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5화.삼위일체 (2) (485/500)

485 삼위일체 (2)

파멸.

그것은 파멸의 힘이었다.

하지만 상대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닌, 자신을 파괴하는 힘이라는 것이 문제다.

신성의 근간이 되는 세계. 그 세계의 일부가 파괴되며 타오르듯 발생하는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분출해 내는 것에 불과했다.

그 폭발과도 같은 힘을 담아 냈기에 위력적이지만 섬세하지 못한 신성이 생겨나는 것이고, 그 폭발을 만들어 내기 위해 스스로의 세계를 계속해서 파괴하다 보니 완전한 공허의 존재로 돌아서는 것이다.

힘을 쓸수록 자신을 파괴하지만, 그 힘은 마약 같아서 한번 사용하고 나면 돌이키기 어렵다.

초반에는 세계의 귀퉁이가 부서져 나가기에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다가 서서히 그 힘에 중독되어 갈 때쯤 돌아보면 세계는 무너져 내리는 외딴 섬이 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게 공허의 힘.’

그런데 그 파멸의 힘을 로칸은 어떻게 쓸 수 있게 된 것일까?

로칸은 조금 전 순간적으로 터져 나왔던 기운의 정체가 공허의 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설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공허의 기운에 잡아먹히기라도 한 것일까?

‘재미있군.’

아니다. 그건 아니었다.

공허의 힘을 사용한 것은 맞지만 일반적인 방식과는 조금 달랐다. 공허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꼭 세계를 파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공허라는 것은 파괴와 혼돈에서 일어나는 기운이니까.

때문에 로칸은 자신의 세계가 아닌 다른 것을 파괴했다.

지하 세계의 주민들. 그리고 그 안에 도사리고 있던 공허의 잔재들. 공허의 기운이 스며들어 이름 없는 신으로 모습을 드러내면 그들을 때려잡으며 파멸의 힘을 얻어 낸 것이다.

어쩌면 그의 세계 주민들이 잡은 것은 공허의 신이 아니라 공허의 신이 가진 파괴된 세계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과의 격돌 과정에서 생겨난 파멸의 힘이 로칸의 배틀 액스에 담긴 것이었다.

‘꼭 세계로 국한 지을 필요는 없다 이거지.’

그 순간 로칸은 각성했다. 의식과 사고를 확장시켜 세계를 대체할 무언가를 찾아낸 것이다.

지하 세계의 공허는 말할 것도 없고, 지하 세계의 주민들과 명부마도의 존재들이 격돌하는 순간, 세상 어딘가에서 살을 찢고 뼈를 부수는 순간의 힘들을 그러모았다.

투지, 투쟁, 폭력, 파괴, 죽음.

그 모든 순간에서 발생하는 기운들이 로칸의 몸 안에 몰려들었다. 그의 고유 신성과 만나 막대한 힘의 증폭을 이루어 냈다.

진정한 상위 신들의 힘.

그리고 상위 신의 개념을 넘어 최상위 신으로 불리는 존재들이 깨친 이치를 로칸이 스스로 깨달아 가고 있었다.

콰앙!

무심히 내지른 일격에 포세이둔의 포격이 통째로 썰려 나갔다. 단일 투사체가 아니라 공간 전체가 베어지고 터져 나간 것이다.

살짝 밀리는 감이 있던 힘 싸움의 결과가 단숨에 뒤집어졌다.

파멸의 힘을 끌어내는 원리를 알지 못하던 때에도 비등하던 그들이었으니 이제는 오히려 체급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노오옴!”

하지만 포세이둔도 포기하지 않았다. 로칸이 뭔가 각성을 이루었음을 알지만 자신 역시 신계에서 가장 강한 최상위 신 중 하나였으니까.

게다가 공허의 힘까지 손에 넣은 지금, 두려울 것이 없었다.

좀 더 출력을 높인 포탄 세례를 퍼부었고, 특이점 내의 신성을 빨아들여 무너지는 자신의 세계를 떠받쳤다.

과하게 힘을 쓰고 있는 탓에 소모되는 신성의 양이 더 컸지만, 저놈을 죽여 그 신성을 먹어 치우고 특이점의 신성마저 모두 흡수해 낸다면 세계는 정상으로 돌아가고 자신은 기존보다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게 될 터였다.

카이스만을 넘어 신들의 신이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모든 존재가 파멸하더라도……!”

그리고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파멸해도 좋다. 특이점이 사라지고 신계 자체가 붕괴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포세이둔은 신성과 공허를 가리지 않고 마구 뒤섞었다. 방해자인 로칸을 향해 마구 뿌려 댔다.

“글세, 누가 파멸할지는 두고 봐야겠지.”

씨익.

그런 놈을 향해 로칸이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의 깨달음을 담아 새로운 스킬을 창조해 내었다.

“폭력의 시간.”

폭력의 시간.

깨달음을 얻었다지만 로칸이라도 파멸의 힘을 무한정 끌어내기는 무리였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폭력의 시간이었다.

시간제한을 두는 대신 세계에서 끌어모은 파멸의 힘을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제한 시간은 10분.

하지만 세계의 시간은 고작 10분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가속된 시간 속에서 발생한 모든 폭력과 파괴, 파멸의 기운이 로칸의 전신에 그득하게 들어찼다.

공허의 신으로 변해 가는 포세이둔을 향해 로칸이 과감하게 몸을 날렸다.

***

“과연 최상위 신답군.”

포세이둔과의 전투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났다. 그와 같은 최상위 신이 공허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은 일이었으니까.

어째서 공허에 침식당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 되면 이미 공허의 작동 원리를 알고 있었을 테니 로칸이 그러한 것처럼 그와 비슷한 힘을 일으킬 수 있었을 터였다.

한데 조금 더 파워를 올리자고 공허의 힘을 사용한다? 위력 자체는 좀 더 강해졌을지 몰라도 여러 신성 활용 능력에 제약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힘 대결로 로칸을 몰아붙인 것이 패인이 되었다.

폭력의 시간이 시작되자 로칸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파괴력을 자랑했으니까.

로칸이 움직임과 동시에 그의 세계에서 지하 세계와의 전투를 시작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지상의 다른 종족끼리의 전투보다 아무래도 지하 세계의 종족과 그들의 뒤에 달라붙은 공허의 잔재들을 처리하는 쪽이 더 큰 힘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힘이 로칸의 근육이 되어 포세이둔을 두 동강 내 버렸다.

그리고 흡수되는 막대한 신성과 공허.

그로 인해 세계 : 명부마도에도 막강한 공허의 신이 등장할 수 있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한 번 꺾었던 존재일 뿐 아니라, 세계에 편입된 공허의 신은 아무래도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파괴하여 힘의 양분으로 삼을 세계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포세이둔의 모든 것을 흡수한 로칸은 그 힘을 만끽할 틈도 없이 특이점의 장치들을 조작했다.

수동으로 세팅되어 정령 신과 천신을 공격하던 방어 장치의 타깃을 그들을 공격하는 모든 신들에게로 돌렸다.

“이거나 처먹어라!”

쿠화아아아아.

방어 장치에 로칸의 신성이 깃들었다.

폭력과 파괴의 신성이. 그리고 포세이둔에게 획득한 바다의 신성까지 더해지자 녀석이 사용하는 것보다도 더욱 위력적이고 변칙적인 공격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마치 슈팅 게임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 더욱 흥이 올랐다.

“다행히 시간을 맞췄군.”

그렇게 로칸의 지원이 시작되자 공허에 사로잡힌 물과 바다의 신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 중에는 아예 공허에 침식당한 놈들도 있었지만 포세이둔의 하위 신으로 어쩔 수 없이 싸우던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정령 신과 천신도 굳이 그들을 쫓지 않았고, 곧 전투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오토 모드.”

로칸 역시 굳이 신성을 사용해 그들을 포격할 이유가 없었기에 오토 모드로 전환하여 공허의 존재들만을 공격하게 두었다.

이로써 세 개의 특이점을 모두 가동시킨 셈이 되었다.

그 때문일까? 세 번째 특이점까지 방어 장치를 가동시키는 것을 완료하자 이전의 특이점들에서는 보지 못했던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이점 연결을 진행하시겠습니까?]

“음, 그래.”

시스템 알림에 따라 승인하자 특이점에서 거대한 빛이, 신성이 일어났다.

등대처럼 어딘가를 향해 빛을 밝히더니 곧 다른 특이점들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트라이앵글.

신계가 삼각형으로 연결되었다.

세 개의 특이점이 하나로 연결되는가 싶더니 신계를 이어 하나의 결계를 생성해 내었다.

[삼위일체의 결계가 생성되었습니다.]

“오?”

때마침 공허의 군세 일부가 그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결계에 가로막혀 전진하지 못하는 모습이 스크린에 들어왔다.

단순히 가로막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발을 내디딘 놈들의 몸뚱이를 모조리 태워 버리고 소멸시킨 것이다.

최후의 보루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저지선이 형성된 것이다.

“반격의 시간이군.”

그 모습에 로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거라면, 이게 있다면 전황을 다르게 가져갈 수 있을 터였다.

침공 당하는 입장이다 보니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던 신계의 신들 역시 공세로 태세를 전환할 수 있을 테니까.

“돌아가시죠.”

확인을 마친 로칸은 얼른 특이점을 빠져나왔다.

진이 빠졌는지 짧은 시간 동안 수척해진 정령 신과 천신을 돌아보며 복귀를 선언했다.

정령 신과 천신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곳에서의 목적은 이미 이루었고 공허의 군주를 상대할 수 있는 그들이 이곳에 발이 묶여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신계의 큰 손해였으니까.

카이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한 그들은 단숨에 신들의 도시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본대라 할 수 있는 신들의 부대에 합류했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신들의 도시로 돌아온 셋은 가장 먼저 카이스만을 찾았다. 퀘스트의 완료 보고도 보고였지만 그의 상태가 걱정되는 것이다.

신성을 쏟아부었음에도 호전되지 않는 상처는 심지어 더 악화된 듯 보였다.

“나는 괜찮네. 그보다 잘해 주었군. 덕분에 숨을 좀 돌릴 수 있겠어. 그럼 이제 염치없지만 저들을 몰아내는 데 힘을 더해 주게. 결계가 가동된 것을 알았다면 저들 역시 힘을 집중시킬 걸세. 결계를 뚫어 내려면 그 수밖에 없으니.”

“알겠습니다.”

낫지 않는 상처를 부여잡고 힘겹게 말하는 카이스만의 모습은 언제 힘이 다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그럼에도 신계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를 감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신계에 미래는 없으니까.

더구나 카이스만의 말처럼 공허의 군주들은 병력을 한곳으로 집중시키는 중이었다.

삼위일체의 결계를 파괴하기 위해서.

나아가 신계의 신들을 짓밟고 그들의 세계를 찬탈하기 위해서.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그들을 요격하고 세를 흩어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삼위일체의 결계 방어][퀘스트]

카이스만의 주문이 완성될 때까지 삼위일체의 결계를 파괴하려는 공허의 군단을 막아라.

-성공 조건 : 삼위일체의 결계 방어

-성공 보상 : 대량의 신성

-실패 조건 : 삼위일체의 결계 파괴

-제한 시간 : 72시간

아예 퀘스트까지 나타났다.

카이스만이 다시 신성를 끌어모아 무언가를 하려는 모양이었고, 그때까지 삼위일체의 결계를 방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만약 실패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페널티 설명은 없지만 대충 예상은 되었다.

주문이 실패하거나, 미완성된 상태에서 약화되어 발현되겠지.

“어쨌든 날뛰면 된다 이거로군.”

싸운다. 적을 분쇄한다.

결국 퀘스트 성공 조건은 간단했다. 적진을 파고들어 마구 날뛰면 그만인 것이다.

게다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상위, 최상위 신들도 도울 테니 고작 사흘을 막지 못하겠나.

거창하게 발동시킨 삼위일체의 결계가 고작 사흘도 공허의 군단을 막지 못할 수 있다는 게 살짝 의아하고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자신이 적이라 해도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머리를 털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광풍이 기다리고 있는 전장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