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9 신계 방어 (2)
가베라.
공허의 존재였으나 지금은 세계 : 명부마도의 하위 신이 된 녀석이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모르는 건 아니군.’
몇몇은 화들짝 놀랐지만 반수 이상이 묘한 눈길로 가베라와 로칸을 돌아보았다.
가베라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몰라서 그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기에 로칸이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그렇다면 뭐가 문제입니까?”
“그건…… 너무 위험하다. 시도는 좋았지만 그러다 잡아먹힐 수도…….”
“좀 전에 공허의 존재들을 개무시하던 게 누구죠? 그런데 이제 와서 잡아먹힐까 봐 겁이 난다고요?”
“…….”
그동안의 말들이 모두 허세였던 것을 시인하는 셈이다.
대부분의 신들은 침묵했고, 광풍은 눈을 빛냈다.
자신이 알려 준 것처럼 세계 안에서 공허의 존재에게 신격을 부여한 뒤 죽이는 방법이 아니라 아예 두들겨 패서 하위 신으로 삼은 것이 흥미로운 것이다.
어쩐지 그 역시 시도해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겁쟁이들이네.’
침묵 속에 그들을 돌아보았지만 로칸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당장 그 생각이 적중해서 군주급은 모르더라도 중상위 신급의 존재 몇만 이쪽으로 돌려세워도 큰 도움이 될 텐데 말이다.
“딱히 생각이 없으신 것 같군요. 그럼 저도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좋아. 그럼 내가 제안하지. 별동대를 꾸려 놈들을 요격한다. 지금 불리한 건 놈들이 아니야. 생각이 없는 놈들이 아니니 신계의 곳곳을 점령하고 신성을 먹어 치운 다음 여기를 공략하려 들겠지. 대부분의 신들이야 도망쳐 나올 수 있겠지만 특정 지역을 벗어나기 어려운 놈들도 있잖아? 그 놈들 몽땅 잡아먹히는 거 가만히 보고만 있을래?”
“…….”
“새끼들이 의리가 없어요.”
비단 의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냉정히 생각해서 그들이 신들의 도시까지 직전하지 않고 주변의 지역들을 범하고 점령하며 밀고 들어온다면 힘과 세력은 더 커질 것이고, 그때가 되면 이곳에 있는 신들이 전력으로 저항한다 해도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한 것이다.
이쪽에도 압도적인 전투력을 지닌 신들이 몇 있지만 그쪽에도 군주라 불리는 이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요격을 한다면?
놈들의 진격 속도를 늦출 수 있을 뿐 아니라 힘을 소진시키고, 신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벌어낸 시간으로 흡수된 공허의 신성을 정화하든 복속킬 수도 있을 터였다.
결국 광풍의 주장대로 별동대를 꾸려 게릴라전을 펼치기로 결정되었다.
“넌 당연히 이쪽이지.”
별동대를 맡는 것은 신계에서도 가장 강한 열 명의 신이 맡기로 했다.
광풍도 그중 하나였고 가장 첫 번째 멤버로 로칸을 뽑았다.
이미 한 번 호흡을 맞춰 보기도 했고, 성향도 잘 맞으니 재미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다니면 이런저런 이야기도 할 수 있을 테고.
“정말 이대로 가는 겁니까?”
“뭐, 나쁘지 않잖아?”
팀은 금방 꾸려졌다. 다른 신들은 몰라도 광풍의 경우, 함께하려는 이들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래서 광풍은 과감히 팀원을 배제시켰다.
광풍과 로칸. 굳이 따지자면 카이까지 일단 셋이 팀을 이루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 멤버는 현장 주변에서 구하기로 한 것이다.
최악의 경우 정말 그들만으로 게릴라전을 진행해야 할 수 있지만 사실 큰 상관은 없다. 둘은 이미 공허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던 전적도 있지 않던가?
충분히 적들을 학살하고 빠져나올 수 있는 실력을 지닌 이들인데다 놈들이 오는 길목에는 충분히 이쪽에 합류할 만한 존재가 있었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 참, 저쪽은 괜찮냐?”
“저쪽이요?”
“지상이랑 천상. 이 새끼들이 이쪽만 공격할 리 없잖아?”
“……!”
빠르게 떠날 채비를 마쳤을 대, 광풍이 로칸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신계의 신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 이용했을 뿐이라지만 과연 공허의 존재들이 지상과 천상은 가만 내버려 두고 신계만을 공격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비록 신들을 잡아먹고 괴롭히며 세계를, 이름을 획득하려 하는 놈들이지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꼭 신들의 세계에만 있지 않는 것이다.
지상과 천상.
최소가 반신 등급인 그들에게 어쩌면 이보다 더 악명을 날리기 쉬운 장소가 있을까?
로칸은 광풍의 말에 식겁하며 지상과 천상을 살폈다.
자신의 세계가 아닌 만큼 원래는 명부마도와 같이 들여다보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지상과 천상의 주신으로 등극하며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유저들이 움직이는 세상인 만큼 자신이 창조한 세계처럼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은 불가능하고, 개미집을 들여다보듯 관찰하는 것만 가능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미 사건은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젠장.”
대부분의 타락자들을 정리했지만 잔당들을 중심으로 공허의 문을 열고 있었다.
힘이 부족해 그 문의 크기가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안쪽에서도 적극 호응한 탓인지 무섭게 공허의 존재들이 쏟아졌다.
다행히 로칸이 직접 지시를 내리지 않았어도 각 거점과 국가, 종족에서 토벌 퀘스트를 내건 상태였고 로칸은 즉시 여기에 한 팔 거들었다.
‘이거면 되겠지.’
반신 이하의 유저들에게는 엄청난 옵션이지만 당장 그에게는 쓸모없는 에픽, 레전드 등급의 아이템들을 내걸고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들에게 순차적으로 그것들을 골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퀘스트를 건 것이다.
유저들의 아이템 욕심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해낼 것이라 믿었다.
‘보호 장치도 필요하겠지.’
제압, 심문 그딴 것은 필요 없다.
로칸이 요구한 것은 공허의 존재들의 말살.
그로 인해 수반되는 공허의 신성 흡수까지도 퀘스트로 간단히 해결했다.
로칸의 신전에 공허의 신성을 바치면 골드로 환전해 주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 꽤 많은 신성이 소모되었지만 공허의 존재를 하위 신으로 받아들인 까닭인지 한결 공허의 신성을 받아들이는 게 편해졌기 때문에 예상보다는 적게 들었다.
그렇게 흡수된 공허의 신성을 모두 로칸에게 흡수가 되고, 그로 인해 태어나는 세계 : 명부마도 속의 공허의 신들은 폭력으로 제압해 하위 신으로 삼을 작정이었다.
지상과 천상에서 사냥되는 공허의 존재들이 많을수록 로칸에게는 은근한 부담이 되긴 하겠지만 그는 자신 있었다.
상대가 무엇이든, 어떤 힘을 지녔든 굴복시킬 자신이.
“가시죠.”
“해결됐나?”
“일단은요.”
광풍도 로칸의 그런 자신감을 믿었다. 직접 경험해 본 로칸은 분명 그럴 자격이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 성장 속도뿐 아니라 실질적인 전투 능력 면에서도 자신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지상과 천상을 통일한 그 수완도 믿을 만했다.
때문에 광풍은 마음을 놓고 그를 인도했다.
아니, 굳이 이동 따위에 힘을 뺄 필요가 없으니 함께 카이를 타고 날았고, 다행히 시간을 맞춰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 애들은 영 굼뜨다니까.”
그곳은 로칸 역시도 한 차례 방문해 본 적 있는 곳이었다.
정령 신과 정령, 엘프들이 있는 곳.
엘프 신은 물론 그들과 어울린 숲의 여러 새와 짐승, 벌레, 식물 신들이 낙원을, 혹은 요새를 이루어 사는 곳이다.
하지만 이들이 공허의 진격을 완벽히 막아 낼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들이 단단하게 뭉치면 분명 강한 위력을 발휘할 테고, 정령 신이라면 신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이니, 엘프 신과 힘을 합칠 경우 군주급 둘까지도 버텨 내겠지만 반대로 군주급이 셋 이상 찾아온다면?
승리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 고립되어 탈출하기조차 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힘을 합쳐 이놈들을 찢어 먹으려 들겠지.”
그리고 군주급의 공허의 신들이 힘을 합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 정도가 아니라 바보다.
이미 대대적인 침공을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개인적인 일탈이 아닌, 군주급들의 협력이 있다는 것이니까.
더구나 정령 신이나 엘프 신쯤 되는 이들의 세계라면 그들에게도 의미가 컸다.
독식할 수만 있다면 단번에 이름을 되찾고 신격을 획득할 수 있을 만큼.
“바쁘겠군요.”
“아니. 꼭 그렇지도 않을걸? 정령 신이 그렇게 꽉 막힌 녀석은 아니거든. 녀석이라면 아마 준비하고 있을 거야.”
잠시 잡담을 나누고 안으로 들어가자 부산하게 움직이는 정령들과 엘프들, 그리고 숲의 여러 신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광풍의 말처럼 확실히 이주를 준비하는 모습이다.
“오셨군요.”
“얼마나 더 걸리지?”
“하루면 될 것 같습니다.”
“하루라……. 나쁘지 않군.”
정령 신 일로네가 광풍과 로칸을 발견하고 아는 체를 했다.
로칸의 말처럼 녀석이 정령과 엘프들, 그리고 숲의 이주를 지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아이는……. 그새 이만한 성장을 거두다니 놀랍군요.”
이미 눈여겨보던 까닭인지 카이를 발견하고는 살짝 놀란 기색을 띠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아직 반신의 지경에도 오르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한데 지금은 어엿한 하급 신의 경지에 올랐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나?
하지만 일로네는 그저 놀라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조화와 비행의 신이라는 이름에는 정령들의 영향이 컸기 때문인지 대뜸 자신의 신성을 뚝 떼어 카이에게 건넨 것이다.
“뀨?”
“감사합니다.”
[조화와 비행의 신 카이의 신성이 대폭 강화됩니다.]
그 양으로 보자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신성의 안에 담긴 기질이 문제였다.
애초에 정령들의 영향과 축복을 받은 것이 고작인 상태에서 발휘하던 조화의 신성과, 정령 신이 직접 자신의 신성을 내어주며 획득하는 조화의 신성은 그 질에서 달랐으니까.
조화의 신성은 부수적이고, 종족 특성에서 오는 비행의 신에 가까웠던 카이의 신성에 정체성이 더욱 강해졌다.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신에 가까워졌다고나 할까?
로칸은 진심으로 감사했고, 내면의 변화를 느낀 카이도 기분 좋게 울부짖었다.
“저희를 위해 애써 주시는데 해 드릴 건 이 정도밖에 없네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놈들의 동태를…….”
“……?”
“왜 그러십니까?”
그렇게 인사를 나누던 찰나, 일로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뭔가를 감지한 것이다.
“뭔가…… 아주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그들과 마주친 풀과 나무들이 죽어 가는 게 느껴져요.”
정령 신인 만큼 정령이나 그들의 속성과 관련된 세계 전반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아주 자세한 정보까지는 얻지 못하는 듯싶었지만 그들의 기운이 죽어 가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는지 조급해졌고, 이주를 준비 중인 정령과 엘프, 숲의 신들을 재촉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광풍과 로칸에게 부탁했다.
“부탁드립니다. 시간을 벌어 주세요. 이들이 안전하게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 저도 합류하겠습니다.”
“좋아. 맡겨 두라고.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함부로 까불면 어떻게 되는지를 톡톡히 보여 주지.”
그러자 광풍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그것은 로칸도 마찬가지.
애초에 싸우기 위해 이곳에 온 그들이 아니던가?
그뿐만 아니라 유저인 그에게는 정령 신이 퀘스트까지 내려줬기에 더욱 기쁜 마음으로 날뛸 수 있었다.
[시간 끌기][퀘스트]
숲의 정령과 엘프, 기타 신들이 피할 시간을 벌어라.
-성공 조건 : 정령 신이 이끄는 집단의 안전 확보
-성공 보상 : 이주 완료한 신들의 신성 조각들 획득
-실패 조건 : 50% 이상의 사망
‘이 정도면 후하군.’
실패 조건이 50% 이상의 사망이면 조건도 후한 편이었기에 마음 놓고 숲의 바깥으로 달려갔다.
광풍과 함께, 적의 선봉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