히려 더 과감한 공격을 퍼부었다.
쿠오오오오오오오.
엘리멘탈 브레스!
반신의 등급에 오르며 깨달았고, 신위에 오르며 강화된 그 힘이 놈들을 휩쓸었다.
“키아아아아아아악!”
몸이 휑하니 꿰뚫린 녀석들은 추락을 면치 못했다.
신성으로 어떻게든 목숨을 부여해 보지만, 감히 로칸과 자신을 공격한 녀석을 가만 둘 생각 따윈 없는 카이였다.
엘리멘탈 브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추락하는 놈들은 일단 놓아두고 도망치는 놈의 날갯죽지를 부리로 꽉 깨물어 비틀자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신성을 이용해 비행 상태를 유지하긴 했지만 비틀거리는 몸으로 카이의 다음 공격을 피해 내지는 못했다.
[카이가 대량의 신성을 흡수했습니다.]
“응?”
그와 동시에 로칸에게 하나의 알림이 나타났다. 카이가 스스로 처치한 중급 매의 신이 가진 신성을 흡수했다는 것이다.
로칸이 흡수한 것을 나눠 먹는 형태가 아니라, 스스로 신성을 흡수한 것.
덕분에 10억가량이나 소모되었던 신성이 다시 크게 불어났다.
혹여나 카이가 무리를 하다가 신성을 몽땅 소모해 버리면 어떻하나 주시하고 있던 로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식이라면 딱히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로칸 자신이 그러했듯 이제 막 신위에 오른 카이가 중급 매의 신을 압도했다는 건, 무척이나 큰 의미였으니까.
게다가 엘리멘탈 브레스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두 마리가 더 바닥에 처박힌 상태였다.
“읏차.”
자신이 맡고 있던 두 놈을 끝장내고 카이가 떨어뜨린 중급 매의 신 중 한 마리의 위에 올라탄 로칸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배틀 액스를 놈에게 가져다 대었다.
다른 한 놈은 카이의 발톱에 짓밟혀 무력화된 상태였기에 안심해도 좋았다.
“딱 한 번만 기회를 주지. 우리를 왜 쫓아온 거지?”
“……말하면 살려 줄 건가?”
압도적인 힘. 그 폭력의 위세에 억눌린 녀석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로칸은 그들에게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
대충 알 것 같았으니까.
“그건 들어 보고 결정하지.”
“……특이점을 찾기 위해서다.”
“어째서? 누가 시킨 거지?”
“그건……. 누가 시킨 게 아니다. 매의 신님을 회복시키기 위해 우리가 자발적으로 나선 것뿐.”
“매의 신? 회복?”
순간 로칸의 눈빛이 흔들렸다. 가만 보니 이들에게서 공허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단순히 감지하지 못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이들과 비등하거나 그보다 강할 것으로 보이는 시조새의 신이 숨기고 있던 공허의 기운까지 읽어 낸 그가 아니던가?
이들이 기운을 숨기는 능력이 월등한 것이 아니라면, 정말로 이들이 공허의 힘을 품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게 무슨 뜻이지?”
“매의 신님께서 공허에 잠식되고 있으시다. 그분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신성이 필요하지. 특이점이 가진 신성이라면 그분을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부탁한다. 제발 매의 신님을……!”
퍼억
놈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 전에 로칸이 머리통을 부숴 놓은 것이다.
대충 사정을 알 것 같았으니까.
상위 신이 공허에 잠식되자 그들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하위 신들이 회복을 위해 신성을 구하고 다니는 것이다.
제 것을 떼어 줄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긴 것이겠지.
‘어쩌면 아까워서일 수도 있지만.’
그리고 로칸도 확인한 바 있는 특이점의 막대한 신성이라면 공허의 기운쯤은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힘을 얻는다 한들, 신계를 구성하고 보호하는 힘인 특이점의 신성을 잃는 것보다 의미가 있을까?
녀석이 신계 전체를 보호할 만한 능력이 있다면 모를까 어림없는 일이다. 당연히 협조해 줄 생각도 없었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모르지만 로칸은 감히 자신을 노린 것을 용서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 일을 벌이려 했다면 그 대가를 치를 각오도 되어 있겠지.
“젠장, 끝이 없군.”
놈들의 신성을 모두 흡수한 로칸은 여전히 굳어진 표정으로 하늘을 살폈다.
신성이 더 증가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사이 나타난 것인지 저 구름 위로 몰려든 비행 계열 신들의 신성이 느껴진 것이다.
이놈들과 같은 자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또한 공허의 존재들이 노린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신계에는 이런 식으로 한데 묶인 종족 신들이 꽤나 많았으니까.
상위 신들을 타락시켜 그들에게 딸린 하위 신들까지 움직이는 것은 무조건 먹힐 수밖에 없는 수인 것이다.
“카이, 돌파하자.”
벌써 열 이상의 신들이 구름 위에 모인 것을 확인한 로칸은 즉시 카이에 올라탔다.
신화를 타는 자를 통해 한 번 더 카이를 강화시킨 뒤, 전속력으로 날아 그들을 따돌리기 시작했다.
비행 계열의 신들이기에 기동력만큼은 내로라하는 그들이지만 신성까지 마구 쏟아붓는 카이의 속도를 따르는 것은 무리였다.
‘서둘러야겠군.’
덕분에 몇 시간 만에 놈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거리를 벌렸지만 로칸은 안심하지 않았다.
언제 감지 가능 범위까지 놈들이 쫓아올지 몰랐기에 두 번째 특이점인 구름 위로 뛰어오르며 준비한 아이템을 던졌다.
몽실몽실 구름과 뇌전의 구슬.
카이스만에게 받은 그것들을 어떤 구름에 던져 넣자 구름 한가운데에 블랙홀 같은 구멍이 나타났다.
두 번째 특이점 내부로 들어서는 입구.
카이를 역소환하고 그곳으로 뛰어들자 권한 확인과 함께 구름 속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사용자 권한 확인 : 폭력과 파괴의 신 로칸]
[작동 권한 확인. 접근이 승인되었습니다.]
[현재 방어 장치가 휴면 상태입니다. 재가동하시겠습니까?]
첫 번째 특이점과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아니, 거의 똑같다 할 정도로 비슷했다.
기판에 약간 차이가 있긴 했지만 그건 방어 장치들이 하늘에 있는 까닭인 듯싶었다.
파앗.
화면이 켜지자 로칸을 쫓던 신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특이점에 진입할 때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는데 그새 따라온 모양이었다.
로칸과 카이를 찾지 못해 지나쳐 가거나 대충 특이점의 위치를 아는 놈들이 있는지 근처를 서성거렸지만 권한이 없는 그들이 특이점에 접근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이것 봐라?’
그리고 그들 중에는 중급 매의 신들과 달리 스스로 공허를 품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레벨을 확인하니 무려 상위 신급의 존재들.
아무래도 로칸을 따라 들어오거나 납치, 협박 등을 통해 직접 특이점의 신성을 취하려는 작정인 것 같았다.
“이걸 조작할 수 있으려나?”
그대로 침묵한다면 기다리다 지쳐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로칸은 놈들을 그냥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뭔지 모르는 기판을 하나씩 건드려 보며 조작법을 익혔고, 일부에 불과하지만 대충 사용 방법을 알 것 같았다.
[방어 장치를 수동 조작 모드로 변경합니다.]
[사용자의 속성이 방어 장치에 부여됩니다.]
[폭력과 파괴의 권능이 방어 장치에 부여됩니다.]
[록 온(Lock On). 발포하시겠습니까?]
“여기까지 왔으니 선물을 줘야겠지. 이거나 먹어라!”
쿠르르르르릉!
로칸의 조작에 따라 공허를 품은 신들에게 벼락의 포격이 집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