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2회차]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의문: 카오스 드래곤은 사냥이 불가능해요. 용사 후보가 든든한 동료들을 모아서 충분히 성장했을 때는 이미 수명이 다해서 자연으로 돌아간 후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있을 수 없어요. 회귀했다고 가능한 업적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나요?
도덕 선생님. 일개 학생이 뭘 알겠어요.
나는 만만한 어린 용의 경험치를 먹으러 왔을 뿐이다. 집주인이 망룡왕인 줄 알았다면 절대 안 왔을 것이다.
얼떨결에 잡아버렸지만.
그리고 얻었다.
■■□
이 모자이크 스킬은 아직 비활성화 상태였다. 하지만 어떻게 활성화하는지는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다.
자! 복권을 긁어볼 시간이다.
▷깜짝: 강한수 학생! 기다려주세요! 옛말에, 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개는 뒤쫓지 말라고 했습니다. 상부에서 조사를 마칠 때까지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빠르게 알아보겠습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세요!
도덕 선생은 부리나케 떠났다.
그 직후, 내 입에서 절로 비웃음이 튀어나왔다.
“풋! 주인없는 개? 뇌가 딱딱한 선생이라서 뭘 모르네.”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나약한 인류는 ‘뜨거운 꽃’을 만지는 어리석음을 반복한 끝에 불을 다스리는 경지에 도달했다.
호기심이야말로 인간을 발전시킨 원동력.
판도라의 상자는 열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못 열어보게 할 거면 애시당초 상자에 넣지 말았어야 했다.
원인제공자는 교직원 일동.
내가 잘못한 건 없다.
“자…. 어디….”
스킬을 활성화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망룡왕의 심장.
그것은 테니스공 크기의 칠흑빛 하트(♥)였다.
산맥을 연상시키던 망룡왕의 초현실적인 덩치랑 비교하면, 그 힘의 원천인 심장은 너무나 작고 귀여웠다.
말랑말랑.
심지어 그 감촉마저도!
검은색 페인트로 칠한 슬라임인 줄 알았다.
그럼, 엉뚱한 감상은 이쯤하고….
꼴깍.
나는 젤리처럼 말랑말랑한 망룡왕의 심장을 한입에 삼켰다.
용을 죽이면 대량의 경험치만 얻고 끝나지만, 그 심장을 섭취하면 경험치와 용의 속성 일부를 계승한다.
망룡왕의 속성은 혼돈.
이 심장은 모자이크 스킬을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휘이이잉-!
내 몸속에서 혼돈이 휘몰아쳤다.
육체가 믹서기에 갈리는 듯한 감각.
변태 같은 무림고수와 소드마스터라면 “강해질 수만 있다면 고통쯤은 얼마든지 참아주겠어!”라며 미련하게 견디겠지만, 나는 엔도르핀을 분비해서 영화감상 하듯 술렁술렁 넘겼다.
“...따분하네.”
고통을 즐기는 변태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정신 멀쩡히 뜨고 수술이 끝나길 가만히 기다리는 기분이다.
뭘 하면서 시간을 때울까?
누군가 노래라도 불러줬으면….
■■□ → ■■F
오! 끝났다.
스킬 이름이 들어갈 자리는 여전히 시커먼 모자이크였지만, 하얀색 모자이크는 F등급으로 표시가 바뀌었다.
스킬이 활성화됐다는 뜻이다.
“흐음. 일단은 블랙박스(Black-Box)라고 해둘까.”
진짜 이름을 알 수 있을 때까지.
사실, 스킬 이름이야 개똥이든 소똥이든 아무렴 어떤가? 효과만 좋으면 장땡이지.
나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능력치 기능을 개방했다.
자세히 살펴보기라는 것이다.
▷종류: 스킬
▷명칭: ■■
▷등급: F
▷E: □□□□ □□□.
▷F: 망각하지 않는다.
모든 스킬은 등급이 오를 때마다 새로운 효과가 추가되거나 기존 효과를 강화한다.
이 살펴보기 기능은 질 나쁘게도, 다음 등급의 효과를 가르쳐주면서 희망 고문을 한다. 그런데 나는 이마저도 모자이크로 가려져서 E등급 효과를 볼 수 없었다.
“망각(忘却)하지 않는다고? 뭘?”
하지만 재미있을 것 같다.
버그 냄새가 난다.
효과가 대단하지 않아도 솔직히 상관없다.
멀쩡한 사람을 제멋대로 회귀시킬 만큼 대단한 교직원을 당황시켰다는 것만으로도 그냥 좋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나는 이 신나는 기분을 품은 채 귀환길에 올랐다.
위대한 존재가 사는 마을로.
*
“용사님! 너무 늦으신 거 아니에요?”
“잘못되신 줄 알고 걱정했습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두 잡것이 환영해줬다.
내 돈으로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었는지 피부가 반들반들하고 신수가 훤해졌다.
죽은 요정이 불쌍하다고 구시렁댈 때는 언제고?
그녀의 시신을 팔아서 호의호식 중이었다.
나는 라누벨을 돌아보며 물었다.
“우리가 헤어지고 며칠이나 지났는데?”
“오늘까지 딱 7일째네요. 용사님. 그동안 뭐하고 계셨어요?”
“...너희들 몰라?”
이걸 어떻게 모를 수 있지?
“네. 일정을 제대로 안 가르쳐주셨는데 저희가 어떻게 알겠어요. 어휴! 말도 마세요. 용사님이 안 계시는 동안, 500년이나 자취를 감췄던 망룡왕 뇌비우스가 나타나서 중앙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답니다. 대륙의 쟁쟁한 영웅호걸들이 나섰지만, 빈번히 실패하고 몰살당했어요.”
“...그랬었군?”
용사와 망룡왕의 환상적인 콤비.
과장 살짝 보태서, 우리의 모험은 생존자를 남기지 않았다.
망룡왕 뇌비우스는 워낙 덩치가 컸기에 아주 먼 거리에서도 관측됐지만, 인간인 나는 가까이서 대면하지 않으면 파악이 힘들었다.
설사, 시력이 좋아서 봤어도 의미없다.
용사의 얼굴을 아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 얼굴마저도 맹독을 뒤집어써서 새까맣기만 했다.
나도 망룡왕의 숨결을 이용한 경험치 수확으로 바빴다. 그래서 마주치는 누구에게도 내가 용사임을 알리지 않았다.
즉, 아무도 진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거, 어쩌면….’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주판을 두들겼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너희 둘, 듣고 놀라지 마. 내가 망룡왕 뇌비우스를 토벌했다!”
업적과 평판을 동시에 올릴 기회다.
“용사님이요?!”
“헉! 용사님께서…!”
“그래. 망룡왕의 시체는 경험치로 변해서 사라졌고, 유일한 증거물인 심장도 내가 그 자리에서 먹어버렸지만, 확실해. 못 믿겠으면 여러 정보통으로 확인해봐. 망룡왕의 습격 소식이 더는 안 들릴걸?”
나는 라누벨과 짐꾼에게 각색해서 설명해줬다.
이러쿵저러쿵해서 용사가 무찔렀노라고.
둥지에서 조용히 황혼기를 보내던 망룡왕이 나 때문에 깨어나서 날뛰었다는 내용은 당연히 뺐다.
이거 들통나면 평판은 끝장이다.
“와아…! 정말 굉장하세요! 5대 재앙을 혼자서…!”
“역시 용사님이십니다!”
평화로운 마을에서 빈둥빈둥 놀기만 한 게 찔렸던 걸까, 두 잡것은 침 튀겨가며 내 업적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반응이 썩 괜찮았다.
나를 의심하는 조짐은 없었다.
‘좋아! 아주 훌륭한 완전범죄야!’
사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평판을 걱정했었다.
하지만 이 멍청한 판타지 원주민들은 망룡왕 뇌비우스의 출현을 자연재해로 착각해줬다.
덕분에 문제 될 게 없었다.
나는 망룡왕을 처치한 훌륭한 용사로만 기억될 것이다.
사람들이 믿어줄지는 의문이지만.
나는 소환되고 고작 보름 된 용사인 까닭이다.
1회차의 나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생명체를 죽인다는 거부감에 미적거리다가 간신히 10레벨을 달성했을 시기다.
그렇다. 10레벨!
보름 된 햇병아리 용사에게 마왕과 망룡왕은 너무나 머나먼 별천지의 존재였다. 용사 특전을 고려해도 불가능했다.
내가 쓰러트렸다는 사실을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저희는 믿어요!”
“그렇습니다!”
라누벨과 짐꾼의 아부가 싫진 않다. 그러나 이 둘은 내가 오크 주둔지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맹신하는 것이다.
내 실력을 모르는 대다수 원주민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군. 또 잡으면 돼.”
망룡왕 뇌비우스처럼 이름값 높은 강적을 토벌해서 증거물을 제시하면 믿어줄 것이다.
명성과 업적을 동시에 올릴 최고의 해결책.
레벨이 낮은 처음만 어렵다. 한 번 물길을 트며 그 뒤부터는 간단하다. 5대 재앙도 첫 토벌만 힘들었고 이후에는 손쉬운 편이었다.
최적의 일정표와 경로가 내 머릿속에 좌르륵 연상됐다.
“용사님. 뭘 또 잡으신다는 거예요?”
라누벨이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내가 열심히 갈궈서 귀여운 척이 좀 줄어드는가 싶었는데, 잠시 안 본 사이에 원상태로 돌아갔다.
그 교정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질문에 답해줬다.
“거물을 또 잡을 거야.”
5대 재앙 이상의 경험치 덩어리를.
“네?! 귀국은 어쩌시고요? 알렉스 씨랑 오리엔테이션을 갖기로 한 약속날짜까지 이제 하루 남았어요.”
“아…! 알렉스…!”
나는 이마를 쳤다.
어떻게 그 친구를 깜빡할 수 있지?
아무리 명성과 평판에 눈이 멀었어도 ‘동료’를 잊어선 안 된다. 만약에 라누벨이 얘기해주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고마워서 그녀의 뺨에 뽀뽀하고 싶을…. 아, 이건 너무 갔나.
“그리고 용사님.”
“말해. 지금은 기분이 좋아.”
알렉스를 어떻게 요리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요정 장의사가 알려준 정보인데요. 저희가 확보한 요정 시신은 엘브하임 왕비님의 수호기사 중 하나래요. 여기서 더 놀라운 점은 뭔지 아세요?”
“암시장에도 하나 있었다는 거겠지.”
“맞아요!”
딱히 놀랍지도 않다.
요정들의 평균 레벨은 100쯤 한다.
안티에이징의 축복을 받은 요정들이 오래 사는 건 틀림없지만, 경험치를 쌓을 기회가 인간 용병보다 적어서 200레벨을 넘는 전사는 정말 극소수다.
800레벨은 말할 것도 없고.
왕비를 지키는 중책을 맡는 게 당연하다.
아무튼,
“라누벨. 잘 들었으니 이제 닥쳐.”
내 인내심도 슬슬 고갈됐다.
“네?!”
“나머지 이야기는 네 가슴속에 고이 묻어놔. 상급 악마에게 요정왕의 마누라를 빼앗기고 실종된 수호기사들을 수색하는 임무 따위는 내가 알 바 아니야.”
“......”
“뭐냐. 그 거북한 눈깔은.”
이년이 멀쩡한 사람을 귀신처럼 쳐다본다.
“용사님.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어요?”
“척하면 척이지. 내가 용사 경력 10년- 쌓을 예정인 몸이다. 이 정도는 서론만 들어도 알 수 있어.”
귀찮은 사건은 귀신같이 감지해낼 수 있다.
1회차에선 망할 동료들 때문에 회피하지 못하고 뒤치다꺼리를 도맡아서 처리해야 했지만.
“그러면 저거는요?”
“저거?”
“이 마을 쪽으로 달려오는 사두마차요! 복면 쓴 산적들에게 쫓기는 듯해요!”
라누벨의 해설대로다.
튼실한 백마 4필이 모는 화려한 마차였다. 따로 깃발은 없었지만, 마차에 새겨진 은빛 여우 문양을 나는 알고 있다.
신성제국 제1 황녀의 표식.
그녀는 중앙대륙의 북부를 지배하는 거대한 나라의 씨족이다. 여기서 그 나라의 국경이 가깝긴 했다.
고귀한 황족이 저리 다급하게 국경을 넘는 이유야 뻔했다.
숙청(肅淸).
‘이상하네. 황제가 붕어하려면 아직 5년쯤…. 아차!’
망룡왕이 황궁을 무너트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래서 황제가 일찍 죽었고, 평범한 황태자와 똑똑한 황녀의 골육상전(骨肉相戰)이 벌써 벌어진 모양이다.
1회차에서 이 싸움은 황태자의 압승으로 끝난다. 고위귀족들이 똑똑한 여황제보다는 만만한 황제를 바란 결과였다.
패배한 황녀는?
미인계를 써서 용사 일행에 빌붙는다.
여황제에 오를 때까지.
“진짜 얍삽한 여자였지….”
짐꾼은 마을을 떠날 채비를 위해 마구간에 가고 없었다. 마을주민들은 땡볕을 피해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저 불청객들을 눈치챈 사람은 나와 라누벨뿐.
그렇다면,
“...앗! 동쪽 하늘에 최신형 마법지팡이가 날아간다!”
“정말요?!”
라누벨의 시선이 마차 반대편 하늘로 돌아갔다.
이 틈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조용히 내뱉었다.
“후우~~”
망룡왕 뇌비우스의 숨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내가 생성한 독가스가 입김을 타고 사두마차 쪽에 살포됐다.
“히이잉~?!”
“히잉~?!”
힘차게 달리던 말들이 단말마를 지르며 고꾸라졌다. 채찍질하기 바쁘던 기사도 그 직후에 마부석에서 추락했다.
쿠당탕-!
사두마차는 길 한복판에 전복됐다.
“커엌?!”
“독…!”
두건으로 정체를 감춘 신성제국의 추적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멈춘 마차에 접근한 그들은 순차적으로 픽픽 쓰러졌다.
독무(毒霧)에서 탈출한 생존자 따위는 없었다.
고요해졌다.
“용사님. 하늘에 마법지팡이는커녕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그래? 내가 잘못 본 모양이네.”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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