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2회차] I want to go home. Plz!
내 업적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악마를 일일이 잡으러 다니기도 귀찮아서 중앙대륙 최남단에 자리한 마왕의 영토 전역에 맹독을 살포했다. 경험치 소실이 좀 있겠지만, 내 레벨은 티끌 모아 태산을 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강과 호수, 하늘 등이 빠르게 오염됐다.
털썩.
철퍼덕.
모든 생명체가 픽픽 쓰러졌다.
망룡왕 뇌비우스의 숨결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내 항체는 이독제독(以毒制毒) 방식으로 새로운 독을 혼합해냈다.
장점은 무색무취(無色無臭).
꼭 독살하고 싶은 연놈이 있는데, 평판과 인성논란 때문에 망설이는 소심한 용사를 위한 독이다.
악마들에게도 매우 효과적이다.
▷경악: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도덕 선생님.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너무 완벽해서 지적할 곳이 없지요?
맹독을 버틴 간부급 악마는 찾아가는 서비스로 처리했다.
놈들의 은신처와 약점, 특징, 공략법 등은 1회차에서 몸소 학습해뒀기에 거침없었다.
이제, 마왕 페도나르와의 일전(一戰)만을 앞에 두고 있었다.
감회가 새롭다.
1회차에선 거슬리는 동료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마왕의 본거지까지 비효율적으로 진격했었기 때문이다. 비겁한 우정의 힘으로 협공해놓고 뭐 잘났다고 파티를 날마다 벌이는지···.
하지만 2회차에선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가 살포한 맹독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중앙대륙의 악마들은 멸족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인류 침공은커녕 앞으로 재기조차 힘들 것이다.
별동대를 구성해서 마왕만 간신히 패퇴시키는 게 고작이었던 역대 용사들이랑 차별된 확실한 성과.
위업과 평판 S학점은 떼놓은 당상이다.
▷난감: 악마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도덕 선생님! 그게 포인트인데요?!
▷한숨: 강한수 학생. 귀엽고 청순한 공주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요? 사랑은 걸을 수 없으면 기어서라도 갑니다. 다소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공주님이랑 맺어질 가능성은 충분했습니다. 사랑에 기회보다 더 좋은 신하는 없다고···.
네!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현재, 나는 남의 눈치 볼 필요 없을 만큼 강하다. 공주가 정말 마음에 들었으면, 벌써 자빠트려서 침 발라뒀을 것이다.
내가 미쳤다고 양보하겠는가?
그냥 별로였을 뿐이다.
대한민국 시골아가씨도 고귀하신 공주님보다는 덜 촌스럽다. 그래도 몸매는 좋으니 하룻밤쯤은 오케이? 하지만 공주란 족속들은 순결과 정조를 꽤 엄격하게 따진다.
잘못 놀렸다가 코 꿰이는 수가 있다.
그건 곤란하다.
▷침묵: 아, 네. 그, 그렇군요. 괜한 참견해서 미안합니다···.
별말씀을.
▷격려: 흠흠. 이제 결과만을 앞두고 있군요. 저의 마지막 조언입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세상도 당신을 부드럽게 감쌀 겁니다. 이 세계를 좀 더 아껴주세요. 그러면, 강한수 학생의 무운과 졸업을 빕니다.
네네. 감사합니다.
그래서 몇 점?
▷인사: 당신이 어떤 성적이 나올지는 저로서도 알 수 없습니다. 채점은 교직원 권한 밖이니까요. 예상외로 짧은 교육시간이었지만, 제 잔소리를 듣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도덕 선생님도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2회차에서 있었던 일들을 되새김질해봤다.
전투력, 업적, 평판, 인성.
내 예상과 계획을 벗어난 위기는 몇 차례 있었지만, 재빠른 임기응변으로 슬기롭게 대처해서 4과목 중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다고 나는 자부할 수 있게 됐다.
“라누벨.”
“네. 용사님.”
내 업적을 널리 알리는 홍보담당을 맡은 라누벨이 긴장한 어조로 내 부름에 답했다.
그동안 미운 정이라도 든 걸까.
마지막이니 덕담 한마디쯤 해주기로 했다.
“너도 그동안 수고했다.”
“네···. 네에?!”
“너는 용사에게 무작정 아양 떠는 이상한 계집애지만, 덕분에 여행 내내 심심하지 않았다. 네 씀씀이를 감당할 수 있는 부잣집 도련님 만나서 너 닮지 않은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살아라.”
“돌려 까이는 기분인데요?!”
라누벨이 항의했다.
얘는 덕담해줘도 지랄이로군.
“기분 탓이야.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간다. 괜히 응원한답시고 기웃거리다가 죽어서 내 경력에 흠집 내면 가만 안 둔다.”
그때는 홀라당 벗겨서 벽걸이로 쓸 거다.
“우우···. 조심하세요. 용사님.”
“오냐.”
나는 텅 빈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1회차에선 마왕의 성에 인간과 악마들의 뼈와 살점으로 한가득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한산했다.
몽땅 대피한 탓이다. 악마들은 내가 살포한 맹독을 피해서 몽땅 도망쳤다.
오직, 마왕만 자기 왕좌를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었다.
참으로 바람직한 상황이다.
“흥~ 흐응~♪”
내 마음처럼 뻥 뚫린 고속도로 같다.
아무도 내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
1회차에선 이 돌파구를 뚫는답시고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판타지아 대륙 곳곳에서 모여든 영웅호걸들이 가족을 놔둔 채, 용사의 마지막 전투를 위해 몸을 불살랐다.
그들이 죽을 때마다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내가 약한 게 원인이었지.’
나도 구차한 변명거리라면 있다.
1회차 내내 동료란 것들이 내 성장을 방해하고, 허구한 날마다 사고를 쳤다. 그러면서 노는 건 또 얼마나 좋아하던지···.
거기에 불필요한 시간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나는 훨씬 빠르게 강해졌을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나 혼자서 전부 짊어졌다.
생판 남의 목숨과 희생도 요구하지 않았다.
과부와 불효자식, 고아는 없었다.
“...완벽해.”
1회차보다 모든 성적이 우수하다. 전투력은 많이 부족한 감이 있지만, 마왕을 못 쓰러트릴 정도는 아니다.
평판, 업적, 인성.
걸리는 게 전혀 없었다.
판타지 원주민들은 이 순간에도 나를 찬양하기 바빴다. 홍보대사로 임명한 라누벨이 열심히 내 활약을 전파한 덕분.
검토 끝.
내가 졸업 못 할 이유는 없다.
“자···. 그럼.”
1회차 때랑 디자인이 똑같은 거대한 대문.
저 너머에서 마왕 페도나르가 용사인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가슴이 또 설렜다.
10년의 여정을 압축해서 다시 여기까지 왔다.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교직원 일동이란 수상한 집단의 비위도 맞췄다.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이제, 내 앞을 가로막는 유일한 장애물을 힘껏 걷어찼다.
쾅-!
“크흠! 노크할 줄도 모르는가? 예의를 모르는 용사로군.”
마왕 페도나르.
내 최고의 스폰서는 부하들이 몰살당했음에도 차분했다. 아니, 차분함을 넘어서서 여유와 유희마저 보내고 있었다.
1회차에선 보지 못했던 이벤트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너, 너무 빤히 쳐다보지 마세요···.”
전라(全裸)의 요정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내게 애원했다.
...요정 수컷들이 터무니없이 무능한 걸까?
이 종족의 여성들은 툭하면 다른 종족이랑 뜨겁게 열애하거나 붙잡혀 있다. 혹은 둘 다이거나.
나는 그 요정의 능력치를 보고 수긍했다.
▷종족: 엘프
▷레벨: 482
▷직업: 왕비(총애→마성↑)
▷스킬: 매력S 마성S 노래S 정령A 궁술A···
▷상태: 쾌락, 홍조, 절정
직업이 왕비(王妃).
악마에게 납치됐다던 요정왕의 마누라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구속되거나 손찌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왕의 목을 양팔로 끌어안고 있는 자세 또한 강제하고는 한참 멀었다.
상태에도 세뇌나 약물의 흔적은 없었다.
아주 평범한 관계였다.
1회차에서 실비아 공주는 “내 어머니는 악마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되셨다!”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추측성 발언이었던 모양이다.
진실이란 참으로 잔인하군.
“크흐흠-!”
흐트러진 옷맵시를 정돈한 마왕이 과장되게 헛기침하며 분위기 쇄신을 시도했다.
“뭐, 그 마음 이해해. 마왕님.”
나는 씩 웃으며 신사들만의 언어로 답해줬다.
온종일 옥좌에 앉아서 용사가 오길 기다리는 것도 따분할 터. 마왕에게도 취미생활 한두 개쯤 있는 게 당연하다.
취미는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전설의 용사여. 인간적으로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아쉬움 가득한 얼굴의 요정 왕비를 조용히 퇴실시킨 마왕 페도나르가 어이없다는 말투로 내게 따졌다.
빠른 게 어때서?
마왕의 진의를 알 수 없었다.
“난 원래 인간이다만?”
인간이 인간적으로 행동했을 뿐이다.
지구 대한민국에서는, 답답한 친구에게 부모님 안부를 묻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이 새끼, 저 새끼···.
부모님께 효도(孝道)하려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한다.
회귀까지 했으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용사여. 소환되고 한 달밖에 안 된 거로 아는데.”
“정확히 22일.”
“......”
“왜?”
“용사여! 역대 용사들은 동고동락해온 동료들이랑 꿈과 희망을 싣고 모험 끝에 내 앞에 섰었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지! 하지만 그대는 동료는커녕 성검(聖劍)조차 없이 내게 도전하려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보 같은 질문인걸.”
마왕도 이미 답을 알고 있을 터.
“동료와 성검 없이도 당신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잖아. 안 그래?”
나는 마왕의 능력치를 보았다.
▷종족: 퍼스트 데몬
▷레벨: 999+
▷직업: 마왕(용사→레벨↓)
▷스킬: 마기SSS 면역SS 검술SS 불멸SS 금강SS···
▷상태: 현자, 당혹, 경계
참으로 화려하다.
병신 같은 직업만 빼놓고 보면.
혼자서 판타지아 대륙 전체를 씹어먹을 수 있는 능력치인데도 직업 하나가 발목을 잡는다.
용사랑 싸우면 레벨 페널티를 받는다.
레벨이 떨어진다는 건, 모든 스킬 효과의 감소를 뜻한다. 아무리 스킬 등급이 높아도 레벨이 낮으면 전체적인 효율이 감소한다.
용사가 인류의 희망인 이유.
정공법으로는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릴 수 없다.
판타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레벨과 SSS등급의 마기, SS등급 스킬로 도배한 괴물을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판타지아 대륙을 잘 뒤져보면 강자는 많다.
무시무시한 5대 재앙이 있듯이, 인류를 지키는 강력한 수호자 또한 다수 존재한다.
이 수호자들은 세상사에 절대 간섭하지 않고, 마왕 페도나르의 준동만을 스토커처럼 주시하며 힘을 비축한다.
그들은 전성기의 나보다 강하다.
하지만 ‘최초의 악마’를 이기진 못한다.
“허허! 용사여. 실로 오만하구나!”
헛웃음을 터트리며 옥좌에서 일어선 마왕 페도나르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나를 도발했다.
용사에게 성검(聖劍)이 없기 때문일까?
마왕은 허리에 찬 마검(魔劒)을 뽑지 않고 장식으로 놔뒀다.
나를 깔보는 티가 역력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정령검 엔드미온을 뽑았다.
끼기기긱-!
칼날이 진동하며 끔찍한 귀곡성이 메아리쳤다.
이 안에는, 내가 지금까지 학살한 수많은 악마의 원한에 오염된 마음의 정령이 다수 깃들어 있다.
앙탈이 심해서 길들이는데 애먹었다.
“용사여. 그 마검의 이름은 뭐지? 그렇게 역동적인 기운은 처음 보는데.”
“정령검 엔드미온이야.”
“......”
마왕 페도나르가 놀라서 말문을 잃었다.
이거 참 보람차군!
“귀여운 파트너. 준비됐지?”
오만방자한 마왕에게 우리의 환상적인 콤비를 보여주자고!
끼기기긱-!
*
레벨이 급격히 하락한 마왕 페도나르는 내 상대가 못 됐다. 어린아이 손목 비트는 수준으로 손쉽게 이겼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커억?!”
전투가 시작되고부터 단 세 합 만에 모가지가 날아간 마왕이 단말마를 내지르며 고꾸라졌다.
철퍼덕, 툭.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허무한 최종결전.
마왕은 급격히 떨어진 레벨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적응할 틈도 없이 무너졌다.
이건, 내 예상 밖이었다.
“하하! 그랬군! 이제야 알겠네. 마왕의 페널티! 그건 용사랑 비슷한 레벨로 떨어지는 거였어!”
두 번 싸워보니 알겠다.
용사가 1레벨이면 마왕도 1레벨.
용사가 30레벨이면 마왕도 30레벨.
용사가 5000레벨이면 마왕도 5000레벨.
아주 환상적인 직업 페널티였다.
그래서였다.
마왕 페도나르는 내 성장을 억지로 도운 거였다.
높은 등급의 스킬을 다수 보유한 마왕은 용사의 레벨이 높아질수록 전투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 반대가 되면 쥐약이고.
“퉤! 괜히 개고생했네. 진짜 쓰레기 같은 모험···.”
▷용사님. 모험은 즐거우셨나요?
네! 매우 보람찬 모험이었습니다!
지구로 돌아가서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진정한 용사의 길은 실로 험난합니다. 하지만 꿈과 희망을 잃지 않은 당신을 응원해준 수많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우정과 사랑을 배우며 함께 성장한 당신은 마침내 사악한 마왕을 처치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나오는 멘트가 1회차랑 똑같다.
진행자가 너무 성의 없다고 따지고 싶지만, 채점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에 잠자코 결과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부터 성적을 알아볼까요?
운명의 순간이 왔다.
“제발 가즈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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