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18화 (18/430)

 018화

[2회차] 키다리 용사님

▷황당: 황녀와 검왕을 살해하셨더군요. 과거 앞에서는 모자를 벗고, 미래 앞에서는 웃옷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과거의 실패를 무시하진 않되, 미래를 위해 내려놓아야 합니다. 실패해본 당신이라면 그 둘을 좋은 미래로 이끌 수 있지 않았을까요?

오! 도덕 선생님. 빨리 돌아오셨네요.

좋은 미래는 모르겠고, 실패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황녀를 암살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요!

내 평판에는 전혀 문제없다.

무고한 신성제국 백성들도 권력투쟁의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된다.

권력욕에 찌든 황녀를 교화시키기보다는 깔끔하게 죽여두는 편이 가장 변수가 적고 성공적이다.

게다가 쉽잖아?

알렉스는 논할 가치조차 없다.

▷두통: 가장 멋진 승리는 자기 마음을 이기는 것입니다. 1회차 원한을 내려놓으란 의미였습니다···. 현자(賢者)가 화를 내면 더 이상 현자가 아니게 됩니다. 어리석은 인간에게 참회할 기회를 줘야 하지 않을까요? 관용은 용사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입니다.

오늘따라 선생 잔소리가 찰지다.

이러다가 마왕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할 기세다.

▷부정: 그것은 용사의 존재의의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두고 보면 알겠지요~

깜짝 놀란 신관과 마법사가 서둘러 달려왔다. 그들은 알렉스의 맥박을 짚어보고는 하나같이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주, 죽었습니다···.”

“왕국 최고의 검호가 이리 허무하게···.”

“신이시여···.”

알렉스의 죽음이 충격적인 모양이다.

왕족과 왕국을 수호하던 남자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사라졌으니, 불안에 떠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됐다.

나도 그 책임을 느낀다.

알렉스가 개새끼란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다시 기회가 오더라도 망설임 없이 죽일 거다. 그리고 이 선택에 대한 책임을 떳떳하게 짊어질 것이다.

“걱정하지 마! 이 용사님에게 맡겨달라구?”

힘없는 민중들에게 안도감을 주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꽤 자신하는 부분이다.

“헉!”

“히익?!”

“딸꾹!”

...이놈들은 힘없는 민중이 아니라서 저리 두려워하는 것이다. 속옷까지 탈탈 털어보면 분명 찔리는 짓을 했을 게 틀림없다.

얼굴들을 기억해두자.

“왕궁기사단! 전원 집합! 살기 싫으면 말고.”

“헉?!”

“지, 집합-!”

내 명령에 불복하는 왕궁기사는 없었다. 그들은 신속하게 내 앞에 오와 열을 맞춰 섰다.

군기가 바짝 잡힌 늠름한 얼굴들.

2회차를 시작했을 때, 거슬리던 광경 중 하나가 방금 사라졌다. 왕궁기사들이 흠모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딱 내가 원하는 그림이다.

‘그래! 멀쩡한 사람이 회귀했으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1회차에서 10년이나 걸렸던 일을 2회차에선 10일로 단축했다.

용사의 비호 아래에 똘똘 뭉친 지금 같은 결속력이라면, 왕국에 산재한 문제들을 빠르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가 할 일이다.

“제군들. 보다시피, 단장 알렉스가 실전 훈련 중에 죽었다. 실전 같은 훈련을 하다 보면 종종 벌어지는 일이지. 실전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폭력이 아닌 안목이야. 그걸 외면하고 날뛰면 알렉스처럼 단번에 골로 가는 거지. 이해 못 한 자살희망자 있나?”

“......”

“......”

대꾸는 없었다.

모두가 내 가르침을 받아들인 모양이다.

“좋아. 내 오리엔테이션은 여기서 끝내고, 지금부터 우리는 이 왕국을 좀먹는 문제들을 빠르게 제거할 것이다. 음? 이해를 못 한 얼굴들인걸? 그러면 지금부터 손모가지 걸고 질문받겠다. 질문 있는 기사는 잘리고 싶은 손을 번쩍 들도록.”

“......”

“......”

궁금증들이 말끔히 사라진 모양이다.

진도가 빨라서 좋군.

“지금부터 두 팀으로 나누겠다. 라누벨이 이끄는 절반은 왕비의 별장으로 가서 보라색 옷장을 열면 비밀통로가 나올 거야. 그 길을 따라 쭉 들어가면 집회장이 나올 텐데, 그곳의 악마숭배자를 싹 정리하고 증거물을 몰수해오도록. 왕비? 앙탈이 심하면 죽여도 돼. 어차피 교수형이야. 나머지는 나랑 왕국 내부를 청소한다.”

원래는 유료 서비스다.

하지만 알렉스를 죽인 책임과 빚이 있다.

나는 야만적인 검왕 따위가 없어도 이 왕국의 치안과 평온이 유지될 수준까지 정화해줄 것이다.

뒷말 안 나오도록 확실하게!

신성제국 백성들에게 욕먹으며 단련된 내 실력을 보여주겠다.

▷놀람: 강한수 학생. 무슨 심경변화인가요?

아! 아직 계셨습니까?

도덕 선생님. 보시고 평판 점수 잘 매겨주세요.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에 납치된 나는 10년 동안 무수히 많은 사건을 거의 무상으로 해결해줬다.

전부 완벽하게 해결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나를 소환한 왕국의 문제들은 발단부터 해결책까지 빠삭하게 안다고 자부한다.

어린 용(龍) 먹기나 다름없다.

정확히 5일 걸렸다.

왕궁의 정문으로 이어지는 넓은 중앙광장.

이곳에서 왕국의 모든 해충을 죽이는 이벤트가 개최됐다. 아직은 생포해둔 상태지만, 곧 처리할 예정이다.

주최자는 당연히 나.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다.

“짐꾼. 준비됐어?”

“네. 용사님.”

영원히 깨끗한 물탱크는 없다. 주기적으로 청소해주지 않으면 구정물로 변한다.

이 왕국의 치안도 다르지 않다. 1급수 같은 청결을 유지하려면 제2의 알렉스가 꼭 필요하다. 그것도 내게 충성하는 똘똘한 놈으로.

그래서 짐꾼을 골랐다.

“내가 얼마나 경험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지?”

“네. 용사님! 매우 잘 압니다!”

무거운 짐 대신 흉흉한 창을 쥔 짐꾼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가만히 앉혀두고 온종일 정신교육 한 보람이 있었다.

우리 주위에는 경험치 덩어리들이 바글바글했다. 오늘의 이벤트를 위해 굴비처럼 줄줄이 엮어서 예쁘게 모아놓은 죄인들이다.

원래는 바다에 수장시킬 예정이었지만, 그럴싸한 계획은 늘 변경되기 마련이다.

죄인의 직업과 성격도 다양했다.

“폐하! 폐하! 살려주십시오! 용사가 미쳤습니다!”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친구가 있었다. 그 근성으로 어릴 적부터 사람을 납치해서 강간하고 고문했으니, 참으로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능력치도 제법 준수하다.

▷종족: 휴먼

▷레벨: 116

▷직업: 귀족(족보=기품↑)

▷스킬: 기품C 살인D 전술D 경영D 정치E···

▷상태: 탈골, 경상, 공포

귀족들은 무병장수하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레벨을 올린다.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영약(靈藥)이 인기는 가장 많지만, 그 희소성과 가격이 만만치 않아서 경험치 사냥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꼭 몬스터만 잡으란 법은 없다.

사람도 경험치를 준다.

인간들 간의 전쟁이나 몬스터 토벌을 자주 다니는 군벌 출신은 경험치를 구할 기회가 많아서 그나마 낫다.

가난한 문벌들이 늘 문제다.

젊음을 유지하며 무병장수하고는 싶은데 영약 살 돈이 아깝거나 없고, 아프거나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터와 사냥터도 가기 싫다.

날로 먹고 싶다는 심보.

이러면 자연스레 살인으로 이어진다.

시작부터 살인마로 입문하는 귀족은 없다.

처음은 죽여도 무관한 죄수와 노예부터.

여기서 만족하고 끝내면 문제가 안 되는데, 레벨을 더 올리려고 무고한 서민을 건드리면 심각해진다.

무조건 사형감이다.

“죽여.”

“네.”

짐꾼의 창이 귀족의 가슴을 꿰뚫었다.

“와아아아!”

“용사님! 만세!”

“꼴 좋다!”

구경 나온 시민들이 환호했다.

내 가족과 이웃을 납치해서 경험치로 써먹은 악랄한 귀족의 죽음에 기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입가심용에 불과하다.

메인 요리는 이제부터다.

“사랑하는 임이시여! 소녀는 억울하옵니다! 폐하~!”

이벤트용 굴비랑 차별되게 나무기둥에 따로 묶인 초췌한 미녀가 왕궁을 바라보며 애원했다.

이 자리에 정말 힘들게 모셨다.

▷종족: 휴먼

▷레벨: 36

▷직업: 왕비(총애→마성↑)

▷스킬: 매력B 기품C 마성D 마기E 사교E···

▷상태: 혼란, 공포, 쇠약

만두 국왕의 예쁜 마누라다.

어떤 여자든 꽃처럼 아름다워지길 바란다. 이미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어 한다.

경험치를 입수해서 레벨을 올리는 방법이 가장 보편적이지만, 이게 어려운 여성들은 스킬에서 해법을 찾는다.

매력, 마성, 불로, 축복, 무공, 마법···.

하지만 이건 레벨보다 훨씬 올리기 힘들다.

스킬 숙련도 때문이다.

그래도 미모와 젊음을 쉽게 유지하고 싶었던 왕비는, 왕국을 좀먹던 사이비교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악마랑 계약해서 ‘악마의 힘’을 빌린 것이다.

스킬 ‘마기(魔氣)’가 그 증거.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남편을 배신하고 악마에게 나라와 백성들을 팔아넘긴 것이다. 그런데도 본인이 뭘 잘못한 줄 모른다.

그래서 판결은?

“이년도 죽여.”

“...용사님. 갱생의 여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 짐꾼 새끼가 아직도 교육이 덜 됐네. 미녀라고 봐주고, 왕비라고 봐주면 어느 백성이 용사와 국가를 믿겠니? 네가 대신 죽을래?”

“아, 알겠습니다.”

푹-!

예쁘게 오래 살고 싶었던 왕비의 몸이 축 늘어졌다.

좋은 경험치가 됐다.

왕비는 범죄의 현장에서 붙잡혔고 증거 또한 뚜렷했기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그래도 만두 국왕은 조용히 은폐하길 원했다.

후계자 책봉 때문이다.

악마숭배자의 자궁에서 태어난 ‘불길한 존재’가 다음 우리의 왕이 된다고 상상해보라.

이걸 순순히 받아들일 백성은 없다.

그래서 만두 국왕은 아내의 유감스러운 죄목은 덮어두고 지하감옥에 유폐, 악마의 습격에 왕비가 살해됐다는 식으로 정리하길 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성을 못 느꼈다.

왜냐하면,

“어머니···!”

“어마마마···!”

후계다툼 중인 두 왕자도 곧 퇴장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피를 나눈 형제끼리 서로 죽이려는 것도 거슬리는데, 그 활동자금을 마련하려고 온갖 추잡한 비리와 뒷거래에 손을 댔다.

사재기, 고리대금업, 투기, 암살, 정략결혼, 협박···.

이놈들은 갱생의 여지가 없다.

“지옥에 가거든 형제끼리 싸우지 말고 효도해라. 두 번 해라. 판결 끝. 죽여.”

“네!”

푹! 푹!

평균 200레벨의 두 왕자가 짐꾼의 창에 찔려 사망했다.

구경하던 백성들은 놀라긴 해도 그리 충격받은 얼굴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판타지 세계에서 왕족이란, 하늘의 구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을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왕비부터 악마숭배자로 공표한 후에 죽이고, 그녀가 낳은 왕자들을 이어서 처형하는 식으로 충격을 완화했다.

그게 정답이었다.

아무도 내 판결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걸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짐꾼. 나머지 잡것들은 빠르게 정리해.”

“잡것들? 아! 네! 용사님!”

푹! 푹! 푹! 푹! 푹···.

백성들은 이제 그러려니 바라볼 뿐이었다.

왕족까지 처형되는 마당에 귀족과 유명인이 눈에 차겠는가? 복잡한 재판 없이 빠르게 정리됐다.

사악한 귀족일수록 레벨이 높았다.

덕분에 짐꾼의 레벨도 쭉쭉 올라갔다.

▷종족: 휴먼

▷레벨: 325

▷직업: 심판자(죄인→심판↑)

▷스킬: 심판A 근성B 생존C 창술C 용기D···

▷상태: 긴장

보름 전까지만 해도 그는 286레벨 노예 인생이었다.

하지만 10년 경력의 훌륭한 용사님의 지도편달로 빠르게 성장한 짐꾼은, 이렇게나 멋진 사내대장부로 둔갑했다.

직업도 싸구려 용병에서 심판자로 바뀌었다.

스킬 구성도 참으로 알차다.

“어디 보자···. 그래. 이제 괜찮은 여자만 옆구리에 붙여주면 영웅의 풍모가 완성되겠군!”

아주 적합한 여성이 있다.

왕국의 공주님.

탈탈 털었음에도 곰돌이 속옷밖에 안 나오다니. 쳇!

그녀는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캐릭터라서 무명(無名)의 용병 출신으로는 감히 엄두도 못 내지만, 왕비가 사고 치는 바람에 기회가 왔다.

인생은 원래 한 방이다.

“용사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왜?”

“제가 공주님의 가족을 살해했습니다만···?”

아하! 난 또 뭐라고.

이 짐꾼은 여전히 덩치 큰 새가슴이었다.

“말은 똑바로 해. 살해가 아니라 처형이지. 누군가 해야 할 일이었어. 왕비와 왕자들은 네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갈 거야. 경험치로. 우리는 이미 한 가족!”

탈탈 털어서 곰돌이 속옷밖에 안 나온 공주님이라도 ‘악마숭배자의 딸’이란 불명예와 의혹에서 영원히 도망칠 수 없다.

공주로서 가치가 급락했다

“그러니 너 정도면 과분한 신랑감이지. 자신감을 가져!”

“첫날밤에 독살당할지도···.”

“어허! 이 용사님만 믿으라구~”

내가 널 왕(王)까지 키워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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