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23화 (23/430)

 023화

[3회차] 이 용사는 무료로 해줍니다!

1레벨이라도 클래스가 다르다.

블랙박스의 힘으로 스킬들이 온전히 보존됐다. 덕분에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의 폭이 대단히 넓어졌다.

...어쩌지?

바닐라랑 초콜릿 맛 중에서 고르다가, 갑자기 32가지 맛의 아이스크림 가게를 소개받은 기분이다.

선택 장애가 오기 시작했다.

▷후회: 약속은 어리석은 자들이 걸리는 덫이라더니…. 앞으로 강한수 학생의 성장은 논하지 않겠다고 전에 약속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회귀했는데도 스킬이 남아있는 건가요?

도덕 선생님. 저는 SS학점을 받은 학생입니다.

라누벨의 엉덩이나 힐끔힐끔 훔쳐보는 소심한 신출내기 용사랑 급이 다른 베테랑이죠.

회귀만 벌써 2번째! 3회차!

그런데도 비범하지 않으면 병신 아닙니까.

▷당혹: 모,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혼자서 횡설수설한 도덕 선생은 떠났다.

교직원 일동은 내가 또 회귀하면 문제의 모자이크 스킬도 함께 사라질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블랙박스는 살아남았다.

제멋대로인 판타지 신(神)의 횡포로부터.

“큭큭…!”

나는 알현실에서 퇴실하자마자 배꼽을 잡고 한참 동안 웃었다. 2회차에서 쌓인 스트레스 일부가 풀리는 기분이다.

“강한수 씨. 뭔가 재미난 일이라도 있나요?”

지크가 아쉬운 얼굴로 라누벨을 배웅한 후에 내게 물었다.

아! 내가 너무 티 냈나?

“그냥. 이 판타지 상황이 너무 기가 막혀서. 그리고 지크. 앞으로는 거리낌 없이 편하게 불러. 한수라고. 우리는 문화시민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지구로 귀환을 꿈꾸는 소중한 동료니까.”

내게 졸업장을 안겨줄 중요한 친구다.

동료로 부족함이 없다.

“흠흠! 그, 그렇지. 동료! 그러면 편히 말하게. 한수야! 그런데 지구로 귀환? 나는 안 할 건데.”

“뭐-?!”

“켁켁?! 이거 놓고 말해! 수, 숨 막혀!”

“마왕을 안 잡겠다고?!”

그러면 이 새끼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안 그래도 용사가 둘이라서 협상 실패로 짜증 났는데.

“그래도 마왕은 잡을 거야!”

“...그래?”

나는 자동반사처럼 움켜쥐었던 지크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놔줬다.

바닥에 주저앉은 친구가 눈물을 찔끔한다.

“콜록콜록! 한수는 힘이 세네.”

“그야….”

우리는 똑같이 용사고 1레벨이지만, 보유한 힘은 향유고래와 멸치만큼 그 차이가 매우 컸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레벨이 오를수록 이 힘의 격차는 좁혀지긴커녕 더욱 벌어질 것이다.

“나랑 똑같이 1레벨이고 스킬도 통역A뿐이면서 굉장하네.”

“...음?”

이 녀석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이거 혹시….

“몸도 좋은 걸 보니, 지구에서 운동 열심히 했나 봐.”

“조금.”

용사는 타인의 능력치를 마음대로 볼 수 있다.

그건 용사끼리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지크는 내 능력치를 보고도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내 스킬이 통역A뿐이라고?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1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패기SSS 마기SS 내성SS 혼돈SS 맹독SS 근력SS 맷집SS 민첩SS 투기SS 몰살SS 오감SS 권투S 검술S 학살S 격투S 체술S 불굴S 파괴S 체력S 심판S 불사S 망각S 숨결S 회복S 인내S 활력S 근성S 저항S 재생S 면역S 냉정S 철벽S 금강S 투창S 포효S 도발S 광기S 추적S 기력S… ■■F

▷상태: 황당

이게 안 보인다고?

지크는 블랙박스의 존재조차 모르는 듯했다.

나는 당혹감을 감추고자 화제를 돌렸다.

“이봐, 지크. 너는 지구로 귀환할 마음이 없다면서 마왕은 왜 잡겠다는 거야? 무엇을 위해?”

“마왕이 부활해서 이 세계가 위기에 빠졌다잖아!”

지크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흐음…. 그런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별로 돌아갈 마음은 없지만, 앞으로 살아갈 판타지를 지키기 위해 싸우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나는 지크의 꿈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마왕만 함께 쓰러트려 준다면!

녀석이 졸업을 거부하고 유급하든 휴학하든 말아먹든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닷새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합의했다.

알렉스의 신나는 오리엔테이션에서.

지크는 왕궁 밖으로 나가서 자유롭게 판타지 세계를 구경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10년 넘게 여기서 생활했다.

관광객이 아닌 현지민이나 다름없는 상태.

그래서 동행을 거절했다.

시커먼 남자 둘이 짝꿍처럼 붙어 다녀서 뭐하겠는가?

“용사님~ 어디 가세요~?”

“...라누벨?”

“넵! 라누벨입니다!”

“귀여운 척하지 말…. 아무튼, 네 이름을 몰라서 불러본 게 아니야.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느냐고 묻는 거지. 너는 지크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거 아니었나?”

소환된 직후부터 나는 라누벨에게 매몰차게 대했다.

반면, 지크는 라누벨에게 사근사근했다.

2회차까지는 용사가 하나라서 그녀에게 선택권이 없었지만, 현재는 둘이다.

동료 1호는 원하는 용사와 모험을 고를 수 있었다. 그녀가 어떤 용사를 더 챙겨주고 싶은지는 비교해볼 필요도 없다.

그런데,

“제가 왜요?”

라누벨이 고개를 갸웃하며 귀여운 척했다.

“지크는 어쩌고?”

“저야 모르죠.”

“라누벨. 그 녀석도 용사야.”

지크가 숙녀 엉덩이를 빤히 쳐다보는 실례를 저지르긴 했지만, 내가 아는 라누벨은 자유분방해서 그 방면으로 굉장히 관대했다.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내 앞에서 알짱대는 이 라누벨은 2회차 기억이 없다. 제삼자라고 해도 좋다. 우리는 접점이 없으며, 오늘 처음 만난 사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 앞에 있다.

대체 왜?

“저는 전설을 쫓는 고고학자랍니다.”

“그래서?”

“이 판타지아 대륙으로 소환된 역대 용사들의 삶과 업적 등을 연구했어요. 그들은 여러 공통점이 있는데, 한쑤 용사님은 뭔가 달라요. 지크는 제가 예상했던 용사의 모습 그대로였고요.”

라누벨이 하려는 말은 이가 갈릴 정도로 잘 이해했다. 그래서 내가 졸업 못 하고 3회차, 삼수생이 된 거겠지!

하지만,

“그거랑 나를 쫄래쫄래 따라오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우움…. 신기해서?”

“꺼져!”

“앗!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용사님!”

나는 라누벨을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목적지는 왕비의 별장.

왕족 전용 사냥터로서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작은 숲, 그 한복판에 세워진 호화로운 목조건물이다.

1회차 때 알게 된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자극적인 야외플레이를 좋아하는 만두 국왕의 명령으로 설계됐다.

초창기에는 왕비랑 거의 매일 들락거렸지만, 두 아들과 딸이 성장하면서 더는 이 아슬아슬한 밀회가 힘들어졌다. 이에 왕은 단념하고 쉼터를 왕비에게 추억의 선물로 줬다. 그러나 출입금지령은 여전히 유효해서 굉장히 폐쇄적인 공간이 됐으니….

결국, 밀회의 장소로 악용됐다.

“예상대로 경비견이 있군.”

별장을 지키는 멍멍이가 5마리. 조련사와 시녀, 왕비 외의 사람이 접근하면 무조건 짖도록 훈련되어 있다.

“저기, 용사님? 여기는 출입금지구역인데요.”

“싫으면 돌아가던가. 너 혼자.”

“우우….”

입술이 붕어가 된 라누벨은 더는 쫑알대지 않았다. 그리고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나를 관찰할 뿐이었다.

나는 무시하고 바람의 방향을 확인했다.

그리고 숨을 내뱉었다.

“후우우~~”

고작 1레벨인 내가 저 경비견 5마리를 동시에 조용히 처리하긴 힘들다. 하지만 여기에 고등급 스킬이 가미되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SS등급 맹독.

일명, 용사의 숨결!

집 지키는 개 잡는 건 일도 아니다.

반응은 바로 나타났다.

“멍-?!”

“깨갱~?!”

순찰 중이던 경비견 2마리가 중독되어 바로 죽어버렸다. 놈들의 단말마를 들은 나머지 3마리가 달려와서는 똑같은 운명을 걸었다.

이걸로 경비견은 모두 처리됐다.

“라누벨. 따라와.”

이왕 따라온 전력이니 보험을 들어두기로 했다.

“...네? 네!”

눈을 휘둥그레 뜬 라누벨의 노골적인 시선을 받으며, 나는 별장 출입문의 잠금장치를 부수고 안쪽으로 조용히 침투했다.

왕비에게 걸릴 걱정은 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알현실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남편의 의심을 사면서 곧장 별장으로 달려올 확률은 매우 낮다.

이왕 모인 김에 가족끼리 오붓한 식사 후에 천천히 올 것이다. 아니면 내일 새벽이나 아침쯤 오던가.

집 지키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종족: 휴먼

▷레벨: 34

▷직업: 시녀(주인→매력↑)

▷스킬: 매력C 잡역D 마기E 체술F

▷상태: 편안, 휴식

왕비의 전속시녀.

별장에서 쭉 생활하며 모든 가사노동을 홀로 처리한다.

가녀린 여성에게 너무 가혹한 업무부담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5레벨이 지구의 운동선수 수준의 체력을 발휘한다.

34레벨이면 홍콩영화 배우처럼 정말 날아다닌다.

‘여기에 마기까지 있네. 어쭈? E등급이잖아.’

저 시녀는 계약한 악마의 힘을 빌려 쓰기에 통상적인 34레벨보다 훨씬 강하다.

내게는 거기서 거기지만.

침입자의 존재를 아직 눈치채지 못한 시녀가 내게 등을 보이자마자, 나는 깃털처럼 가볍게 도약했다.

발소리나 기척은 전혀 남기지 않았다. 내 암살 계통의 스킬도 A등급 이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SS등급에 도달한 기본 스킬이 상승효과를 일으켰다.

2회차 요정왕도 일격에 죽인 조합.

시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경비견처럼 독무로 조용히 처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스킬이 아무리 우수해도 1레벨로는 영 불안했기에 확실한 쪽을 택했다.

우득.

34레벨 시녀에게 저항할 틈도 안 주고 가녀린 목을 손등으로 후려쳐서 부러트렸다.

이미 1레벨의 범주를 한참 넘어선 능력치.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1레벨→12레벨

시녀를 죽이며 얻은 경험치로 레벨이 올라감에 따라 모든 스킬의 효율이 미미하게 상승했다.

보통은 여기서 끝.

하지만 나는 고등급 스킬이 매우 많기에 단순히 몇 배라고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전투력이 뻥튀기된다.

지식인답게 수학식을 적용해보자!

지크: 1레벨, 통역A

(9+1)*(10+6)=160

시녀: 34레벨, 매력C 잡역D 마기E 체술F

(9+34)*(10+4+3+2+1)=860

나: 1레벨, 아무튼 많음

(9+1)*(10+9+8+8+8+8+8+8+8+8+8+8+7+7+7+7+7+7+7+7+7+7+7+7+7+7+7+7+7+7+7+7+7+7+7+7+7+7+7+7+7+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6…+1)=???

전투력이 실제로 이렇게 계산되진 않는다.

지크의 통역A, 시녀의 매력C와 잡역D 같은 생활보조용 스킬도 계산에서 빼야 하고, 비슷한 스킬끼리의 상승효과도 변수로 작용하며, 컴퓨터게임처럼 등급별 수치가 저렇게 딱딱 맞지도 않다.

대충 이런 느낌이란 예시일 뿐.

“아주 좋아.”

운영자 계정으로 롤플레잉게임 하는 기분이다.

“...저기, 용사님? 1레벨 맞으시죠?”

“아니. 지금은 12레벨.”

“......”

라누벨이 눈알을 굴리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녀는 능력치를 볼 수 없지만, 목이 기형적인 방향으로 꺾인 채 죽은 시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색 기운의 정체를 눈치챘다.

악마의 힘, 마기.

그런데도 1레벨 용사가 단숨에 처치해서 놀란 듯했다.

미리 선수를 치기로 했다.

“라누벨. 계속 따라올 거면 닥쳐. 묻지 마.”

“우우…. 네.”

별장 내부 여기저기에 마법진 함정이 깔려있다.

하지만 우수한 천재마법사인 라누벨은 당연히 안 걸렸고, 나는 SS등급 면역에 내성까지 달고 있어서 공기처럼 무시했다.

우리가 갈 곳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찰칵.

보라색 옷장의 잠금장치를 풀고 비밀통로를 따라 쭉 들어갔다.

목적지는 악마숭배자들의 집회장.

사이비 교주(敎主)가 일장연설 중이었다.

“안녕?”

먼저 아는 척했다.

“네, 네놈은 누구냐?! 어떻게 들어왔지?!”

교주의 물음에 나는 마기SS를 활성화했다.

그걸로 대답은 충분했다.

▷종족: 데몬

▷레벨: 194

▷직업: 마법사(나이→마력↑)

▷스킬: 마기B 마법C 마력D 변신D 설교E…

▷상태: 공포, 혼란

인간 교주로 변신해있던 악마는 내 SS급 마기를 느끼자마자 오들오들 떨었다.

좋은 신분증이다.

“이봐. B급. 오늘부터 여긴 내가 접수한다. 귀찮은 운영은 네가, 편안한 명령은 내가. 불만 있니?”

“어, 없습니다! 위대한 악마 대공(大公)이시여!”

B급 악마가 복종하듯 바짝 엎드렸다.

“위대한 분이시여!”

“위대한 분이시여!”

멀뚱멀뚱 서 있던 악마숭배자들도 눈치껏 교주를 뒤따라 하나둘 내 앞에 넙죽 부복했다.

“저기, 용사님?”

“야. 눈치껏 좀 닥쳐주라.”

“......”

라누벨의 입을 다물게 한 후, B급 악마와 그 숭배자들 앞에 선 나는 연설을 시작했다.

목소리를 까는 게 포인트다.

“모두 들어라! 구더기 같은 종자들아! 우리는 이 왕국을 혼돈의 어둠 속에서 지배할 것이다. 그 첫걸음으로 너희가 할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해주마.”

“오오!”

“오오오!”

알현실에서 지크를 관찰해보며 깨달은 게 있다. 공짜로 일해주면 평판이 쭉쭉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3회차 역전용사가 인심 팍팍 써서 무료로 봉사해주기로 했다.

만두 국왕이 푹 쉴 수 있도록.

“이 왕국은 내가 접수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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