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 삼위일체 (1)
“헛! 그건……!”
로칸이 해류를 제어해 포세이둔의 공세를 물리치자 천신도 깜짝 놀랐다.
해류 제어 따위는 로칸의 주력 신성이 아니니 위력의 차이는 있지만 천신이 살짝 거들자 바닷속이 평온 그 자체로 변한 것이다.
덕분에 그들은 쭉쭉 나아갈 수 있었고 특이점이 있는 위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역시 대비를 해 놨네요.”
하지만 뜻대로 안으로 들어가는 건 어려웠다.
특이점의 입구를 열기만 하면 권한 설정이 되어 있지 않는 다른 존재들을 떨궈 낼 수 있겠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도록 이미 포세이둔의 지배를 받는 신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것이다.
이들을 몽땅 죽여야 할까? 얼마의 시간이 걸려도 좋다면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들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단 저들은 애초부터 물이나 바다에서 태어난 신들이고, 이쪽은 육지나 하늘을 배경으로 탄생한 신들이니까.
해신의 트라이던트가 있으니 어느 정도 바다의 능력을 쓸 수 있다지만 주 무기가 아닌 만큼 로칸에게도 제약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받으십시오.”
그래서 로칸은 해신의 트라이던트를 천신에게 넘겼다.
움직임은 바다 왕자의 망토의 효과로도 충분하니 굳이 불리한 싸움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천신에게 해신의 트라이던트가 쥐어진다면 신성 변환 능력이 더해져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
“이거라면 문제없겠군요. 가십시오.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해신의 트라이던트를 쥔 천신이 자신만만하게 제안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공허에 물든 신들을 자신이 맡을 테니 로칸은 포세이둔을 막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정령 신과 천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겠지만 광풍과 함께 최상위 신으로 꼽히는 그들이라면 잠시 버티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 부탁합니다.”
폭력과 파괴의 신성을 일으키며 로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죽어라!”
“신성을 내놔!”
광전사처럼 달려드는 놈들에게 진짜 광전사의 힘을 보여 주었다.
“꺼져!”
쿠화아아아악.
로칸이 내지른 일격에 바다가 갈라졌다.
일직선으로 거대한 균열이 생기더니 막아선 놈들을 베고, 빨아들였다.
“해류 변환!”
그 순간 천신의 지원이 이루어졌다.
예상대로 해신의 트라이던트에 신성 변환 능력을 담아 로칸을 향해 달려드는 놈들을 밀어 내고 뭉개 버린 것이다.
놈들 역시 물 또는 바다의 신들인 만큼 거세게 저항을 했지만 힘의 격차가 너무나 컸다.
압도적인 신성으로 몰아치자 놈들이 일으킨 바다의 힘은 형편없이 깨어지며 로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열려라!”
그 틈에 목적지까지 도달한 로칸은 준비한 아이템을 집어 던졌다.
쿠와아아아아아.
그와 함께 해저화산이 폭발하듯 거센 기운이 바닥에서부터 뿜어져 올라왔다.
주변에 있던 모든 존재들을 날려 버렸고, 그 힘을 버텨 낸 로칸만이 거대한 구멍처럼 열린 특이점의 입구를 마주할 수 있었다.
“금방 끝내고 오겠습니다!”
홀로 남아 신들을 상대할 천신에게 한마디를 던지고 곧장 몸을 날렸다.
푸화아아아앗!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거센 포격이 날아들었다.
신성을 머금은 물을 압축시켜 쏘아 낸 것이기에 로칸으로서도 쉽게 막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흥!”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로칸은 더욱 힘을 주어 놈의 물대포를 갈라 버렸다.
“하등한 종족의 신 따위가……!”
오히려 더 빠르게 짓쳐 들자 포세이둔이 노성을 토했다.
종족 우월주의 같은 것이 있는 놈인지 막말을 내뱉으며 자신의 무기인 트라이던트를 찔러 갔다.
로칸이 가지고 있던 해신의 트라이던트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무구.
같은 신급 무구일 텐데도 그 격에서 분명한 차이가 느껴졌다.
그러나 자신의 무구도 그에 밀리지 않는다.
폭력과 파괴의 신성에 맞춰 제작된 배틀 액스는 그의 힘을 증폭시키고 적의 신성을 잡아먹는 데 특화되어 있었으니까.
“폭력의 신, 절대자의 힘, 신의 육체.”
로칸은 그 즉시 자신의 모든 신성을 끌어올렸다.
광풍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라면 결코 여유를 부릴 수 없었으니까.
설령 공허에 물들어 눈이 돌아간 상태라도 말이다.
쩌어어엉!
포세이둔의 찌르기와 로칸의 베기가 맞물렸다.
힘 대 힘의 대결.
창을 이용한 찌르기는 순간 파괴력이 높았지만 삼지창의 형태인 트라이던트라고 위력이 3배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로칸 역시 일점에 힘과 신성을 집중해 휘둘렀고, 둘은 동시에 밀려 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역시 만만치 않군.’
그러나 로칸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적어도 힘에서는 우위를 점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했으니까.
더구나 이곳은 특이점 내부이다.
바다의 힘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는 뜻.
그런 곳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로칸에게 살짝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씨익.
그렇기에 로칸은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재미가 있지 않겠나.
바깥에서 고군분투 중인 정령 신과 천신에게는 미안하지만 모처럼 로칸의 호승심에 불이 당겨졌다.
“좋아. 그럼 놀아볼까?”
그나마 녀석이 자신을 상대하는 동안 방어 장치를 작동시키지 못할 테니 좀 낫겠지.
스스로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며 다시 포세이둔과 부딪쳐 갔다.
“……!”
콰앙!
그러나 포세이둔의 병기 활용은 실로 놀라웠다.
보통 트라이던트라는 기형 병기를 사용하는 이들이라면 병기의 이점에 휘둘려 상대를 꿰뚫는 것에만 집중을 할 텐데, 그는 검을 쥔 듯 삼지창을 내리그으며 창끝으로 날카롭게 베기를 시도한 것이다.
벼락같은 일격에 로칸도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길게 베이며 파괴 불가의 갑옷에 긴 상처가 남겨졌다.
스크래치 정도의 대미지이긴 하지만 조금 더 깊게 들어왔다면 뼈가 드러나고 심장이 갈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압.”
그러나 로칸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배틀 액스에 달린 사슬에 신성을 더해 놈의 트라이던트와 자신의 왼팔을 한데 묶었다.
힘을 주어 빼내려 하더라도 빼낼 수 없도록 엉킨 실타래처럼 왼팔과 트라이언트를 묶고 그것을 꽉 말아 쥐었다.
“무슨 짓이냐!”
파지지지지직!
당황한 포세이둔은 급히 트라이던트를 타고 신성을 흘려 보냈다.
물의 기운, 그리고 벼락의 기운을 차례로 흘려보내며 로칸에게 고통을 가했지만 속성 저항력이라면 이미 최고치를 찍은 로칸이 아닌가?
굳이 카이의 테트라 엘리멘탈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 고통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하게 힘을 주며 트라이던트를 당겨 포세이둔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파괴의 일격!”
퍼엉!
순간 로칸에게 몸이 딸려 온 포세이둔이 급히 신성을 일으켜 공격을 방어했다.
응축된 물을 베듯 둔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로칸은 끝까지 배틀 액스를 밀어 넣었다.
“제길, 얕았나?”
공격은 성공했다. 그러나 완전히 밀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제대로 꽂혔다면 반대편으로 튀어나왔을 배틀 액스가 그저 살가죽을 조금 베어 내는 것에 그친 것이다.
그러나 정작 공격을 당한 포세이둔은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서둘러 겹겹이 물의 보호막을 둘렀고, 로칸은 그 위를 신나게 두들겼다.
제아무리 최상위 신이라지만 이런 근거리에서, 무기까지 봉인당한 채 로칸을 떼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트라이던트를 놓아 버릴 수도 없는 일이기에 다급한 신성의 난사가 이루어졌다.
‘제길.’
로칸으로서는 불만스러운 일이었다.
이쯤 되면 포세이둔의 신성 소모가 더 커야 하지만 특이점 내부에 충만한 신성이 소모되는 만큼 신성을 회복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일일까?
포세이둔 역시 신성을 빠르게 회복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고 장기화될 경우 손해를 보는 것은 로칸 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점점 놈의 보호막이 단단해지고 더 빠르게 생성되고 있음을 느꼈으니까.
‘승부를 봐야 해.’
때문에 이대로 전투가 길어지는 것은 금물이었다.
압도적인 파괴력을 이용한 단기 결전.
그것이 신위를 얻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로칸이 오랜 세월 최상위 신으로 군림해 온 포세이둔을 쓰러뜨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큭!”
그때, 내리 긋는 배틀 액스에서 묘한 반탄력이 전해졌다.
포세이둔은 그저 똑같이 방어만 하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이건……!’
로칸은 곧 그 이유를 파악했다.
‘공허!’
포세이둔의 신성에 섞인 공허의 기운. 그것이 폭발하며 강한 반발력을 만들어 낸 것이다.
수세에 몰렸기 때문일까? 놈의 안을 파고든 공허의 기운이 저절로 서서히 풀려나오고 있었다.
‘초극을 쓸까?’
때문에 로칸은 고민했다.
놈이 반격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라면 초극을 사용해도 먹힐 것 같았으니까.
더구나 이 특이점 내에 충만한 신성까지 끌어들인다면 그 어느 때보다도 막강한 위력의 일격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나 망설여졌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아니다.
초극이 후속타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필살의 일격인 만큼 막거나 피해 낼 때의 고민이 있을 법도 했지만, 적어도 로칸의 고민은 그것이 아니었다.
공허에 대한 호기심.
그것이 그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자신 역시 공허의 신성을 일부 품고 있으나 어째서 공허가 그토록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인지, 그 방식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세이둔만큼 거대한 신성을 다루는 이에게서 발생하는 공허의 기운이라면 그것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녀석과의 전투를 통해 뭔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짧은 망설임이 전투의 양상을 바꾸었다.
콰앙!
“큭.”
포세이둔이 봉인되어 버린 자신의 무기를 과감히 포기한 것이다.
로칸이 망설이는 찰나를 포착하고, 그 빈틈에 일격을 꽂아 넣었다.
단순한 주먹질이지만 바다를 가르고 땅을 부수어 놓을 수 있는 거대한 신성 포격과도 마찬가지였기에 로칸이 뒤로 크게 물러났다.
“퉷.”
속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핏물을 뱉어 낸 로칸은 포세이둔의 트라이던트를 구석에 집어 던졌다.
좁다면 좁은 공간이지만 사용자들의 의지에 따라 무한히 확장되는 공간이기도 했기에 트라이던트는 점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놈도 트라이던트에 집착하지 않을 모양이지만 굳이 위험 요소를 곁에 둘 수는 없었다.
놈이 무기를 포기하고 시간이 좀 더 지났다면 인벤토리에도 넣을 수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배틀 액스를 꼬나 쥐고 두 눈이 검게 물든 포세이둔을 향해 재차 뛰어들었다.
“하등 종족의 한계를 체감하게 해 주마!”
퍼엉 펑 펑 펑 펑 펑!
그 순간, 포세이둔의 등 뒤에서 수십 개의 포신이 솟아났다.
일제히 로칸을 향해 방향을 돌리며 신성과 공허가 뒤섞인 포탄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제기랄, 더럽게 노는군.”
로칸이 얼른 배틀 액스를 휘둘러 봤지만 그 모든 것을 막아 내는 것은 무리였다.
뀨웃!
테트라 엘리멘탈 효과를 받았음에도 놈의 포격을 받을 때마다 내장이 울려 왔고, 방어하거나 상쇄해도 묵직한 충격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위력.
아무리 최상위 신 중 하나였다지만 이건 해도 너무했다.
뭔가 비밀이 있을 터였다.
콰앙!
“……!”
필사의 저항을 이어 가던 어느 순간, 로칸의 일격에서도 기이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공허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어떤 힘이 완벽하게 포격을 무력화시키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으윽!”
그다음 공격에서는 여지없이 속이 울리는 충격을 받아야 했지만, 그 짧은 순간의 감각이 손에, 몸에 남았다.
‘이거다!’
로칸은 즉시 방어를 굳히고 자신을 관조했다.
무아지경으로 배틀 액스를 휘둘러 놈의 공격을 상쇄하면서도 자신에게 일어난 감각을 상기하고 내면을 관찰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공허의 비밀을.
세계를 잃고, 이름을 잃은 존재들이 어째서 기존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