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5화 (5/430)

 005화

[2회차] 내가 중2병이라니!

▷황당: 하루 만에 또 사고 칠 줄은 몰랐습니다. 외상으로 산 돼지는 쉴 새 없이 꿀꿀거린다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금전적인 대가를 내놓은 국왕은 당신에게 계속 무언가를 요구할 겁니다. 탐욕은 가방을 썩게 하죠.

도덕 선생님. 타락은 너무 간 것 같은데요.

▷한숨: 안 좋은 타협이 좋은 소송보다 낫습니다. 이길 수 있어도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곁에서 봐줄 텐데, 밀려드는 학생들로 바쁜 게 한입니다.

국왕이랑 담판 짓고 하루가 지났다.

온몸에 난 상처는 라누벨의 마법으로 치료했지만, 빈혈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고급스러운 방에 기절하듯 드러누웠다.

그래도 피 흘려 투쟁한 성과가 있었다.

용사 활동비.

1회차에선 불가능했던 쾌거다.

그나저나 학생들?

▷설명: 방앗간 주인은 자기 방앗간이 돌아가기 위해서만 밀이 자란다고 생각하죠. 강한수 학생. 용사 후보는 당신만이 아닙니다. 이미 졸업생도 꽤 나왔어요. 지구로 무사히 귀환한 용사들은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도덕 선생은 분발하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

오늘 얘기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내가 방앗간 주인? 중2병이었다고…?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굴러가지 않았다. 판타지 세계로 넘어온 인간은 ‘한국인 강한수’만이 아니었다.

지구의 수많은 중2병 꿈나무가 용사로 육성되는 중이다. 거대한 실습실을 혼자 쓰면서.

1인(人)을 위한 차원 규모의 교육시설.

그 스케일이 너무 바보 같아서 현실감이 따라가질 못했다.

“용사님. 무슨 고민 있으세요?”

어제부터 잠잘 때를 제외하곤 온종일 내 곁에 붙어있는 라누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라누벨. 이 땅에 소환된 용사가 나뿐인 건 확실해?”

“네? 네. 확실해요.”

도덕 선생은 밀려드는 학생들로 바쁘다고 했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용사가 마왕 페도나르를 무찌르기 위한 여행 중이라고.

하지만 이 세계의 용사는 나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평행세계…?’

여기랑 똑같은 판타지 세계가 학생 수만큼 존재하는 걸까. 혼자 즐기는 오프라인 롤플레잉게임처럼.

바보 같은 스케일이 더욱 엉터리가 돼버렸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일단은 보류. 지금은 하루빨리 고향별로 돌아갈 방법만 생각하기로 했다.

졸업생들이 지구로 귀환해서 행복하게 잘 산단다.

나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라누벨. 따라와.”

*

만두 국왕에게 금화를 한가득 받았다.

기껏 소환해낸 용사가 떠난다는 말에 위기의식을 느낀 국왕은, 돈으로라도 내 환심을 사기 위해 국고를 활짝 열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와아! 이게 다 얼마지?! 인류를 구한 역대 용사 중에서 용사님처럼 돈 밝히시는 분은 없을 거예요. 정말 굉장해요!”

“쉿! 목소리 좀 낮춰.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잖아.”

만두 국왕은 용사의 동료가 될 예정인 고고학자 라누벨에게 돈주머니를 맡겼다.

내가 왕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용사님! 용사님! 저 마법구슬을 갖고 싶은데, 사도 괜찮을까요? 예전부터 꼭 갖고 싶었어요.”

...만두 국왕은 감시자를 잘못 고른 듯하다.

나는 가격표를 힐끔 보고는,

“사버려.”

내 돈 아니다.

“야호! 감사합니다!”

라누벨과 내가 걷고 있는 장소는 왕국 물류의 중심지, 수도의 대시장이었다. 자릿세가 높고 질 좋은 물건이 많이 들어오는 만큼 가격도 무시무시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판타지의 전유물인 마법이 깃든 마법도구는 귀족들마저 겸손하게 하는 사치품이었다.

마법봉, 마법구슬, 마법가루, 마법빗자루, 마법….

하여간 ‘마법’이란 단어만 들어가면 무조건 비싸진다.

지구에서 ‘첨단’이 비싸게 먹히듯이.

내 허락에 기분 좋아진 라누벨이 가게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는 자기 머리통 크기의 구슬을 양팔로 끌어안고 나왔다.

무척 행복한 얼굴.

거리를 지나가던 청년들이 그런 라누벨을 넋 놓고 바라봤다.

“라누벨. 얼른 따라와.”

“네. 용사님.”

나는 혀를 한 번 차고는 강아지에게 손짓하듯 그녀를 불렀다.

이게 다 무지한 청년들을 위해서다.

가증스러운 라누벨에게 현혹된 모양인데, 이 젊은 천재마법사의 씀씀이를 감당하려면 부유한 대귀족쯤 돼야 한다. 데이트 한두 번이면 집안 기둥이 통째로 뽑혀나갈 테니까.

현재, 내 복장은 완벽한 판타지풍이었다.

입고 있던 교복이 왕궁기사들 때문에 너덜너덜해지기도 했지만, 1회차에선 교복 차림으로 당당히 이 거리를 활보하며 불필요한 관심과 시비를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는다.

10년 동안 생활하며 판타지 의상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마음에 든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풀거리는 소매, 쫄쫄이 스타킹, 긴 옷깃, 공작새 깃털 모자, 호박 바지, 붉은색 구두, 꽉 끼는 사타구니, 반짝반짝 꽃무늬….

족보를 알 수 없는 패션 테러다.

하지만,

“복장이 엄청 호화롭군.”

“귀, 귀족이다. 그것도 엄청난….”

“대단한 가문의 자제인가?”

나를 귀족으로 착각한 왕국의 백성들은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귀족에게 잘못 걸리면 목숨이 10개여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 옆에 착 달라붙은 채 졸졸 따라오는 라누벨을 보고 “애송이. 옆의 예쁜이를 놓고 꺼지면 살려주마.” 같은 상투적인 대사를 읊는 수컷들이 안 보이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즉, 쇼핑하기 좋은 환경이다.

“그런데 용사님. 어딜 가시는 거예요? 유명한 대장간이랑 약초상점도 거들떠보지 않으시고. 용사님은 여기 처음이시잖아요.”

“암시장.”

“옛?!”

“제발 부탁인데, 좀 닥쳐주라. 너 때문에 멀쩡한 나까지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잖아.”

목을 자라처럼 움츠린 라누벨이 소심하게 대꾸했다.

“하, 하지만 암시장인걸요? 정의로운 용사님이 불법적인 경매에 손을 덴다니, 놀라는 게 당연하잖아요.”

“라누벨.”

“네.”

“방금 산 마법구슬도 불법이다만?”

“앗?!”

그녀의 사리사욕으로 구매한 물품이다. 허락한 건 나지만, 그걸 사양하지 않고 덥석 문 것은 그녀였다.

즉, 우리는 공범이다.

“...용사님. 제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인류평화에 도움만 된다면 암시장도 괜찮을 것 같아요. 맹독도 약에 쓰이잖아요~.”

라누벨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전환했다.

“이해했으면 조용히 따라와.”

“네! 그런데 암시장은 어떻게 찾으실 거예요? 여기서 오랫동안 생활한 저도 소문으로만 접했는걸요. 경매 장소를 매번 바꾸는 탓에 잡기 힘들다고 들었어요.”

예리한 질문이다. 아니, 당연한가.

이제 막 판타지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신출내기 용사가 현지민보다 빠삭하게 안다는 건 충분히 수상했다.

이걸 뭐라고 둘러대는 게 좋을까… 아!

“내가 누구냐?”

“선택받은 용사님이시죠.”

“그러면 잘 생각해봐. 용사가 평범하면 용사겠니? 경험치 5배 특전 하나만으로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면, 수천 년 살아온 용과 요정들이 진즉 마왕을 토벌했을걸.”

“그, 그렇다면…?”

고고학자답게 똑똑한 라누벨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잘 들어. 마왕을 쓰러트릴 용사의 진면목(眞面目)은 능력치에 드러나지 않아.”

“괴, 굉장해…!”

“이해했으면 말대꾸하지 말고 좀 닥쳐.”

“우우….”

나는 1회차에서 애용했던 술집으로 향했다.

라누벨의 의문처럼, 매번 모임 장소를 바꾸는 암시장 위치는 잘난 나조차 알 수 없다.

물론, 암시장의 단골손님이었던 나는 몇 군데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만두 국왕의 후원으로 암시장 방문 시기가 대폭 앞당겨진 상태.

새로운 정보가 필요했다.

바로 이곳에서.

끼익―

나는 녹슨 경첩의 미닫이문을 밀며 누추한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벽난로와 초롱불로 어둠을 몰아낸 실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먼저 온 손님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뒤섞여있다.

“확 밀어버려! 지면 죽을 줄 알아!”

“호호! 그래서요?”

“여기에 맥주 한 잔! 아니, 둘!”

팔씨름 내기하는 사내들의 시끌벅적한 함성, 사내를 유혹하는 아가씨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 구석에서 통기타를 연주하는 음유시인, 술잔을 바쁘게 나르는 여종업원….

내 추억의 모습 그대로다.

아주 천천히, 과거의 향수를 음미하며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사방에서 나를 경계의 시선으로 힐끔거린다.

내 등장으로 분위기가 싸해지진 않았지만, 기류라고 할 무언가가 달라진 것만은 틀림없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고 ‘귀족’인 탓이다.

1회차랑 달라진 술집 친구들의 태도에 내심 섭섭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바텐더 앞까지 걸어갔다.

유리잔을 닦던 바텐더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귀족 나리께서 굉장한 미녀분과 함께 이 누추한 술집을 찾아주셔서 소인의 눈이 호강하는군요.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겉보기엔 낡았어도 왕국에서 거래되는 모든 주류를 취급합니다.”

물 흐르듯 부드러운 말투다.

방울뱀처럼 찢어진 눈매가 날카로웠지만, 사람 좋은 미소와 깔끔하게 정돈된 콧수염, 새하얀 정장이 이를 무마해줬다.

1회차 그대로였다.

나는 친애하는 그 바텐더의 이름을 불렀다.

“토니.”

“...귀족 나리께선 저를 아십니까?”

“제법 잘 알지.”

용사님은 악의 세력을 무찌르고 다닌다.

그 악의 기준에는 마약이나 노예 같은 찜찜한 품목을 옮기는 밀수꾼, 유통하는 상인, 원하는 손님도 포함되어 있다.

통칭, 암흑상회.

1회차에서 용사 파티는 판타지 대륙 곳곳에 퍼져있는 암흑상회를 깨부수며 암호와 비밀아지트 위치를 많이 알아냈다.

유쾌한 모험은 결코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괜찮은 친구도 잃은 탓이다.

▷종족: 휴먼

▷레벨: 54

▷직업: 암살자(야간→잠복↑)

▷스킬: 은신D 추적E 영업E 잠복E 청소F…

▷상태: 긴장

토니는 전직 암살자다. 은퇴 후에 술집을 개점한 그는, 방황하는 내게 이 야만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준 친구다. 정신적인 스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회차 때처럼 이번에도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지만, 걸리적거리는 라누벨도 있고, 오늘은 우정을 되찾으려고 찾아온 게 아니다.

나는 암시장에서만 쓰이는 ‘약속의 언어’를 읊었다.

“토니. 좋은 술이 조금 들어왔는가?”

“원하시는 가격대를 말씀해주시면 조금은 맞춰드리겠습니다.”

옳거니!

너무 이른 타이밍이라서 ‘약속의 언어’가 다르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기우였던 모양이다.

내심 쾌재를 부르며 대화를 이었다.

“토니. 세 번 말하게 하지 말게.”

“헛! 소인이 실례했습니다.”

내 옆자리에 엉덩이를 찰싹 달라붙어 앉은 라누벨이 “용사님. 한번 말씀하셨어요.”라고 눈치 없이 속닥거렸지만, 깔끔히 무시해줬다.

질문 1번, 이름 2번.

합쳐서 3번이다.

“나리께선 운이 좋으십니다. 오늘 들어온 27년산 흑맥주 블랙드래곤(Black-Dragon)입니다. 구운 양고기를 곁들이시면 그 풍미가 더욱 살아납니다.”

오늘 들어온 술.

다음 암시장의 시간과 장소를 알려준다.

예를 들어, 토니가 이틀 전에 좋은 술이 들어왔다고 하면 “이틀 후에 열립니다.”라고 해석하면 된다.

그리고 흑맥주 ‘27년산 블랙드래곤’은 암시장의 정확한 위치를 가리킨다.

여기에 추가로, 술을 따르는 바텐더의 표정과 방향에 따라 약속장소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오늘?”

“그렇습니다.”

“벌써 술을 개봉한 건 아니겠지?”

경매가 벌써 시작했다면 다음을 노리는 편이 낫다.

“그랬다면 다른 술을 소개해드렸을 겁니다.”

“아아, 미안하네. 내가 의심이 많아서. 토니. 묻는 김에 하나만 더. 양고기의 질은 좋은가?”

구운 양고기.

이번 암시장의 주력상품이 ‘노예’란 뜻이다.

민주주의, 평등사상이 지배적인 지구에선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 야만적인 세계에선 노예가 제법 흔하게 거래된다.

지역마다 법이 조금씩 다른데, 대다수 나라가 전쟁포로 외 인간의 노예화를 금지했다.

그렇기에 불법이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토니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이 바닥에서 허세와 과장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니 이번 암시장에서 경매될 노예들은 객관적으로 좋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게는 무척 만족스러운 소식이다.

“주문은 그대로 양고기 2인분.”

“2인분.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불법적인 어둠의 경매장 2인석을 예약했다.

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