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화
[2회차] Chaoooooo...!
팟.
뒤돌아선 나는 숲속을 달렸다.
용을 사냥하러 온 용사가 역으로 토벌당한다면, 업적과 명성은커녕 음유시인의 싸구려 농담거리조차 안 될 것이다.
“Chaooo!”
상대는 고룡 중의 고룡이었다.
능력치 상태에 표시된 ‘황혼’이 그 증거.
임종이 얼마 안 남았다는 뜻이다.
물론, 황혼이라도 나잇값 못하는 비만 도마뱀이면 괜찮은데, 직업이 놀랍게도 ‘패왕’이었다. 얼마나 호전적인지 알 수 있는 대목.
그래서 레벨과 스킬 모두 깡패였다.
저 패왕의 용은 무명(無名)이 당연히 아니다.
1회차에선 만나긴커녕 자연사한 줄도 몰랐지만, 수많은 나라를 멸망시킨 사악한 용 이야기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친구였기에 귀동냥으로는 알고 있었다.
3쌍의 날개, 덩치, 칠흑색 비늘, 호전성….
묘사가 정확히 일치했다.
망룡왕(忘龍王) 뇌비우스
마왕 페도나르의 부활로 위험순위에서 살짝 밀렸지만, 판타지아 원주민이 꼽는 ‘5대 재앙’의 한 축을 담당하는 존재다.
나머지 재앙들을 1회차 말년에 줄줄이 토벌해봐서 아는데, 지금의 나로선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괴물딱지였다.
펄럭! 펄럭!
하늘로 날아오른 거대한 흑룡(黑龍)의 날개 3쌍이 개기일식처럼 내 머리 위의 태양을 가렸다.
위를 힐끔 보니, 망룡왕이 주둥이를 쫙 벌리고 있었다.
‘용의 숨결…!’
판타지 세계관에서 용이란 엉터리 생명체를 더욱 엉터리로 만들어주는 최강의 공격수단.
용의 숨결(Breath).
용왕쯤 되면 그 위력은 자연재해보다 끔찍하다.
“Chaooo~~!”
거친 표효와 함께 망룡왕의 주둥이에서 쏘아진 시커먼 독액이 폭포처럼 지상 위로 떨어졌다.
콸콸~!
맹독이 홍수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용의 숨결에 닿은 모든 동식물이 순식간에 검게 변하며 죽었다.
산이나 바위 위 같은 고지대로 도망쳐도 소용없었다. 독액에서 뿜어져 나온 독가스 또한 치사성이 매우 높았던 탓이다.
하지만 나는 무사할 수 있었다.
그냥 빗맞은 덕분이었다.
“늙어서 노안(老眼)이 왔나? 숨결 명중률이 형편없네.”
나는 마을 반대방향으로 달렸다.
잡것들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위대한 존재께 피해를 주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망룡왕의 출현으로 예정이 좀 많이 어그러졌다.
그러나 절망적인 수준까진 아니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346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맷집S 근력A 민첩A 내성A 오감A…
▷상태: 육성
오크 군락지를 쓸어버린 이후부터 폭풍 성장 중이다.
아직은 S등급 스킬이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S등급을 찍는 건 1회차에서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노력으로 올릴 수 있는 한계치가 A등급이란 말이 정설로 받아들여질 정도.
하지만 내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마스터 몰랑. 감사합니다.’
내 몸은 수동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세균과 독이 침투하면, 골수에서 대량으로 생성한 백혈구가 식균 작용으로 항체(抗體)를 만들고 항원(抗原)을 제거한다.
몸에 상처가 생기면, 백혈구에서 분리된 혈소판이 혈액 응고로 피딱지를 형성하며 순식간에 출혈을 틀어막는다.
판타지의 회복, 해독 마법 따위는 필요 없다.
스르륵….
독가스에 노출되어 시커멓게 변했던 피부가 원상태로 되돌아왔다.
망룡왕의 숨결도 근본적으로는 독.
머리 위로 곧장 떨어졌다면 위험했겠지만, 멀리 빗나가면서 백혈구가 항체를 만들 시간을 벌었다.
이걸로 독은 면역.
하지만 해결해야 할 위협은 아직 더 남아있었다.
“KuKu…!”
“BuBu?!”
용의 숨결을 피해서 도망치던 오크 무리랑 마주쳤다. 놈들은 나랑 같이 사이좋게 도망치길 거부하고 덤벼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맹독을 뒤집어쓴 나는 오크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접근을 막고자 공격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도 양보할 수 없었다.
“비켜-!”
오크들의 공격을 맨몸으로 맞으며 돌파했다. 온갖 날붙이가 내 육체를 강타했으나 무시했다.
그러면서 냉정하게 주위를 살피다가, 레벨이 높은 오크가 보이면 정령검 엔드미온으로 멱을 따줬다.
“CuCu~?!”
나는 고통을 즐기는 변태가 아니다. 인내심도 대단하지 않다.
과학으로 밀어붙일 뿐.
육체의 통증은 엔돌핀(endorphine)이 억제해준다.
보통은 격한 운동 스트레스나 출산 때만 뇌하수체와 시상하부에서 엔도르핀이 대량으로 분비되지만, 내게는 그런 제한조건이 없었다.
단, 남용은 금물.
마약처럼 황홀경을 느끼게 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조절이 필수적인 호르몬이다.
“캬아~! 뿅에 취한다~!”
“HuHu…?”
“죽어! 죽어! 내 경험치가 되어랏! 냐하하하!”
“QuQu~?!”
전투 중에는 부신수질에서 분비된 아드레날린(adrenaline)이 뇌와 뼈대 부분의 혈관을 확장해서 반사신경과 기능을 강화한다.
또한, 아드레날린은 소화 기능을 억제해서 전투 중에 생리현상으로 고통받지 않게 도와준다.
그러나 이 호르몬도 과하면 위험하다.
고혈압으로 쓰러지는 수가 있다.
“끈질겨!”
“Chaooo!”
나는 계속 달렸다.
망룡왕도 계속 따라왔다.
강력한 몬스터가 망룡왕의 맹독 숨결에 중독돼서 빌빌거리면, 나는 살포시 다가가서 정령검 엔드미온으로 모가지만 톡 따줬다.
최고의 팀플레이!
내 레벨이 경이적인 속도로 올라갔고, A등급에서 멈춘 스킬들도 한계를 돌파하며 다방면으로 성장했다.
다른 말이 필요 없다.
“하핫! 이런 버스 기사는 처음이야!”
“Chaoooo-!”
죽이 잘 맞는 우리는 밤낮없이 판타지아 대륙을 모험했다. 그 누구도 우리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악마, 숲, 영웅, 괴물, 기사단, 용병, 도시….
청소기 앞의 먼지처럼 싹 쓸려나갔다.
‘내일도 오늘 같으면 좋겠네!’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며칠이 흘렀을까? 영원할 것 같았던 우리의 우정과 모험에도 종착지가 있었다.
만남처럼 작별도 갑작스러웠다.
*
“Chaooo~~~?!”
나의 친애하는 파트너, 망룡왕 뇌비우스가 밤하늘을 우아하게 날다가 비명을 지르며 지상에 곤두박질쳤다.
쿵-!
처음에는 마왕의 습격을 의심했다.
우리의 지독한 우정을 시샘한 스폰서가 아니고서는, 판타지아 세계관 최강의 용을 한 방에 추락시키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종족: 카오스 드래곤
▷레벨: 999+
▷직업: 패왕(정벌→패기↑)
▷스킬: 혼돈SS 파괴SS 망각SS 패기S 맹독S…
▷상태: 노환, 탈골, 염좌, 탈진, 황혼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최강의 용이라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오랜 비행으로 척추와 날갯죽지에 무리가 왔고, 체력에도 비상이 걸리며 몸이 따라주질 못했다.
반면에 나는 어떠한가 하면….
▷종족: 아크 휴먼
▷레벨: 903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내성SS 광기S 근력S 맷집S 민첩S…
▷상태: 양호
화려하게 성장했다!
내 레벨은 평화로운 대륙에서 사냥으로 단시간에 올릴 수 있는 한계치에 근접했다.
여기서 더 올려서 999레벨을 돌파하려면, 경험치가 알찬 악마 부하를 많이 보유한 스폰서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딱 적당한 타이밍에 모험이 끝났다.
문제가 있다면,
“이건 평판에 좀 치명타일지도…?”
나는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다. 용의 숨결에 대지가 맹독으로 오염되고, 살아있는 생명체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시력이 나쁜 망룡왕이 엉뚱한 방향으로 숨결을 토해서 소멸한 도시가 적지 않았다.
이 주변만 그런 게 아니다.
판타지아 중앙대륙의 절반이 이 꼴이다.
마왕 페도나르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인류를 공포의 도가니에 빠트린 셈이다.
무서운 놈.
▷탄식: 정말 무서운 학생이군요!
아! 도덕 선생님. 정말 오랜만에 오셨네요.
▷고민: 위기상황이 계속되는 바람에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저 때문에 잘못되면 큰일이니까요. 그래서 전투가 끝나길 기다렸던 건데, 평화로웠던 대륙마저 끝나버렸네요.
끝나다니요. 포기하긴 아직 이릅니다!
저에게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2회차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판타지아 차원은 중앙대륙을 중심으로, 비슷한 땅덩이의 4개 대륙이 십자가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동대륙, 서대륙, 북대륙, 남대륙.
그리고 망룡왕과 나의 주요활동지역은 중앙대륙이었다.
그 주변의 4개 대륙은 지금도 멀쩡했다. 큰 타격을 받은 중앙대륙 또한 절반이나 무사했다.
통계학으로 따지면 인류 터전의 90%가 온전한 셈.
그러니 포기하기엔 너무 이르다.
▷긍정: 맞습니다. 용사에게 희망은 중요한 덕목이죠…. 아무튼, 믿을 만한 명마(名馬)라도 말굴레를 벗겨서는 안 됩니다. 1회차 기억과 정보를 맹신하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난 거잖아요?
부정하진 않겠다.
어린 꼬마 용이 사는 줄 알았는데, 임종을 앞둔 최고령 용이 떡하니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굉장히 호전적이고 강력하기까지 했다.
이젠 인성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업적을 올리려다가 평판이 너덜너덜해졌다.
“대신에 얻은 것도 있지.”
“Chao….”
기력이 다한 망룡왕 뇌비우스는 빠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도중에 나를 포기하고 둥지로 돌아가거나, 날개를 접고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했다면, 못해도 1년은 더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용은 마지막까지 패도(覇道)를 걸었다.
그것은 놈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이봐. 만족해?”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 패기와 위용을 잃지 않은 망룡왕. 나는 쓰러진 놈의 거대한 머리에 다가가며 물었다.
용이 그 입을 벌리며 답했다.
“Chao.”
“그렇군.”
용(龍)의 언어는 어떤 스킬로도 번역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용을 연구한 학자도 알아듣지 못한다.
오직, 자신을 낮춰서 인간종으로 변신(Polymorph)한 용이 인간의 언어로 말해줄 때만 대화가 성립된다.
하지만 지금은 예외였다.
파충류의 표정 따위를 내가 알 순 없지만, 망룡왕이 웃고 있다는 확신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즐거운 패배였다고.
“나도 즐거웠어. 뇌비우스.”
푹.
나는 망룡왕의 미간에 정령검 엔드미온을 박았다.
이 정도로 간단히 죽을 존재가 아니었지만, 생명의 불꽃이 다해가는 와중에는 산들바람도 위험한 법이다.
“Chaooo….”
용의 마지막 의지도 크게 한몫했다.
여전히 삶에 미련이 있었다면 달랐겠으나, 놈은 중앙대륙 절반을 파괴할 만큼 치열했던 승부의 결과에 만족했다. 그래서 내게 기꺼이 승자의 권리를 허락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자신의 힘을 넘겨준다.
그 양은 상식을 벗어난 수준이었다.
촤아악~!
작은 산맥에 버금가는 용체(龍體)가 새까만 맹독의 홍수로 변하면서 지상을 또 한 차례 휩쓸었다.
망룡왕 뇌비우스.
최후의 최후까지 끔찍한 용이었다.
뚝배기를 깨자마자 깔끔하게 죽어주던 마왕 페도나르가 이건 좀 본받았으면 좋겠다.
악당이라면 근성이 있어야지.
“...어라?”
능력치 변화를 본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이 용은 단순히 경험치와 심장만 남기고 떠난 게 아니었다.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혼돈’까지 내게 맡겼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999+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내성SS 혼돈SS 광기SS ■■□ 근력S…
▷상태: 혼돈
그 덕분에 내 능력치도 혼돈에 빠져버렸다. 종족도 혼돈이고, 스킬도 혼돈이고, 상태도 혼돈이다.
온 세상이 혼돈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도덕 선생님. 저 모자이크는 뭔가요?
▷혼란: 그, 그건 저도 잘….
평소처럼 시원한 답변이 아니고 우물쭈물 댄다.
이 엉터리 교육시스템을 짠 교직원도 모르는 능력치인 걸까? 아니면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
솔직히,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거 참~♪”
주택복권 은박지를 긁기 직전처럼 설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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