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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화.공허의 군주 (2) (482/500)

482 공허의 군주 (2)

아쉽게도 일격에 전투가 끝나는 일은 없었다.

과연 군주 급이라는 것인지, 녀석은 탈피 후 연약해진 방어력에도 불구하고 로칸의 공격력을 버텨 내는 것은 물론, 반격을 가해 오기까지 한 것이다.

하지만 번번이 테트라 엘리멘탈과 정령 신의 개입으로 타격을 주는 것은 무산되었다.

[공허의 불꽃에 노출되셨습니다.]

[타이틀 ‘공허를 품은 자’ 효과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탈피!”

그러나 착실하게 대미지를 입었고, 위기의 순간을 몇 번이나 넘겼다.

그 증거로 자신의 신성을 벗어던지는 탈피를 두 번이나 사용했다.

껍질을 벗어 버림으로써 몸 자체는 연약해지지만 공허의 신성은 더욱 강해지는 능력이었기에 로칸으로서도 까다롭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수록 본연의 신성을 잃어 가기에 탈피를 사용할 때마다 놈이 공허에 더욱 진하게 물들어 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어쨌든 죽이지 못하면 말짱 꽝이다.

오히려 놈이 점점 더 강해질 시간을 주는 것과 같았기에 로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콰광! 콰과과광!

다른 곳들의 전투도 점점 격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더 큰 신성, 더 잦은 공방이 오가며 신성과 공허가 충돌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다섯 곳의 전투 중 확실하게 승기를 잡아 가는 것은 광풍과 로칸이 유일했다.

나머지는 비등하거나 오히려 조금 밀리고 있는 상황. 공허의 군주들이 작정하고 그들을 노린 까닭에 상성이 맞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광풍이야 상성을 무시하고 상대를 때려잡는 중이었고, 로칸은 정령 신을 대신해 놈과 직접 전투를 치르면서 놈이 짜놓은 판을 뒤엎은 케이스였다.

“젠장!”

치이이이이익.

불과 물, 얼음의 대결.

로칸과의 전투에 버거움을 느끼던 로스마룬이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공허의 신성을 마구 내뿜으며 로칸을 밀어 내기 위해 애를 썼고, 로칸은 불꽃 따위 무시한 채 놈의 몸에 배틀 액스를 꽂아 넣었다.

‘걸렸군.’

찰나를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광살.”

퍼버버버버버벅!

불꽃을 내뿜느라 버둥거리던 로스마룬의 몸에 수십 번의 참격이 꽂혀 들어갔다.

이번에는 탈피를 사용할 틈이 없었는지 그대로 몸으로 받아 낸 놈의 신성이 휘청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쿠화아아아아아아!

바로 그때, 카이의 엘리멘탈 브레스가 마무리를 지었다.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놈의 전신을 뒤덮은 브레스가 세포 하나까지 모조리 소멸시켜 버렸다.

[공허의 세계 : 불지옥 반도를 인수하시겠습니까?]

놈의 죽음을 시스템이 확인시켜 주었다.

“아니!”

이미 파괴된 세계 따위를 인수할 리가.

로칸은 즉시 놈의 신성을 몸으로 받아들였고 얼른 다른 전장으로 눈을 돌렸다.

마침 광풍 역시도 자신의 상대를 처단하는 데 성공했다.

서로 눈짓을 하며 즉시 밀리고 있는 다른 신들의 쪽으로 합류할 채비를 했다.

“멍청한 놈들!”

콰과과광!

그 순간 대폭발이 일어났다.

남은 공허의 군주 셋이 동시에 힘을 폭발시키며 자신과 싸우던 신들을 밀어 낸 것이다.

그중 한 놈은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미련 없이 물러났다. 어차피 광풍이, 로칸이 합류하는 순간 전세가 크게 기울어질 테니까.

“크흐흐흐!”

“저 새끼들이 미쳤나.”

그리고 음흉하게 웃기 시작했다.

한 놈이 아니라 세 놈 모두가.

단체로 실성하기라도 한 것일까?

광풍은 심드렁하게 대꾸했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하다못해 한 명이라도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어야 할 상황에서 모두를 밀어 내다니?

정상적인 판단이 아니었고, 노림수가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모두 달려들기보다 부상을 회복하며 놈들의 반응을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광풍과 로칸만 빼고.

“크윽!”

득달같이 달려드는 둘의 공세에 공허의 군주들도 감히 경시하지 못했다.

정상일 때도 버거운 둘의 공격인데 지금은 큰 부상까지 입은 상태가 아니던가?

승기를 잡고 있었다는 것이지 상처 하나 없는 압승을 거두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었기에 급히 공허의 신성을 모아 함께 그들을 밀어 냈다.

“선불 맞은 멧돼지 같으니……! 그래. 그런 네놈의 성격 덕분에 우리의 계획이 성공했구나!”

“무슨 개소리야?”

이번에는 재차 달려들려던 광풍과 로칸도 멈칫거렸다. 대체 무슨 계획이 성공했다는 것일까?

‘설마?’

순간 로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공허의 군주는 모두 열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이곳에 다섯이 있으니 나머지 다섯은 어디에 있을까?

“젠장, 빈집 털이인가?”

로칸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설마 신들의 도시를 침공하고 있는 것일까?

별다른 군세의 이동은 감지되지 않았는데?

‘하긴, 그딴 게 없어도…….’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최상위 신 정도의 무력을 갖췄다면 사실 중급, 하급 신의 숫자 따위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단신으로 힘 좀 쓴다 하는 상위 신들을 쥐어 패고 다니던 광풍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놈들이 소수 부대를 운용하여 신들의 도시를 공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 조급해졌다.

“병신들이 뭐라는 거야? 왜, 성동격서라도 준비하셨나? 근데 말이야. 카이스만 영감은 그렇게 호락호락 당할 리가 없거든. 우리 걱정 말고 네 목이나 잘 간수하시지?”

퍼엉!

광풍이 폭발적으로 튀어 나갔다.

놈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카이스만을 믿는 것이다.

게다가 정령 신처럼 다른 지역에 자리 잡은 최상위 신들도 있기에 다섯 명만 이곳에 투입되었지만 그들 중 한둘 정도는 신들의 도시에 머무르거나 지원을 갔을 테니 방어가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였다.

놈들을 처치한 뒤, 가도 늦지 않는다는 판단이었다.

“지원 부탁합니다!”

그런 광풍을 뒤따라 로칸도 몸을 날렸다.

다른 최상위 신들은 머뭇거리거나 회복에 집중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정령 신까지 합치면 이쪽도 셋일 뿐 아니라 그들보다는 이쪽이 상태가 더 좋았으니까.

각자의 고유 신성을 뿜어내며 공허의 군주들에게 들이닥쳤고, 녀석들은 이미 후퇴 쪽으로 가닥을 잡았는지 최대한 그들을 밀어내고 발을 빼기 위해 힘을 쏟았다.

다시 한참이나 이어진 공방.

그 결과 추가적으로 공허의 군주를 사냥하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그중 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것에는 성공했다.

“카이! 신화를 타는 자!”

그들과 그들의 군세가 물어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로칸과 광풍은 즉시 신들의 도시로 내달렸다.

정령 신도 함께 가려 했으나 자칫 남겨진 최상위 신들이 기습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그들을 보호하고 보조하는 차원에서 그곳에 남아 상황을 정리했다.

“카이, 더 빨리!”

안 그런 척하기는 했지만 광풍도 제법 걱정이 되었나 보다.

카이를 재촉해 단숨에 신들의 도시로 향하자 거의 폐허 수준으로 변한 성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감!”

이미 시가전으로 돌입했는지 신들의 도시 내부에서는 거센 신성의 폭풍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강대한 힘과 힘이 부딪치며 일어나는 충격파가 도시 전체를 뒤덮었고, 그 여파에 휩쓸려 죽은 신과 공허의 존재들의 육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저건……!”

광풍과 로칸조차도 해소해 내는 것이 쉽지 않을 만큼 강대한 힘의 충돌이 도시의 중앙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정확히는 카이스만의 거처 인근이다.

버티기 어려워하는 카이를 역소환한 로칸과 광풍은 각자의 신성을 끌어올리며 억지로 뚫고 들어갔다.

딱히 막아서는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건만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버거웠다.

그만큼 엄청난 힘과 격을 지닌 존재들이 부딪치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둘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가 전신을 자극하지만 묵묵히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카이스만과 그 앞에 선 존재를 똑바로 마주했다.

[이름을 잃어버린 자들의 왕 카이륜][Lv 598]

“……!”

598레벨이라니? 카이스만보다 1레벨이 낮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그 격차는 생각보다 크지 않을 터였다.

신성의 활용 능력이나 고유 신성의 상성 따위에 따라 얼마든지 어느 한쪽이 압도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니까.

쌍방이 모든 신성을 털어 버릴 작정으로 힘 싸움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오지 마라!”

그때, 저 안쪽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바로 카이스만의 것.

놀랍게도 대결 중인 두 존재 중 상처를 입은 쪽은 카이스만이었다.

그것도 작은 상처가 아닌지 피를 울컥울컥 쏟아 내고 있었고, 그대로 둔다면 누가 패하고 소멸하게 될지는 자명해 보였다.

“시끄러, 영감. 내가 당신 말 듣는 거 봤어?”

그러나 광풍은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힘을 발휘했다. 자신의 격을 최대로 발하며 그들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소위 말하는 끝판왕인가?”

로칸도 입술을 꾹 깨물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처럼 둘의 사이에 진입한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없어서는 아니다. 정면에서 승부하는 것보다 양쪽으로 나뉘어 적을 노리는 것이 더 유리하니까.

이미 놈을 마주하는 순간부터 혼자의 힘만으로는 어쩌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자존심을 부리지 않고 최대한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떨거지들뿐이더니 그럭저럭 쓸 만한 놈들이 나타났군.”

상대는 공허 그 자체와 같았다.

이목구비는 물론이고 일말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근육이 부들부들 떨려 올 지경이지만 로칸은 정신을 다잡고 배틀 액스를 들어 올렸다.

“까고 있네. 쓸 만한 수준인지 네 목을 썰 만한 수준인지는 보면 알겠지!”

광풍과 로칸이 동시에 힘을 일으켰다.

카이스만의 보조가 있다면 더 좋겠지만 치명상을 입은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기는 어려웠기에 오직 자신의 힘만을 믿었다.

놈을 앞뒤로 압박하며 짓쳐 들었다.

따악.

“……!”

“큭!”

쩌엉!

각자의 고유 신성을 진득하게 끌어올린 배틀 액스가 서로 부딪쳤다.

놈이 고작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 위치가 뒤바뀌며 서로에게 무기를 겨눈 꼴이 된 것이다.

서로가 작정을 하고 달려들었기에 아랫배가 아려 올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지만, 둘은 약속한 것처럼 서로를 밀어 내며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카이륜을 향해 재차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학습 능력이 부족하군.”

따악.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몸이 동시에 순간 이동 되더니 이번에는 카이스만을 향해 도끼를 휘두른 꼴이 되었다.

“젠장!”

급히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강력한 힘을 담았던 만큼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카이스만, 이딴 놈들을 데리고 신계를 꾸려 가다니, 소꿉장난이라도 하고 싶었던 건가?”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일어나는 둘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녀석이 카이스만을 질책했다.

고작 이런 놈들을 지키기 위해 그 오랜 세월을 희생했냐는 듯, 혀를 차고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제길, ‘공간’ 사용자였나! 로칸, 공간이 열리는 순간에 집중해! 그냥 베어 버려!”

“눈 뜬 장님까진 아니었나 보군.”

그때, 광풍이 알았다는 듯 로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놈의 능력에 대한 힌트를 준 것이다.

시간이 없어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로칸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세 번은 못 당해 주지!”

둘은 재차 놈에게 달려들었다.

따악.

놈이 손가락을 부딪치는 순간이 타이밍이다. 그 순간 주변의 신성이 요동치며 ‘공간의 틈’이 벌어졌다.

“부서져라!”

그것이 완전히 입을 벌리기 전, 로칸이 배틀 액스를 내리그었다. 그것은 광풍도 마찬가지.

아가리를 벌리려던 공간을 강제로 닫아 버리자 그들을 강제로 날려 버리는 것 같던 힘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아무리 강력한 신성을 지녔다 해도 그들 정도의 존재를 어떤 장치 없이 강제로 날려 버리는 건 불가능한 것이다.

“산산조각을 내 주마!”

다시 자신감이 차오른 광풍과 로칸이 놈을 향해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설사 카이스만이라 해도 감히 무사하지 못할 파괴적인 일격이 놈의 몸에 꽂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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