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화
[2회차] Show me the money
국왕과 귀족이 기다린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반신반의했던 용사 소환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부리나케 준비를 시작했음을 나는 잘 안다.
지금쯤 뒷문으로 조용히 입장 중일 터. 그렇지 않다면, 문 앞에서 내가 오랫동안 대기할 이유가 없었다.
“용사님. 듣고 계십니까?”
늙은 귀족이 내게 정중히 물었다.
“그래.”
“이제 곧 국왕 폐하를 알현하게 되십니다. 그러니 폐하 앞에선 지금 같은 가벼운 말투는 자제해주십시오.”
“대체 몇 번을 말하냐. 알겠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도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거참!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마왕 페도나르보다 더 죽이고 싶은 알렉스랑 헤어진 후, 왕궁 복도를 한참 걸어서 도착한 고풍스러운 입구.
그 앞에서 깐깐하게 생긴 늙은 귀족에게 주의사항만 1시간쯤 들은 것 같다.
똑똑.
문 안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
“...제가 가르쳐드린 예법이 만족스러운 수준에 도달하셨습니다. 이제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목석처럼 서 있는 예법도 있냐?”
“크흠!”
나랑 1시간 동안이나 입씨름을 벌였던 늙은 귀족이 무안했는지 고개를 돌린 채 헛기침했다.
내가 봐도 그는 최선을 다했다.
엉덩이 무거운 왕족과 귀족들이 허겁지겁 뒷문으로 입실할 때까지 용사를 상대로 있는 말, 없는 말 지어내며 시간을 끌었다.
그 덕분에 심심하지 않았으니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끼익―
거대한 문이 서서히 열렸다.
왕국의 역사와 세월이 묻어난 낡은 알현실. 그 가장 안쪽의 높은 단 위가 가장 먼저 내 시선을 끌었다.
“짐의 땅에 잘 와주었다! 용사여!”
얼굴이 노란색 고명 올린 만두처럼 생긴 중년 남성이, 옥좌에서 과장되게 일어서며 팔 벌려 환대해줬다.
이 나라의 국왕(國王)이다.
젊은 시절에는 전쟁터도 자주 나간 호전적인 인물이었다는데, 지금은 그냥 왕관 쓴 만두다.
알현실에는 짜증 나는 면상들이 주르륵 진열되어 있었다.
왕자, 공주, 왕비, 귀족, 기사, 마법사….
이 나라에 자욱하게 깔린 암운(暗雲)을 난 이미 알고 있지만, 이들에게 주옥같은 1회차 정보를 가르쳐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해결은 더욱 말도 안 되고.
“용사님. 국왕 폐하의 어전이십니다.”
얼른 인사하라고 왕궁기사가 슬쩍 눈치 준다.
1회차 때는 정중히 인사했다. 평가는 썩 좋지 못했지만.
지금은 내가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머지않은 미래에 암살당할 만두 국왕에게 잘 보일 필요성을 못 느꼈다.
하지만 오늘의 테마는 겸손.
일단은 상대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환대에 감사합니다. 폐하.”
싫어도 익혀야 했던 이 나라의 예법으로 인사했다.
단, 허리를 숙이되 절대 과하지 않게.
내가 굽실거리는 태도가 마음에 든 걸까?
국왕의 얼굴이 꽃빵처럼 활짝 펴졌다.
1회차에서 정치적으로 만난 여러 권력자가 표정관리를 잘했는데, 이 국왕은 정말 예외 중의 예외였다. 지나치게 표정이 솔직하다. 좋게 말하면 인간미, 평범하게 평가하면 무능.
나를 구경하던 귀족들이 속닥거렸다.
“움직임에 절도가 있군.”
“허! 내 아들놈보다 예법이 훌륭해.”
“무식한 야만인을 상상했는데….”
1회차의 추억이 몰랑몰랑 피어났다. 이 야만인들에게 예의범절을 모르는 야만인 소리를 듣던 굴욕의 나날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판타지 경력 10년.
나는 모든 종족과 나라의 예법과 문화를 꿰차고 있다.
좋아서 학습한 건 아니지만.
기분 좋아진 국왕의 얼굴은 1회차 때보다 해맑았다. 좌우 입꼬리가 올라간 뺨이 부풀면서 먹음직스러운 왕만두가 됐다.
그는 라누벨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고했다. 고고학자 라누벨.”
“황공합니다, 폐하.”
그녀에게 짧게 치하한 국왕은 다시 옥좌에 앉았다. 그리고는 기대에 찬 목소리로 내게 질문했다.
“용사여. 능력치가 보이는가?”
영어로 스테이터스(Status).
만두 국왕의 목소리가 좀 더 부드러워진 것만 빼면, 1회차랑 똑같은 전개였다.
이 판타지 세계에는 능력치가 존재한다.
친절하게 숫자와 글자로 표기해서 자신의 성장지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놨다.
마치, 가상현실게임의 홀로그램처럼.
▷종족: 아크 휴먼
▷레벨: 1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통역A 불굴F 암살F
▷상태: 양호
같은 행동이나 상황을 반복하면 스킬(Skill)이 된다. 그리고 숙련되면 자연스럽게 스킬 랭크(Rank)가 오르며 효율과 위력이 상승한다.
통역A는 1회차 때도 기본으로 주어졌던 스킬이다. 하지만 그 옆의 불굴F과 암살F는 검왕 알렉스의 담력시험 영향일 터.
알고는 있었지만, 볼 때마다 헛웃음이 나왔다.
레벨부터 스킬까지.
아주 깔끔하게 초기화됐다.
“아주 잘 보입니다, 폐하. 1레벨, 직업은 용사입니다.”
“오오! 용사의 특전을 알 수 있겠는가?”
“경험치 500%입니다.”
“500%…!?”
국왕만이 아니라 주위의 모두가 경악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재능이랑 관계없이 남들보다 5배 빠르게 성장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내가 1시간 동안 무언가를 반복하면 5시간 효율이 발생한다.
전설의 용사다운 사기적인 특전이다.
“용사님! 경험치 500%는 정말 굉장한 거예요!”
“오냐.”
“아부가 아니라 정말로요!”
내 시큰둥한 반응에 라누벨이 호들갑 떨었다. 경험치 500%의 가치를 어떻게든 이해시키려고 옆에서 계속 쫑알거렸다.
그래서 좀 닥쳐달라고 말하려는 순간, 옥좌에서 느닷없이 벌떡 일어선 왕이 양팔을 번쩍 들며 힘주어 외쳤다.
“선택받은 용사여! 악마의 영토랑 가까운 이 나라에 위기가 도래했다! 악마들을 무찌르며 능력치를 올린 후,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려다오!”
이 나라는 수많은 문제에 둘러싸여 있다.
왕자들의 후계자 다툼, 악마랑 손잡은 고위귀족, 사이비교에 빠진 왕비, 마을 처녀들의 실종, 엽기적인 연쇄 살인마, 기근, 역병….
현기증 날 정도로 많다.
머릿속으로 주판을 빠르게 두들겨봤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로 입 싹 닦는 무가치한 문제들은 제외. 내 전투력을 올려주거나 금전적인 이득을 주는 일들만 꼽아봤다.
...정말 손을 꼽아야 할 정도로 적었다.
국왕이 현실을 보지 못하고 악마의 영토 탓으로 돌리는데, 이 나라는 악마가 아닌 내부적인 문제가 압도적으로 많다.
마왕은 굉장히 양심적인 신사다.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다.
내가 부하들을 쓰러트릴 때마다 꼬박꼬박 보상을 챙겨준다. 가끔은 너무 많이 퍼줘서 부담스러울 정도.
즉, 이대로는 수지타산이 안 맞아서 일 못 한다.
“폐하. 얼마만큼 지원해주실 겁니까?”
“지원?”
만두 국왕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용사인 그대를 소환했다. 우리 왕국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최고의 지원을 한 셈이지. 여기서 더 무엇을 한단 말인가?”
사냥개를 끌고 왔다.
뒷일은 사냥개가 알아서 해결할 문제다.
만두 국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거절합니다. 딴 용사를 알아보십쇼.”
“뭣이?!”
모두가 경악한다. 흠. 마음에 드는 얼굴들이군.
“이 나라의 위기? 알 바 아니야. 당신들은 용사를 대하는 태도가 글러 먹었어. 무릎 꿇고 부탁해도 모자랄 판국에 명령? 이봐, 만두 국왕. 나는 이 왕국의 백성이 아니야.”
“이놈! 감히 폐하께…!”
어느 귀족이 발끈했다.
그리고 나는 샤프펜슬로 보답했다.
“앜?!”
이마빡에 0.3mm 샤프펜슬이 박힌 귀족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나뒹굴었다.
그래도 나로선 꽤 봐준 거다.
내 힘이 충분했다면 두개골을 관통했을 터. 그리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면 단단한 이마빡 대신 눈구멍을 노렸을 것이다.
챙! 챙! 챙!
내 샤프펜슬 투척에 놀란 왕궁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그들은 내가 움직일 수 없도록 사방에서 칼날을 겨누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죽일 수 있다면 죽여봐라.”
나는 천천히 걸었다.
목에 겨누어진 칼날에 베이며 피가 흘러내렸지만, 개의치 않고 왕좌의 홀 쪽으로 걸어갔다.
칼날은 그 이상 파고들지 못했다.
내 뼈와 피부가 단단하기 때문이 아니다.
“헉?!”
“미친…!”
식겁한 왕궁기사들이 알아서 검을 치우고 있었다. 날붙이로 위협하며 포위망을 짰지만, 내 손가락 하나 베지 못했다.
긴장한 그들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나는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왕이 죽으면 왕자가 대처할 수 있지. 그 왕자마저 잃는다면 공주가, 공주가 없으면 먼 친척이. 그렇다면, 용사가 죽으면 누가 대처할까? 어떻게 마왕의 멱을 딸래?”
목뿐만 아니라 온몸에 베이고 찔린 상처가 한가득했다.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지만, 나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이 야만인들은 겸손하게 상대해줄 가치가 없다. 가만히 놔두면 끝도 없이 기어오를 돼지들이다.
혼란에 빠진 왕궁기사들의 얼굴은 거무죽죽했다.
머지않은 미래에,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이 악마들에게 죽거나 범해지길 바라는 왕궁기사는 없었다.
알렉스처럼 세상에 관심 없는 위인 빼고는.
그놈만 조심하면 된다.
나는 1회차 경험으로 배짱을 부리는 것이다. 이들이 나를 절대 죽이지 못한다는 걸 안다.
판타지 세계가 멸망하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이 땅에서 죽으면, 게임처럼 재시작하거나 부활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죽음은 나도 두렵다.
그러나 이 심리전은 내가 이겼다.
“폐하. 더 하실 말씀이라도?”
정치는 기세 싸움이다.
무조건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
“...용사여. 짐은 이 땅을 수호하기 위해 그대를 소환했다. 여러 귀족과 상인에게 마법 촉매를 사들이도록 주문하고, 라누벨에게 명하여 그대를 이 땅에 불러들였다.”
“그래서?”
“그대는 우리 왕국 소유다!”
만두 국왕의 선언.
정말 웃기지도 않는 논리였다.
“나는 물고기가 아니야. 물고기는 낚은 어부가 주인이지만, 나는 용사다. 왕국 소유? 진짜 웃기는구먼. 세계에 공표해봐라. 이 왕국이 어떻게 되는지를.”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왕위를 노리는 두 왕자도 다르지 않았다.
저급한 악마를 숭배하는 사이비교에 빠진 왕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지만, 천박하게 나서진 않았다.
마음에 드는 분위기.
나는 여기에 마침표를 찍었다.
“나는 용사를 우대해줄 나라로 떠나겠다. 막거나 가두더라도 소용없어.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테니. 인류의 희망인 용사를 핍박한 사실이 들통나는 순간, 이 나라의 운명은 끝나지. 어리석은 왕에게 찬동한 너희들도.”
듣고 있던 귀족과 기사들이 숨을 삼켰다.
“용사여! 무슨 지원을 원하는가!”
초조해진 만두 국왕이 외쳤다. 그는 충신과 고위관료들의 의견도 묻지 않고 백지수표부터 넌지시 찔렀다.
패배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고품질 의식주, 장비, 물약, 군사지도, 면책권, 룸서비스….”
“룸서비스?”
“요거.”
나는 수줍게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렸다.
“......”
“그리고 폐하.”
“아직 더 남았는가, 용사여!”
이 잠깐 사이에 이마의 주름이 늘어난 왕의 얼굴. 바닥에 떨어진 찐만두처럼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지만.
“Show me the money.”
한 번 클리어한 롤플레잉게임은 따분한 법.
치트키치고 꽃길만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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