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화
[3회차] 우리 친구 아이가!
내가 용사로 소환되기 이전부터 이 왕국은 B급 악마와 악마숭배자들의 놀이터였다.
하지만 무너트리기도 쉽다.
열심히 충성하는 악마숭배자에게 마기를 공급해주는 B급 악마만 처치하면 도미노처럼 순식간에 지리멸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걸 역으로 활용해봤다.
B급 악마를 복종시켰다.
자연스럽게 악마숭배자들도 딸려왔다.
나는 순식간에 왕국이란 장난감을 손에 넣었다.
왕궁의 어느 사석에서 벌어지는 이 대화도 그 결과 중 하나였다.
왕비 왈.
“사랑하는 임이시여. 용사님께 활동자금을 지원해야 한다고 소녀는 생각하옵니다.”
이에, 국왕의 대답은?
“활동자금? 굳이 왜 그런 쓰잘머리 없는 곳에 돈을….”
“소녀가 간청드리옵니다.”
왕국 제일의 미녀가 팔뚝을 끌어안으며 간절히 부탁하자, 만두 국왕의 표정이 삽시간에 풀어졌다.
단순히 기분 좋아서 변한 게 아니다.
마치,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그의 동공도 풀렸다.
국왕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왕비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폐하. 이분은 쓰잘머리 없는 용사가 아니라, 저희가 경애해야 할 위대한 분이시옵니다. 이 점을 명심하시옵소서.”
“...알겠소.”
배불뚝이 남편에게 볼일이 끝난 왕비가 내게 윙크를 보냈다.
▷종족: 휴먼
▷레벨: 36
▷직업: 왕비(총애→마성↑)
▷스킬: 마성B 매력B 마기C 기품C 사교E···
▷상태: 타락, 애욕, 음란
이 나라의 왕비야말로 B급 악마의 조커.
가장 경계해야 할 악마숭배자다.
나는 이런 왕비의 마기를 강화했다.
마기(魔氣)가 E등급에서 C급으로 상승함에 따라, 연관성이 짙은 마성(魔性) 또한 D등급에서 B등급으로 올라갔다.
마성은 이성을 홀리는 힘.
만두 국왕은 2회차 때처럼 내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서로 얼굴 붉혀가며 싸우지 않고 평화적으로.
이걸로 내 인성 점수에는 문제없다.
내가 2회차 때보다 발전했다는 증거였다.
“잘 쓰겠습니다, 폐하.”
“소인이 위대한 용사님께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지요. 아름다운 왕비님? 앞으로도 그 아름다움이 빛바래지 않고 오랫동안 간직하시길 기원합니다.”
이미 왕비의 꿈은 이루어줬다.
내 도움으로 마기가 E등급에서 C등급으로.
그녀는 이전보다 요염하고 음탕해졌다.
“호호! 용사님께 도움이 되는 것이야말로 소녀의 기쁨. 나중에 제 별장에서 다과를 접대해드리고 싶사옵니다.”
다과뿐만이 아닐 것이다.
“시간이 되면 그리하지요. 왕비님.”
나는 만두 국왕에게 인사한 후에 퇴실했다.
악마숭배자들로부터 수금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들이 불법적으로 손에 넣은 돈을 만질 순 없었다.
마약, 인신매매, 살인, 협박, 고리대금….
온갖 악행으로 벌어들인 돈을 쓴다면 내 인성 점수에 마이너스로 적용될 뿐이다.
그래서 전부 백성들에게 환원시켰다.
대신, 합법적으로 국왕에게 활동자금을 받았다.
짤그랑!
금화로 가득한 돈주머니 소리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열심히 일해서 받은 서비스이기에 더욱 뿌듯한 게 아닐까.
이건 임금(賃金)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무료로 봉사하는 중이다.
그 차이는 매우 크다
“용사님-! 한쑤 용사님-!”
왕궁기사가 왕궁 저편에서부터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게 시비를 걸려는 표정은 아니었다.
“흐음. 또 무슨 일이 터졌나?”
알렉스의 신나는 오리엔테이션은 연기됐다.
내가 악마숭배자들을 조종해서 왕국을 완벽하게 점령하는 과정에서 생긴 크고 작은 잡음 때문이다.
왕비는 악마숭배자, 국왕은 꼭두각시.
그 아래의 유력가문과 귀족들도 가족 중 누군가 악마숭배자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연결고리가 있다.
일당독재체재라고 할까.
“한쑤 용사님! 좀 도와주십시오! 길거리에서 지크 용사님께서 귀족이랑 시비가 붙었는데,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알렉스를 포함한 왕궁기사단은 아니다.
그들은 마기에 현혹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지만 충성맹세를 한 국왕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시점에, 꼭두각시의 꼭두각시인 셈이다.
“지크가?”
이건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래?
그 현장에 가보기로 했다.
*
봉건제도와 계급사회가 만연한 이 야만적인 세계의 귀족은, 살아있는 수류탄이나 다름없다.
평민이나 노예 때문에 기분이 언짢아지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뒤집어씌워서 구타하거나 감옥에 보낸다.
그래도 귀족은 처벌받지 않는다.
살인(殺人) 빼고.
경험치를 노리고 고의로 평민과 노예를 죽이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한 탓이다.
그래서 살인만은 모든 국가에서 엄격하게 감시한다.
그렇다. 살인만,
살인 빼고는 정말 다 허용된다.
나라에서도 일부 왕족과 귀족들의 만행과 횡포를 알지만, 정치 문제로 커지면 손해가 더 크기에 눈감아주는 실정이다.
애초에 그 나라를 운영하는 자들이 귀족이다. 귀족이 귀족에게 불리한 법을 제정할 리 없다.
하지만 어디에나 정의감과 오지랖 넘치는 친구가 있기 마련. 열혈(熱血)이라고 부르던가?
“내가 확실하게 봤다고! 저 돼지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강제로 끌고 가는걸!”
지크가 왕궁기사랑 실랑이 중이었다.
“지크 용사님. 냉정하게 잘 보십시오. 어딜 봐서 강제라는 겁니까? 이 아가씨는 정말로 남작님이 좋아서 따라간 겁니다. 못 믿겠다고 하셔서 직접 물어보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왕궁기사가 피곤한 어조로 지크를 설득했다.
그러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협박당해서 그렇게 말했겠지! 당연한 거 아니야? 여기서 강제라고 폭로하면 나중에 보복당할 테니까. 어제부터 저 돼지랑 사귀기 시작했다니. 딱 들어봐도 수상하잖아.”
“하아….”
중재를 맡은 왕궁기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쪽, 아까부터 지크에게 계속 돼지라고 모욕당한 귀족은 화를 참듯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모독을….”
“저 때문에 정말 죄송해요. 남작님.”
그런 귀족의 두툼한 팔뚝을 끌어안은 예쁘장한 아가씨가 어쩔 줄 모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대충 알겠네.”
아까부터 계속 용사에게 돼지라고 인신모독을 당하는 통통한 남작도 낯이 익었다.
그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를 알고 있다.
▷종족: 휴먼
▷레벨: 21
▷직업: 귀족(족보=기품↑)
▷스킬: 경영D 예절E 폭식E 기품E 마기F…
▷상태: 비만, 분노, 굴욕
F급 악마숭배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백작 가문의 정통후계자다. 풍족한 가정환경 속에서 후계자 수업 스트레스로 식욕을 주체하지 못한 그는, 고도비만과 각종 합병증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당뇨병, 고지혈증, 관절염, 담석증, 암….
판타지 마법도 만능은 아니다.
건강이 나빠진 남작은 마기에 손을 댔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B급 악마의 농간으로 성정이 난폭해진 남작은 온갖 패악을 저지르며 물의를 일으킨다. 폭력, 강간, 행패, 방화….
용사의 심판을 받기 전까지.
1회차에선 그랬다.
“지크.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일단은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아! 한수야. 너도 말 좀 해줘. 이 돼지가 아가씨를 성추행하려는 걸 내가 똑똑히 봤는데, 자꾸 아니라고 부정하잖아.”
“증거는?”
“있어! 너도 보이지? 이 돼지는 마기F 스킬을 갖고 있어! 악마숭배자란 뜻이야!”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마기SS인 내 앞에서 뭔 개소리래?
“지크. 마기를 품었다고 해서 다 악마숭배자는 아니야. 악마의 심장을 먹으면 영구적으로 몸에 마기가 생겨. 수련이나 영약으로 얻는 방법도 있고. 마기를 습득하는 방법은 다양해.”
그렇다고 마기가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악마에게 통제받지 않는 마기는 제멋대로 날뛰기 때문이다. 소유주의 성격을 저급한 악마처럼 변질시킨다.
잔인, 교만, 오만, 집착, 음란, 과욕, 난폭….
그래도 많은 이들이 손을 댄다.
“저 돼지는 악마숭배자가 맞아.”
지크가 우기기 시작했다. 아니, 이 친구의 말이 맞다. 남작은 아직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악마숭배자가 틀림없다.
분명 그렇긴 한데….
옹호해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구경꾼들의 시선이 매우 곱지 않았다.
“착한 남작님을 악마숭배자로 몰다니….”
“남작님이 돼지? 우리 식당 단골손님이시다!”
“저자가 전설의 용사라고? 허허! 말세로고.”
원인이 된 아가씨가 마침표를 찍었다.
“식당을 운영하시는 제 아버지가 발을 접질리면서 남작님의 머리와 옷에 음식을 엎질렀어요. 그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다음이었어요. 남작님께서 괜찮다면서 제 아버지를 용서해주셨어요. 그게 너무 고마워서, 어제부터 남작님께 제가 치근댄 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남작님. 괜히 저 때문에 흑흑!”
야단났다.
여자를 울려버렸다.
여론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턱!
왕궁기사가 지크의 어깨에 장갑 낀 손을 무겁게 얹으며 말했다.
“지크 용사님. 아직도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
“없으시면 돌아가시지요. 남작님께는 저희가 충분한 사과와 보상을 약속해드리겠으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나, 나는….”
“너희 둘. 지크 용사님을 왕궁까지 정중히 모셔라.”
지크는 죄인처럼 수습기사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거참….”
패배한 개처럼 처량하게 퇴장하는 동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 머릿속도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졌다.
저 새끼가 정말로 나를 졸업시켜줄 수 있을까?
*
내 불안감이 기우였던 것처럼 지크는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남자의 사생활을 관찰하는 취미는 없지만, 도덕 선생이 녀석을 보고 배우라고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하잖는가?
지크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씻는다.
왕국에서 엄선한 하녀들에게 몸을 맡기면 편한데, 숫총각 티를 팍팍 내면서 자기가 직접 씻는다.
그 뒤에는 왕국의 수도 여기저기 참견하고 다닌다.
곤경에 빠진 사람이 보이면 일단 달려간다. 그리고 사연의 진위(眞僞)도 확인해보지 않고 무료로 잔심부름이나 일을 돕는다.
주로 돕는 대상은 아름다운 여성.
지크는 종족, 나이를 불문하는 잡식성이었다.
이 녀석도 수컷이란 걸까…?
“주인님. 소녀에게 더 분부하실 일이 있으신지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나를 주인이라고 자연스럽게 칭하는 미녀는 이 나라의 어머니, 왕비였다.
악마의 힘에 빠진 자들의 신분과 지위는 무의미했다. 마약 같은 중독성에 정신을 지배받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악마숭배자가 위험한 것이다.
나는 왕비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처럼 지크를 관찰해서 내게 보고해.”
“알겠사옵니다.”
“가봐.”
“네. 언제든 불러만 주세요. 밤에라도.”
몸을 돌린 왕비는 나를 유혹하듯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도도한 발걸음으로 물러났다.
나는 창틀에 턱을 괸 채 왕궁의 창밖을 내다봤다.
“야! 꼼짝 마!”
“야옹~!”
새끼고양이랑 술래잡기 중인 지크가 보인다.
사건다운 사건이 없으니, 꼬마A의 잃어버린 애완동물이나 찾아주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그것도 당연했다.
내 수중에 떨어진 왕국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그것만이 아니다.
왕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악마숭배자를 동원해서 내 평판을 야금야금 올리고, 왕족에 대한 반감 여론을 키우는 중이다.
만두 국왕이 영원히 쉴 수 있도록.
“실비아는 신경 쓸 거 없고.”
암시장을 급습한 미래의 요정왕은 예정대로 생포됐다.
열흘 뒤에 암시장 경매품목으로 올라오는 그녀를 용사가 사주지 않으면 변태 귀족에게 팔려갈 것이다.
나는 당연히 안 갈 거고, 암흑상회에서 통용되는 ‘약속의 언어’를 모르는 지크는 암시장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
내가 1회차에서 썼던 편법은 미리 차단해뒀다.
실비아는 자연스럽게 퇴장. 이러면 도덕 선생도 아무 말 못 하겠지.
그리고 남은 건?
“알렉스.”
미래의 검왕.
2회차에선 일찌감치 내 손에 퇴장했다.
쓸모도 없고, 마음에도 안 들어서.
하지만 이번 3회차에서는 알렉스의 활용처를 발견한 탓에 아직은 멀쩡히 살려둔 상태였다.
▷반색: 드디어 동료의 가치를 인정하시는군요?
물론입니다. 도덕 선생님.
개똥도 약에 쓰인다고 하잖습니까? 히쭉.
*
악마숭배자들의 준동으로 어수선했던 왕국이 안정되면서, 출타했던 알렉스 또한 왕궁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하하! 용사들. 왕궁훈련장에 잘 왔다! 계집처럼 상처 하나 없는 피부를 보니,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모양이군.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왕국 제일의 검이 너희를 훌륭한 용사로 키워주마! 그것도 단시간에.”
알렉스의 두근두근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됐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알렉스 교관님!”
“나도.”
지크의 의욕이 충만했다.
대충 맞장구친 나는 알렉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훈련을 시작하기에 앞서, 오늘은 왕비님이 특별히 참관하셨다. 두 용사의 대련을 무척 고대하시더군.”
“...예?”
“왕비님이 바라신다면야….”
친구랑 싸우기 싫어도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됐으니, 최선을 다해서 붙어보도록. 참고로, 왕비님 앞에서 항복이나 도망치는 추태는 내 주먹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으름장을 놓은 알렉스가 뒤로 물러났다.
“자, 잠깐…. 한수야? 우리는 친구지?”
지크가 뒷걸음치며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른다.
“얼른 덤벼. 왕비님이 우리의 대련을 바라신다면, 이 또한 공짜로 왕국을 위하는 길. 지크. 네가 바라던 일 아니야?”
“나는- 꾸엑?!”
우히히히- 큼! 이게 아니지.
“정말 미안하다! 친구여!”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첫날부터 무료봉사를 지껄이던 지크의 턱주가리에 주먹을 꽂을 때마다 무척 괴로웠다.
퍽! 빠각!
표정 관리가 너무 힘들어서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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