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12화 (12/430)

 012화

[2회차] Master Mollang

끼이익-

녹슨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리고 그 틈새로 고개만 빼꼼 내민 주근깨 소녀가 내게 질문했다.

“누구신데, 우리 몰랑이를 찾으세요?”

이 마을 촌장의 딸이었다.

1회차에선 그녀랑 제법 친하게 지냈었는데, 나 같은 정상인에게 회귀는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좋은 추억까지 싹 망상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촌장의 딸은 내 기억보다 훨씬 어렸다.

어엿한 숙녀가 아닌 풋풋한 소녀.

1회차에선 지금으로부터 9년 뒤에 만났으니 당연했다. 당시엔 유부녀였고 젖먹이 아들을 늘 품에 안고 있었다.

그리고,

몰랑몰랑~

항상 몰랑거리는 위대한 존재도 함께했다.

훗날 태어날 젖먹이 아들 대신 소녀의 가슴에 베개처럼 폭 끌어 안겨있었다.

내 등 뒤에서 까치발 들고 어깨너머를 본 라누벨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끝을 흐렸다.

“위대한 존재가 슬라임…?”

슬라임(Slime).

수많은 판타지 게임에 등장하는 젤리 몬스터.

둥글둥글한 찐빵처럼 생긴 슬라임은 이 판타지 세계에서도 1레벨부터 가장 흔하게 만나볼 수 있는 경험치 덩어리다.

어디서든 살고, 무엇이든 먹어치우고, 번식력도 우수하다.

지구랑 비교하면 참담한 수준인 판타지 도시의 하수구시설이 막히지 않고 장기간 유지되는 것도 슬라임이 청소해준 덕분이다.

나는 라누벨에게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슬라임이라고 얕보지 마라. 이분은 평범한 슬라임이 아니시다.”

“네, 맞아요! 몰랑이는 몰랑거려요!”

소녀의 부연설명대로다.

일반적인 슬라임은 말랑거린다.

이 위대한 존재처럼 몰랑거리지 못한다.

“...에?”

“라누벨. 네 눈은 옹이구멍…. 아니, 됐다. 설명보다 보여주는 편이 빠르겠지. 꼬마 아가씨. 귀엽고 사랑스러운 네 친구를 이 오빠가 잠시만 안아봐도 될까? 아주 잠깐이면 돼.”

내 복장은 여전히 귀족처럼 화려했다.

눈치가 빠른 소녀는 뒤편에서 숨죽인 채 지켜보는 촌장 부부를 힐끔 본 후에 말했다.

“우리 몰랑이를 헤치지 않으실 거죠…?”

“약속할게.”

나는 조심스럽게 위대한 존재를 넘겨받았다.

몰랑몰랑!

낯선 나를 경계하듯 거칠게 몰랑거리셨지만, 소녀가 어루만지며 타이르자 금방 얌전해지셨다.

몰랑몰랑….

그분을 안은 나는 선 채로 명상하듯 눈을 감았다.

차분히 그 몰랑거림을 느꼈다.

‘그래! 바로 이 감촉이야!’

슬라임은 내가 아는 가장 완벽한 생명체다.

젤리 같은 몸을 자유롭게 출렁거릴 수 있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먹으며 빠르게 소화해낸다.

가장 놀라운 점은 ‘뇌(腦)’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말랑거리면서 풍부한 감정표현이 가능하다. 육체에 국한되지 않은 영적인 존재란 뜻이다.

반면에 인간은 어떠한가?

특정 관절 외에는 움직임이 제한되어 있다. 도마뱀처럼 죽은 척하거나 신체 일부를 자르고 도망치는 일이 불가능하다.

노화된 육체는 회복되지 않는다.

못 먹는 동식물 종류가 많고, 부패하거나 오염된 음식물은 아예 엄두도 못 낸다. 수분을 하루만 공급 안 해줘도 몸에 이상이 생긴다.

인간은 굉장히 불완전한 생명체다.

몰랑몰랑~

그러니 우리는 학습해야 한다.

인류는 그렇게 생존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기서 1차원적인 어리석은 인간은 강력한 판타지를 손에 넣으려고 발버둥 친다.

무공, 마법, 정령, 초능력, 마검, 성검, 신성력, 신의 권능, 게임 능력치, 용의 심장, 요정 마누라….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인간의 강함은 오직 ‘과학’에서만 나온다. 지구 인류의 발자취가 그 사실을 입증해준다.

지구를 넘어서 우주로!

판타지 세계관에선 감히 상상도 못 할 위엄이다.

화성에서 싸우는 무림고수는 없잖은가?

한계치가 다른 학문이란 뜻이다.

“이 오빠가 재미난 걸 보여줄게.”

헬스트레이너를 얕잡아보는 사람이 있는데, 트레이너가 짜는 식단과 교습은 오컬트(Occult)가 아닌 사이언스(Science)다.

엄연한 학문이며, 건강과학이다.

높은 효율과 미용 증진은 기본이고, 무리한 운동에서 오는 부작용과 후유증이 없도록 도와준다.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동시스템 제어.’

모든 생물은 죽지 못해서 산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자면, 우리가 끔찍한 고문이나 절망 끝에 “죽고 싶어!”라고 아무리 간절히 애원해도 심장은 멈추지 않는다.

내 몸인데도 내 마음대로 못한다.

이건 자동시스템 때문이다.

고상하게 일컬어,

자율신경계(Autonomic nervous system)

자율신경은 호흡, 신진대사, 체온조절, 소화, 분비, 생식 같은 생체활동의 기본이 되는 항상성을 유지해준다.

예쁜 여자를 보면 불끈하고, 고소한 냄새에 침을 질질 흘리고, 운동을 많이 하면 심장이 벌렁거리는…. 이런 무의식적인 행동이 전부 자율신경계의 영향이다.

이 시스템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그 즉시, “동작 그만!”처럼 심장과 폐가 멈추면서 죽는다. 그렇기에 모든 생물은 자율신경계를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슬라임만 빼고.

“어?! 용사님 근육이 빵빵해졌어요!”

“맙소사! 용사님. 그건 무슨 조화입니까?”

슬라임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전신을 통제할 줄 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서 남에게 가르쳐주진 못한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가 있는 법.

몰랑몰랑?

온종일 몰랑거리는 이 위대한 존재만은 귀엽게 몰랑거리면서 간단히 전수해줄 수 있다.

딱히 의도하고 몰랑거리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몰랑몰랑’은 슬라임의 특색이 두드러지는 원초적인 율동을 내포하고 있다.

1회차에선 진지하게 배우지 않았다.

판타지 모험 9년 차에 접어들면서 심신(心身)이 극도로 지쳐 있었던 탓에 마스터 몰랑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한참 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2회차의 나는 배울 자세가 되어있다.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고 영혼에 새겼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몰랑!”

몰랑몰랑?

위대한 존재는 내가 감사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좌우로 몰랑거렸다.

그 마음 이해한다.

이건 내가 멋대로 배워간 기술이기 때문이다.

일명,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

마법이나 무공처럼 책의 이론을 독학하는 방식으론 절대 습득하지 못한다. 자기 몸으로 직접 이 율동을 느끼면서 깨닫는 수밖에 없다.

열심히 몰랑거리면 돼!

이걸 어떻게 묘사한단 말인가?

말과 글로는 설명이 안 되는 심오한 학문이다.

“용사님! 용사님! 어떻게 하신 거예요?”

라누벨이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묻는다.

나는 은근슬쩍 귀여운 척하며 내 두꺼워진 팔뚝에 엉겨 붙으려는 그녀를 단호하게 밀어낸 후에 되물었다.

“성장호르몬이라고 들어봤니?”

“...네?”

“모르면 됐어.”

내분비샘은 호르몬을 통제하는 기관의 통칭이다.

송과선, 시상하부, 뇌하수체, 갑상샘, 부갑상샘, 부신, 신장, 이자섬, 난소, 정소 등등.

이런 내분비샘에서 분비된 호르몬은 육체의 기능을 조절한다. 사람의 성장도 이 호르몬의 통제를 받는다.

성장호르몬은 뇌하수체 전엽에서 분비되는데, 뼈와 연골 같은 성장 세포를 증식시키는 인슐린유사성장인자(IGF-1)의 합성을 촉진한다.

두 호르몬은 근육과 인대, 힘줄 강화뿐만 아니라, 호르몬 원료인 지방 분해에도 관여한다.

보통은 무산소운동으로만 분비가 촉진된다.

하지만 만약, 이걸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불끈불끈!

멋진 육체를 손쉽게 만들 수 있다.

내 입맛대로.

▷종족: 아크 휴먼

▷레벨: 204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통역A 살인B 근력C 민첩C 내성C…

▷상태: 성장

스킬 등급을 최대치까지 올리려면 시간이 좀 소요될 것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시간문제일 뿐.

이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당혹: 여행의 성과가 이건가요? 보고도 이해가 안 됩니다. 슬라임이 위대한 스승? 처음 듣는 기사(奇事)입니다. 아몬드를 얻으려면 단단한 껍질을 벗겨야 하는 법입니다. 노력 없이 스킬을 얻을 수 있다면 누가 노력하겠어요?

도덕 선생님. 그걸 왜 저에게 물으십니까?

남이야 좌로 구르든 우로 구르든 내가 알 바 아니다. 그리고 말은 바르게 해야 하지 않을까? 원치 않은 회귀로 10년 노력이 증발한 내게 그 누구도 노력 운운할 순 없다.

설사 신(神)일지라도!

▷침묵: 네. 옳은 지적입니다. 교직원 일동을 대표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전투력 S학점은 강한수 학생이 최초였습니다. 인성 F학점도 최초였지만…. 불합격이야 어떻든 간에, 당신의 경이적인 노력을 우리가 재시험이란 명목으로 짓밟은 건 사실입니다. 앞으로 이 주제에 관해선 왈가불가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아, 네….

도덕 선생님이 사과하다니!

▷웃음: 스승에게 많이 배우고, 동료에게 더 많이 배우고, 제자에게 그보다 더 많이 배웁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죠. 그런데 저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인성 F학점으로 재시험은 교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니 그럴 수밖에요. 강한수 학생. 고맙습니다.

도덕 선생은 욕 같은 칭찬을 날린 후에 떠났다.

다음에는 불시에 찾아오겠단다.

몰랑몰랑-!!

“아차차! 죄송합니다! 마스터 몰랑!”

나는 신경질적으로 몰랑거리는 위대한 존재를 서둘러 소녀에게 돌려줬다. 그리고 감사의 뜻으로 수고비를 듬뿍 안겨줬다.

그 액수에 놀란 촌장이 참견했다.

“나리! 이렇게 많이 주실 필요는…!”

“괜찮습니다. 정 부담되시면 마스터 몰랑의 사료라도 잘 챙겨주십시오. 그거면 충분합니다.”

판타지아 중앙대륙 북서부 구석에 틀어박힌 촌(村)까지 이틀 걸려 찾아온 목적이 막 완수됐다.

과학의 힘.

이것은 기술(Skill)이 아닌 기교(Technic)다.

지식과 경험의 산물.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 나는 나.

프랑스 철학자,데카르트(Descartes)는 말했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판타지 세계가 의심스럽고, 실제로 개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처럼 생각할 줄 아는 내 존재까지 부정할 순 없다.

회귀도 이것만은 건드리지 못한다.

“용사님! 저도 몰랑이를 안아볼래요!”

“저도…. 흠흠!”

호기심을 참지 못한 라누벨과 짐꾼이 나를 흉내 냈다.

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마음대로 하라고 놔뒀다. 못 하게 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단지, 조금 죄송할 따름이다.

몰랑몰랑….

위대한 존재의 수난이 시작됐다.

마스터 몰랑. 이 잡것들이 귀찮게 해도 좀 참아주시길!

“밤늦기 전에 돌아와.”

라누벨과 짐꾼에게는 원 없이 만져본 후에 여관으로 돌아오라고만 해뒀다.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자율신경계란 개념조차 모르는 인간이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을 깨우치면 100% 사망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로선 정말 영문도 모른 채 심장과 폐가 멈춰버린 셈.

대책 없이 물에 빠진 상태라고 할까?

허우적거리다가 질식사할 것이다.

아무튼,

▷종족: 아크 휴먼

▷레벨: 204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통역A 근력B 민첩B 내성B 오감B…

▷상태: 각성

실시간으로 진화하는 내 육체 이상으로 스킬 등급이 골고루 폭등 중이었다.

미완성도 마왕의 뚝배기를 깰 만큼 대단했지만, 마스터 몰랑의 완성된 가르침은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효율을 발휘했다.

나로선 매우 반가운 소식.

앞으로 남은 건?

“204레벨 알리바이를 만들 장소인데….”

그러면서 ‘업적’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구로 귀환하려면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리는 것 외에도 4과목 성적이 모두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전투력, 업적, 평판, 인성.

전투력이 낮으면 마왕을 아예 못 쓰러트리니 논외로 치더라도, 1회차에서는 업적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10년 동안 여기저기 떠돌면서 온갖 참견을 다 했기 때문이다.

업적이 저절로 쌓였다.

하지만 이번 2회차는 다르다.

이대로 가다간 업적 F학점 확정이다.

“그건 곤란하지.”

기껏 죽인 요정 공주를 또 보긴 싫었다. 확실하게 죽인 실비아의 멀쩡한 모습을 본다면 나라도 소름 돋는다.

똑같은 모험을 3번 반복하는 것도 질리고.

다행히 이 인근에 어린 용(龍) 한 마리가 숨어 산다. 온순해서 사냥을 등한시한 탓에 레벨과 스킬도 매우 낮다.

1회차에서는 동료 전원이 못 죽이게 반대하는 바람에 그림의 떡이었다. 용사가 강해지는 걸 동료란 연놈들이 견제한 것이다.

하지만 2회차에서는 그 누구도 내 졸업을 방해하지 못한다.

용학살자(Dragon Slayer)!

판타지에서 이보다 확실한 업적이 또 있을까?

이것만이 아니다.

용 자체도 좋은 사냥감이지만, 그 심장도 경험치 덩어리다. 섭취하면 레벨을 단숨에 뻥튀기할 수 있다. 레벨이 낮다고 알려진 나에게 최고의 알리바이가 되어주리라.

게다가 이건 정상적인 사냥이다.

완벽하다.

“이러면 도덕 선생도 불만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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