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9화 (9/430)

 009화

[2회차] 날아오르라! 경험치여!

팟!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펴며 도약했다.

그러나 기운 빠지게 165레벨의 육체가 시작부터 비명을 지르며 삐꺽거렸다.

레벨이 오르면 조금은 나아질 줄 알았는데, 마왕의 뚝배기를 깬 전성기랑 비교하면 4레벨이나 165레벨이나 잔챙이인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또한 상대적이다.

▷종족: 엘프

▷레벨: 189

▷직업: 궁수(궁술=관통↑)

▷스킬: 궁술D 명중D 채집E 휴식E 검술F…

▷상태: 분투

내 뺨에 상처를 낸 요정 궁수의 능력치다.

보유한 스킬들이 매우 어정쩡하다. 심지어 대응도 어설프다. 자기가 쏘면 당연히 맞으리라 생각하는지 거리를 벌리려고 하지 않는다.

요정이 활시위를 놓는다.

피용―

화살은 일직선으로 돌진해오는 내 급소를 정확히 노렸다. 너무 정직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이봐. 눈동자 굴리는 게 다 보인다고.

탁! 휙! 탁!

나는 화살을 피하거나 칼날로 쳐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던 화살이 바람의 정령이나 마법으로 궤도를 틀거나 빨라지는 판타지 속성이라도 가미되면 모를까, 이딴 평범한 화살은 애들 소꿉장난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예쁜 눈깔로 미리 위치까지 가르쳐준다.

“어, 어떻게...?!”

요정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뒤늦게 후퇴했다. 당황하면서도 잽싸게 활대를 버리고 허리춤의 단검을 뽑는 시도가 훌륭했다.

다만, 대응이 잘못됐다.

화르륵!

내 옆구리를 노리는 불의 정령도 포함해서.

나는 치켜든 바스타드를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히익-?!”

요정이 허겁지겁 단검을 머리 위에 수평으로 들며 막았으나, 온몸의 무게를 실은 내 돌파력을 저지하진 못했다.

정령의 불에 덴 등허리는 무시하고 그러려니 넘어갔다. 뼈와 힘줄만 안 다치면 전투에 전혀 지장 없다.

퍽-

“일단 하나.”

예쁜 머리가 수박처럼 좌우로 쪼개진 요정이 나뒹굴었다.

검술이라고 부를 것도 없었다.

호신용이든 휴대용이든 단검을 선택했으면, 도망치지 말고 이 오빠의 넓은 가슴 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었어야 했다.

단검은 장검보다 사정권이 좁으니까. 하지만 이 어여쁜 요정은 거리를 좁히긴커녕 벌리려고 애썼다.

명백한 경험 부족.

인간을 상대로 싸워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아니면 멀리서 우아하게 활쏘기만 해왔던가.

쨍그랑.

나는 그 자리에서 바스타드를 버렸다.

189레벨로 강화된 요정의 두개골을 쪼개는 과정에서 날이 상해버렸기 때문이다. 완전히 못 쓸 정도는 아니지만, 더 좋은 무기를 막 발견한 참이다.

탁!

핏덩이가 된 요정의 손에서 벗어난 단검을 허공에서 낚아챘다.

스틸레토(Stiletto) 계열로, 이 단검은 검신(劒身)이 가늘고 끝이 매우 뾰족한 게 특징이다.

찌르기에 특화된 암살용 무기인 셈.

나는 공성 병기처럼 묵직한 양손 무기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 스틸레토는 조금 예외였다.

바스타드랑 충돌하고도 날에 흠집 하나 없다.

꽤 공들여서 만든 상등품일지도?

“이놈! 그녀를…!”

직후, 요정 사내가 포효하며 내 뒤편에서 달려든다.

“더한 바보가 있네?”

피부에 닿는 싸한 공기의 흐름으로 진즉 눈치채고 있었지만, 기습할 거면 소리는 지르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양동이나 심리전을 한순간이나마 의심했을 정도로 노골적인 공격이다.

그 습격자의 무기는 검신이 얇고 긴 레이피어(rapier). 비실비실하게 생긴 요정 수컷에게 어울리는 장검이다.

내 취향이랑 완전 정반대지만, 저것도 탐났다.

상대는 오른손잡이.

그래서 나는 왼손에 스틸레토를 쥐었다.

요정이 레어피어로 내 등을 노리며 찔러왔다.

나는 팽이처럼 몸을 회전하면서 스틸레토를 역수로 쥐고 비스듬히 세워서 레이피어의 칼날에 맞댔다.

틱, 티딕!

금속끼리 마찰하며 푸른 불꽃이 튀겼다.

나는 그 상태에서 열차 레일을 타듯 레이피어의 칼끝에서 손잡이까지 스틸레토로 긁으며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안녕?”

“헉…!?”

땀내 나는 사나이들끼리 진하게 포옹할 수 있는 거리. 단검이 극단적으로 유리한 타이밍이 왔다.

그걸 아는 요정 사내의 시선이 스틸레토에 꽂혔다. 이 단검의 다음 동선을 경계하는 것이다.

진짜 알기 쉬운 친구다.

이 때문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은 나는, 아까부터 빈손이라 심심한 오른손을 꽉 말아쥐었다.

그리고 힘찬 주먹으로 답례했다.

퍽-

“꾸엑?!”

내 오른손이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요정 사내의 갸름한 턱주가리에 정통으로 박혔다.

주둥이가 돌아가고 고개는 위로 젖혀진다.

이 친구의 왼손도 부랴부랴 뭔가 하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거기까지 신경 쓰기엔 내가 너무 바빴다.

덥석.

정신을 놔버린 요정 사내의 모가지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방패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날아오는 화살과 정령의 공격들을 막아냈다.

푹, 푹, 퍽, 펑, 푹….

이 친구는 레벨이 높아서 엔간한 방패보다 튼튼했으며, 요정 특유의 마른 체형이라 가볍기까지 했다.

게다가 아직 살아있기에 더욱 가치 있었다.

화살 공격이 잦아들었다.

“요정 친구. 내 무기랑 바꾸자.”

“컥-?!”

스틸레토를 요정 사내의 복부 깊숙이 꽂았다. 주요 혈맥은 피했으니 쉽사리 죽진 않을 것이다.

왼손에 우정의 증표로 교환한 레이피어를 쥐고, 오른손에는 방금 사귄 친구를 방패처럼 들고 돌격했다.

우리의 우정에 놀란 요정들이 우왕좌왕했다.

아직 살아있는 동족을 공격하는 걸 망설이고 있었다. 그래서 결정을 좀 도와주기로 했다.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꺅-?!”

“이걸로 둘.”

지팡이를 쥔 요정 소녀의 귀여운 머리통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러자 십여 마리의 정령이 전장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노릇노릇 잘 익은 내 허리의 복수다.

촤아악-!

목의 절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리고 바로 옆.

머리가 실종된 귀여운 요정의 피를 뒤집어쓴 예쁜 요정이 친구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횡설수설했다.

나는 그녀의 벌어진 입에 레이피어를 찔러 넣어줬다.

“꺄악-?!”

“노래를 참 잘하네. 셋.”

뇌 중에서도 호흡, 심장 박동, 소화 운동 조절 등을 관장하는 연수(延髓)를 헤집어놓았으니 살아날 가망은 없다.

그리고 이 친구도 슬슬 한계에 달했다.

“우리의 짧은 우정은 이만 잊을게. 넷.”

우득.

방패로 잘 써먹은 요정 사내의 모가지를 부러트렸다. 과다출혈로 자연사해버리면 경험치가 증발해버리기 때문이다.

우정의 증표로 교환한 스틸레토는 회수하고, 그의 시체는 불의 정령이 내뿜은 화염방사에 활활 타버렸다.

일반적인 시체는 0레벨. 태생부터 튼튼한 종족을 빼고는 방패로 쓸 수 없는 고깃덩어리다.

특히, 요정은 개뼈다귀처럼 약하다.

“저 인간을 죽여-!”

“용서 못 해!”

격분한 요정들이 일제히 내게 활과 지팡이 등을 겨누는데, 그건 대단히 경솔한 행동이라고 충고해주고 싶다.

이곳엔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다.

암시장 경비원들은 동료의 죽음에도 냉철하게 전투에 임했다. 분노한 요정 공주님이 나를 신경 쓰지 못할 만큼 거칠게 침입자들을 밀어붙였다.

반면, 요정들은 감정에 쉽게 휘둘렸다.

긴 수명을 가진 요정들은 이웃, 동료, 친구 같은 주변인들이랑 수백 년씩 함께하는 탓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공동체 생활하면서 가족 같은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이건 장점인 동시에 약점이다.

그리고 현재는 이 약점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탈출구를 봉쇄해!”

“늑대탈 손님을 엄호한다!”

“측면 지원을 서둘러!”

암시장 경비들이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가족 같은 동료들의 엽기적인 죽음에 냉정함을 잃은 요정들이 빈틈을 마구 보인 결과였다.

요정들이 도미노처럼 줄줄이 무너졌다.

“아아! 이런…!”

마른 지푸라기마냥 픽픽 쓰러지는 요정들의 비참한 최후를 볼 때마다 안타까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내 아까운 경험치들이…!”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럴수록 요정 공주님의 정신상태도 심각해졌다. 농약 한 사발 들이킨 미친년처럼 정령들이랑 마구 날뛴다.

그런데도 강했다.

레벨을 더 올리지 않으면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될 터. 소심하게 싸울 때가 아니었다.

손가락 한두 개쯤 잘릴 각오로 임하자.

내 성장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정말로 손가락이 싹둑 잘렸다.

위자료로 짭짤한 경험치를 받았다.

“비겁한 놈. 연약한 척하다가 검기를 쏘다니.”

나는 맨손으로 칼날 잡기를 시도했다가 잘린 오른손 검지를 흙먼지 속에서 주웠다.

우쭐대다가 손가락 대신 목이 날아갈 뻔했다.

약 10초 전에 싸늘한 주검이 된 가해자의 깨끗한 전투복으로 손가락 절단면에 묻은 흙먼지를 꼼꼼히 닦았다.

톡.

그리고 세심하게 원위치에 붙였다.

살짝 삐뚤어진 것 같지만, 기분 탓일 것이다.

“허억, 헉, 흐윽…. 네놈은 악마냐?”

1회차 때처럼 또 혼자 살아남은 미래의 요정왕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게 질문했다.

분노를 넘어서서 질린 얼굴.

진심으로 나를 악마로 착각하는 듯했다.

“피차 몰살시켜려다가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내 간섭으로 역사가 바뀌었다.

인질극을 벌이지 못한 암시장 측은 폭주하는 요정 공주님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고, 끝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이곳에서 150레벨대 인간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는, 공주님의 달라진 레벨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종족: 아크 엘프

▷레벨: 288

▷직업: 주술사(축복=정령↑)

▷스킬: 정령S 기품A 매력A 궁술B 축복C…

▷상태: 골절, 출혈, 탈진, 자책

무려 4레벨이나 올랐다.

그리고 나는?

▷종족: 아크 휴먼

▷레벨: 203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통역A 살인B 투기C 광기D 도발E…

▷상태: 재생, 혼돈

이 암시장에서만 199레벨이 상승했다.

...스킬?

사소한 변수니 신경 쓸 거 없다.

이번에 용사 특전 경험치 5배 효과를 톡톡히 봤다. 평균 200레벨대 요정을 죽일 때마다 레벨이 쭉쭉 오르며 강해졌다.

내 꿈을 위해 경험치가 되어준 요정 친구들의 성원과 협찬에 감사하는 바이다.

이 기세대로 매일 레벨을 올린다면 6개월 안에 마왕 멱살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남은 경험치는 하나.

절대 놓쳐선 안 되는 옛 동료였다.

실비아의 상태는 탈진, 골절, 출혈. 그것도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암시장 최정예들이 확실하게 그녀의 생명을 깎아놓았다는 뜻이다.

그녀는 이제 한걸음 내딛기도 힘겨운 상황.

하지만 최고의 공격수단은 여전히 유효했다.

“악마! 네놈은 여기서 나와 함께 죽는다! 땅의 정령들이여!”

요정 공주가 격렬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자신을 따라왔다가 죽은 동료와 친구들의 주검을 버려두고 도망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요정 시체는 제법 비싸게 거래된다.

처녀가 ‘순결’을 상징하듯이, 요정의 피와 뼈는 ‘영원’의 의미가 담긴 마법 촉매로 자주 쓰인다.

정육점 고기처럼 해체된 채로.

인간혐오에 찌든 실비아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여기를 우리 모두의 무덤으로 만들 생각인가? 웃기는군. 이 개미지옥으로 동료와 친구들을 초대한 건 너잖아. 안 그래?”

이 공주는 땅의 정령으로 암시장을 함몰시킬 계획이었다.

자신도 함께.

“악마! 네놈 때문이야! 네놈만 없었어도 이렇게 되지 않았어! 우리가 이겼을 거라고! 이기면 문제없었어!”

“패배할 각오도 없이 동료를 끌어들이지 마라. 민폐니까.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악마라고 우기는데….”

나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요정들의 새빨간 피로 물든 늑대탈을 벗었다.

두두두, 뚝-

암시장을 무너트릴 기세던 땅의 정령들이 파괴를 멈췄다. 요정 공주가 간절히 부탁해도 꼼짝하지 않았다.

친구인 그녀가 죽는 게 싫어서?

그렇지 않다.

“어째서 이 악마를 감싸는 거야-?!”

실비아가 미지(未知)의 상황에 혼란스러워했다.

절대적으로 신뢰해온 정령들의 배신.

그 때문에 넋을 놔버린 요정 공주님의 심장에, 나는 스틸레토를 자연스럽게 꽂아줬다.

그런 후, 이유를 가르쳐줬다.

“정령은 말이지, 친구라면서 살인기구처럼 부려먹는 네년의 거짓된 우정보다 용사님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해.”

정령들은 자연을 사랑한다.

그 자연을 지키려면?

용사님이 마왕 페도나르를 토벌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전에 생매장으로 죽어선 정말 곤란하다.

“용사…?”

실비아가 두 눈을 부릅뜨며 되묻는다. 내가 농담이라고 해주길 바라듯이.

“3번째는 만나지 말자. 실비아.”

털썩.

미래의 요정왕은 용사님의 발판이 되었다.

영광으로 알도록!

*

▷당혹: 그래서 요정들을 몰살시켰다고요? 분노와 복수가 결합하면 잔인함이란 딸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딸은 성가시고 어려운 존재죠. 선은 납처럼 무겁고, 악은 깃털처럼 가볍습니다. 이래선 마왕을 쓰러트려도 졸업하기 힘들 것 같은데요.

억울합니다! 존경하는 도덕 선생님!

저 난폭한 요정들이 먼저 절 공격했다고요!

▷판결: 인내는 평화를 거두어들이고 성급함은 후회를 거두어들입니다. 참았으면 좋게 해결되지 않았을까요? 인내와 세월은 힘이나 분노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강한수 학생. 서두르지 말고 주위를 차분히 돌아보세요. 무엇이 보이나요?

...경험치?

검왕 알렉스를 이젠 죽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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