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화
[3회차] 어서 와. 친구는 처음이지?
▷성적표를 꼼꼼히 확인해주세요!
성적표
이름 강한수
전투력 업적 평판 인성
A+ SS E F-
비고 졸업시키면 지구와 용사들이 위험함!
존경하는 채점관님! 변호할 시간을 주십시오!
저는 지구에서 조용히 지낼 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별을 부술 리 없잖습니까? 사라지면 어디서 살라고….
▷불합격했습니다.
미친! 대체 왜!
▷사유: 전생의 기억을 반성하고 뉘우치긴커녕 악용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지나친 폭력은 반감과 공포를 부르는 법입니다. 세상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 시험 첫날로 회귀합니다.
▷재시험을 시작합니다.
빛이 내 몸을 감쌌다.
▷교직원 일동이 수업내용을 조정합니다.
▷교직원 일동은 당신의 발전을 기대합니다.
▷관심용사가 상향조정됩니다.
▷전문교사가 파견됩니다.
*
“환영합니다, 용사님!”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싱글벙글한 라누벨의 앙증맞은 목소리가 내 귀를 자극했다.
기껏 교정해놨는데 또다시 귀여운 척하는 그녀의 거슬리는 얼굴과 말투를 보니, 내가 또 회귀했음을 실감했다.
“이 3회차 실화냐….”
정말 상상도 못 했다.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인생에 실패한 주인공에게 딱 1번 더 기회를 주고 끝난다. 그런데 나는 마왕을 잡고 명백히 성공한 인생임에도 회귀만 2번째였다.
이 무슨 개떡 같은 고구마 전개일까?
소설로 썼으면 독자들에게 100% 욕먹고 망했다.
“저기, 용사님? 정신이 드셨나요?”
“아니.”
고혈압으로 쓰러질 것만 같다.
“그, 그런가요! 용사님, 슬슬 정신을 차려주세요!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소환돼서 많이 혼란스러우시죠? 이곳은 판타지아. 용사님이 태어나고 자란 세계랑 다른 차원입니다. 당장 이해를 바라는 건 무리겠죠. 지금부터 차근차근 설명해드릴게요.”
라누벨에게 똑같은 설명을 3번째 듣는다.
마왕 페도나르의 뚝배기 1번, 모가지 1번 날리고 온 용사님 앞에서 뭔 개소리를….
“어머! 제 소개하는 걸 깜빡했네요. 저는 라누벨. 고대의 전설을 쫓는 여행 중, 신탁을 받고 용사님을 소환한 고고학자입니다. 라누벨은 고대언어로 ‘진리’란 뜻이에요.”
그 빌어먹을 ‘진리’란 자기소개 또한 3번째.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여기서 라누벨을 죽이고 시작하면, 2회차랑 똑같이 진행 중인 3회차가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까?
진지하게 그 방향을 고민했다.
▷식겁: 참아주세요! 한마디 말이 일을 그르치기도 하고, 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키기도 합니다. 강한수 학생. 기분전환이나 화풀이를 목적으로 무고한 동료를 시작부터 죽이지 말아주세요!
아, 도덕 선생님. 또 만났네요.
▷위로: 정말 유감입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모든 과목을 통틀어서 SS학점은 학생이 최초란 거예요. 카오스 드래곤을 토벌하고 마왕을 22일 만에 쓰러트렸기 때문일까요? 당신의 이름은 명예의 전당에 기록되어 영원히 남게 될 겁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런 입바른 소리는 됐습니다.
제 마음은 온종일 번개탄 위에 올려둔 쥐포처럼 시커멓게 타버리기 직전입니다.
“저기, 용사님?”
“......”
내 모험의 어디가 잘못됐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최단기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결과를 얻어냈다. 이건 내 주관적인 판단이 아닌 객관적인 지표다.
그런데 1회차에서 D학점을 받았던 평판이 E학점으로 떨어졌다.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짐작 가는 거라면 망룡왕 버스.
중앙대륙 절반이 파괴된 게 원인일 것이다.
아무도 내가 망룡왕을 깨웠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지만 중앙대륙 절반이 파괴된 건 사실이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고작 열흘 된 용사가 뭘 할 수 있겠어.”라고 이해해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자들은 아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으리라.
“완전히 동네북이군….”
용사란 직업은 좋은 샌드백이다.
1회차에서도 그랬다.
기껏 목숨을 구해줬더니, 잃어버린 짐보따리와 실종된 가족을 찾아내라고 발광하는 연놈이 적지 않았다.
털북숭이 산적에게 벌거벗겨진 채 강간당할 뻔한 걸 구해줬더니, 자기 알몸을 본 책임을 운운하는 여자도 있었다.
언제나 잘못은 용사에게 돌린다.
망룡왕이 깨어나자마자 토벌하지 못하고 민간피해가 발생한 시점부터 이미 용사의 평판은 깎여나가고 있던 셈이다.
불합리와 부조리의 극치.
“저기, 용사님? 폐하께서 기다리고….”
“좀 닥쳐봐.”
“우우….”
나는 라누벨에게 한마디 쏘아준 후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러줬다.
지금은 만두 국왕이랑 놀아줄 기분이 아니다.
하지만 이놈들은 용사의 기분 따위 안중에 없었다.
철컥.
지켜보고 있던 왕궁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이것도 2회차랑 똑같은 패턴이었다.
“용사님. 혼란스러운 건 이해하지만, 시간이 너무 지체됐습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만 가시지요.”
...내가 이때 뭐라고 답했었더라? 아!
“나도 기다리는 중이다.”
“예?”
“깡통아. 잘 들어봐. 마왕을 무찌를 용사가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냐?”
“둘입니다.”
왕궁기사가 별 고민 없이 즉답했다.
그의 말대로 용사는 둘…. 둘?!
“저기, 안녕하세요? 아까부터 계속 불렀는데 대답이 없으셔서…. 저는 대한민국 서울에 살고, 직업은 고등학생입니다. 나이는 17살. 취미는 게임과 독서입니다.”
파릇파릇한 청소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랑 다른 똥색 교복을 입고 있다.
평범하게 생긴 계란형 얼굴은 검은색 뿔테 안경 외에는 주목할 점이 없었고, 왜소한 체격과 근육량으로 보아선 평소에 운동이랑 그다지 친하지 않았음을 시사해줬다.
하지만 나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남학생의 교복 호주머니에서 반쯤 튀어나온 스마트폰 케이스에 새하얀 수녀복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던 탓이다.
허벅지 좌우가 트인 치마 안쪽은 검은색 망사스타킹과 가터벨트. 성스러움과 배덕함이 공존하는 복장의 미녀였다.
한순간이지만,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직책은 성녀(聖女).
저 스마트폰 케이스는, 나도 잠깐 즐겼던 롤플레잉게임의 여주인공을 모델로 한 캐릭터상품이었다.
“하, 하하…. 이건 제 소소한 취미입니다.”
“그렇군.”
소소하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대범한 액세서리. 생긴 거랑 달리 범상치 않은 친구란 것만은 잘 알겠다.
능력치야 뭐….
▷종족: 아크 휴먼
▷레벨: 1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통역A
▷상태: 기대, 희망, 흥분
전부 평범하고 상태만 조금 비정상이었다.
수상한 중세풍 복장의 인간들에게 영문 모를 장소로 납치당했음에도 침착함을 넘어서서 환영하는 분위기다.
몰래카메라로 착각하는 걸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아아, 그렇지. 내 정신 좀 보소. 강한수. 사는 곳은 대한민국….”
철컥!
왕궁기사가 거슬리는 금속음을 울리며 눈치를 줬다.
오랜만에 동향을 만나서 기분이 좋아졌던 나는 주위를 힐끔 돌아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냥 좋아할 상황이 아니었던 탓이다.
“얼른 가시지요.”
왕궁기사가 내게 위협적으로 눈에 힘을 주면 낮게 말했다.
나는 호주머니에 든 0.3mm 샤프펜슬을 뽑으려다가 멈췄다. 2회차처럼 똥배짱을 부리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던 탓이다.
용사가 둘.
희소성이 대폭 줄어들었다. 비협조적인 용사A를 죽이고 용사B만 채용해도 판타지 세계는 멸망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었다.
용사끼리 공조해서 협상 테이블로 국왕을 끌어내면….
“네! 기사님! 강한수 씨도 어서요! 마왕을 쓰러트리고 판타지 세계를 구하는 임무라니! 와아! 벌써 기대되네요!”
혼자만 신난 용사B가 용사A를 재촉했다.
용사B는 용사끼리 공조는커녕 이 야만인들을 위해 공짜로 목숨 걸고 일해줄 마음으로 충만했다.
용사A는 두통이 몰려왔다.
“자자, 일단은 진정하시고….”
“판타지 주민들은 한국식 이름을 발음하기 힘들 테니, 앞으로 저를 지크라고 불러주세요. 강한수 씨도 새로운 이름 하나 짓는 게 어때요? 아! 지크는 안 돼요. 제가 먼저 선점했으니.”
“......”
판타지 적응속도가 미쳤다.
용사 지크.
그 이름을 어디서 따왔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스마트폰 케이스에 그려진 성녀랑 같은 게임의 주인공 캐릭터 이름이 ‘지크’이기 때문이다.
메인 스토리에서는 성녀랑 나중에 결혼한다.
이 친구의 욕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봐.”
“지크입니다.”
“...그래, 지크. 부모님이 안 보고 싶어? 친구들은? 다들 널 걱정하고 있을 거 아니야.”
“딱히. 괜찮은데요?”
“......”
부모님이 지어주신 소중한 이름을 같잖은 이유로 버릴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는데.
이 녀석은 사회부적응자가 틀림없다.
“강한수 씨. 걱정하지 마세요.”
“뭘?”
진심으로 궁금해서 지크에게 물었다. 바로 조금 전에 마왕 페도나르의 모가지를 따고 온 내가 뭘 걱정하는지를.
“당신은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하아?”
이 새끼,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나는 뒷목을 문지르며 스트레스를 달랬다.
동향에 대한 반가움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교직원 일동은 어디서 이런 불효자식을 주워온 건지….
▷흐뭇: 방황하는 강한수 학생을 위해 엄선해서 고른 용사 후보입니다. 회귀도 안 했는데 놀라운 적응력이지요?
도덕 선생님. 놀라움을 넘어서서 문화충격 수준입니다.
지크는 씩씩하게 앞장서서 걷는 라누벨의 건강한 엉덩이를 넋 놓고 바라보는 중이었다. 납치됐다는 자각 자체가 없는 듯했다.
...1회차의 나도 저랬을까?
정말이라면 진지하게 자살을 고려해볼 것이다.
▷칭찬: 강한수 학생은 교직원 사이에서도 인정한 노력파입니다. 그 노력의 방향성을 제대로 잡아줄 친구만 곁에 있으면 충분히 졸업할 수 있다고 저희는 판단했습니다. 붉은빛을 가까이하면 반드시 붉게 된다고 하죠. 친구를 본받아서 훌륭한 용사로 거듭나시길 빕니다!
의도는 잘 알겠다.
마음 같아서는 엎어버리고 싶은데….
▷종족: 아크 휴먼
▷레벨: 1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통역A ■■F
▷상태: 짜증
회귀의 능력치 초기화는 정말 답이 없다.
몰랑몰랑~~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은 기억하고 있기에 절망적인 상황까지는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또다시 시작하라고 하면 나도 사람인지라 지친다.
그나저나….
“이 블랙박스는 대체…. 음? 호오라…?”
“강한수 씨.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블랙박스?”
지크가 묻는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기보다는, 라누벨이랑 시선이 마주치며 무안해진 자기가 도망칠 구실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내 2회차는 무의미하지 않았다.
나는 망각하지 않았다.
*
납치범들에게 협조적인 지크 덕분일까?
소란스러웠던 2회차랑 다르게, 3회차에선 알렉스의 담력시험 이벤트가 벌어지지 않았다.
무난하게 납치범들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우리는 알현실 입구에서 예의범절을 배웠다.
완벽하게 왕국 예법을 구사하는 나 때문에 늙은 귀족이 경악하긴 했지만, 2회차처럼 헛소리로 시간을 질질 끌진 않았다.
지크가 계속 몸개그 해준 까닭이다.
덕분에 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끼이익-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용사들이여! 짐의 땅에 잘 와주었다!”
회귀하면서 만두 국왕의 신수도 훤해졌다.
2회차에선 마누라와 두 아들의 처형식 이후부터 얼굴이 썩은 만두처럼 푸르딩딩하게 변했었는데.
“안녕하세요! 국왕님!”
“풋.”
“푸읍!”
지크의 한심한 인사에 여기저기서 실소가 터졌다.
하지만 나는 이 친구를 비웃지 않았다. 처음에는 누구나 실수하기 때문이다. 1회차에선 나도 마찬가지였고.
그렇다고 함께 어울려줄 생각은 없었다.
“환대에 감사합니다. 폐하.”
“허!”
“오오!”
내 차례에선 귀족들의 감탄사가 터졌다.
나는 그들의 칭찬을 담담히 넘겼다. 2회차로도 충분한데 무려 3회차다. 복습도 3번째.
못하면 정상인이 아니다.
“용사들이여. 능력치가 보이는가?”
만두 국왕이 기대를 담아서 우리에게 묻는다.
지크가 먼저 대답했다.
“네! 종족은 아크 휴먼. 직업은 용사. 특전은 경험치 5배. 스킬은 통역A. 상태는…. 매우 양호합니다!”
“잘 보입니다.”
너무 잘 보여서 탈이다.
스킬이 많아서 조금 어지럽긴 하지만.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1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패기SSS 마기SS 내성SS 혼돈SS 맹독SS…
▷상태: 복귀
블랙박스 F등급 효과가 활성화됐다.
교복에 가려진 내 육체가 망각을 거부하고 과거로 되돌아갔다.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린 직후에 얻은 ‘마기SS’가 그 증거.
내 2회차 전성기로.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린 직후로.
3회차가 시작되기 직전으로!
‘레벨은 복구가 안 돼서 아쉽네.’
하지만 레벨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경험치는 주위에 많잖아?
“지크! 그리고…. 깡한쑤? 선택받은 용사들이여! 악마의 영토랑 가까운 이 나라에 위기가 도래했다! 악마들을 무찌르며 능력치를 올린 후,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려다오!”
빵긋한 만두 국왕이 공짜로 일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발끈한 우리는,
“네! 국왕님! 우리에게 맡겨주세요!”
“......”
지크가 내 의견도 묻지 않고 씩씩하게 그렇겠노라고 대답했다. 심지어 나까지 자연스럽게 끌어들였다.
‘...동향이고 뭐고 죽일까?’
하지만 성자 같은 이해심으로 꾹 참았다.
도덕 선생은 이 범상치 않은 친구만 따라다니면 쉽게 졸업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예정된 졸업장을 찢을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다.
한차례 심호흡 후,
나는 상큼한 미소를 그리며 지크에게 동조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저희에게 전부 맡기시고 푹 쉬십시오.”
영원히.
나는 준비가 끝났다.
▷공황: 강한수 학생, 당신은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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