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화
[2회차] 에필로그여야 했는데…?
마왕 페도나르의 뚝배기를 깨기 10년 전.
내게도 연약한 시절이 있었다.
그날, 나는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열띤 토론을 벌였다.
빙 둘러앉은 낡은 책상 위에는, 교과서 대신 마법소녀풍 동인지가 당당히 놓여 있었다.
같은 반 여학생들이 “저 바보들이 또···.” 같은 무례한 시선을 보냈지만, 취미는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우리 또래에 어울리는 건전한 주제였다.
“공부 때려치우고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고 싶다···. 마왕에게 붙잡힌 공주를 구출해서 결혼하고 싶어.”
“고작 공주냐? 나는 판타지 세계의 여러 종족 미녀들이랑 흥미진진한 모험을 떠날 거다.”
두 친구는 자기 취향을 밝히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야만인처럼 남의 여자를 빼앗고, 현대사회에서 배척받는 하렘을 만들겠노라고 선언한다.
우리를 보는 여학생들의 시선이 바보에서 벌레 이하로 평가절하됐지만, 판타지 로맨티시스트인 두 친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옆도 만만치 않았다.
“모험? 시시하긴. 배워둔 과학과 역사는 장식이냐? 핵무기만 개발하면 세계정복도 가능하거든?”
“과학 30점짜리가 잘도 핵무기 만들겠다. 판타지 하면, 역시 금단의 10서클 마법이지. 한 방에 싹 쓸어버리는 거야!”
“풋! 마법? 샌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무협세계에서 넘어온 무공이야말로 진리! 소드마스터라고 들어는 봤냐?”
판타지 세계에서 하고 싶은 일.
친구들이 자랑하듯 읊는 꿈과 희망은 하나같이 허무맹랑한 것들뿐이었다. 절대로 일어날 리 없는 망상, 오컬트이기에 막 던지는 것이다.
“강한수. 너는 어때?”
동인지에 수록된 최신게임 인기순위를 훑으며, 친구들의 얘기를 건성으로 흘려듣던 내게 배턴이 넘어왔다.
빤히 쳐다보는 무언의 압박들. 나만 계속 입 다물고 있어서 불편한 모양이다.
‘판타지 세계에서 뭘 하고 싶냐고?’
깊게 생각해본 적 없다.
차라리 화성 탐사가 훨씬 현실적이다.
가능하면 자동차나 비행기···. 하다못해 우주선으로 갈 수 있는 장소를 물어봐 줬으면 좋겠다. 화성이라면 내가 늙어 죽기 전에 밟아볼지도 모르니까.
빤히 쳐다보는 친구들의 시선이 점점 따가워진다.
어쩔 수 없이, 3초쯤 고민 후에 답했다.
“내 꿈은···.”
그날의 개그상은 내 몫이 됐다.
판타지 세계로 납치되기 전날의 달콤한 추억이다.
*
...달콤은 무슨.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서 곰팡이에 꽃이 폈다.
내 꿈.
수세식 변기 개발이 어때서?
잘난 황제도, 예쁜 공주도,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도, 요강이나 수풀 위에 쭈그려 앉아서 힘주는 인생인 건 똑같거늘.
유치한 꿈은 그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이제, 궁상맞은 추억팔이는 집어치우고, 꿈과 희망 없는 잔혹한 현실을 직시해보자.
여기는 무척 낯익은 실내였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마감된 아치형 돔.
백색 형광등 대신 은은한 자줏빛을 자아내는 벽걸이 랜턴이 사방에서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바닥에는 도넛 모양의 복잡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걸 보자마자 절로 이가 갈렸다.
“용사납치용 마법진···.”
고상한 전문용어로, 차원이동 마법진.
그 정중앙에 선 내 주위를 은색 갑옷 입은 사내들이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왕궁기사.
판타지 세계의 정예부대 같은 존재다.
대치 중인 나를 보며 긴장하는 왕궁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나는 ‘고등학생 몸’이다. 저들처럼 보디빌더 같은 근육질하고는 인연이 없었다.
“허, 허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어느 나라든 왕궁기사가 최정예집단인 건 틀림없지만, 내 앞에서 저리 고개 빳빳이 쳐드는 놈은 오랫동안 없었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고 나니, 내가 10년 동안 쌓아 올린 힘을 잃었음을 절감했다.
통나무처럼 두꺼웠던 내 팔뚝이 개뼈다귀로 바뀌었다. 나머지 신체 부위도 비실비실해지긴 매한가지.
어디 몸뚱이만 그럴까.
소지하고 있던 고급 장비와 소모품이 몽땅 사라졌다. 수집한다고 투자한 세월이 회귀 한 방에 무효처리됐다.
꿈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아니다.
지구도 아니다.
아무리 부정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고 간단히 인정해버리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무려 10년이다, 10년!
남의 인생이라면 “오! 그래. 10년 동안 개똥밭에서 애쓰셨구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10년은 매우 긴 시간이다.
허약한 꼬마가 열심히 운동해서,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세계적인 운동선수로 이름을 떨칠 충분한 시간이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다면, 옹알이하던 첫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을 보고도 남는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합쳐서 10년 공부하면 여생이 편안해진다고 해도 놀잖는가?
10년.
3,650일.
87,600시간.
나는 이 기나긴 시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구로 귀환을 갈망했다. 빌어먹을 동료들에게 수모와 멸시를 당한 날에는 특히 심했다.
원치 않았던 회귀도 모자라서 판타지.
이 끔찍한 현실을 어찌 간단히 인정할 수 있겠는가···!
“환영합니다, 용사님!”
“......”
꾀꼬리 같은 미성(美聲)이 내 정신을 일깨워줬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순백색 기조를 강조한 로브(Robe)를 입은 묘령의 여인이었다.
아는 얼굴이다.
내 흑역사의 한 면을 장식한 동료 중 하나.
하지만 그녀는 라스트보스 앞까지 함께하진 못했다. 모험 도중에 무너져내리는 유적에서 낙오되어 생매장당했기 때문이다.
그날, 나 혼자서 축배를 들었다.
이제는 다시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정신이 드셨나요?”
“아니.”
회귀, 재시험.
질 나쁜 농담이 아니었다.
“그, 그런가요. 용사님, 슬슬 정신을 차려주세요!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소환돼서 많이 혼란스러우시죠? 이곳은 판타지아. 용사님이 태어나고 자란 세계랑 다른 차원입니다. 당장 이해를 바라는 건 무리겠죠. 지금부터 차근차근 설명해드릴게요.”
1) 마왕 페도나르가 깨어났다.
2) 인류의 위기가 도래했다.
3) 신탁의 용사님을 소환했다.
4) 이 세계를 구해주세요!
그녀는 네 줄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내용을 장황하게 풀어서 설명했다.
회귀한 나는 다 아는 내용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인류를 위협하는 마왕 페도나르의 뚝배기를 깨고 에필로그까지 찍고 온 참이다. 도중에 죽어서 회귀한 머저리 용사가 아니다.
“어머! 제 소개하는 걸 깜빡했네요. 저는 라누벨. 고대의 전설을 쫓는 여행 중, 신탁을 받고 용사님을 소환한 고고학자입니다. 라누벨은 고대언어로 ‘진리’란 뜻이에요.”
고고학자 라누벨.
외모와 실력을 겸비한 천재마법사.
학구파라서 전투마법보다 보조마법에 특화되어 있지만, 악착같은 탐험가답게 생활력과 생존력, 체력 등이 전반적으로 우수한 편이다.
다만,
“생글생글 웃지 마라. 거슬린다.”
“옛-?!”
바로 이년이 원흉이다.
나를 이 야만적인 세계로 납치한 장본인.
만약, 지금의 내게 마왕의 뚝배기를 깰 당시의 힘이 1%라도 남아있었다면, 가장 먼저 라누벨부터 죽여버렸을 것이다.
뭘 해도 밉상인 여자.
그게 고고학자 라누벨이었다.
“귀여운 척하지 말라고.”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하자.
라누벨을 선택한 신(神)의 안목은 탁월했다고.
미래를 모르는 회귀하기 전의 나는···. ‘1회차’라고 하자. 1회차의 나는 지금이랑 똑같은 상황에서 유감스러운 판단을 내렸다.
바로, 라누벨의 미모에 넋을 잃은 것이다.
살짝 변명하자면, 당시의 나는 사춘기였다.
그리고 라누벨은 예뻤다.
내가 좋아했던 게임캐릭터 코스프레 전문여배우가 오징어로 기억될 정도로, 그녀의 비주얼은 압도적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라누벨은 여전히 예뻤지만, 나는 달라졌다.
미인계에 홀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 그런···.”
“멀쩡히 잘 살던 사람 납치해놓고 도와달라? 너는 이 상황이 재미있니? 내 얼굴만 봐도 웃음이 빵빵 터져? 라누벨, 그 이름처럼 개념 말아먹은 진리로구먼. 뒤질래?”
라누벨의 화사한 미소가 얼어붙었다.
이제 좀 마음에 드는군.
“죄송해요···.”
자라처럼 목을 움츠린 라누벨이 기어가는 어조로 사과했다. 하지만 어째서 용사가 화내는지는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용사가 세상을 구한다.
이 판타지 세계에선, 음양의 조화만큼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상식이었다.
소환된 용사는 꿈과 희망을 싣고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
역사책에 실린 역대 용사들이 다 그러했다.
철컥, 갑옷의 금속음이 들려왔다.
“용사님.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끄러운 라누벨의 입이 다물어지길 기다렸던 걸까.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왕궁기사 중 하나가 대표로 말을 건넸다.
신탁을 받았어도 라누벨은 어디까지나 조력자.
현재 내가 밟고 있는 차원이동 마법진에 들어간 재료비와 마법 촉매 등은, 국가 단위의 지원이 아니면 실현 불가능하다.
즉, 배후에 왕국이 있다는 뜻이다.
“나도 기다리는 중이다.”
“...예?”
“왜 놀라는데?”
“그야···.”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는 무능한 왕궁기사가 되묻는다. 뇌까지 근육으로 된 놈들에게 많은 걸 바란 내 잘못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자.
“잘 생각해봐. 마왕을 무찌를 용사가 이 세계에 몇 명이나 있지?”
“당신뿐입니다.”
왕궁기사는 별 고민 없이 즉답했다.
그의 말대로 용사는 나 하나뿐.
자동차 타이어처럼 얼마든지 왕자들이랑 교체할 수 있는 판타지 국왕 따위보다 훨씬 고귀하신 몸이다.
내가 죽으면 이 세계는 끝난다.
“이제 이해했겠지? 나를 영접하고 싶으면, 간 보지 말고 빨리 튀어오라고 국왕에게 전해. 내 시간은 비싸다. 불만 있으면 너희가 마왕 잡던가.”
“......”
“......”
내 신통한 발언에 감탄한 모두가 말문을 잃었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걸?
▷반박: 옛말에, 숨겨진 보석 앞에서는 그 누구도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신을 낮추세요, 용사님.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지는 법입니다. 겸손은 하나의 미덕인 동시에, 평범함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나를 가르치려 드는 장문의 잔소리.
건방진 ‘그것’이 사람 목소리인지 문자인지는 아리송했다. 내 머릿속에 직접 전달했기에 그 경계가 모호했다.
그래서 누구신지?
▷해답: 전문교사입니다. 인성 부분에서 F 학점을 받으셨더군요.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그런 당신을 위해 제가 파견된 거니까요. 당신이 어엿한 용사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제 교사자격증을 걸고.
“맙소사···.”
판타지에 도덕 선생님이 출근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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