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2회차] 오크와 함께 춤을
“...아차. 내 정신 좀 보소.”
어째서 사람들이 관음증에 빠지는지 알 것 같다.
근육질 오크의 테크닉이 장난 아니다. 수컷만 존재하는 오크의 욕구불만이 활화산처럼 펑펑 터진다.
여기에 자지러지는 요정의 신음과 비명 또한 수위를 더해줬다.
방해하기 미안할 정도이다만….
쾅-!
통나무를 베며 돌입했다.
오크 족장이 비무장 상태로 요정의 엉덩이에 집중하는 지금이야말로 암살할 절호의 기회였다.
“KuKu-?!”
화들짝 놀라는 흑돼지 얼굴.
하지만 오크 족장의 387레벨은 장식이 아니었다.
일전에 알렉스가 그랬듯이, 놈 또한 기습을 뒤늦게 눈치챘음에도 육체의 우위로 대응이 매우 빨랐다.
근처에 놔둔 녹슨 철검을 휘두른다.
서걱-
그러나 금속끼리의 충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알렉스 때랑 차이점.
정령검 엔드미온은 0.3mm 샤프펜슬이랑 차원이 다른 무기였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독이다.
촤아악-!
오크 족장의 녹색 피가 막사 내부를 물들였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얕아.
뼈를 베는 감각이 없었다.
정령검 엔드미온의 절삭력이 우수하다는 건 틀림없지만, 387레벨 오크의 뼈를 공기처럼 벨 수준은 아니다.
“GuGu!”
“VuVu!”
막사에서 들린 돼지 멱 따는 소리에 놀란 오크들이 몰려왔다.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지만, 1회차에서 동료들을 단숨에 몰살시킬 만큼 완벽했던 내 전성기 실력이 나오지 않았다.
낮은 스킬 등급, 레벨, 육체, 장비….
실패 원인은 꽤 복합적이다.
지금보다 강해질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내 경험치가 되어랏!”
후방에서 몰려드는 오크는 무시했다. 300레벨 주술사의 공격은 다소 위협적이지만, 금방 부상을 회복할 족장에 비할 바는 아니다.
나는 오직 눈앞의 오크만을 주시했다.
꾸욱.
엄지발가락을 짓누르듯 묵직하게 오른발을 한 걸음 앞으로, 동시에 오른팔을 뻗으며 엔드미온을 놈의 심장 쪽으로 질렀다.
“TuTu…!”
오크 족장은 피하려고 뒷걸음치다가 벌러덩 넘어졌다. 볼썽사납긴 해도 내 회심의 찌르기는 확실히 피해냈다.
하지만 다음은 어쩔 건데?
쓰러진 놈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꺅?!”
정정한다. 딱 하나 있었다.
오크 족장은 방금까지 친교를 다지던 요정의 가느다란 발목을 붙잡고 자신 앞으로 당겼다.
놈의 단순한 생각을 읽은 난 헛웃음을 터트렸다.
“인질극이니?”
“FuFu.”
인간과 요정은 겉보기에 차이가 거의 없다.
대다수는 두 종족의 귓바퀴 모양으로 단번에 구분해내지만, 오크는 후각으로 인간과 요정을 구별한다.
그런데 여기서 착각이 온 것이다.
오크의 피를 뒤집어쓴 나는 인간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예쁜 요정도 오크랑 살을 섞으면서 요정 고유의 체취가 옅어졌다.
즉, 우리를 동족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그래도 오크치고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알았다.
푹-
하지만 그게 한계다.
정령검 엔드미온의 뾰족한 칼끝이 요정의 아담한 가슴을 찔렀다. 피멍과 상처로 가득한 피부를 뚫으며 안쪽 깊숙이.
푹-!
그리고 등까지 관통하여 뒤편의 오크까지 꿰뚫었다.
“Gu…?”
목에 칼이 박힌 오크 족장이 의문에 찬 시선을 내게 보낸다. 아무래도 이전에 이 방법으로 재미 좀 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게 인질극은 통하지 않아.”
판타지 세계의 인연은 나에게 먼지나 다름없다. 오크 군락지까지 흘러든 요정의 사연 따위 궁금하지 않았다.
“가, 감사합--”
요정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내게 고맙다고 했다. 파트너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나도 조금 고맙다.
▷종족: 엘프
▷레벨: 892
▷직업: 조련사(조련→경험치↑)
▷스킬: 사육S 조련A 교감B 채집C 정령D…
▷상태: 저주, 염좌, 피로
요즘 만나는 요정마다 레벨들이 깡패다.
경험치도 팍팍 주고.
1회차의 나는 이 시기에 알렉스에게 처맞고 왕궁에서 빌빌거리고 있었다. 소중한 경험치 덩어리들이 세상을 떠나는 줄도 모른 채.
이래서 정보가 중요한 것이다.
‘단순한 우연인가?’
이 조련사는 암시장에서 입맞춤한 요정이랑 어딘가 비슷했다.
예쁜 요정, 800레벨대, 악마의 저주.
공통점이 무려 셋이나 됐다.
1회차의 나는 온갖 참견을 다 하며 돌아다녔지만, 이처럼 초창기에 퇴장한 인물들의 정보까지는 알지 못했다.
“흠…. 아무렴 어때.”
몰라도 마왕의 뚝배기를 잘만 깼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비밀을 파헤쳐봐야 귀찮은 일에 휘말려서 시간을 빼앗길 뿐이다.
나는 내 모험을 할 뿐이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이 노래의 후렴구처럼.
“YuYu?”
“오크야. 청산별곡이라고 들어봤니?”
“Yu…?”
“무식하긴!”
387레벨 족장 오크랑 892레벨 조련사 요정을 죽였다. 그리고 내 레벨은 또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오크 몇 마리가 달려들든 문제없었다.
우선은 296레벨 주술사부터.
“KuKu?!”
놈이 근거리에서 던지는 불덩이를 맨몸으로 맞아주면서 그대로 돌진했다. 그리고 화상 치료비로 돼지머리를 챙겼다.
때구르르…!
시원하게 잘도 굴러간다.
“덤벼, 친구들.”
“QuQu!”
“KuKu!”
원래는 몸을 사리면서 암살로 끝장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복권(892레벨 요정)이 터지면서 불필요해졌다.
오크 군락지.
빠르게 정리하고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자.
“...뭔가 깜빡한 것 같은데. 아!”
기억났다.
“용사님~!”
“살려주십시오~!”
오크들에게 포위된 잡것들이 용케도 아직 버티고 있었다.
용사 동료 1호기 라누벨은 그렇다 쳐도, 이름 모를 짐꾼이 빌빌거리면서도 여태 살아있는 건 무척 의외였다.
하지만 그 근성이 싫진 않았다.
“엄살은. 좀만 기다려.”
나는 200레벨대 오크 투사 셋의 협공을 엔드미온으로 베어냈다. 대단한 기술이 가미된 접전은 아니었다.
너도 한 방, 나도 한방!
하지만 나는 멀쩡했고 오크 투사들은 줄줄이 머리통을 내려놨다. 실시간으로 내가 강해지고 있음이 느껴진다.
좋은 흐름이다.
“용사님~!”
도와달라고 아양을 떠는 라누벨은 무시하고, 꿋꿋하게 창 들고 버티는 짐꾼부터 구하기로 했다.
그를 포위한 오크 무리 쪽으로.
나는 조잡한 창과 날붙이를 무시하고 들이박았다.
“KuKu~?!”
“CuCu~?!”
내 앞을 막아선 오크들이 볼링핀처럼 줄줄이 쓰러졌다.
조금은 전성기 기분을 낼 수 있었다. 볼링핀 평균 레벨이 1/10로 줄어들긴 했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용사님. 헉헉….”
“...짐꾼.”
“네.”
“어째서 그리 악착같이 버틴 거지?”
짐꾼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이었다.
그는 5천 오크가 서식하는 군락지로 무모하게 돌진하라는 내 지시에도 군말 없이 따랐다.
그리고 내가 올 때까지 도망치지 않고 우직하게 버텼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용사님께서 노예의 굴레로부터 저를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제 목숨은 당신 것이었습니다.”
“...그게 끝?”
“이유가 더 필요합니까? 크으으…. 긴장이 풀리면서 더는 못 버티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바닥에 드러눕는 짐꾼.
먼지가 입에 들어가든 말든 쫙 벌린 채 기절하듯 곧장 잠든다. 드르렁드르렁 코까지 골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주위에 오크가 아직 바글바글하거늘.
“...진짜 웃기는 녀석일세.”
요정왕 실비아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그걸 공기 취급해온 짐꾼이 기습적으로 할 줄은 몰랐다.
이 파티, 조금은 괜찮을지도….
“용사님~! 마력이 다 떨어졌어요~!”
“......”
아니, 우정의 힘은 역시 번거롭다.
*
오크 5천 마리를 사냥하는 것도 일이다. 매초 1마리씩 잡는다고 쳐도 84분이나 걸리기 때문이다.
우정의 힘으로 셋이서 분담하면 28분.
하지만 나는 거의 혼자서 빠르게 몰살시켰다. 놈들이 겁먹고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다면 더욱 단축됐을 것이다.
“KuKu~!”
마지막 오크가 볼썽사납게 쓰러졌다.
친목으로 똘똘 뭉친 요정들처럼 복수심에 불타며 악착같이 덤벼줬으면 편했을 텐데, 오크들에게는 최소한의 의리조차 없었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친다. 지킬 가족이 없으니 당연한 판단이다.
흐물흐물….
오크들의 시체가 하나둘 녹으며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자연의 힘이 뭉쳐서 태어난 몬스터(Monster)가 힘을 잃고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시체가 남는 경우는 단 하나.
경험치로 화(化)하지 않고 자연사했을 때뿐이다.
그리고 요정은?
“좋은 마법 재료지.”
이대로 썩어 문드러지거나 들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놔두는 짓은 죽은 자에 대한 모독이다.
인류를 구할 용사님의 품위유지비로 환전된다면, 그녀도 만족하고 마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저기, 용사님? 묻어주는 거 아니었어요?”
라누벨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
“내가 왜?”
“죽은 요정이 가엽잖아요.”
어느새 깨어난 짐꾼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정령검 엔드미온을 감싸고 있던 새하얀 천으로 요정의 시체를 미라처럼 둘둘 감으며 답했다.
“나참. 가여워서 몸뚱이라도 좋은 일에 써주겠다는 거잖아. 그리고 라누벨. 너는 대단히 오해하고 있는데. 나는 정의로운 용사야. 여자를 토막 내서 판매하는 짓은 하지 않아.”
“어?”
“뭐냐, 그 뜻밖이란 표정은.”
“그야….”
라누벨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끝을 흐린다.
“야. 오크랑 요정이 같니? 너희 둘은 요정의 시체를 챙겨서 마을로 돌아가. 그리고 나서스 왕자에게 연락해. 그러면 장의사가 시체대금 들고 찾아올 거다.”
“아!”
“역시 용사님!”
돈도 돈이지만, 이 잡것들을 떼어낼 좋은 구실이다.
오크를 상대로 이렇게 빌빌거려선 용은 아예 엄두도 못 낸다. 그러니 이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용사님! 도망치시면 안 돼요!”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크 군락지에서 우정의 힘을 마음껏 발산하며 욕구불만을 해소한 라누벨과 짐꾼.
둘은 요정의 시체를 짊어지고 도망치듯 귀환길에 올랐다.
그 뒷모습들을 보며, 솔직히 조금 걱정됐다.
“마스터 몰랑을 귀찮게 하지 말아야 할 텐데….”
너무 귀찮게 하면 몰랑거리면서 깨물기 때문이다.
이게 생각보다 아픈데, 그 몰랑몰랑한 몸으로 어떻게 깨무는지는 나도 정말 모르겠다.
아무튼, 홀가분한 마음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 용을 암살하러….
▷피곤: 불시에 온다고 했지요?
어머! 존경하는 도덕 선생님, 오셨습니까.
현재까지 이상 없습니다.
▷설교: 아니요! 유감스럽게도 있습니다! 가여운 요정의 생명을 너무 쉽게 포기한 게 아닐까요?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이 있습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이라고 하지만, 간단히 포기하란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그건 지나친 오해이십니다.
나는 오크 군락지에서 발견한 요정을 포기한 적이 없다.
892레벨.
이걸 어떻게 포기한단 말인가?
흥분한 흑돼지 밑에 깔린 가련한 여인을 본 순간, 강한 운명의 이끌림을 느꼈다. 우리가 곧 하나가 되리란 밝은 미래를 보았다.
실제로 그렇게 흘러갔고.
그녀는 좋은 경험치가 되어줬다.
▷두통: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자는 불행에 빠진다고 합니다. 스스로 기쁨을 찾지 않는 자는 기쁨을 누릴 수 없어요. 새로운 인연을 소중히 해보세요. 몰랐던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새로운 인연이라….”
어렵네. 일단 용(龍)부터 먹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행복해질 것 같다.
▷종족: 카오스 드래곤
▷레벨: 999+
▷직업: 패왕(정벌→패기↑)
▷스킬: 혼돈SS 파괴SS 망각SS 패기S 맹독S…
▷상태: 졸음, 몽롱, 황혼
“...흠.”
“Chao…?”
“실례했습니다.”
어린 용의 둥지 주소는 제대로 찾아왔다. 화산 분화구처럼 생긴 큼직한 구렁에 칠흑색 날도마뱀이 태평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다만,
“Chaooooo-!!”
“망할.”
집주인이 아직 안 바뀌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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