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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급 관심용사-17화 (17/430)

 017화

[2회차] 훈련은 실전처럼!

시체는 주인이 없다.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다.

우리는 황녀 일행의 마차에서 보석상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대로 순순히 황제 자리를 오라비에게 넘길 수 없다는 황녀의 강력한 의지가 엿보이는 액수였다.

마음 같아서는 황녀가 입고 있는 고풍스러운 검은색 속옷까지 홀딱 벗겨서 챙겨가고 싶지만, 가져갈 수 있는 짐에 한계가 있어서 포기해야만 했다.

이게 다 라누벨 때문이다.

“불쌍해요. 이들에게 쫓긴 사연이 있는 듯한데.”

용사의 동료 같은 대사를 읊고 앉았다.

...말이 좀 이상한데?

아무튼,

“야. 라누벨. 너는 이 여자만 불쌍하고 나는 행복해 보이니? 마을에서 4차원 가방 마술이라도 익히지 않고 뭐했어?”

“에…. 몰랑이랑 놀았어요.”

“괴롭힌 거겠지!”

위대한 존재가 라누벨만 보면 몰랑거리면서 두려워한다. 얼마나 귀찮게 만져댔는지 상상이 안 됐다.

라누벨이 수심에 깃든 얼굴로 묻는다.

“용사님. 이 아름다운 여성분은 누굴까요?”

“마차의 문양을 보면 알잖아.”

“처음 보는데요.”

“...음?”

고고학자 라누벨이 모르는 가문의 문장은 없다. 그런데 그녀가 모른다고 단언하면, 정말 최근에 생긴 가문이란 뜻이다.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아아, 그렇군. 시기상 분가(分家)한 지 얼마 안 됐나.’

신성제국 황제는 냉철하고 현명한 인물이었다.

훗날, 두 자식의 후계다툼으로 제국이 분열할 것을 예견한 그는 일찌감치 평범한 아들을 후계자로 책봉하고, 똑똑한 딸의 야욕을 끊고자 황가(皇家)에서 제명하는 강경책을 선택했다.

그리고 딸에게 ‘후작’ 지위를 내렸다.

하지만 똑똑한 황녀는 포기하지 않고 야금야금 자신만의 세력을 키웠다. 그 과정에서 허울뿐이었던 그녀의 가문 문양 또한 덩달아 유명해진 건 당연지사.

그래도 끝내 실패한 황녀는 용사 일행에게 빌붙었고, 그녀의 눈물과 친목질이 국가전복으로 이어진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라누벨. 여기 시체를 마법으로 다 태워.”

“네?! 하지만….”

“벌거벗긴 이 여자의 똥구멍에 꼬챙이를 찔러서 깃발 대용으로 쓰는 광경을 보고 싶으면 놔두고.”

“히익?!”

평범한 황제와 귀족들의 화합으로 빠르게 안정을 되찾던 신성제국은 야만적인 용사 일행의 공격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쉽게 표현해서, 달걀로 바위를 깨버렸다.

다수결의 원칙을 깨고, 극소수가 다수를 몰살시켰다.

그 결과,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껍데기가 된 신성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승리에 취한 용사 일행은 “똑똑한 여황제가 나라를 잘 다스릴 거야!” 같은 개소리나 시부렁댔다.

쿠데타로 나라 전체가 피폐해졌다.

전국적으로 줄어든 군사력과 무너진 치안은 통치자의 IQ가 높다고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작은 도시를 경영하는 게 아니다. 긴 시간과 자본을 요구하는 대규모 국가사업이다. 자본을 구하려면?

세금.

자연히 올라간 세금으로 고통받는 건 백성이다. 세금 높인 지도자치고 잘하는 놈을 못 봤다.

선황제의 걱정은 최악의 형태로 마무리됐다.

화르륵!

우리는 귀금속을 뺀 황녀를 포함한 모든 시신을 커다란 마차에 욱여넣고 불태웠다.

이것은 내 1회차의 속죄였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욕을 먹어보긴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평화로운 신성제국이 되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이미 국토 절반이 망룡왕의 맹독에 오염됐는데, 후계다툼까지 얹어지면 너무 불쌍하잖은가?

*

우리는 이틀 걸려서 왕국으로 되돌아갔다.

약조한 열흘에서 하루 지각하긴 했지만, 만두 국왕은 내가 썩은 미소를 짓자마자 대범하게 용서해줬다.

그리고 마침내,

“하하! 용사. 왕궁훈련장에 잘 왔다! 계집처럼 상처 하나 없는 피부를 보니,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모양이군.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왕국 제일의 검이 너를 훌륭한 용사로 키워주마! 그것도 단시간에. 으흐흐.”

알렉스의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됐다.

나와 알렉스를 포위하듯 널찍한 원을 그리며 둘러싼 왕궁기사들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구경꾼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흙먼지 가득한 훈련장 밖의 그늘진 장소에는 왕족과 귀족, 신관, 하녀, 마법사 등이 옹기종기 모여서 관전할 채비를 갖췄다.

마을 씨름판에 들어온 분위기.

하지만 낯설지 않다.

강렬한 경험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 법이니까.

그 말대로, 1회차의 나는 낯선 세계에 떨어져서 향수병이 빠질 틈도 없이 인권모독을 온종일 당해야만 했었다.

구타, 치유, 구타, 치유, 구타….

첫날에는 정말 개처럼 얻어맞기만 했다. 기절하면 뒤편에 대기한 신관에게 치료받은 후에 또 맞았다.

명분은 그럴싸했다.

“단시간이라….”

“그렇다. 단시간. 부활한 마왕이 언제 진격해올지 알 수 없는 비상시국이니까. 나는 너를 속성으로 가르칠 거다. 실전 훈련이라고 들어봤냐? 스킬 숙련도를 올리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알렉스가 주먹을 붕붕 흔든다.

내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그러다가 죽으면?”

“안 죽어. 초보자를 상대로 내가 힘 조절을 못 할 것 같아? 아프거나 다치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저쪽에 대기 중인 신관과 마법사들이 바로 치유해줄 테니. 아! 그리고 네게 거부권은 없다. 인류의 운명이 걸린 사안이니 엄살은 받아주지 않아.”

“많이 아플 것 같은데.”

“그쯤은 참아라. 남들은 내게 실전 훈련을 받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린다. 복에 겨운 줄 알아라.”

“용사에게 원한을 사는 건 괜찮고?”

“네 도량이 좁은 거겠지.”

시시콜콜한 자기소개는 생략됐다.

1회차에선 짧게나마 그 시간을 가졌었는데, 2회차 알렉스는 빨리 나를 때리고 싶어서 오리엔테이션 일정을 팍팍 생략했다.

그의 능력치에도 잘 표현되어있었다.

▷종족: 휴먼

▷레벨: 292

▷직업: 검객(체력=검술↑)

▷스킬: 검술S 체력A 철벽B 내성B 불굴C…

▷상태: 기대, 악의

상태 악의(惡意).

1회차 때는 못 봤던 것 같은데?

나는 피식 웃으며 말았다.

“알렉스. 훈련은 내가 아니라 네가 받아야 하지 않을까? 고작 292레벨로 누굴 가르쳐.”

“기어오르지 마라. 덜 맞고 싶으면.”

이마에 힘줄이 돋은 알렉스가 으르렁거렸다.

“진심으로 해주는 충고야. 내가 오크 주둔지를 쓸어버리고 망룡왕을 토벌했다는 얘기를 해준 거로 안다만?”

알현실에서 라누벨이 나 대신 보고했다.

만두 국왕을 포함해서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하! 그딴 거짓말을 믿을 거 같냐. 이봐, 용사. 훈련받기 싫어서 핑계를 댈 거면 좀 더 현실성 있는 거로 해라.”

“큭큭!”

“풋!”

“키득!”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왕궁기사들이 알렉스를 따라서 천박하게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1회차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그때도 저들은 나를 저런 눈으로 보았었다.

흙바닥을 엉금엉금 기면서 어떻게든 알렉스로부터 도망치려는 나를 한심하게 내려다봤었다.

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입 닥쳐. 철밥통들아. 재밌어 보여? 너희 처자식이 처맞아도 그렇게 웃을래? 내가 멱살 잡고 온종일 때려줄까?”

“......”

“......”

내 말을 들은 왕궁기사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슬금슬금 뒷걸음치며 하나둘 해산했다.

하지만 전부 떠난 건 아니었다.

“너희는 뭐냐?”

내 질문을 받은 자들이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처자식이 없습니다.”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작년에 아내랑 사별했습니다.”

대답하는 왕궁기사들의 울적한 마음이 내 영혼마저 울렸다.

저들에게는 관전할 자격이 충분했다.

“그래! 너희들은 거기 있어도 돼! 내가 인정하마! 이 용사는 언제나 솔로(Solo)의 편이니까. 마음껏 웃어!”

즐거운 쇼가 될 테니.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999+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내성SS 근력SS 맹독S 맷집S 오감S…

▷상태: 양호

알렉스의 능력치랑 비교 자체가 안 됐다. 알렉스 100만 대군이 몰려와도 몰살시킬 자신 있었다.

블랙박스?

F등급 스킬이라서 정렬 우선순위상 끄트머리로 밀려났다. 펼치기 기능을 따로 활성화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망각하지 않는다.

그 효과의 쓰임새는 여전히 오리무중….

“용사! 실전에선 말하고 공격하지 않아. 예고 없는 기습을 늘 조심해야 하지! 바로 지금처럼!”

알렉스는 1회차랑 똑같은 말을 하며 내게 돌진해왔다.

하지만 노리는 부위는 전혀 달랐다.

“거참….”

복부를 공격해왔다면 맷집S의 성능을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거기는 내 기분이 더러워질 것 같아서 일부러 못 맞아주겠다.

그렇다고 방어하지도 않았다.

괘씸해서 역으로 먼저 걷어차는 쪽을 택했다.

퍽-!

“커억-?!”

오른쪽 다리의 무릎 관절이 기형적인 방향으로 꺾인 알렉스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

“......”

이 사태에 구경꾼들이 입을 쫙 벌렸다.

마음에 드는 반응들이다.

“알렉스. 엄살 그만 부리고 얼른 일어나. 실전에서 너의 적은 친절하게 기다려주지 않아.”

“이놈…!”

그래도 미래의 검왕(劒王)다웠다.

내 가벼운 도발에 두 눈이 충혈된 알렉스는 두 손으로 땅을 박차며 잽싸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오른쪽 다리가 완전히 박살 난 알렉스는 몸의 무게중심을 왼쪽 다리에 집중한 채 제자리에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물론, 내가 알 바 아니다.

“아아앜?!”

알렉스의 뒤로 잽싸게 이동해서 꼬리뼈 부분을 올려 찼더니, 예상대로 힘찬 오페라가 들려왔다.

녀석은 아직 검왕이 아니다.

현재는 일개 왕국의 왕궁기사단장일 뿐. 하급 악마 한둘만 습격해와도 바로 쩔쩔맬 약자다.

그런 주제에 남을 가르치시겠다고?

“이봐, 알렉스. 일단 너부터 실전경험이 빈약한데 누굴 가르치겠다는 거야?”

“으으...”

“외견과 상식으로 남을 재단하지 마라. 신중한 자들은 진짜 실력을 감추고 행동하니까. 잘 들어. 모든 싸움은 승률 50% 고정이야. 이기지 못하면 진다. 너처럼 기세등등한 멍청이는 이 법칙을 무시하다가 일찍 죽어버리지.”

“네놈이…! 크윽!”

고꾸라진 알렉스는 곧장 일어서지 못했다. 근성으로 견딜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선 탓이다.

그의 육체는 붕괴 직전이었다.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관의 외침이 들려왔다.

“용사님! 그러다가 알렉스 단장이 죽겠습니다!”

“당연하지. 실전에선 원래 잘 죽어.”

나는 이 실전 훈련을 당장 멈출 생각은 없었다. 1회차의 알렉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강행했다.

물론,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다음 가르침. 잘 싸워서 이기는 건 하책이야. 안 싸우고 이기는 게 상책이지. 반드시 상대의 피를 봐야만 실전인 건 아니야. 너 같은 야만인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이놈….”

흙바닥에 쓰러진 알렉스가 나를 노려본다.

나는 그 면상을 걷어찼다.

“그리고 가장 명심할 것. 실전은 냉혹해. 남을 해코지할 때는 역으로 당할 각오도 있어야 돼. 그걸 망각하는 순간, 너는 동료와 수하들을 위기에 빠트릴 거다.”

매우 중요하다.

내가 그 최대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걷어차인 알렉스는 썩은 오징어처럼 흙바닥에 퍼져서는 손가락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내가 너 따위에게….”

알렉스는 현실을 부정하기 바빴다.

그래서 내 가르침을 아예 들으려 하지 않는다.

“쯧쯧. 현실부정. 약자들만 상대해온 병신이 처음으로 패배했을 때 보이는 보편적인 증상이군.”

“......”

“자! 그러면, 중간교육과정을 생략하고 마지막 가르침을 내려줄게. 실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 줄 알아?”

우리의 눈이 딱 마주쳤다.

“설마…?”

내 눈빛을 보자마자 정답을 눈치챈 알렉스가 입을 쫙 벌렸다.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더 빨랐다.

우득.

알렉스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밟아서 부러트렸다.

너무나 변변찮은 경험치. 그래도 수강료를 아예 안 받는 것보다는 낫잖은가?

정답을 공개했다.

“후환을 남겨두지 말 것.”

내 실전 훈련은 귀찮은 복습이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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