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7화 (7/430)

 007화

[2회차] 암시장이라면 당연히…

“아! 용사님의 계획을 알겠어요! 뛰어난 노예를 사서 동료로 영입하시려는 거죠? 고대의 용사님들이랑 비슷한 발상을 하시네요!”

기대에 찬 라누벨의 두 눈동자가 은하수처럼 반짝거렸다.

나는 그녀의 추측을 마냥 부정할 수 없었다.

1회차 때, 정말 그랬던 적이 있었다.

노예 사냥꾼들에게 끌려간 동족을 구하려다가 자기마저 붙잡힌 멍청한 여자를 암시장에서 비싸게 샀었다.

미래의 요정왕이라고….

대가리에 인간혐오만 들어있는 민폐 캐릭터다.

딩동!

딩동!

그 와중에도 경매는 계속됐다.

11레벨 전사에 대체 얼마를 꼬라박는 걸까?

귀족 특유의 자존심 싸움으로 왜곡되면서 역전의 용사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 사람들, 전부 제정신이 아니다.

“그나저나 용사님. 저 노예분 엄청나게 강할 것 같아요. 온몸에 난 명예로운 흉터와 부리부리한 눈썹을 보세요. 아! 그래도 독설하는 용사님이 더 멋지시지만요!”

“말을 말자.”

행운만 높은 약골 전사가 마침내 팔려나갔다. 대형범선 5척은 살 수 있는 터무니없는 고액에.

내 돈이 아닌데도 현기증 났다.

“아쉽네요.”

“깍두기 아가씨. 아쉬워할 거 없어. 경매는 이제부터 시작이야. 초장부터 저리 지갑을 헤프게 열면, 나중에 정작 사고 싶은 상품이 나와도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해.”

돈을 지나치게 아끼다가 전부 놓칠 수도 있지만.

사회자가 두 번째 상품을 소개했다.

“그녀의 고운 피부를 보십시오. 악마에게 점령당한 어느 귀족 가문의 영애입니다. 길가에서 우연히 주웠는데요. 정말로 귀족인지는 밤의 신사께서 직접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드레스와 장신구는 서비스!”

정말로 귀족인지 한 번 볼까?

▷종족: 휴먼

▷레벨: 1

▷직업: 노예(경험치 50%)

▷스킬: 기품D 매력E 가무E 사교F 예절F…

▷상태: 굴욕

직접 알아볼 것 없이 귀족 영애가 확실했다. 보유한 스킬들이 판타지 서민 아가씨가 가지기 힘든 부류들이었다.

“용사님. 저 숙녀분….”

“미리 말해두겠는데, 우리는 놀러 온 게 아니다. 왕국에 충성해온 귀족을 구하는 건, 왕가의 일이지 우리 역할이 아니야. 명심해.”

“네….”

내 기세에 눌린 라누벨이 침묵했다. 그리고 크게 걱정할 거 없다.

몰락했어도 귀족은 귀족. 학식과 예의범절을 갖춘 젊은 여성을 섹스파트너로 찾는 멍청이는 없다.

그녀는 영부인이나 영애의 전속시녀로 들어갈 확률이 매우 높다. 과거만큼 안락한 생활은 어렵겠지만.

라누벨의 상상처럼 끔찍한 대우는 안 받는다.

“축하드립니다!”

짝짝짝!

어느 귀족에게 비싸게 팔린 여성 노예가 퇴장했다. 낙찰된 몸값이 낮지 않은 거로 봐선, 그녀의 운명은 썩 괜찮을 것이다.

자고로 노예의 대우는 몸값에 비례하는 법이다.

라누벨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괜찮을까요?”

“괜찮아. 우리가 데려가서 어설프게 돌봐주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하고 행복할 거다. 내가 보장하지.”

비싼 노예를 함부로 다루는 주인은 없다.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 안다는 듯이 말씀하시네요.”

“알다마다.”

너무 잘 알아서 탈이다.

1회차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이 자리에 요정왕이 있었다면, 경매장을 힘으로 엎어버리고 모든 노예를 해방하자고 주장했을 것이다. 아니, 용사인 내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먼저 돌진하곤 했었다.

그 뒷수습은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그년 뒤치다꺼리로 고생한 걸 생각하면….

“이번에 만나면 대갈통을 쪼개버려야지.”

“용사님?”

“...아무것도 아니야.”

이 뒤부터 경매는 탄력을 받아서 빠르게 진행됐다.

나도 몇 번씩 간 보고 빠지길 반복했다. 팍팍 지르고 싶었지만, 돈주머니의 금화가 무한하지 않기에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왔다.

▷종족: 휴먼

▷레벨: 286

▷직업: 용병(재산→생존↑)

▷스킬: 창술C 근성D 생존D 야영E 요리E…

▷상태: 공복, 나약

비틀거리며 무대로 올라온 남자는 넋을 놓고 있었다. 동공이 풀려있고 몸 상태도 영양실조로 삐쩍 말라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의 가치가 또렷하게 보였다.

286레벨.

스킬과 상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는 지금까지 나온 어떤 노예보다도 레벨이 높았다.

그게 중요하다.

“왕국 북부에서 활약하던 용병입니다. 식사를 오랫동안 거부해서 꼴은 이렇지만, 뛰어난 창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건강만 회복하면 훌륭히 써먹을 수 있을 겁니다!”

사회자가 열심히 애써보지만, 손님들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삶의 의욕 없는 노예를 설득하는 것도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끝끝내 설득에 실패하면?

돈만 날리게 된다.

그렇기에 입찰을 꺼릴 수밖에 없다.

“입찰해.”

하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저 용병은 내가 딱 원하는 맞춤형 노예였다.

“네!”

딩동!

내 지시를 받은 라누벨이 탁상종을 눌렀다.

뒤늦게 다른 손님들도 입찰경쟁에 뛰어들었지만, 간만 보고 썰물처럼 빠르게 포기했다.

“더 없으십니까?”

용병 노예의 동태 같은 눈깔을 보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여기 모인 손님들은 자신의 안목을 믿었다.

멀쩡했다면 입찰가가 5배쯤 뛰었으리라.

좌중을 쓱 둘러본 사회자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셋, 둘, 하나…. 축하드립니다! 늑대탈 손님. 좋은 물건을 아주 저렴하게 구매하신 겁니다!”

축하를 건네는 사회자의 말대로다.

싸게 샀다. 주위의 다른 손님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남의 능력치를 볼 수 없는 자의 한계다.

짤랑…!

돈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낸 라누벨이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그리고는 내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묻는다.

“용병의 능력치를 보셨나요?”

“어. 286레벨.”

“세상에나…. 대박! 알렉스 씨에 버금가네요!”

미래의 검왕이 섭섭해할 발언이다.

이 용병의 레벨이 상당히 높은 이유는 간단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많이 죽인 덕분이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알렉스가 본격적으로 강해져서 ‘검왕’으로 불리는 시기는, 수호하던 왕궁이 악마들의 습격으로 폭삭 주저앉은 이후부터다.

그전까진 레벨이 낮아서 약했다.

평상시의 왕궁은 지극히 평화로운 탓이다. 평균 5레벨짜리 좀도둑을 잡아서 올릴 수 있는 레벨에는 한계가 있다.

“손님. 열쇠와 계약서입니다.”

“테이블에 놔둬.”

낙찰한 용병 노예는 우리 테이블 뒤쪽에 대기했다.

허튼짓하지 못하도록 수갑과 족쇄를 찼으며, 어깨 좌우에 덩치 좋은 경호원 둘이 감시하듯 붙어섰다.

암흑상회.

악(惡)의 소굴이라도 칭찬해줄 건 칭찬하자.

훌륭한 서비스 정신이다.

그때, 찰그랑 소리를 내면서 여전히 묵직한 돈주머니를 확인한 라누벨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이상한 질문을 했다.

“용사님. 이제 돌아가나요?”

방금 합리적인 소비를 해서 기분이 좋다.

좋게 타이르기로 했다.

“너, 머리 아프니? 쇼핑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

경매는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뺏고 빼앗는 입찰경쟁으로 불붙은 손님들의 씀씀이가 커졌지만, 아직은 지갑 사정이 넉넉한 최적의 타이밍.

이때, 질 좋은 상품이 많이 올라온다.

나도 괜스레 설레고 말았다.

“용사님. 저, 속이 울렁거려요.”

라누벨이 옆에서 맥빠지는 소리를 했다.

사람이 사람을 사고판다.

여기에 거부감을 느낀 그녀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그래도 용케 발끈하거나 폭주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솔직히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다. 그녀가 지하 5층 깊이의 암시장에서 날뛰면 100% 사망이니까.

생매장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

용사라도 예외가 아니다.

“조금만 더 참아.”

라누벨이 보채지 않아도 오래 있을 생각이 없다.

입찰경쟁이 치열한 중반부가 지나면 손님들의 지갑이 급격히 얇아지는데, 이때부터는 암시장도 손님 사정에 맞춰서 변변찮은 상품만 선보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도 손가락 빨면서 구경만 하던 건 아니다. 괜찮은 노예가 나오면 찔러보고 포기하길 반복 중이다.

만두 국왕이 챙겨준 돈주머니는 여전히 빵빵했지만, 도덕 선생의 잔소리 때문에 당분간은 이 돈만으로 버텨야 한다.

오늘의 성과는 용병 노예 하나.

나쁘지 않았다.

“슬슬 나갈….”

지정석에서 막 일어서려던 내 움직임이 뚝 멈췄다. 전혀 상정하지 않았던 변수가 등장한 탓이다.

사회자가 외쳤다.

“대륙 최남단의 유명한 숲에서 주운 요정입니다! 보시다시피 정신은 좀 망가졌지만, 외모와 혈통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순결하죠. 우수한 2세를 바라시는 손님이라면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

“오오!”

“오오!”

요정을 빼놓고 판타지를 논하긴 힘들다.

영어로는 엘프(Elf).

인간의 욕망이 집약된 상위호환이다.

평균수명은 은행나무(2000~3000년)에 버금가며, 왕족으로 불리는 순수혈통은 반영구적으로 산다.

뼈다귀처럼 마른 체형과 뾰족한 귓바퀴가 특징이고, 이 귀에 성감대가 몰려있어서 만지면 예민하게 반응…. 음?

유일한 약점은 번식력.

자연법칙에 따라, 수명이 긴 요정은 출산율이 매우 저조하다. 피임약을 항시 복용하는 수준이다.

설상가상으로, 고자와 성직자처럼 성욕마저 낮다. 요정이 고결하다는 착각과 오해는 여기서 나왔다.

그 결과,

딩동!

딩동!

딩동!

상대적으로 높은 번식력과 왕성한 성욕을 겸비한 인간들의 땅따먹기에 패한 요정들은, 서부개척시대의 북아메리카 인디언처럼 깊은 숲속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사냥감’으로 전락했다.

요정이 지구에 살았다면 환경보호단체 그린피스가 지켜줬겠지만, 이 야만적인 세계에는 밀렵꾼만 존재한다.

“용사님. 저 요정, 이상해요.”

요정이 출품되고부터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한 고고학자 라누벨이 내 귓가에 작게 속닥거렸다. 속이 울렁거린다고 칭얼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우수한 마법사인 그녀도 느낀 게 틀림없다.

저 요정이 특별하다는 것을.

▷종족: 엘프

▷레벨: 851

▷직업: 궁수(궁술=관통↑)

▷스킬: 궁술A 속궁B 시력C 추적D 정령D…

▷상태: 저주, 봉인, 중독, 탈진, 마취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딩동!

경매에 참여했다.

다른 손님들은 요정의 아름다운 육체와 혈통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나는 이 요정이 수컷, 고자, 병신, 추녀라도 상관없다.

레벨만 높으면 장땡이다.

851레벨.

마왕 페도나르가 기르는 애완견이랑 동급이다. 이 레벨대면 중급 악마쯤 될까? 우수한 종족 보정과 스킬 등급이 높으니, 약간 더 쳐줘서 중상급 정도….

하지만 현재는 그런 평가들이 무의미했다.

“상태가 아주 종합비타민이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가장 처음에 걸린 ‘저주’는 악마의 소행일 터. 상급 이상의 강력한 악마에게 패배하면 걸리는 상태 이상이다.

저주는 레벨을 대폭 떨어트린다. 저 요정처럼 800레벨대라면 최대 80레벨까지 낮출 수 있다.

모든 능력 1/10로 감소.

일단 걸리면 살아도 산 게 아닌 셈이다.

저주 뒤에 있는 봉인, 중독, 탈진, 마비는?

이것들은 요정을 생포한 암흑상회에서 반항하지 못하도록 하나씩 다단계로 추가한 게 틀림없다.

사나운 암표범 다루듯이.

딩동!

딩동!

딩동!

입찰경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불꽃축제의 폭죽처럼 금방 흐지부지됐다.

손님들은 이 요정의 레벨을 모르기에 지갑을 활짝 열지 않았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합리적인 가격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요정이 희귀해서 그나마 비싸게 먹힌 거다. 보통은 젊고 우락부락한 전사를 훨씬 높게 쳐준다.

여긴 야만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힘으로 모든 걸 대변한다.

아름다운 여자를 돈으로 흥정하는 남자는 겁쟁이다. 힘으로 얻는 자야말로 진정한 사내대장부로 취급된다.

자신이 꼭 강할 필요는 없다. 노예든 용병이든 사병이든 ‘힘’을 동원해서 상대적 약자의 여자를 빼앗으면 된다.

‘용기 있는 자만이 미녀를 얻을 수 있지.’

맞는 말이다.

하지만 힘이 없으면 미녀를 지킬 수 없다. 그렇기에 미녀보다 전사의 몸값이 더 비싼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판타지인가?

자! 힘차게 눌러주자.

딩동-!

“또 입찰하는 늑대탈 손님! 셉니다! 이 신사분께 도전하실 분, 더 없으십니까?”

모두가 고개를 젓는다.

보기 드문 미색의 요정임은 인정하지만, 저만한 몸값이면 강력한 전사를 하나 더 고용하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한다.

사회자도 이 낙찰가에 대단히 만족하는 눈치.

그가 천천히 초읽기에 들어갔다.

“셋, 둘….”

콰과광-!

바로 그때, 폭음이 경매장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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