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화
[2회차] 딩동! 딩동!
우중충한 술집을 나온 우리는 바텐더 토니에게 들은 암시장 약속장소로 조금 빠르게 이동했다.
원래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라누벨이 양고기만 먹기엔 느끼하다며 샐러드랑 이것저것 추가로 주문하는 바람에 꽤 지체됐다.
실컷 먹고 만족한 라누벨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왜?”
“용사님. 그 바텐더를 아세요?”
“토니? 잘 알지.”
순진한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여자와 약육강식(弱肉强食)을 가르쳐준 멋진 친구다.
내가 용사만 아니었다면 함께 사업을 벌였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어떻게 아셨어요?”
“용사니까.”
전직 암살자 토니는 1회차부터 잘 알던 진정한 친구지만, 그렇다고 라누벨에게 거짓말만 한 건 아니다.
용사의 특전은 경험치 5배만이 아니다.
나는 타인의 능력치를 자유롭게 볼 수 있다.
어째서 나만 볼 수 있는지 의아했었는데, 도덕 선생의 얘기를 듣고 깨달았다.
용사 후보가 초반에 똥오줌 못 가리고 강자에게 덤벼서 개죽음당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 능력은 2회차에서도 유효했다.
“와아! 그러면 제 능력치도 보이세요?”
“당연하지. 200레벨.”
▷종족: 휴먼
▷레벨: 200
▷직업: 학자(지식=마술↑)
▷스킬: 마법A 마술A 매력B 요리B 불로C…
▷상태: 흥미
200레벨.
마왕 페도나르의 최하급 졸개만도 못하다.
하지만 라누벨은 스킬 등급이 매우 높은 편이라서, 잠재력 하나만큼은 무시무시하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상대적으로 일반인은 스킬 등급이 매우 낮다.
어느 수준이냐면….
▷종족: 휴먼
▷레벨: 8
▷직업: 도둑(주간→행운↓)
▷스킬: 시력E 도주F 살인F
▷상태: 긴장
평범한 성인이 되면 딱 저쯤 된다.
라누벨의 허리춤에 매달린 돈주머니로 슬그머니 손을 뻗는 저 청년처럼, 스킬은 물론이고 레벨마저 매우 형편없다.
죽을 때까지.
“앗?!”
라누벨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나도 움직였다.
당황하는 라누벨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자동반사처럼 왼발을 옆으로 쭉 내밀었다.
툭.
내 발에 걸린 8레벨 도둑이 우당탕 자빠졌다.
하지만 라누벨에게서 훔친 돈주머니를 손에서 놓치지 않은 도둑은 잽싸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가 더 빨랐다.
“컥?!”
무릎으로 도둑의 등허리를 찍어 눌렀다.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
허리디스크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부위다.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허리 통증은 기본이고, 다리 저림으로 일상생활이 힘들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타격점 중 하나.
“호오? 제법 근성이 있잖아?”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도둑 청년은 돈주머니를 쥔 오른손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빈 왼손을 마구잡이로 휘저으며 저항했다.
만약, 이 시점에 도둑이 과감히 돈주머니를 포기했다면 내게서 도망칠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도둑은 8레벨.
1레벨인 나보다 육체 능력이 우수했다.
하지만 욕심이 화를 불렀다.
손끝에 힘을 준 내 수도(手刀)가 도둑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지난 10년 동안 지겹도록 반복해온 작업이다.
바로 살인(殺人) 말이다.
우득.
목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
오래 앉아있는 학생과 직장인들의 목디스크가 빈번한 부위다. 팔 저림과 어깨 결림으로 고생하기 싫다면 자주 관리해줘야 한다.
이 도둑은 영영 관리할 수 없겠지만.
“깔끔하군.”
옷에 핏방울은커녕 먼지 한 톨 안 묻었다.
지금부터 귀족과 부자들이 바글바글한 암시장에 갈 건데, 옷에 피가 묻어선 체면이 서지 않는다.
라누벨이 돈주머니를 주우며 말했다.
“용사님은 살인에 익숙하신 모양이네요.”
“조금.”
바보 같아서 100번째부터 세길 포기했다.
이건 내가 이상한 게 아니다.
이 야만적인 세계에는 살인자가 정말 많다.
살면서 전쟁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는 남자가 드문 탓이다. 그래서 성인 남성 평균이 3레벨.
반면, 여성은 나이 불문하고 1레벨이다.
각설하고….
내가 죽인 도둑 청년은 8레벨이었다.
평균 3레벨을 한참 초과했다.
스킬 구성으로 보아선 전직 사냥꾼이나 병사도 아니다. 십중팔구 무고한 민간인을 상대로 살인을 수십 번 저지른 악질이란 뜻이다.
직업이 ‘용사’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종족: 아크 휴먼
▷레벨: 4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통역A 불굴F 검기F 암살F 살인F
▷상태: 양호
레벨이 쑥쑥 올랐다.
용사 특전인 경험치 5배 부스터 덕분인데, 도둑치고 레벨이 높아서 들어온 경험치가 짭짤했다.
첫 사냥부터 느낌이 좋다.
“아! 맞다. 용사님. 레벨이 오르지 않으셨나요?”
“올랐지.”
무려 4레벨이다.
지구의 스포츠선수 수준이다.
“그 이유를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살아있는 모든 동식물은 힘을 품고 있어요. 성장하면서 힘이 늘어나는 부류도 있지만, 대다수는 빼앗거나 섭취하는 방법으로만 올라요. 그리고 이렇게 축적된 힘은 능력치의 레벨로 표기돼요.”
여기서부터 지랄 맞은 판타지가 시작된다.
살인을 많이 할수록 강해지는 시스템.
성장형 롤플레잉게임에서는 간단히 넘어가는 설정이지만, 이게 현실이 되면 악몽 같은 서바이벌이 된다.
너의 이웃을 죽여라, 그러면 강해질 것이다!
판타지 신(神)은 변태가 틀림없다.
*
도둑의 시신은 시장을 순찰하는 치안대에 맡겼다.
우리의 신분은 라누벨이 보증해서 무난하게 넘길 수 있었다. 내가 용사란 사실은 당연히 밝히지 않았다.
며칠이면 왕국 전역에 소문이 쫙 나겠지만, 그때까지 최대한 감추는 편이 내가 움직이기 편했다.
“라누벨. 돈주머니 잘 챙겨.”
“네~!”
“귀여운 척하지 마라. 맞는다.”
“우우….”
내 경험상, 오늘은 손버릇 나쁜 손님이 더는 안 찾아올 것이다. 우리의 위험성이 이 바닥에 벌써 퍼졌을 테니까.
“토니의 손님이십니까?”
어느 음습한 골목.
암시장으로 향하는 약속장소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삐쩍 마른 청년이 정중히 내게 질문했다.
판타지 세계의 대륙 전역에서 암약하는 암흑상회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 보안은 가히 결벽증에 가까워서, 꼬리를 잡아도 몸통에 도달하기 힘들다. 머리는 1회차에서도 끝내 찾지 못했다.
“손님이 아니라 원수다.”
나는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고 약속된 암호를 말했다.
“하핫! 저를 따라오십시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청년은 바로 앞장섰다.
그리고 도착한 2층 목조건물.
겉보기에는 무척 평범했다. 그 내부도 어느 방에 들어서기 전까진 왕국 수도의 유복한 가정집이랑 똑같았다.
라누벨은 바닥에 그려진 도형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공간이동 마법진이네요. 들어가는 재료가 엄청 비싼데….”
공간이동 마법진.
이름 그대로, 공간을 이동하는 마법진이다.
우수한 마법사가 그린 이 마법진에 충분한 촉매를 넣고 약속된 명령어를 읊으면 누구든 발동시킬 수 있다.
“암시장 애들은 철두철미하거든.”
공간이동 마법진은 저렴한 물건이 아니다.
하지만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자본과 상품, 고객의 안전과 신뢰를 고려하면 오히려 싼 편이다.
라누벨은 계속 두리번거렸다.
“와…. 전혀 몰랐어요. 수도의 암시장이면 당연히 수도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줄 알았는데.”
“촌년처럼 일일이 놀라지 마.”
“우우…. 용사님이 이상한 거예요.”
라누벨이 나를 ‘용사님’이라고 몇 번을 불러도, 우리를 여기까지 안내한 청년의 표정은 담담했다.
우리끼리 미리 약속해둔 가명쯤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손님. 이걸 써주십시오.”
우리는 정체를 감추는 용도의 가면을 받아서 착용했다.
나는 늑대탈, 라누벨은 여우탈.
가면 없이 암시장을 당당히 돌아다니는 관심종자가 간혹 있지만, 앞으로 여기저기 얼굴 팔릴 용사인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조금 서둘러줬으면 하는데.”
“네. 손님.”
우리가 가면을 쓰고 마법진 위에 올라간 걸 확인한 청년이 ‘약속된 명령어’를 작게 중얼거렸다.
곧, 빛에 휩싸인 마법진이 발동했다.
번쩍!
우리는 순식간에 목조건물에서 어딘가로 이동했다.
그곳은 어두컴컴한 지하였다.
나는 라누벨이 빛을 밝히는 마법을 쓰려는 걸 제지했다. 주위에 잠복 중인 경비들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는 내 1회차 경험에 있는 장소였다.
왕국 수도의 서쪽에 자리한 숲 아래에 땅을 판 암흑상회가 만든 비밀아지트.
사이비종교에 심취한 어떤 멍청이가 여기서 악마소환을 하기 전까지는 암시장으로 종종 이용됐다.
나도 순수한 손님으로 몇 번 방문했었다.
“저희 매장을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중년의 안내인이 정중히 인사해왔다.
나는 고개만 살짝 까딱여준 후에 질문했다.
“경매는?”
“곧 시작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짧게 설명 후 예약석으로 모시겠습니다. 입찰을 원하시면 좌석 앞의 종을 살짝 누르시면 됩니다. 무조건 선금(先金)이고 화폐와 보석만 취급합니다. 스스로 가면을 벗거나 신분을 밝혀서 발생한 손해와 문제는 저희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미 알던 내용이다.
하지만 라누벨은 처음일 터.
“깍두기 아가씨. 안내인의 설명 잘 들었지?”
“저는 깍두기가 아니라 라- 우읍?!”
“너는 그냥 입 다물고 있어라.”
“......”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라누벨의 입술에서 손을 뗐다.
고고학자 라누벨.
판타지아 중앙대륙에서 제법 유명하다.
그런데 암시장에서 이름을 밝혀서 어쩌자고?
만두 국왕에게 돈을 왕창 뜯어낸 것까진 좋았는데, 그 관리자가 영 불안했다.
“절 따라오십시오.”
우리는 안내인의 인도를 받으며 어두운 터널을 빠르게 이동했다. 절대로 여기선 사고 치면 안 된다.
생매장되고 싶지 않다면.
“용사님. 폭발 마법진이 사방에 설치되어 있어요.”
라누벨이 소곤소곤 알려줬다.
나도 안다. 아니, 1회차 경험으로 절절히 통감한다.
“지하 5층 깊이에 파묻히기 싫으면 여기서 절대 까불지 말라는 깊은 뜻이지.”
“아하!”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넓은 공간에 도착했다. 지하이기에 창문 하나 없었지만, 마치 지상의 낮처럼 밝고 공기는 쾌적했다.
“유익한 시간 되십시오.”
공손히 인사한 안내인이 떠났다.
우리가 안내받은 장소는 방송사 시상식장을 연상시켰다.
그 형태는 관람석 쪽으로 돌출된 트러스트 무대(Thrust stage). 상품인 노예를 3D로 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모든 손님은 프라이버시를 위해 동행별로 떨어지게 배치됐다.
좌석마다 배정된 원형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음료와 다과, 순금 탁상종이 준비되어 있다.
여기가 바로 암시장.
용사님 보정이 활약할 장소다.
“...그럼,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짝짝짝!
짝짝!
손님들의 무미건조한 박수를 받은 사회자가 인사말을 마치고, 쇠고랑을 찬 첫 번째 상품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악마의 영토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입니다! 온몸에 난 이 흉터들이 보이십니까? 강력한 악마를 쓰러트리고 죽어가는 그를 저희가 운 좋게 발견해서 치료했습니다! 은혜를 갚기 위해 스스로 노예를 자처한 역전의 용사! 검투사나 경호원으로 안성맞춤입니다!”
정말 그럴까?
그의 능력치를 확인해보자.
▷종족: 휴먼
▷레벨: 11
▷직업: 전사(전쟁→체력↑)
▷스킬: 행운B 생존E 검술F
▷상태: 불안
역전의 용사는 개뿔!
아무리 포장해도 내게는 안 통한다.
행운만 이상하리만치 높은데, 허풍으로 가득한 저런 약골을 돈 주고 사는 옹이구멍은 이 암시장에 없다.
여기는 한두 푼 나가는 벼룩시장이 아니다.
상품을 보는 안목들이 대단히 높….
딩동!
딩동!
딩동!
다들 돈이 많은 모양이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