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화
[2회차] 자율학습 시작!
▷해설: 강한수 학생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시험에 합격한 용사는 전문교사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졸업하니까요. 불합격하더라도 조용히 재시험 보는 방향으로 대부분 진행됩니다. 교직원이 간섭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재시험이란, 회귀를 뜻한다.
한심하게 살다가 한심하게 후회하며 죽은 주인공. 그들은 아무런 연고도 없이 과거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한다.
회귀한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왜?
▷설명: 실수를 스스로 반성하고 바로잡으란 취지입니다. 강물이 바다에 뛰어드는 속도보다, 사람이 실수에 빠지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수는 누구나 합니다. 하지만 강한수 학생은 다릅니다. 결과만 보면, 당신은 성공했어요.
마왕 페도나르를 토벌했다.
용사의 역할을 깔끔히 완수했다.
다시는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악마들을 철저하게 멸절했다. 마왕도 영원히 부활 못 하게 영혼을 으깨줬다.
후환을 남기지 않은 완전정복이었다.
▷난감: 그래서 문제입니다. 고의로 실수를 반복한 당신은 마왕에게 참패의 쓴맛을 봤어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가뿐히 이겨버렸죠.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실패하지 않았기에 반성도 하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반성하지 않기에 잔소리하러 왔다는 거잖아?
▷긍정: 정확합니다. 선한 사람은 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물은 다투지 않고 만물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죠. 강한수 학생이 동료들을 위하는 깊고 넓은 바다가 되길 고대하겠습니다.
마왕이랑 멱살잡이하는 편이 더 쉬울 것 같다.
▷웃음: 이론은 여기까지고 지금부터는 실습입니다. 저는 내일 이맘때 다시 오겠습니다. 수고하세요.
*
“동료라···.”
골치 아픈 숙제다.
“저···. 용사님, 어디 아프신가요?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으시고···. 차원이동은 여전히 검증되지 않은 마법이에요.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르니, 몸에 이상이 생기면 꼭 말씀해주세요.”
라누벨은 끄나풀에 지나지 않았다.
나를 납치하도록 그녀에게 명령한 배후가 등장했다.
...도덕 선생이.
마왕을 쓰러트린 직후, 전문교사를 파견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건 기억한다. 하지만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런데 그게 진짜였을 줄이야!
‘교직원 일동이라···?’
용사를 육성하는 교사집단으로 짐작된다.
놀기 좋아하는 학생을 학교나 학원에 가둬두고 온종일 공부만 시키듯, 이 야만적인 세계로 평범한 사람을 납치해서 ‘용사’란 이름의 전사로 키우는 게 아닐까.
이 조직의 목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게 악의나 적의가 없다는 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마왕의 뚝배기를 깼던 나를 간단히 과거로 돌려보낼 수 있는 작자들이다. 수틀리면, 나 따위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으리라.
그러니 일단은 협조하기로 했다.
대항할 뚜렷한 대안이 나올 때까지는.
“...라누벨. 왕에게 안내해.”
도덕 선생은 겸손의 미덕이라고 했던가?
하고 싶은 말은 알겠는데, 일차원적인 접근법이다.
이건 왕과 나의 주도권 싸움이다. 나는 이 나라의 국민도 아니고, 납치범에게 복종할 의무도 없다.
나는 사냥개가 아니다.
무료봉사자도 아니다.
인간으로서 내 정당한 권리를 쟁취할 것이다.
왕좌에 앉은 채 고개만 까딱거리며 “목숨 걸고 악마랑 싸워라.”라고 명령하는 지배자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이 멸망해버리면 지구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노사관계처럼 적당한 타협점을 찾을 계획이다.
도덕 선생의 말도 일리는 있다.
내가 이길 게 뻔한 주도권 싸움도 좋지만, 지구의 문명인으로서 먼저 양보하는 아름다운 모습 또한 바람직한 접근법이 아닐까.
그러니 이쪽에서 먼저 가주기로 했다.
“용사님! 이쪽이에요!”
로브 안쪽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모르던 라누벨. 그녀는 내가 먼저 왕을 찾아간다는 말을 듣고 표정이 밝아졌다.
이런 용사는 처음 보는 모양이다.
바짝 굳었던 왕궁기사들의 표정도 서서히 풀어졌다. 명예와 자존심으로 먹고사는 그들은 왕과 숙녀를 수호하는 철밥통이기 때문이다.
판타지의 로맨티시스트.
유감스럽게도 용사의 편은 아니다.
“용사님. 폐하 앞에선 말을 가려주십시오.”
왕궁기사가 위압적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부탁했다.
상상해보라. 독일 전차, 러시아 불곰처럼 덩치 큰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자신을. 심장이 쪼그라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뭘 노려봐. 칠 거야?”
하지만 나를 위축시키기엔 역부족이다.
나는 용사님이다.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
그런 내가 죽거나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이 판타지 세계는 마왕에게 유린당한 끝에 멸망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에겐 용사를 두들겨 팰 배짱이 없다. 인류의 미래 따위 관심 없는 그 녀석만 조심하면···.
“오오! 용사! 좋은 패기다!”
“...잠깐.”
이 목소리는 설마--
“소원대로 쳐주마!”
장신의 보디빌더 같은 왕궁기사들보다 머리 하나쯤 더 큰 거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돌격해왔다.
나는 전혀 반응할 수 없었다.
돌솥밥그릇처럼 커다란 주먹이 내 안면으로 날아든다.
‘죽는다.’
그 생각밖에 안 들었다.
1회차 막바지의 나였다면 간단히 피했겠지만, 지금은 강속구로 날아오는 야구공도 못 피하는 저질 고등학생 몸뚱이다.
이 자식이 여기서 왜 나와?
계산 착오다.
안일했다.
부웅--
거인의 주먹이 내 왼쪽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음속을 돌파한 걸까. 한 박자 늦게 칼바람이 고막을 때렸다.
귀가 울리며 머리가 띵해졌다.
고막이 터졌는지, 귓구멍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알렉스 씨! 용사님을 죽이실 작정인가요?!”
라누벨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거인을 나무랐다. 하지만 비난을 들은 거인은 아무렇지 않게 웃음으로 때웠다.
“하하! 담력시험이야, 담력시험. 보라고. 안 죽었잖아?”
“.....”
그래. 나는 이게 마음에 안 들었다.
이 야만인들은 무고한 사람을 납치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말로는 용사님, 용사님 이러면서 띄워주지만, 실질적인 대우는 인간 이하.
쓰고 버릴 사냥개 혹은 장난감.
하지만 이번엔 다를 거다.
‘도덕 선생님. 이건 정당방위입니다.’
탁.
나는 거인 곁으로 오른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오른손은 왼쪽 호주머니 안쪽으로 찔러 넣었다.
예상대로 샤프펜슬이 있었다.
송곳이나 날붙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내가 학창시절에 애용했던 0.3mm 샤프펜슬은 꽤 뾰족한 편이다.
무기로 쓸만하다.
상체는 숙이면서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린 불안정한 상태.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고 육상선수처럼 그 추진력을 이용했다.
발도술(拔刀術)이라고 하기엔 조잡했다.
육체가 기술을 따라가지 못한 탓.
그래도 내 손놀림은 민간인이랑 궤를 달리했다. 사람 한 번 죽여본 적 없는 미지근한 검도장 사범하고는 다르다.
10년 경력의 용사.
남을 상처 입히는 건 자신 있다.
암살자처럼 살기(殺氣)를 죽인 채, 자연스럽게 바짝 붙어서 거인의 아래쪽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샤프펜슬을 휘둘렀다.
제대로 된 칼이 있었다면 심장이나 허리를 노렸겠지만, 피부가 돌처럼 단단한 이 거인에게 샤프펜슬로 상처 입힐 만한 부위는 단 하나밖에 없다.
“이, 이놈이?!”
거인이 식겁하며 뒤로 물러선다.
내 기습은 완벽했다. 하지만 그는 뒤늦게 눈치챘음에도 몸놀림이 재빨랐다.
찌이익-!
내 0.3mm 샤프펜슬은 거인의 바짓가랑이를 일직선으로 찢는 선에서 그쳤다.
유감스럽게도 살가죽을 찢는 감각은 없었다.
몸이 둔해서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1회차 육체 능력의 1%만 회복했어도 성공했을 텐데.
“아쉽네.”
고자로 만드는 건 아쉽게도 실패.
단순한 보복 차원이 아니다. 이 거인에게만큼은 절대 꿀릴 수 없다는 마음이 강했다.
내 원한의 양으로 따지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이다.
검왕(劍王) 알렉스.
1회차에서는 국왕을 알현하고부터 닷새 뒤, 왕족 전용훈련장에서 시행된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으로 알렉스를 만난다.
그리고 첫날부터 그에게 개처럼 맞았다.
실전 훈련이란 명목으로.
하지만 이번 2회차에서는 내가 당황하지 않고 소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녀석의 관심을 일찍 끈 모양이다.
일단은 내 검술 스승이기도 하다.
“알렉스 씨! 얼른 용사님께 사과하세요!”
얼굴이 홍당무가 된 라누벨이 빽 소리 질렀다.
마찬가지로 새빨개진 알렉스가 찢어진 바짓가랑이를 양손으로 가리며 항의했다.
“라누벨! 이걸 보라고! 나도 당했-”
“대체 뭘 보라는 거죠?!”
말문이 막힌 알렉스가 원흉인 나를 한껏 노려봤다. 하지만 내 옆에 선 라누벨이 쌍심지를 켜자마자 수그러들었다.
“큭! 그런 비실비실한 몸으로 암살자라고? 재미있군. 좋다, 빌어먹을 용사. 나, 왕궁기사단장 알렉스에게 이기면, 정식으로 무릎 꿇고 사과하겠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거짓말이다.
놈은 죽는 순간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네 불알 두 짝을 걸고?”
“까불지 마라.”
알렉스는 상처 입은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며 떠났다. 바짓가랑이를 양손으로 가린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그 뒷모습을 보며, 나도 가치관이 조금 변했다.
회귀(回歸).
무조건 나쁜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1회차에서 쌓인 원한과 스트레스를 마음껏 풀라는 신(神)의 계시일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란 말도 있잖은가?
“흐음...”
뱃멀미하듯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알렉스의 담력시험이 내 고막만 찢은 게 아니었다. 귀 가장 안쪽의 반고리관이나 전정 기관을 건드린 게 틀림없다.
이 둘은 몸의 평형감각을 관장하는 기관이다.
이게 고장 나면?
세상이 뒤집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용사님. 제가 마법으로 치유해드릴게요.”
제자리에서 휘청거리는 내 오른팔을 슬며시 붙잡으며 가녀린 몸으로 지탱해주는 라누벨.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척했다.
“됐어.”
매몰차게 라누벨의 손을 뿌리친 나는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했다.
회귀하면서 모든 능력을 잃은 건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약해져야 할 이유는 못 된다.
내 노력의 10년을 무(無)로 돌린다고?
진짜 가소롭다.
터진 고막에서 흘러내리던 피가 뚝 멈췄다. 어지러움도 멈추며 자세가 안정됐다.
“어?! 용사님, 용사님! 그건 무슨 힘인가요?”
내 미세한 변화를 눈치챈 라누벨이 휘둥그레진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묻는다.
귀여운 척하지 말라고 방금 경고했거늘.
“궁금해?”
“네!”
“특별히 이번만 차근차근 설명해줄 테니, 귀 씻고 잘 들어.”
“감사합니다!”
나는 머릿속으로 한 차례 정리 후, 입술을 뗐다.
“인체의 자율신경계를 수동으로 돌린 후, 망가진 반고리관을 고치는 거야. 어떻게 반고리관인 줄 아느냐? 전정 기관의 이석(耳石)이 잘못됐다면 세상이 기우는 것처럼 느껴졌을 텐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회전하기만 했거든. 그건 반고리관의 림프액이나 감각모, 감각세포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지. 자! 원인을 알았으니 그 뒤는 간단해. 소뇌(小腦)로 잘못된 감각정보를 계속 보내는 청신경을 잠시 끊어두고, 반고리관의 자연치유력을 집중적으로 올리면, 짜잔! 어머나! 벌써 나았네! 들어보니 간단하지?”
“...에?”
전혀 이해 못 한 라누벨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
현미경과 인체해부도를 모르는 판타지 주민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줘서 뭐하겠는가? 소귀에 경 읽기다.
하지만 오늘의 테마(Thema)는 겸손.
자애로운 미소를 담아서 그녀를 위로해줬다.
“몰라도 괜찮아. 사는 데 지장 없어.”
“우우···.”
라누벨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또 귀여운 척했다. 하지만 이번엔 핀잔 주지 않고 넘어갔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왕궁기사가 우렁차게 외쳤다.
“폐하! 용사가 알현을 요청합니다!”
요청한 적 없는데.
멋대로 나를 아랫사람 취급하는 이놈들을 굴비처럼 엮어서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으나, 일단은 친교(親交)를 다지기로 했다.
입가에 환한 미소를 그렸다.
도덕 선생은 내게 바다가 되라고 했다.
좋은 비유다.
바다가 돼서 몽땅 수장(水葬)시켜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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