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20화 (20/430)

 020화

[2회차] 마왕의 성으로!

요정왕의 죽음.

그 소식은 빠르게 대륙을 강타했다.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요정왕의 인맥은 굉장히 넓고 깊었다.

1회차에선 요정왕이 쿠데타로 죽고 나서스 왕자가 즉위하자마자, 판타지아 대륙 곳곳에서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용사 일행은 요정왕 지인들의 원조와 응원을 받으면서 엘브하임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크게 달랐다.

요정왕 따위가 용사님을 공격했다!

심지어 명분도 하찮았다.

용사가 인간이란 이유로 ‘먼저’ 공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요정왕의 지인들도 “이 미친놈은 친목질로도 안 되겠다.”라며, 오랜 친우의 죽음을 애도하긴커녕 침묵을 지켰다.

좋은 흐름이다.

아무도 나를 걸고 넘어가지 않았다.

내 평판에는 아무런 지장 없다.

▷피로: 왕자의 도발에 넘어간 요정왕을 죽이셨더군요.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은 말이 아닌, 말하는 자의 품행입니다. 정당방위라고 하기엔 과했던 게 아닐까요? 너무 당긴 활은 부러지는 법입니다.

도덕 선생님. 이젠 불쑥불쑥 등장하시네요.

▷부정: 이번에는 저도 예정에 없었습니다. 사전에 왕자의 쿠데타를 저지한 사례는 종종 있었지만, 요정왕을 직접 살해한 용사는 강한수 학생이 최초였습니다. 심지어 빨라도 너무 빨라요! 그래서 조사차 나온 겁니다.

아하! 이래저래 관심받는군요.

특별전형으로 졸업시켜주면 더 고마울 텐데.

▷미안: 그건 곤란합니다.

도덕 선생은 그 말만 남기고 휙 떠났다. 정말로 요정왕이 내게 살해당했는지만 확인하려고 온 듯했다.

망할 잔소리꾼 같으….

▷깜빡: 급한 서류만 해결하고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아무리 늦어도 내일 중으로는 올 겁니다. 그때까지 동료들이랑 사이좋게 지내주세요! 부탁합니다. 아셨나요?

네! 도덕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동료라고 해봐야 둘밖에 없다.

▷경고: 옛 동료도 포함입니다.

도덕 선생은 이번에야말로 진짜 떠났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알렉스 대타로 짐꾼을 키워서 왕국의 요직에 집어넣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 데 저리 호들갑 떠는 이유가 뭘까?

아무튼,

인간 vs 요정

이런 전쟁 구도가 완성되기 직전까지 갔다.

인간에게 밀려 사냥감으로 전락한 요정들이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요정왕의 존재가 매우 컸다.

터무니없이 높은 레벨의 초월자.

실제로 싸워보면 정말 별거 아니겠지만, 스킬이 똥이란 정보를 모르는 인간들에게 요정왕은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으로 전쟁억제력이 있었다.

그런데 죽었다.

전쟁 명분도 충분했다.

용사님을 도와서 요정 나라를 쳐부수자!

...그러나 오지랖 넓은 용사님께서 자비를 베푸셨다.

모든 요정이 요정왕처럼 인간혐오에 찌든 경험치 덩어리는 아니라고 옹호해줬다.

그렇게 전쟁의 불씨는 빠르게 꺼졌다.

물론, 나도 공짜로 일한 건 아니었다.

경험치 먹고, 업적 챙기고, 평판 오르고, 선물도 받고, 여자도…. 음. 아무튼,

“굉장한걸.”

나서스 왕자를 내 두 번째 스폰서로 임명해도 될듯하다. 이번에 지구로 돌아가면 영영 후원받을 일이 없겠지만.

굉장한 건 굉장한 거다.

“저를 두고 하는 말씀이신가요?”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요정 여기사 에이리스가 새침한 어조로 내게 묻는다.

연회가 끝난 어젯밤부터 좀 많이 괴롭히긴 했다.

내 시선을 눈치챈 그녀는 밑으로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올리면서 굴곡진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가렸다.

...하지만 신기하잖아?

요정 가슴은 LCD 모니터가 정상인데.

“물론, 그쪽도 굉장하지.”

인간과 요정의 화합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바이다. 두 종족의 장점만을 취하면 굉장한 혼종이 탄생하는 듯하다.

에이리스가 그 증거.

인간 왕국에서는 내가 용사라고 소개하면 아가씨들의 눈빛이 그윽하게 바뀐다. 자신의 성적 매력을 강조하는 건 기본이고.

하지만 요정 왕국은 달랐다.

요정 아가씨들은 용사인 내게 호기심은 가져도 연애의 대상으로는 보지 않았다.

오기가 생긴 나는 연회장에서 수많은 요정 여성을 만나봤지만, 단 한 명도 내게 농담조의 추파조차 던지질 않았다.

순도 100% 요정은 답이 없다.

그러나,

“남자는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인간의 피가 1/4 흐르는 에이리스는 내 보검(寶劍)을 요염한 눈길로 힐끗 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남편은 약 2천 년 전에 복상사(腹上死)했다. 결혼 이틀 만에 벌어진 참사로, 요정답지 않게 정열적인 그녀를 감당 못 한 것이다.

졸지에 과부가 된 에이리스는 요정 사내들이 쉬쉬하는 바람에 재혼은커녕 하룻밤 불장난조차 즐기질 못했다.

무려 2천 년 동안!

“덕분에 잘 쉬었어. 에이리스.”

“정말로 쉬신 거 맞나요? 저는 물먹은 정령처럼 지쳤습니다만.”

“아주 잘 쉬었어. 지친 내 마음이.”

도덕 공부로 쌓인 스트레스가 조금은 해소됐다.

“...인간의 자극적인 언어표현은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군요. 불처럼 뜨겁고 바위처럼 단단한 용사님. 당신의 앞날에 축복만 가득하시길.”

“고마워.”

나는 에이리스랑 마지막으로 진득한 입맞춤을 즐긴 후, 침실을 나와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엘브하임에 더 체류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방문목적을 쉽게 완수했다.

요정왕 사냥

내가 굉장하다고 혼잣말한 이유다.

요정왕이 좀 많이 못나긴 했어도, 순수한 레벨만은 망룡왕보다도 훨씬 높았다.

그걸 또 용사 특전으로 5배 뻥튀기!

평범한 영웅이 ‘5대 재앙’을 혼자서 다 죽인 것 이상의 막대한 경험치를 순식간에 손에 넣은 셈이다.

“장비도 이 정도면 썩 훌륭하고.”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한 나서스가 감사의 뜻으로 이것저것 많이 챙겨줬다.

투구, 갑옷, 목걸이, 반지, 귀걸이, 물약….

이 이상의 무장과 소모품은 단시간에 구하기 어렵다. 맞춤형으로 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적을 뒤지거나 사냥으로 습득한 고급 재료를 싸 들고, 전설의 대장장이나 연금술사를 찾아가야 한다.

번거로움을 넘어서서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용사님~!”

진한 다크서클이 생긴 라누벨이 나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호기심 많은 고고학자인 그녀는 밤새도록 요정 왕국 전역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1회차에서도 그랬으니까. 지식이 풍부한 라누벨도 엘브하임만은 처음인 까닭이다.

요정 왕국은 오랫동안 폐쇄적인 생활을 해왔다.

겉보기엔 도시와 마을 등이 예술품처럼 아름답지만, 조금만 깊게 파고들면 정말 아무것도 없다.

정치, 경제, 기술, 철학, 미술, 음악….

수만 년 전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문명을 거부한 현대의 원시인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게 학자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이겠지만.

“라누벨. 민속촌은 잘 구경했어?”

“모자라요. 며칠만 더요! 하루만이라도!”

“안 돼.”

뭐든 시기가 중요한 법이다.

현재, 나는 중앙대륙 절반을 초토화한 망룡왕을 토벌하고, 무능한 요정왕을 처단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니 지금의 인기가 식기 전에 마왕까지 쓰러트려야 한다.

지금이라면 평판 A학점을 딸 수 있을 것이다.

업적이 살짝 불안하긴 했지만, 그건 마왕의 영토에서 악마들을 몰살시키다 보면 저절로 충족될 터.

“용사님. 제가 이렇게 부탁하는데도요?”

우수에 젖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는 라누벨. 귀여운 척하는 평소보다 세게 나왔다. 어지간히 요정 나라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좋으면 여기서 살던가.”

나는 그녀의 같잖은 미인계를 코웃음 한 방으로 쳐냈다.

“우우….”

복어처럼 뺨을 부풀린 라누벨과 나는 곧장 공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해서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도 좋은 일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

“축하한다. 짐꾼. 내가 뭐라고 했냐. 충분히 된다고 했지?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공주라도 지켜줄 남자가 없으면 개털이야. 너 정도면 아주 과분한 신랑감이지.”

“용사님. 그러니 저도 슬슬 이름으로….”

“정말 축하한다! 부하A!”

“아, 네.”

소심한 부하A와 아름다운 공주의 결혼식!

진전이 없었던 둘의 관계는 요정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번개탄처럼 급속도로 진행됐다.

만두 국왕과 귀족들이 공주를 설득했다는 모양이다.

그 결과, 벌써 첫날밤까지 보냈다.

“흐뭇한 겹경사로군.”

“용사님. 신부의 표정이 어두운데요?”

라누벨의 지적을 들은 나는, 박수갈채를 받으며 결혼식장에 막 입장 중인 공주의 능력치를 살펴봤다.

▷종족: 휴먼

▷레벨: 73

▷직업: 공주(국력=매력↑)

▷스킬: 매력B 애교C 가무D 사교E 불로E…

▷상태: 체념, 긴장, 기대, 걱정

레벨과 스킬은 준수했고, 상태도 매우 양호했다. 처음 결혼해보는데 마냥 설레고 행복하기만 할 리 없잖은가?

신혼생활, 출산, 산후조리, 후계문제….

앞으로 걱정이 태산일 것이다.

“라누벨. 네 알량한 기분 탓이야. 손뼉이나 쳐.”

“우우…. 네.”

짝짝짝!

짝짝!

아름다운 결혼식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신랑·신부가 결혼반지를 끼고 혼인맹세를 하려는 순간,

콰당-!

문을 박차며 결혼식장에 멋대로 난입한 청년이 “나는 이 결혼 반댈세!”라고 외치면서 소란을 일으켰다.

왕궁기사들이 뒤따라 난입했다.

“저 자식을 잡아!”

“이게 무슨 행패인가!”

“신성한 결혼식을…!”

문제를 일으킨 청년은 내 기억에 있는 자였다.

1회차 때, 동맹국이랑 정략결혼이 결정된 공주를 설득해서 제3 세계로 야반도주를 시도했던 용병B.

뛰어난 용병으로 제법 알려진 젊은 실력자다.

하지만 딱 그뿐.

내 관점에서 용병B는, 시녀들이랑 자주 왕궁 밖으로 놀러 나가는 공주에게 치근대는 힘 센 양아치였다.

스르릉-

나는 정령검 엔드미온을 뽑았다.

신성한 결혼식을 방해한 저 야만인을 살려둘 이유와 필요성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자, 잠시만요!”

마음씨 착한 공주가 봐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너무 무른 판결 같지만, 결혼식장을 피로 물들이면 부정 타기에 쫓아내는 선에서 정리하기로 했다.

이 소란이 끝난 직후,

“저 남자분. 공주님을 끔찍이 사랑했었나 봐요.”

라누벨이 이상한 말을 했다.

“사랑? 추잡한 소유욕이 낳은 집착이지.”

해맑았던 부하A의 굳은 표정이 내 시선을 끌었다.

쯧쯧! 얼마나 가슴이 아플꼬….

그러다가 문뜩, 동료들을 잘 챙겨주라던 도덕 선생의 신신당부가 떠올랐다.

“그래, 그렇지….”

나는 무슨 경우에도 후환을 남기지 않는다.

*

결혼식장에서 두들겨 맞고 쫓겨난 용병B는 포기하지 않았다.

치유사 동료에게 응급치료를 받은 후, 어둠을 틈타서 왕궁에 몰래 숨어들었다.

목적지는 신부의 방.

놈은 이제 막 결혼한 유부녀를 노리고 있었다.

정의로운 용사로서 모른 척할 수 없잖아?

푹!

정령검 엔드미온이 용병B의 목을 꿰뚫었다.

“컥-! 요, 용사…!”

“가정파괴범은 응징이다.”

남의 아름다운 신부를 시샘하고 보쌈하려 하다니? 대체 얼마나 성욕과 감정을 주체 못 하는 원숭이인 걸까.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

나는 용병B의 시체를 흔적도 없이 분쇄했다.

한 줌의 시커먼 독소(毒素)로.

“이거, 기분이 묘한걸?”

시원한 사이다를 들이켠 것 같은 청량감!

이딴 가정파괴범을 처리해봐야 내 업적이나 평판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될 텐데도 그냥 뿌듯했다.

부하A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음음. 느낌이 좋아.”

내가 잘하고 있다는 청신호가 틀림없다.

에필로그에 가까워진 기분이다.

*

부하A의 행복을 빌어주며 작별한 용사와 라누벨.

두 사람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왕 페도나르의 방대한 영토에 발을 들였다.

여기서부터는 논스톱이다.

마왕의 성까지.

“라누벨. 너는 안전한 뒤편에 찌그러져 있다가, 이 용사님이 악마들을 몰살시키는 멋진 모습을 널리 전파하도록. 마법으로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아마도요…?”

My lady Earth.

지금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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