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화
[2회차] 손이 미끄러졌네. 미안!
내 명성이 판타지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상심이 큰 만두 국왕이 칩거에 들어가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왕국의 대다수 국민은 정의로운 용사님을 찬양하기 바빴다.
주변국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용사님의 무궁한 승리를 기원합니다! 이것은 제국에서 준비해본 약소한 선물입니다! 꼭 받아주십시오!”
“착용감이 어떻습니까? 저희 왕국에서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한 갑옷입니다. 용사님께서 마왕을 쓰러트릴 때 보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용사님. 저희 공주님이 생떼를 부려서 찾아뵙게 됐습니다. 아! 데릴사위는 절대 아닙니다! 절대!”
각국에서 귀한 선물과 예쁜 아가씨들을 한 보따리씩 보내왔다.
그러면서 자기 나라가 얼마나 백성들에게 잘해주는 곳인지 침 튀겨가며 설명했다.
“선황제께서 최근에 붕어하신 후에도 신성제국은 평온합니다. 용사님께서 번거롭게 방문하실 필요 없습니다.”
“마왕이 부활하지 않았습니까? 인류가 용사님의 발목을 잡아선 면목 없지요. 저희 왕국은 범죄율이 매우 낮습니다.”
“해상왕국은 매우 안전합니다! 귀족들이 매일 해적을 퇴치합니다. 용사님을 누추한 바다까지 모실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나는 웃으며 답례해줬다.
“여자는 됐고, 선물만 잘 받겠습니다.”
여자라면 이 왕국 수도에도 많다. 왕국 전역에서 신데렐라를 꿈꾸며 몰려든 어여쁜 아가씨들로 넘쳐난다.
굳이 공주, 영애, 규수를 고집할 필요 없다.
지친 내가 손을 내밀었을 때, 복잡하게 따지지 않고 웃는 얼굴로 호응해주면, 창녀나 과부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마음의 치유’다.
나도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건 아니다.
너무나도 힘들었던 1회차 시절, 토니의 술집에서 만취한 상태로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를 만류하고 적극적으로 위로해준 사람은 아름다운 공주나 요정이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가씨였다.
구원은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자기가 외면할 뿐.
“고대의 용사님들은 경건하셨는데···.”
“불쌍한 중생들이었네.”
라누벨의 불만을 일축한 나는 선물들을 쭉 둘러봤다.
성의를 보인 티는 역력했지만, 지금의 내게 실질적으로 도움 되는 영약이나 장비는 없었다.
내가 300레벨쯤 됐다면 고맙게 써줬겠지만.
“짐꾼.”
“네. 용사님.”
“이 선물들은 네가 전부 처리해라.”
“예에?!”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장비와 도핑 같은 건 상관없지만, 경험치 올려주는 영약은 팔지 말고 다 먹어라. 팔다가 내게 걸리면 죽는다. 진짜 죽는다.”
“명심하겠습니다!”
씩씩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짐꾼이 영약을 먹고 고급 장비로 무장하면 알렉스의 빈자리는 충분히 메꿔질 터.
왕국에서 내가 할 일은 이제 없었다.
“라누벨.”
“네!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안 주셔도 돼요!”
“당연히 안 주지. 미쳤냐?”
“......”
“따라와. 진정한 용사가 무엇인지 보여줄게. 너는 보고 느낀 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해주기만 하면 돼.”
“뭘 하시려고요?”
라누벨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아주 좋은 질문이다. 귀여운 척만 안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나는 정령검 엔드미온을 챙기며 답했다.
“업적 작업.”
내 최고의 스폰서, 마왕 페도나르가 챙겨줄 때까지 느긋한 전원생활을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첫 악마의 등장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년 뒤다.
인간적으로 너무 늦다.
그래서 직접 챙겨가기로 했다.
“업적이요?”
“따라오면 알게 될 거야.”
이제, 본격적으로 졸업을 준비할 때다.
*
1회차에선 정말 별의별 일을 다 했다.
마을소녀가 숲에서 잃어버린 애완고양이를 찾아주거나, 혼자 사는 노인을 위해 약초를 구해오거나, 소심한 새끼의 연애편지를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배달해주거나···.
돈도 안 되고 아무도 안 알아준다!
어디까지나 자기만족.
이마저도 동료들만 흐뭇해할 뿐이고, 나는 아까운 시간과 심력만 낭비해서 스트레스만 쌓여갔다.
하지만 이번 2회차는 다르다.
업적이 확실한 일들만 골라서 할 생각이다.
이미 절반은 성공했다.
내가 왕국을 정화한 이후부터였을까?
망룡왕 뇌비우스 토벌.
소환되고 보름밖에 안 된 용사가 5대 재앙 중 하나를 홀로 사냥했다는 소문을, 판타지 원주민들이 믿기 시작했다.
앞으로 큼직한 이벤트 하나만 더 성공하면 된다.
“용사님. 여긴 왜 온 거예요?”
쪼르르 쫓아온 라누벨이 생뚱맞은 질문을 했다.
용사가 어딜 가는 이유야 뻔하잖은가?
“문제를 해결하러 왔지.”
“요정 나라를요? 정복이라도 하시게요?”
이곳은 엘브하임 중심부에 세워진 마탑.
나서스 왕자의 전폭적인 협조로, 공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해서 단숨에 왕국의 수도까지 올 수 있었다.
요정이 사는 도시와 마을은 그야말로 판타지의 표본이다.
건물, 벤치, 보도블록, 가구, 장식물, 성벽···.
이 모든 게 예술품이기 때문이다.
물의 정령과 땅의 정령이 빚은 찰흙으로 형태를 잡고, 불의 정령이 그것을 도자기처럼 굽는 식으로 만든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대부분 집에는 커다란 날개바퀴가 달려있다.
바로 풍차(風車)다.
체형이 비실비실한 요정들은 남녀 불문하고 노동에 쥐약이다. 그래서 물을 퍼내거나 곡식을 빻는 데 풍차를 주로 이용한다.
바람의 정령이 이때 활약한다.
“라누벨이 웬일이래. 정답.”
“히익?! 진짜 정복하시려고요?! 혼자서?!”
“쉿! 목소리 낮춰, 멍청아.”
“......”
라누벨이 양손으로 입을 막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1회차의 나는 이런 얼빠진 애를 어떻게 오랫동안 데리고 다녔던 걸까? 진짜로 존경심마저 든다.
그때, 고급스러운 복장의 요정들이 다가왔다.
아는 얼굴도 있었다.
“환영합니다! 용사님. 엘브하임에 잘 와주셨습니다!”
나서스 왕자가 환한 미소로 우리를 환대해줬다.
나도 웃는 얼굴로 보답했다.
“입국을 허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서스.”
안 해줬으면 무척 언짢았을 것이다.
“별말씀을요. 자! 가시지요. 용사님을 위한 환영회를 준비해뒀습니다.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야말로 귀빈을 모시게 되어 대단히 영광입니다.”
흠. 도저히 싫어할 수 없는 왕자다!
뇌물과 아부가 나쁘다는 사람이 있는데, 물질적인 성의야말로 최고의 표현수단이다.
형태 없는 마음은 믿을 수가 없다.
오고 가는 물질 속에서 신뢰가 싹트는 법이다.
애정만으로 농작물이 자라진 않잖은가? 좋은 비료와 제충제, 비닐하우스 등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연회. 기대되는군요.”
나서스 왕자는 충분한 성의를 보였다.
1회차에서 이런 오라비를 죽여주고 왕좌까지 앉혀줬는데도 맨입으로 싹 닦던 미래의 요정왕, 실비아 공주보다는 100배 낫다.
우리는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
요정들의 주식은 곡류와 과일이다.
이것은 요정이 고상하거나 평화주의자라서 그런 게 아니다.
동물을 죽이거나 식물의 잎사귀를 뜯으면, 마음의 정령이 그들의 ‘고통’이나 ‘공포’에 반응해서 분노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요정의 식문화와 습관이 편중됐다.
“실비아는 직접 사냥한 고기를 구워서 먹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자주 정령들의 분노를 사곤 했지요. 누가 저 말괄량이를 데려갈지 걱정했습니다. 이젠 걱정조차 할 수 없게 됐습니다만···.”
“아아, 그렇군요.”
나는 나서스의 이야기에 대충 맞장구쳐줬다.
미래의 요정왕 실비아.
무려 9년이나 함께 돌아다녔다. 그 여자가 요정답지 않게 육식을 매우 좋아한다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난폭했던 걸까?
연회는 과일과 빵을 조합한 요리들이 주를 이뤘다.
맛은 대체로 썩 훌륭했다.
고기와 생선 같은 담백한 재료를 포기한 만큼 다른 곳에서 맛을 내려고 연구한 티가 역력했다. 토마토와 고추, 파프리카 같은 채소도 간간이 보였다.
저건 허용범위란 건가?
“용사님. 강해지신 것 같습니다.”
나서스가 의미심장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전히 예리한 친구다.
“조금?”
“하하! 조금으로 망룡왕 뇌비우스를 쓰러트릴 수 있는 용사님의 배포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자! 제 잔을 받아주십시오. 100년에 한 번 열리는 과일로 담근 술입니다.”
그렇게 연회가 무르익어갔다.
하지만 내 눈은 언제나 주위의 요정들 능력치를 쫓고 있다. 그중에서도 한 여기사의 움직임을 쭉 주시했다.
▷종족: 하프 엘프
▷레벨: 999+
▷직업: 기사(충절→불굴↑)
▷스킬: 불굴S 검술A 정령A 마법A 궁술A···
▷상태: 결의, 고양
중간보스 나서스의 부관이다.
엘브하임을 통틀어서 3번째로 강한 존재. 나서스 왕자의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다.
왕국의 최강자는 단연 요정왕이지만, 2위와 3위가 동시에 기습해오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겉보기에는 20대 초반이지만, 영원히 사는 왕족을 제외하고는 최연장자로서 존경받는 교관 겸 기사다.
다방면으로 유능한 하이브리드(hybrid).
적재적소에 필요한 스킬을 사용하는데 매우 능통했으며, 여기에 불굴S와 기사 직업의 시너지는 실로 악몽이었다. 혼자서 용사 파티 전원을 압도했었다.
끝내, 비겁한 우정의 힘에 패배하긴 했지만!
이름은 요정A였던 걸로 기억한다.
“에이리스. 그녀는 제가 가장 신뢰하는 부관입니다. 고지식한 게 흠입니다만, 인간의 강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지요.”
“아, 네.”
에이리스,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눈치가 비상한 나서스 왕자는 부관 에이리스를 곧장 불러서 내게 소개해줬다.
그녀는 왕족이 아닌데도 요정의 수명을 초월했다.
높은 레벨과 스킬, 수련의 힘이었다.
요정이 안티에이징을 타고났어도 황혼기에 가까워지면 30대 중반 외모가 되는데, 그녀는 풋풋한 20대 모습을 유지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용사님. 제 가슴이 신경 쓰이시나요?”
“음···. 조금?”
요정치고 커도 너무 컸다.
1회차 때, 나는 목숨이 오락가락한 와중에도 그런 의문을 느꼈었다.
요정이 요정 같지 않다.
에이리스가 별거 아니란 투로 대답했다.
“제 할머니가 인간이셨습니다. 악마에게 저주를 받고 죽어가던 할아버지를 할머니께서 구해주셨고, 두 분은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선 돌아가실 때까지 저를 끔찍이 귀여워하셨지요. 제가 할머니를 무척 닮았다면서. 특히 가슴이요.”
“신사셨군.”
요정답지 않은 그 적극성에는 살짝 존경심마저 든다.
“독특한 취향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여기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걸로 내 의문 하나가 풀렸다.
요정 왕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사가 왕을 배신하고 왕자에게 가담해서 쿠데타를 도운 이유.
나서스 왕자는 요정과 인간의 화합을 바란다.
에이리스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먹고 마시며 오랫동안 연회를 즐겼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데···.
쾅!
연회장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일련의 무리가 들어왔다.
그 선두의 청년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나서스! 이게 무슨 짓이냐!”
제1 왕자의 이름을 막 부를 수 있는 요정은 없다.
단 한 사람 빼고.
“용사님의 환영회 중이었습니다. 아버지.”
왕자의 아버지. 즉, 현직 요정왕.
1회차에선 이미 쿠데타로 죽은 후라서 만나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얼마나 잘난 왕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는데···.
어디, 능력치 한 번 볼까?
▷종족: 아크 엘프
▷레벨: 999+
▷직업: 우왕(평판→통솔↓)
▷스킬: 정령SS 궁술C 검술C 위엄D 정치D···
▷상태: 격분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종족과 직업을 가린 채 참담한 스킬 등급만 봤다면, 간신히 999레벨 넘은 요정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요정왕.
레벨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높은 존재였다.
‘세상에나! 어린 용보다 쉬운 경험치 덩어리가 세상에 존재했었다니!’
세상은 역시 넓다.
요정 왕국을 선택한 게 정답이었다.
“용사? 인간이잖으냐!”
요정왕의 한마디에 연회장 분위기가 싸해졌다.
이곳은 나서스 왕자의 측근들로 넘쳐났다. 인간을 무시하는 요정왕의 발언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상대는 나.
그 인간은 세상을 구할 용사님이었다.
“아버지. 용사님 앞입니다.”
“흥! 더러운 인간 따위를 짐이 신경 쓸 것 같으냐. 나서스. 너야말로 정신 차려라. 인간은 네 여동생을 살해한 해충들이다. 마음의 정령으로 살펴본 그 아이의 시신에 새겨진 공포와 굴욕을 너도 느꼈을 텐데? 그런데도 인간의 편을 들 셈이냐!”
요정왕이 내게 삿대질하며 부들부들했다.
저거, 지금 베어도 될까?
“나의 왕이시여. 실비아가 죽은 건 인간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는 줄 모르고 적대한 요정의 자연스러운 최후였을 뿐입니다. 그 아이가 느낀 공포와 굴욕. 죽기 전에 현실을 깨달은 모양이군요. 오라비로서 동생의 성장이 기꺼울 따름입니다.”
“이놈! 나서스-!”
발끈한 요정왕이 정령들을 소환했다.
그리고 소환이 해제됐다.
“폐, 폐하!”
“왕이시여?!”
“허걱-?!”
함께 온 수호기사와 수행원들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요정왕은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이, 이 무슨 엉터리 같은···.”
털썩.
정령검 엔드미온이 가슴에 박힌 요정왕이 피를 울컥 토하면서 맥없이 고꾸라졌다.
레벨은 결코 만능이 아니다.
만능은커녕 스킬을 보조해주는 부속에 가깝다. 그렇기에 스킬이 변변찮으면 레벨이 아무리 높아도 무용지물이다.
또한, 스킬이 공격에 편중되어있어도 방어가 취약해진다. 일전에 죽인 800레벨대 요정 궁수와 조련사가 좋은 예.
반면에 나는?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999+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내성SS 맷집SS 근력SS 민첩SS 오감SS···
▷상태: 만족
상위 등급의 스킬들이 기본기에 대단히 충실했다. 정령 빼면 시체인 요정 하나 족치는 건 일도 아니다.
...음?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이 용사님께서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초롱초롱한 눈빛들.
그래서 내 1회차 필살기를 꺼내기로 했다. 성공률이 매우 높아서 자주 애용했었다.
표정과 억양이 포인트다.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미안!”
두 번 미끄러지면 동료도 잡는 금손(Golden-hand)이다.
실력도 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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