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화
[2회차] 우리 다 같이 건배!
▷당황: 약한 동료를 경험치로 보지 마세요! 거인의 어깨 위에 앉은 난쟁이는 거인보다 더 멀리 보고, 교황과 농부가 뭉치면 교황 혼자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대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웃는 얼굴로 화합을 다져보세요. 숙제입니다.
도덕 선생님은 어려운 숙제를 내주고 떠났다.
이번에는 이틀 뒤에 온다나?
“그동안 고민 좀 해봐야겠는걸….”
“뭘요?”
내 혼잣말을 주워들은 라누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라누벨.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니?”
“저요? 용사님 보좌요!”
“내가 암시장 뒷수습을 맡긴 거로 기억한다만. 요정들의 시신을 고향에 보내는 작업만 해도 그리 간단치 않을 텐데.”
요정의 시신은 마법 소재로 쓰임새가 많다.
그 암시장에 그냥 놔두면 누군가 정육점 고기처럼 부위별로 발라서 마법사들에게 비싸게 팔아치울 것이다.
이것만은 막아야 했다.
고생은 내가 했는데 남이 먹게 놔둘 순 없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꽤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함께 싸워준 암시장 전우들의 유가족도 챙기지 않으면 안 됐다. 그 많은 요정 시신을 지하 5층에서 왕궁까지 옮기는 것도 일이다.
그래서 가진 돈주머니의 금화를 활짝 풀어서 요정들의 시신을 저렴하게 매입하는 방향으로 진행했다. 암시장 관계자에게 운반비를 지급해서 왕궁까지 안전하게.
“요정왕이랑 협상은 어떻게 됐어?”
“마법구슬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서 잘 풀렸어요. 요정 나라 사절단이 왕국에 조만간 방문하기로 했답니다. 용사님이 강력하게 주장하신 대금도 같이요.”
“그래.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암시장에서 요정 시체를 인수하기 위해 돈주머니를 탈탈 털었다. 누군가 다시 채워주지 않으면 진짜 곤란하다.
세상을 구할 용사라고 해서, 마을이나 도시 주민들이 공짜로 재워주고 입혀주지 않는다. 힘들고 지친 여행자를 상대하듯 바가지나 안 씌우면 다행이다.
여행자금이 없으면, 소설이나 만화 속 용사처럼 용병업이라도 뛰어서 품팔이하지 않으면 굶어 죽기 딱 좋다.
판타지 3일 차.
모두가 내 레벨을 착각하고 있다.
4레벨로.
그렇기에 요정왕도 자기 딸이 용사에게 덤볐다가 역으로 살해당했다고는 전혀 상정하지 못했으며, 암시장 경비도 전멸하면서 내 활약을 기억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양패구상(兩敗俱傷)으로 라누벨도 알고 있다.
“이봐, 용사. 장의사로 전업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이런 소문은 정말 사소한 문제다.
왕궁전용훈련장에서 왕궁기사들을 가르치던 알렉스가 나를 발견하고는 유치하게 도발해왔다.
이틀 뒤에 여기서 신고식이 있을 예정이다.
그날을 고대하는 모양이다.
너두? 나두!
▷종족: 휴먼
▷레벨: 291
▷직업: 검객(체력=검술↑)
▷스킬: 검술S 체력A 철벽B 내성B 불굴C…
▷상태: 기대
검왕 알렉스는 타고난 전위(前衛)다.
영어로 탱커(Tanker).
사람들은 세상을 벨 수 있는 검술이 있어야만 대단한 검사라고 착각하는데, 전장에서 실질적으로 원하는 검사는 아군을 지켜주면서 오랫동안 많은 적을 벨 수 있는 자다.
알렉스가 훗날 ‘검왕’이라고 불리게 되는 이유는, 철벽처럼 아군을 보호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단독임무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적진 한복판에 떨어져도 고립되지 않고 유유히 돌아올 수 있는 검술과 맷집을 보유하고 있었다.
검왕의 상위호환이 ‘용사’다.
“맞아. 장의사로 전업했지. 알렉스, 네 관을 짜기 위해.”
“...주둥이로는 마왕도 잡겠군.”
“글쎄.”
내 1회차 경험을 반추하자면, 분하게도 마왕 페도나르가 나보다 입담이 세다. 주둥이 배틀에서 완패했다.
이번에는 꼭 이기고 말리라!
“용사. 이틀 앞당겨서 오늘부터라도 지도해줄 수도 있다. 하루빨리 내게 사과받고 싶다면 시장이나 기웃거릴 때가 아닐 텐데?”
“안 급하니 꺼져.”
훈련을 시작하면 레벨이 들통난다.
요정왕이 나를 의심하는 전개만은 피하고 싶다. 겉으로는 4레벨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레벨은 조만간 알리바이를 만들 예정이다.
깊은 숲속의 고대 유적에 들어가서 레벨을 올렸다고, 얼렁뚱땅 둘러댈 때까지만 숨기면 된다.
‘나도 제법 성장했는걸?’
도덕 선생의 가르침을 실천해냈다.
성실하게 ‘인내’하고 있다.
예전의 나였으면 울컥해서 벌써 알렉스의 멱을 땄을 텐데, 그의 도발을 ‘물’처럼 흘려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나는 어쩌면 천재가 아닐까?
“용사님. 그래서 오늘은 뭘 하실 거예요?”
라누벨이 경계하듯 묻는다.
어제 암시장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걸까? 이해하기 힘들었다. 시체로 산을 쌓은 것도 아닌데.
“새로운 동료랑 친분을 다져야지.”
“아…. 그 용병분.”
요정들 문제로 어제부터 계속 깜빡하는데, 원래는 내 경험치로 치환될 예정이었던 노예 하나를 살려서 왕궁까지 데려왔다.
“건강은 좀 회복했어?”
약한 동료를 경험치로 보지 말라는 도덕 선생의 경고도 있어서, 여행 짐꾼으로라도 쓸 계획이다.
1회차에서는 고대문명의 유산이나 전설의 유적을 찾는답시고 판타지아 오지까지 탐험했었지만, 이번에는 시간을 허비해가며 이곳저곳 돌아다닐 생각이 없었다.
내게 필요한 곳만 골라서.
“네! 노예가 아닌 용사의 동료가 된다는 말을 듣고부터 의욕이 엄청나요! 왕궁주방장이 식겁할 정도로 먹어대면서 빠르게 체력을 회복하는 중이랍니다!”
“그거 다행이군.”
286레벨에 어울리는 회복속도다.
판타지에서 서바이벌 형식으로 제공하는 레벨 효과는 엄청나다. 롤플레잉게임 같이 원하는 능력치를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올릴 수 없는 대신, 전반적인 상승효과가 있다.
수명, 내성, 민첩성, 힘, 재생력, 오감, 마력….
전부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하! 진짜 생각할수록 열 받네. 내가 10년 동안 올린 레벨이 회귀 한 방에 초기화되다니.’
이번 회귀는 나에게 확신을 심어줬다.
판타지는 결국 판타지.
교직원 일동이나 그 배후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내 레벨과 스킬을 초기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마법, 마술, 무공, 정령, 각인, 축복….
용사의 경험치 5배 특전을 받는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판타지 스킬들.
그 전부가 ‘내 것’이 아니었다.
초월적인 누군가 개입하면 사라질 허구(Fantasy).
과학만이 유일한 진실이고 힘이다.
앞으로는 장비 수집과 의존도 또한 대폭 낮출 생각이다. 지구로 돌아갈 때 압류되면 의미 없기 때문이다.
용사 전용무기인 성검(聖劍)도 포함해서.
마왕을 쓰러트리고 지구로 귀환하는 모든 용사에게 휴대용 핵무기를 쥐여줄 리 없었다.
지구를 부술 의도가 아니라면.
“흠! 생각보다 갈만한 곳이 별로 없네….”
판타지 세계에서 판타지를 제외하면 남는 게 별로 없었다.
과학기술은 모든 분야에서 지구가 압도적이다. 그나마 있는 과학마저도 여기선 ‘마도공학’이라고 하여, 과학과 마술을 섞은 족보불명의 퓨전이 주류다.
내가 추구할 힘은 아니다.
“용사님. 오늘은 어디 가시는데요?”
라누벨이 깜찍하게 목소리를 깔며 묻는다.
귀여운 척하지 말라고 지적하기도 지친 나는 머릿속으로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계산해봤다.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야. 왕국의 공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해서 거리를 좁혀도 이틀. 오늘부터 여행 갈 채비를 서둘러야 해. 요정 나라 사절단에게 대금을 받자마자 출발한다.”
두 발로 걸어서 이동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교통비가 좀 들더라도 빠르고 편안하게 갈 생각이다.
비룡, 마차, 공간이동 마법, 대형범선, 마도열차….
찾아보면 여기도 교통수단이 은근히 많다.
이것들의 가장 큰 장점은?
안전한 마을 밖으로 나와서 위기를 자초한 마을주민이나, 수상한 무리 등에게 발목 잡힐 확률이 대폭 낮아진다.
돈으로 시간과 안전을 살 수 있다.
그것이 내 지론이다.
“먼 거리면 국왕 폐하의 윤허가 필요할 듯한데요.”
“해줄 거야. 만두 국왕이 원하는 것쯤은 잘 알거든. 일을 마치자마자 꼭 돌아온다고 약조하면 순순히 허락해줄 터. 감시자로 알렉스가 따라올지는 미지수지만.”
“유적인가요?”
“아니. 위대한 존재를 만나러 간다.”
위대하고 위대하며 위대한 존재다.
내 정신적인 스승이 술집 바텐더 토니라면, 찾아뵈려는 존재는 물리적인 힘의 스승이다.
우리는 정말 우연히 만났다.
“고룡(古龍)…?”
“그런 나잇값 못하는 날도마뱀이랑 비교하는 건 그분께 실례다. 너는 그렇게만 알고 있어.”
“헤에~”
라누벨이 흥미로운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왜?”
“용사님이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게 신기해서요. 뭐든 다 안다는 식으로 남을 깔보시잖아요.”
“깔볼 만하니 깔보지.”
판타지 야만인들을 존중하라는 게 억지다.
황족, 왕족, 귀족, 대상인 등도 예외는 아니다.
잘난 마법으로 수세식 변기도 개발하지 않고 더럽게 사는 자들을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겠는가?
못 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불필요하다고 느껴서 안 하는 것이다.
문명이 아닌 문화의식의 차이다.
우리는 이후에 여행준비품목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나설 필요는 없었다.
유명한 유적과 고대신전 등을 찾아다니는 고고학자 라누벨은 여행에 매우 익숙한 까닭이다.
신탁을 받은 ‘용사의 동료 1호’답다.
상습적으로 귀여운 척하지 않으면 더 좋을 텐데.
“용사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요정 나라 엘브하임의 사절단이 막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때,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왕궁기사의 보고.
아직 하루도 안 지났는데, 요정 나라의 사람이 도착했다. 고귀한 공주님이 사망했으니 당연한 걸까.
나로선 기다릴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만두- 큼! 영명하신 폐하의 뜻대로 알아서 처리하시라고 전해줘. 나는 돈만 받으면 돼.”
“사절단에서 용사님을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거절해달라고 해.”
이러면 만두 국왕이 빵긋할 것이다.
“그게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절단에 엘브하임 제1 왕자가 동행하는 바람에….”
“미친.”
더럽게 센 중간보스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안 갈 수가 없었다.
*
아크 엘프(Arch-Elf).
요정 왕족은 이론상 영원히 산다.
안티에이징(Anti-aging)은 모든 요정의 기본 옵션이고, 레벨이 조금만 높아져도 질병에 완전면역이 되기에 타살(他殺) 외에는 죽을 일이 정말 없다.
심지어, 이 왕족을 죽일 수 있는 강자도 이 세계에 별로 없다.
레벨의 특성 때문이다.
한 번 올린 레벨은 세월이 흘러도 내려가지 않는다.
특수한 힘의 작용으로 빼앗기거나 잃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자연적으로는 절대 하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요정 왕족은 영원히 산다.
이게 무슨 연관이냐?
경험치가 퇴적층처럼 쌓이면서 영원히 강해진다는 뜻이다.
물론, 스킬은 세월에 묻혀서 사라지거나 등급이 하락하기도 하지만, 꾸준히 연마하면 이것도 레벨처럼 꾸준히 올라간다.
그래서 이런 괴물도 탄생한다.
▷종족: 아크 엘프
▷레벨: 999+
▷직업: 검사(검술=절단↑)
▷스킬: 검술SS 검기S 재생A 정령A 위엄A…
▷상태: 만족
용사 특전으로 파악 가능한 능력치 한계선은 999레벨까지다. 레벨이 그것보다 높으면 저렇게 플러스로 표시된다.
1000레벨도 999+
5000레벨도 999+
그래서 이때부터는 운과 감에 의존해서 상대의 전투력을 추측하는 수밖에 없다.
이 ‘보이지 않는 레벨’을 경계한 나는, 주위의 무성한 소문만 믿고 긴 시간을 수련과 모험에 투자했다.
하지만 마왕 페도나르는 내 예상보다 한참 약했다.
당시에 내가 체감한 위험성으로 따지면, 이 잘생긴 요정이 훨씬 위였다. 마왕처럼 제대로 준비하고 싸운 상대가 아니었던 탓이다.
그렇기에 나는 ‘중간보스’라고 명명했다.
그 이력은 아래와 같다.
현직 요정왕이 쇄국정책(鎖國政策)을 펼친다.
판타지아 중앙대륙을 차지한 인간들이랑 교류하지 않고, 요정 나라에 틀어박힌 채 고립된 길을 수백 년 동안 고수했다.
그리고 이에 반감을 품은 제1 왕자가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는 부친을 살해하고 왕위를 계승한다.
이름이 아마….
“나서스라고 합니다. 소문이 자자한 전설의 용사님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또한, 제 여동생과 동포들의 몸을 지켜주셔서 뭐라고 감사드려야 좋을지…. 아! 왕자라는 딱딱한 호칭은 빼고 나서스라고 편히 불러주십시오. 용사님은 그럴 자격이 있으십니다.”
...무척 호감 가는 인물이다.
모든 요정이 실비아처럼 난폭한 건 아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서스. 우리의 만남처럼 인간과 요정이 화합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저야말로 바라는 바입니다.”
“건배!”
“하하하!”
중간보스랑 친해져서 나쁠 거 없잖아?
오늘도 나는 도덕 선생의 가르침을 잘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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