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9화.카이륜 vs 로칸, 광풍 (2) (489/500)

489 카이륜 vs 로칸, 광풍 (2)

이전과 달라진 것은 차원의 신성에 대한 이해 하나뿐이었다.

오히려 아군의 전력은 더 줄어 있는 상태였고 광풍의 몸에 겹겹이 둘러 있던 공허의 신성도 초기화된 상태였지만, 두 사람을 필두로 다시 반격의 기운이 거세졌다.

누군가는 싸움에서 분노가 독과 같다고 이야기하지만, 적어도 둘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은 광전사였으니까.

분노는 힘의 자양분이 되어 능력을 끌어올렸고, 다수의 적은 또다시 그들의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매개체가 되었다.

적의 숫자가 많을수록 강력해지는 타이틀 효과를 광풍과 로칸 모두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공허충 따위로 수를 늘려 진격해 온 것이 그들의 실책이 되었다.

광풍과 로칸의 힘이 끝을 모르고 불어났고, 최상위 신들이 힘을 쓸 때마다 나서서 방어하던 공허의 군주들도 식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공허충 따위가 수백, 수천, 수만이 죽어 나간들 그들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었기에 소멸을 두려워하며 몸을 사리는 것이다.

쿠르르릉!

그때, 하늘로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흑색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도착했군.’

정확히 공허의 존재들을 타격하는 벼락의 비를 보며 로칸은 마신이 하늘의 특이점에 들어섰음을 파악했다.

수동으로 작동시킨 특이점의 방어 장치에는 그의 신성이 가미되어 더욱 큰 위력을 발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로칸이 사용할 때와 또 다른 모습이었다.

쿠구구구구궁!

그때, 벼락에 호응하듯 대지가 요동쳤다.

놈들이 서 있던 땅이 무너지고 마그마가 솟아올랐으며 악령 같은 나무들이 자라나 놈들의 체액과 신성을 빨아먹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인가? 바위로 이루어진 신급의 골렘들이 몸을 일으켰으며 삭풍이 일어 어설픈 놈들의 몸을 조각 내 버렸다.

정령 신 또한 땅의 특이점에 도달한 것이다.

모든 원소를 뜻대로 조작하는 정령 신이 땅의 특이점을 이용하자 실로 무시무시한 재앙이 일어났다.

‘저쪽도 시작했나.’

슬쩍 지도를 살펴보니 바다 쪽에서도 공허를 뜻하는 보랏빛 점들이 대거 사라지고 있었다.

천신이 물의 특이점에 들어선 것이다.

그의 신성 변환 능력과 자유자재로 형태와 성질을 바꾸는 물의 속성은 제법 잘 어울리니 그 역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

덕분에 신들에게도 숨통이 트였다.

힘 대 힘, 신성 대 신성의 대결로만 치닫던 전투가 다른 양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들은 여전히 공허의 군단을 상대하면 그만이었지만 놈들은 신계, 그 자체를 상대해야만 했다.

땅과 바람, 물, 불, 식물은 물론 구름과 바다까지.

신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그들을 배제하기 위해 힘을 쓰기 시작했고 막을 수 없을 것만 같던 공허의 군단이 순식간에 뒤로 밀려 나기 시작했다.

“모조리 파괴해라! 신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무로 돌리고, 신들의 세상까지 모조리 파괴시키는 거다!”

그러나 밀리는 것도 잠시. 공허의 군주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놈들을 독려했다. 독기를 끌어올리고 신들에 대한, 신계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켰다.

가지지 못한 자의 분노와 독기로 스스로를 폭주시키며 재차 신들을 몰아붙이려 들었다.

“세계 : 학살의 장.”

그때, 광풍이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었다.

끝없는 도전과 고난으로 점철되어 만들어진 세계.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없이 단련될 수밖에 없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세계에 사는 주민들이 광풍의 뒤로 도열하기 시작했다.

“세계 : 명부마도.”

그에 호응하듯 로칸 역시 자신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것이 ‘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존재들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이자 공허의 존재들과 차별화되는 행위이니까.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는 순간, 좌표가 상대에게 읽혀 역으로 공격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무서워 몸을 사릴 때가 아니었다.

전선이 좀 더 밀리는 것은 감당할 수 있지만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카이스만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단기 결전.

여기서 끝장을 봐야 했다. 카이스만을 위해서도, 신계를 위해서도.

“세계 : 대수림.”

“세계 : 드래곤 월드.”

“세계…….”

그 단호한 결의를 읽은 것일까? 그들의 뒤에 서 있던 신들도 저마다의 세계를 개방했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주민들 중 가장 강력한 존재들을 소환하며 신계의 전력을 강화시켰다.

최상위 신들뿐 아니라 상급, 중급, 하급 신들까지도.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대로라면 결국 신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멸망할 수 있었기에 배수의 진을 치고 공허의 군단에 대항했다.

“권능 : 학살의 신.”

“권능 : 폭력의 신.”

“권능…….”

그뿐이 아니다. 각자의 고유 신성을 일으켜 서로를 연결시켰다. 강화하고, 또 강화했다.

그에 따라 막대한 신성이 소모되었지만 이대로라면 신성의 근간마저 사라져 버릴 참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중첩된 권능과 축복 덕분에 하급 신의 주민들이 중급, 상급 신의 수준까지 격이 상승했고, 신들은 비로소 자신감을 나타냈다.

“가자! 신계를 지켜라!”

“저 이름도 없는 것들을 모조리 소멸시켜라!”

“우와아아아아아아!”

신계의 운명을 가를 대격돌이 시작되었다.

***

전투는 치열했다.

머릿수로 따지자면 아직 공허의 군단이 압도적이라 할 만큼 많았고 죽여도 죽여도 끝을 모르고 밀려들었지만, 신계를 지키는 신들의 군단은 하나하나가 족히 부대를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강자들이었다.

신들의 힘도 강력했지만 권능을 둘둘 두른 세계의 주민들은 그들이 키워 낸 역전의 용사이자 오랜 세월 축적된 힘의 집합이었기에 대등한 싸움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군주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일까.

당연히 대장전이다.

특히나 최상위 신급의 존재가 상급 신 수백을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중요도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공허의 군주는 모두 일곱.

그러나 최상위 신은 그보다 더 적었다.

로칸이 치고 올라서며 열한 명이 되었다지만 공허에 침식당한 포세이둔이 처리되면서 다시 열 명이 되었고, 다시 그중 셋이 특이점으로 향하면서 이쪽 역시 일곱 명이 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저쪽에 카이륜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공허의 군주들과 함께였다지만 신계 최강인 카이스만에게 치명상을 입힐 정도라면 최소 그와 비등한 수준이라고 봐야 할 테니 전력상 부족함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믿을 것은 광풍과 로칸의 무력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 동안 공허와 다투면서도 서로를 침공하고, 짓밟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힘이 비등하기 때문이니까.

때문에, 누군가의 음성과 함께 광풍과 로칸이 튀어 나갔다.

공허의 군주들을 죽이기 위해서.

“귀찮게 구는군.”

그러나 그들의 힘을 이미 확인한 바 있는 공허의 군주들이 둘과 싸워 주려 할 리는 만무했다.

공허의 신성을 방어적으로 뿌리며 몸을 빼내려 들었고 거리를 좁힌 만큼 다시 멀어지는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몇 차례나 해 보았던 일이기에 이제는 도주가 능숙하기까지 했다.

“공간 도약!”

하지만 이번에는 놓치지 않는다.

그들이 둘의 속도와 힘에 익숙해진 것 이상으로, 둘에게는 큰 변화가 있었으니까.

자신들이 이해한 차원의 힘을 끌어올리며 신성을 발휘하자 광풍과 로칸의 몸이 제각기 다른 공허의 군주 앞으로 나타났다.

“……!”

이번에는 놓치지 않는다.

설마 둘이 공간의 힘을, 차원의 힘을 사용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공허의 군주들은 당황했고, 그 틈을 둘이 노렸다.

자신들이 카이륜에게 당했던 그때처럼.

“참수!”

“초극!”

쿠과과과과과광!

광풍과 로칸이 각기 낼 수 있는 최고 출력의 기술을 사용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일격 필살의 기술을.

불시에 그 힘에 적중당한 공허의 군주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른 군주들은 도울 생각은커녕 폭발하는 힘을 해소하기 위해 열심히 신성을 휘둘렀고, 대폭발이 끝난 뒤 멀쩡히 선 것은 단둘뿐이었다.

“고, 공격해라!”

“힘이 빠졌을 때 공격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일격이니 회복되기 전에 공격한다?

누구도 감히 그런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금 달려들었다가는 가장 먼저 덤빈 자가 살해당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확인해 보지 않아도 그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소리뿐이었고, 공허의 군주를 비롯한 누구도 둘을 대상으로 신성을 발하지 못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단박에 끝장난 공허의 군주들을 본 신계의 사기가 높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공허의 군주들은 둘의 다음 타깃이 되지 않기 위해 흩어졌고, 최상위 신들은 이제 수가 맞아진 만큼 그들을 일대일로 마크하며 따라붙었다.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냐, 카이륜?”

하지만 정작 변수를 만들어 낸 둘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니다. 이미 필살기를 사용한 후유증과 쿨 타임까지도 신성을 소모해 모두 되돌려 놓은 상태였다.

지금부터 싸울 상대는 그들이 전력을 다해야 하는 존재이니까.

“그새 기고만장해졌군. 카이스만이 제 신성의 찌꺼기라도 나눠 줬나 보지?”

스르르릇.

그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보던 한 지점에서 카이륜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딘가 멀리서 지켜보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는 그곳에 있던 것이다.

다만 모두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이전의 광풍과 로칸이었다면 마찬가지였겠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있는 위치만 공간과 차원이 일그러져 있었으니까.

“찌꺼기만 있어도 너 정도는 충분하거든.”

카이륜의 도발을 광풍이 되받아쳤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함인지 배틀 액스의 도끼 자루를 어깨에 턱 걸치고 그를 노려보았다.

누군가 움찔 몸을 떨기라도 하면 격돌이 시작될 일촉즉발의 순간, 셋은 섣불리 몸을 움직이는 대신 은근하게 신성을 퍼트렸다.

영역 싸움을 하듯 범위를 넓히며 서로를 탐색했다.

파츠츠츳!

대치하는 것만으로 주변의 공간이 터져 나갔다. 신성과 공허가 부딪치며 신계의 공간 자체가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학살의 전장.”

“폭력의 시간.”

먼저 움직인 것은 광풍과 로칸 쪽이었다.

둘이 좌우로 갈라지며 각자의 고유 신성을 발현했다.

“차원의 벽.”

그런 둘을 이번에는 차원의 벽이 가로막았다.

차원의 큐브를 이루던 벽면이 방패처럼 그들을 막아선 것이다.

“흥!”

“부서져라!”

그러나 이번에는 막을 수도, 가둘 수도 없었다.

그들 역시 차원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니까.

아직 그 이해도가 높지도, 고유 신성도 아니라서 카이스만이나 카이륜처럼 차원을 조작할 수는 없지만 차원력의 생성 원리를 파악하고 자신의 고유 신성을 활용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콰앙!

둘의 신성 활용 방식은 달랐다.

광풍은 차원의 틈을 찾아 죄수의 목을 베듯 잘라 냈고, 로칸은 문자 그대로 파괴했다.

그의 신성 정체성 자체가 폭력과 파괴 그 자체였으니까.

다만 막무가내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아니었다.

차원의 균열점. 그것을 찾아 정확히 때려 냈을 뿐이다.

챠라라랑!

“……!”

카이륜이 생성해 낸 두 개의 차원 벽이 무너졌다.

처음으로 카이륜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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