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8화.카이륜 vs 로칸, 광풍 (1) (488/500)

488 카이륜 vs 로칸, 광풍 (1)

“크윽.”

“꼴이 말이 아니군.”

차원의 큐브에 갇혀 튕겨 나간 광풍과 로칸이 몸을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신들의 도시였다.

카이를 타고 날아도 몇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브레이크 없이 날아가 버린 것도 놀라웠지만 그 힘이 유지되었다는 것도 굉장한 일이었다.

그러나 광풍과 로칸은 그것보다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사실이 더 치욕스러웠다.

상대가 그 누구라도 충분히 싸워 볼 만하다고 자신하는 둘이었기에 제대로 힘을 써 보지 못하고 전장에서 이탈당한 것이 뼈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 아무리 차원의 힘을 사용했기 때문이라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 그렇기에 평소라면 카이를 소환해 다시 전장으로 달려갔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를 악물고 피가 나도록 주먹을 쥐었지만 몸을 틀었다.

전장이 아닌, 신들의 도시 내부로 들어갔다.

카이스만을 만나기 위함이다.

“영감! 영감!”

그들과 부딪치며 박살 난 신들의 도시 성벽을 뒤로하고 카이스만의 거처로 뛰어들어 간 둘은 다급히 그를 찾았다.

카이륜의 말을 듣고 생긴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왔나.”

“장난 치지 말고 얼른 일어나 봐. 왜 그러고 있어?”

그리고 발견했다. 창백해진 안색으로 노인처럼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카이스만의 모습을.

“그만 소리 질러라. 머리 울린다.”

광풍의 걱정 어린 타박에 카이스만은 가볍게 손을 저으며 자리를 옮겼다.

그냥 편히 앉아 쉬고 있어도 뭐라 할 사람 하나 없을 텐데, 그는 신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신성 지도 앞에 서서 속수무책으로 밀려 나는 전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말투로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카이륜, 그는……… 나의 형제라네.”

“……영감?”

첫마디부터 충격적인 말을 늘어놓았다.

“우리는 쌍둥이 신이었지. 둘 다 차원을 다루는 고유 신성을 가지고 있어 어릴 적부터 적수가 없었고, 세계는 빠르게 성장하여 금세 상급 신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지. 그때까지만 해도 꽤 사이가 좋았다네. 형제이기도 했고, 같은 힘을 사용하기도 했으니까. 서로가 새로 익힌 능력과 개념을 공유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세계를 바꾸어 관리하기도 했지.”

쌍둥이 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카이스만이 그에 해당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그는 매우 희귀한 차원의 힘을 다루는 신이 아니던가? 아무리 쌍둥이라지만 그 힘마저 똑같을 것이라고는 떠올리기 어려웠기에 머릿속에서 쌍둥이 신에 대한 생각을 배제하고 있던 둘은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럼 도대체 왜……!”

“그건, 그가 공허의 신이 된 이유가 나 때문이어서겠지…….”

“카이스만 님 때문이라고요?”

“그래.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와 카이륜이 서로의 차원을 돌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지. 상급 신의 지위를 얻을 만큼 강한 힘과 세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자만했던 나는 차원의 힘을 이용해 열어선 안 될 것을 열었다네. 다른 차원으로 연결되는 차원 문이었지.”

“그게 혹시 공허였던 겁니까?”

“아니, 그보다 훨씬 전율스럽고 흉악한 곳이었지. 차원 문을 통해 흘러들어온 그는 세계를 망가뜨리기 시작했고, 나의 세계는 빠르게 멸망을 향해 달려갔다네.”

“그럼…….”

“그런 녀석을 자신의 차원으로 대신 끌어들인 것이 카이륜이었다네. 그는 자신의 신성을 이용해 놈을 끌어들였고, 결국 내 대신 세계가 파괴되어 공허의 신이 되어 버린 것이네.”

“…….”

충격적인 이야기에 광풍과 로칸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공허도 아닌 다른 차원.

게다가 ‘그들’도 아닌 ‘그’라니?

고작 한 명에게 세계가 파괴되었단 말인가? 물론 상급 신 정도의 세계라면 지금의 그들 역시 마음대로 파괴할 수 있지만 상대는 카이스만이다.

차원의 힘을 사용하는 신.

그렇다면 보통의 상급 신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는 능력을 보이는 것도 가능 할 텐데, 그의 세계를 유린하고 파괴했다?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그와 같은 힘을 사용하는 카이륜이 둘을 무력화시키고 신들의 도시까지 날려 버리는 터무니 없는 일을 벌이는 걸 겪어 보지 않았던가?

황당했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가 이 시점에 둘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다시 입을 연 것은 카이스만이었다.

“따지고 보면 업보인 셈이지. 그때 겪어야 할 일을 지금 다시 겪고 있는 것뿐이네.”

“……예?”

“영감, 설마?”

“지금 내 세계는 파괴되고 있네. 막아 보려 애를 쓰고 있지만 소용이 없군. 카이륜이 내 세계의 좌표는 물론 구조와 구성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까닭에 당해 낼 재간이 없어.”

씁쓸한 미소를 베어 문 카이스만의 몸에서는 실시간으로 공허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세계가 붕괴되는 중인 것이다.

보통은 어떤 문제나 존재가 날뛰고 있지 않는 이상 수습할 방법이 있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광풍이 자신의 세계를 연결한 뒤, 병력을 보내 해결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음에도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파멸을 받아들였다.

“자칫 자네의 세계까지 붕괴할 수 있네. 카이륜이…… 아주 독한 놈을 심어 놓았거든. 하여,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일 것 같군.”

우우우웅.

카이스만이 부들거리는 손으로 건넨 것은 자신의 신성이었다. 그것도 제법 많은.

이것을 둘에게 떼어 주게 되면 그의 파멸이 더 앞당겨질 테지만 카이륜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같은 차원의 힘을 가진 카이스만의 신성을 받아들이고 분석해 내야만 카이륜에게 저항이라도 해 볼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것을 취한다고 놈을 이길 수 있다고 장담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좀 전처럼 무력하게 당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영감…… 제기랄!”

카이스만의 신성을 먼저 받아들인 것은 광풍이었다.

잠깐 보았을 뿐인 로칸보다 꽤 오랫동안 쌓아 온 그들의 유대가 더 깊을 테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것마저 받아들이지 않아 놈을 상대할 방법이 사라져 버리면 그때는 정말 카이스만의 희생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존재를 걸고 신계를 수호하려 한 그의 노력과 희생이 물거품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광풍이 먼저 신성을 받아들이고 낱낱이 분석하기 시작했다.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꼭, 놈을 쓰러뜨릴 테니.”

로칸도 뒤이어 그의 신성을 넘겨받았다. 좀 더 수척해진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며 내면을 관조했다.

새로이 받아들인 신성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공간이라는 것, 그리고 차원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광풍과 로칸은 차례로 눈을 떴다. 같은 것을 보고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의 소득은 얻은 상태였다.

차원에 대한 이해, 차원의 힘을 쓰는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한 이해를 담고서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카이스만을 돌아보았다.

이제, 그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이…… 얼마 없네. 서둘러야 할 거야. 만약 내가 소멸하면 내가 가진 신성과 세계의 조각들이 모두 카이륜에게 넘어갈 걸세. 어릴 적 했던 맹약이 이런 족쇄가 될 줄은 생각도 못했군.”

카이스만은 둘을 서둘러 밖으로 내몰았다.

시간이 없었으니까.

둘 사이에는 누구 하나가 소멸할 경우, 그의 신성과 세계가 다른 한쪽에게 귀속되는 맹약이 이어져 있는 것이다.

지금도 카이스만의 수준으로 강력한 카이륜이 그의 힘까지 일부 얻게 된다면? 그땐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지 몰랐다.

카이스만을 혼자 두고 떠나는 것은 영 마음이 쓰였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광풍과 로칸은 결연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조금만 기다려, 영감. 그렇다는 건 그놈이 죽으면 영감에게도 기회가 생긴다는 거잖아?”

“조금만 버텨 주십시오. 저희가 금방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고맙군. 이걸 받게.”

카이스만이 희미하게 웃으며 자신의 힘을 그들에게 연결시켰다. 그와 함께 그들의 시야에 신계의 지도가 펼쳐졌다.

단순히 지도인 것이 아니라, 아까 카이스만이 보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황을 살필 수 있는 지도였다.

“신계의 수호자로서 그대들에게 이번 전쟁의 전권을 위임하지. 그리고 혹시나, 내가 먼저 잘못된다면…… 이곳을 찾게. 내가 준 신성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곳의 문을 열 수 있을 테니.”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떤 정보를 그들에게 전달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기억해 두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곳을 찾아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카이륜과 공허의 군단을 쓰러뜨리는 것이니까.

“가자.”

“가시죠. 카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 둘은 즉시 카이의 등에 올랐다.

힘을 아끼고, 이동하는 동안 전황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젠장. 형편없이 깨지고 있군.”

지도를 살피자 삼위일체의 결계가 깨진 후, 신계가 공허의 군단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신들의 힘이 약한 것만은 아니다. 다만 카이륜과 공허의 군주들 때문에 제대로 날뛸 수 없는 것만은 분명했고, 공허의 군단이 선택한 인해전술이 제대로 먹혀들어 가고 있을 뿐이었다.

공허의 존재를 죽이고 그들의 신성을 흡수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세계에 영향이 오는데, 그것을 해소할 시간을 주지 않고 꾸역꾸역 병력을 밀어 넣는 것이다.

소화해 낼 수만 있다면 이전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도무지 그럴 짬이 나지 않았다.

힘을 체득하기 위해 빠지면 전선이 와르르 무너지게 될 테니까.

신계는 더 빨리 점령당할 것이고 공허의 신성을 소화해 낸다 한들 어차피 공허의 군주와 카이륜을 압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신들은 그들의 진격 속도를 늦추는 선에서 분투하는 중이었다.

[모두 모여! 우리가 간다!]

광풍은 즉시 모든 신들에게 신언을 전달했다. 이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지휘하에 공허의 군단과 힘 싸움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 또 다른 신언이 그들에게 전달되었다.

[저와 천신, 마신은 특이점으로 향하겠어요. 특이점의 힘을 이용하면 공허의 군단을 막아 낼 수 있을 거예요.]

정령 신의 메시지였다. 짧은 고민 끝에 광풍은 그것을 허락했고, 거대한 신성을 가진 세 신이 각자 방향을 잡고 이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전선은 더 빠르게 밀려 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버텨 주는 것이 당장 광풍과 로칸이 해야 할 일.

“공간 도약!”

로칸은 즉시 차원의 힘을 이용해 공간을 도약했다.

차원의 힘이라기보다는 하위 개념인 공간의 힘을 이용한 것이었기에 부족한 이해로도 충분히 사용이 가능했고, 몇 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를 단숨에 날아 아군에 합류했다.

정령 신과 천신, 마신의 빈자리를 대체했다.

“크허허허허헝!”

두 마리의 맹수가 초식 동물 사위에서 날뛰는 포식자처럼 공허의 군단을 휩쓸기 시작했다.

반격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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