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화
[2회차] 용병? 그딴 걸 왜 하냐?
“저의 조국 엘브하임은 천천히 멸망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현 요정왕께선 눈과 귀를 막고 인간 여러분을 여전히 얕잡아보고 계십니다. 영원히 산다는 건 축복인 동시에 저주입니다. 방심하는 순간, 자신의 시간이 멈췄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되니.”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차! 용사님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흥에 취해서 과음한 모양입니다.”
“괜찮습니다. 하하!”
나는 이 요정 왕자가 점점 마음에 들었다.
레벨, 외모, 능력, 안목, 철학, 예의….
무엇 하나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지구의 현대인이 환생해서 빙의했다고 말해도 믿어질 정도로 신사적이다.
현 요정왕은 옹이구멍이 틀림없다.
나서스 왕자가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는 후계자 책봉 때문이었다. 요정왕이 제1 왕자를 놔두고 막내딸을 다음 왕으로 지목했다.
실비아가 왕의 재목이었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통치자의 덕목인 제왕학은 아예 배우지도 않았고, 놀기 좋아해서 왕국 밖을 싸돌아다니기 일쑤였다.
책봉 당시의 레벨은 중급 악마에게 털릴 수준이었는데, 자기보다 약한 인간이 “예쁜이. 우리랑 놀자.”라고 말하면, 산채로 태우는 잔혹한 성격의 나르시시스트(Narcissist)였다.
그 결말이 이거다.
“실비아에게 인간을 얕보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늘 콧방귀만 꼈지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예상했었지만, 실제로 겪으니 슬프군요.”
나서스 씨. 당신 상태는 ‘만족’입니다만?
현 요정왕은 자기를 닮아서 인간혐오가 정신병 수준인 막내딸 실비아를 무척이나 아꼈다.
우수한 장남에게서 왕위계승권을 빼앗을 정도로.
스스로 불화를 자초한 셈이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그 아이의 죽음이 엘브하임의 미래가 될 것 같아서 두려울 따름입니다. 용사님께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저희도 용사님이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리실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저의 애검 엔드미온입니다. 왕국의 3대 비보 중 하나이오니, 성검을 얻으신 후에 돌려주십시오.”
나서스가 허리춤에 찬 보검을 내게 넘겨줬다.
비실비실한 요정에게 어울리지 않는 묵직함이 느껴지는 바스타드였다. 쓸데없이 가벼운 성검보다 마음에 들었다.
“...당신의 성의를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로 잊지 않겠다!
엘브하임 3대 비보 정령검(精靈劒) 엔드미온.
1회차 때, 실비아 공주를 도와서 나서스 왕자를 쓰러트리고 그녀를 왕위에 올려주고도 얻지 못했던 명검이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얻을 줄이야!
진정한 왕의 그릇은 이렇게나 달랐다.
그래서 살짝 미안해졌다. 엔드미온을 돌려줄 마음이 없으니까.
우리의 우정과 신의를 어기겠다는 건 아니다.
나서스 왕자는 성검을 획득하면 엔드미온을 돌려달라고 했는데, 나는 마왕의 뚝배기를 깰 때까지 성검을 얻을 계획이 없었다.
이거면 마왕을 썰기엔 충분하다.
“용사님께서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무척이나.”
스르릉-
푸른 용의 가죽으로 만든 고풍스러운 검집에서 정령검 엔드미온을 조심스럽게 뽑아봤다.
청아한 정령의 기운이 꽃향기처럼 진하게 전해져왔다.
나는 앙탈이 심한 마검(魔劒) 계열이 자극적이라서 더 좋지만, 이런 청순한 맛도 싫어하진 않는다.
내 취향대로 천천히 길들이면 되니까. 우리는 좋은 한 팀이 될 것 같은 진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
부르르….
정령검 엔드미온도 동의하듯 떨었다. 깜찍한 녀석.
“그나저나, 용사님은 힘이 굉장히 좋으시군요. 4레벨로 엔드미온을 들기 버거우실 줄 알았는데.”
“...제가 원래 좀 셉니다.”
“역시 용사님이십니다. 하하!”
“하하하!”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서스 왕자가 내 레벨을 대충 눈치챘음을. 어쩌면 여동생 실비아를 죽인 인간이 용사라는 것까지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이걸 시험해보려고 왕국의 보물을 넘겨준 걸까?
그렇다면 정말 무서운 자다.
내가 물욕에 약한 건 어떻게 알고….
담소가 끝나자마자 사절단은 귀국길에 올랐다.
예쁜 머리가 좌우로 쪼개진 시신을 보고 발광하는 심약한 요정도 있었지만, 나서스 왕자의 훌륭한 지휘 아래에 시체인수가 무사히 마무리됐다.
대단히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빈손으로 재시작한 나는 3일 만에 풍족해졌다.
빵빵한 여행자금.
204레벨.
정령검 엔드미온.
덤으로 짐꾼과 고고학자.
국왕까지 달달 볶아서 여행준비를 신속하게 마친 훌륭한 용사와 그 외 잡것들은 신나는 모험 길에 올랐다!
위대한 존재가 사는 마을로.
*
여행은 굉장히 쾌적했다.
출발하기 직전에 알렉스가 위험하다고 반대해서 잠시 지체되긴 했지만, 녀석이 손꼽아 기다리는 신나는 오리엔테이션은 열흘 뒤에 갖기로 합의했다.
걸어서 이동했으면 족히 1년은 걸렸을 먼 거리. 하지만 공간이동 마법진이란 사기적인 교통수단은 이 시간을 극단적으로 좁혀줬다.
1년이 1초로 단축됐다.
이 기술만은 어떻게든 지구에 도입하고 싶을 정도다.
공항에 여러 항공편이 있듯이, 공간이동 마법진도 ‘마법사의 탑’이란 공공시설에서 돈을 주고 이용한다.
짧게 줄여서 마탑(魔塔).
어째서 탑일까?
내 1회차 동료였던 ‘현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마법사는 연구비와 희귀재료가 많이 필요한 직업이다. 아무리 천재라도 이론만 빠삭해선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실험을 통해서 검증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후원을 많이 받아야 하고, 물자가 풍부한 영지나 국가에 소속되어 고임금을 받으며 생활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긴다.
마법사와 도시는 물과 기름처럼 안 맞는 탓이다.
그 이유는,
1) 마법이 폭발하면 위험하다.
2) 밖이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 된다.
3) 매연이 별을 가린다.
4) 좀도둑을 신경 써야 한다.
5) 마력의 순도와 밀도가 떨어진다.
그 밖에도 많지만, 이 5가지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전폭적인 후원을 못 받으면 연구 자체를 못 하기에, 고대의 마법사들은 도시에서 살아갈 방법을 고심했다.
그리고 나온 해결책이 높은 탑이었다.
고층아파트의 장점이랑 비슷하달까.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됐다.
판타지 세계의 건물들은 대도시라도 3층을 넘기지 않는다. 그 한복판에 10층 높이의 탑을 올리면 그 꼭대기는 외부랑 단절된 마법사만의 사적인 공간이 된다.
방구석 폐인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를 만날 기회도 없어져서 필연적으로 동정 대마법사가 되지….”
“저희 마탑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지만.”
나긋나긋한 미모의 아가씨가 우리를 환대해줬다. 검은색 고깔모자와 짧은 치마가 마녀(魔女)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그 복장은 어디까지나 상업적인 서비스일 뿐. 그녀는 공간이동 마법진 이용객을 받는 접수원이다. 마법진을 가동해줄 마법사는 뒤편에서 뒷짐 지고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아닌 접수원의 허벅지를.
대마법사의 경지에 ‘현자’밖에 오르지 못한 이유를 알겠다.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을 제시해주세요~”
판타지 세계에서도 여권 같은 게 필요하다. 현상수배범이나 적대국 밀정을 국외로 탈출시킬 순 없기 때문이다.
“여기. 폐하의 인장과 허가증이다.”
우리는 만두 국왕의 친필 서한으로 확인절차를 대폭 생략했다. 심지어 대기번호조차 없었다.
이것이 바로 권력과 자본의 힘이다.
“마법사님? 마법사님…!”
“...음? 어흠! 그, 그래. 어디로 보내면 된다고?”
“어휴! 집중 좀 해주세요. 또 이러신다.”
“미안하다. 미지의 심연에 대한 고찰에 빠져서…. 마법 얘기다. 흠흠! 사과의 뜻으로 일 끝나고 케이크를 사주마.”
“와! 약속하신 거예요, 마법사님!”
“물론이고말고!”
범죄의 향기가 나는 마법사였다. 하지만 나로선 공간이동 마법만 제대로 발동해주면 아무런 문제 없었다.
마법사가 약속의 주문을 외웠다.
마법진이 환하게 빛나고….
번쩍!
우리는 1년이란 시간과 거리를 단축했다. 여행길에 필연적으로 마주칠 귀찮은 사건들로부터도 해방됐다.
진짜 마음에 드는군.
“...저기, 용사님.”
“왜?”
“여행이 여행 같지 않아요.”
라누벨이 옆에서 입술을 삐죽 내밀며 칭얼댔다.
이 거슬리는 계집애가 생활마법과 요리에 능통하지 않았다면 무조건 떼어놓고 왔을 것이다.
1회차에서 라누벨이 생매장으로 탈락한 첫날은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지만, 이틀째부터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임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
용사를 가장 힘들게 하는 존재는 강력한 악마 따위가 아니다. 숙면을 방해하는 풀벌레와 불청결한 위생시설이다.
과장 하나 안 보태고 통계를 내보면, 마왕 페도나르가 보낸 심야의 암살자보다 모기들이 내 피를 더 빼앗았다.
바로 이때, 라누벨이 빛을 발한다.
그녀의 생활마법은 이런 잡다한 불편함을 해소해준다.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현대인의 감성으로 견딜 수 있는 수준까지.
딱 능력만 마음에 든다.
“라누벨. 너는 내 돈 주고 편하게 오는 것도 불만이니? 왜? 숨 쉬는 것도 편해서 싫다고 하지 그러냐.”
“우우….”
입술이 붕어가 된 라누벨은 바로 찌그러졌다.
그러자 오른손에 창을 든 덩치 큰 짐꾼이 그녀를 옹호하듯 앞으로 나섰다.
“저는 라누벨 양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단번에 와버리면 레벨과 스킬을 올릴 기회가 없습니다.”
“너에게 안 물었어. 닥쳐.”
“......”
자기가 정말로 전설의 용사님 동료가 된 줄 착각하는 짐꾼도 조용히 시킨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판타지 세계로 납치되자마자 보았던 전경이랑 비슷했다.
발밑에 거대한 마법진이 있고, 외곽에는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한 경비병들이 선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리고 왕국과 가문의 깃발이 보였다. 동맹국의 마탑에 무사히 도착했음을 시사해줬다.
공간이동 마법 자체는 이동시간이 없어서 편하지만, 목적지까지 한 번에 가는 직항은 없다.
A마탑에서 B마탑으로.
미리 약속된 촉매로 연결된 마법진끼리만 이동된다.
공항에 도착하면 공항버스나 지하철 등을 이용하듯이, 우리는 지금부터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라누벨, 짐꾼. 따라와.”
입국절차를 빠르게 마치고 마탑 밖으로 나왔다.
북적북적한 도시 거리.
내 기억 속에 있는 풍경이었다.
“용사님. 저, 여기 와본 적 있어서 지리를 잘 알아요! 용병중개소는 저쪽이에요!”
라누벨이 아는 척했다.
고고학자인 그녀는 여기저기 많이 가본 길잡이였다. 판타지아 중앙대륙의 모든 도시와 명소를 빠삭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시큰둥하게 반문했다.
“거길 왜 가냐?”
“예? 그야, 목적지 근처로 향하는 상단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상행도 돕고, 마차도 공짜로 얻어타고, 산적을 물리치고, 명성도 올리고, 돈도 벌고, 사람도 사귀고, 레벨도 올리고, 불침번도 같이하고….”
라누벨이 용병의 장점을 쭉 나열했다.
“그런 하찮은 아르바이트에 할애할 시간 없어.”
“아루바트…?”
“그런 게 있어.”
나는 그녀의 의견을 일축했다.
짐을 잔뜩 실은 상단이랑 함께하면 이동속도가 느려진다.
푼돈 좀 벌겠다고 상행을 도울 이유가 없었다. 지저분한 용병들이랑 어울리기도 싫고.
“왜요? 급하지 않잖아요.”
“부활한 마왕이 언제 우리를 습격해올 줄 알고? 그래도 너는 안 급하다고 단정할 수 있어?”
전혀 안 급하다.
그 신사적인 마왕은 10년이나 나를 기다려준다.
하지만 라누벨은 그 사실을 모르지.
“그, 그건….”
“이해했지? 이해 못 했어도 닥치고 따라와.”
“우우…. 네.”
*
우리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는 도중에 위기에 빠진 상단의 간절한 구조요청 따위는 전혀 듣지 못했다. 기분 탓이다.
내 1회차 기억 속의 마을 전경 그대로다.
정확히 이틀 걸렸나?
예고했던 도덕 선생님도 오셨다.
▷한숨: 용사가 모험을 회피하면 어떡하나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용사의 경험치 500% 특전을 악용하지 말고 정상적인 모험으로 레벨을 올려주세요.
첫인사부터 잔소리.
그리고 대놓고 구르란다.
▷당황: 무조건 고생하라는 저주의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여행자에게 가장 무거운 짐은 빈 주머니입니다. 여행을 나온 이상, 어떤 성과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지당하신 말씀.
성과라면 지금부터 있을 겁니다.
지친 준마를 마을 여관에 딸린 마구간에 맡긴 후, 위대한 존재가 머무는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며 정중히 말했다.
“마스터 몰랑. 불초 용사가 가르침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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