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화
[3회차] 물 좋은 곳으로 Go! Go!
“원, 투, 원, 투~♪”
단백질끼리 착착 감기는 이 손맛!
어깨와 엉덩이를 좌우로 흔드는 리듬감!
사이다 탄산처럼 청량한 지크의 비명!
판타지 원주민의 부탁이니 사양할 거 없다.
꼬마A가 잃어버린 고양이도 공짜로 찾아주는데, 몸소 행차하신 아리따운 왕비님의 부탁 하나 못 들어주겠는가.
우리는 용사의 임무를 다하는 중이다.
이 또한 놀랍게도 공짜다. 이렇게 보람차고 즐거울 줄 알았다면 좀 더 빨리 시작했을 텐데.
“그, 그만- 커억?!”
“지크. 너도 마음껏 공격해.”
나는 손과 발을 이용해서 지크의 온몸을 갈겨줬다.
정말 살살 두들겨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진심이 담기면 한 방에 송장 치우기에, 지크를 유리세공품처럼 조심스럽게 다뤘다.
내 평판 점수는 소중하니까.
그렇다고 쉽게 끝내줄 마음 또한 없었다.
지크가 쓰러지지 않도록 좌우균형을 잡아서 때렸다. 좌로 넘어질 것 같으면 좌측을, 우로 넘어질 것 같으면 우측을-
...어?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이네?
덥석.
주저앉지 못하도록 지크의 머리채를 왼손으로 붙잡은 후, 무릎을 쳐올리며 그의 안면을 찍었다.
“으아아아-!?”
지크의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어? 이런.”
너무 흥에 겨웠던 걸까?
내가 움켜쥐고 있던 머리카락 한 뭉치가 뜯긴 지크의 머리 한가운데에 새하얀 땜빵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저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대련을 속행했다.
“지크. 언제까지 나를 배려해서 방어만 할 거야?”
“으어어어~”
짐승처럼 울부짖는 지크의 두 눈에는 초점이 안 잡혀있었다. 뇌진탕도 살짝 오면서 정신이 혼미해진 걸까.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내가 알렉스에게 자주 당해봐서 잘 안다.
판타지 마법과 치유의 축복으로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다.
이 나라랑 이웃하는 성왕국(聖王國)의 1회차 동료, 성녀쯤 되면 기도 한 번으로 죽은 자도 벌떡 일으킨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판타지는 역시 판타지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3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통역A 체력F 맷집F 불굴F 통감F
▷상태: 중태, 혼란, 염좌, 탈골, 충격, 공포…
지크의 능력치.
스킬이 실시간으로 불쑥불쑥 생성됐다.
상태도 뷔페식당 메뉴처럼 다양하게 나열됐다.
신기하게도 1레벨이 아니다.
왕비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크는 야생멧돼지의 몸통박치기에 혼쭐이 난 이후부터 사냥터 근처는 얼씬도 안 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3레벨.
마구간이나 창고에서 쥐라도 100마리쯤 잡은 걸까?
생명체마다 주는 경험치가 다르다.
만약, 모든 생명체가 최소 1레벨 경험치로 고정됐다면 농부와 어부는 레벨이 깡패였을 것이다.
“지크. 3레벨이 뭐냐. 사냥을 부지런히 했어야지.”
“......”
평범한 동식물이 주는 경험치는 극미하다. 용사의 5배 경험치 특전으로도 티가 안 날 만큼.
하지만 지크는 용케도 몬스터 없는 도시에서 단시간에 레벨을 올렸다. 아니면 좀도둑이라도 살해한 걸까.
뭐가 됐든 내 앞에선 의미 없었다.
“어이? 지크. 내 얼굴 좀 봐봐.”
“......”
온몸이 피투성이 걸레짝이 된 채 의식을 잃은 지크. 피거품을 문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고작 3분 만에?
이건 뭐, 인스턴트식품도 아니고.
나는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다진 오징어에 고추장 양념을 바른 것처럼 변한 지크가 흐느적거리며 쓰러졌다.
털썩.
“치, 치유사! 어서 용사님을…!”
“맙소사! 신이시여!”
용사들의 대련이 끝나길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렸던 구급반이 잽싸게 움직였다.
그들은 지크를 들것에 실어서 훈련장 밖으로 옮겼다.
곧바로 마법과 축복이 효과를 발휘했다.
위이이잉―
지크의 온몸에 난 상처에 빛이 스며들면서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퍼런 피멍의 부기가 빠지고, 찢어진 피부에는 새 살이 돋아났다. 어긋난 뼈도 제자리에 저절로 맞춰졌다.
하지만 바로 못 고치는 부위도 있었다.
이빨.
머리카락.
이 둘만은 꾸준한 치료가 필요했다.
아! 하나 더 있다.
“아으부, 아으...”
정신적인 부상도 본인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
산 자와 죽은 자의 정신에 간섭할 수 있는 ‘마음의 정령’이 도와준다면 회복 속도가 빨라지겠지만, 그 정령을 다룰 줄 아는 주술사는 요정 중에서도 매우 드물다.
이걸로 지크에게 용무는 끝났고,
다음은 알렉스였다.
“이봐, 용사. 너는 대련과 실전도 구분 못 하나? 약자를 괴롭히는 고약한 취미가 있는 모양인데, 진정한 강자가 어떤 존재인지 그 몸에 새겨주지.”
그가 성큼성큼 내게 걸어오며 훈계했다.
듣고 헛웃음도 안 나왔다.
뭐? 약자를 괴롭히는 취미? 이 새끼는 양심도 없나?
▷종족: 휴먼
▷레벨: 291
▷직업: 검객(체력=검술↑)
▷스킬: 검술S 체력A 철벽B 내성B 불굴C…
▷상태: 여흥
알렉스의 능력치는 1회차 초창기랑 다를 게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순 없었다.
서로 경험치를 먹고 먹히는 전란(戰亂)이 아닌 평화의 시기에, 알렉스 정도면 굉장히 높은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는 안 통한다.
나는 전란의 시기를 제대로 겪고 왔다.
2회차에서 중앙대륙 절반을 망룡왕이랑 초토화하고, 마왕 페도나르를 포함한 악마들을 몰살시켰다.
나 혼자서 전쟁을 일으키고 승리까지 거머쥐었다.
경험치, 숙련도.
그 둘을 셀 수 없이 많이 독식했다.
레벨은 초기화되고 말았지만.
“데자뷔인가.”
내 복부를 노리는 알렉스의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도 똑같이 그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알렉스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여기에 응했다. 291레벨이나 되는 녀석이 양심도 없이 힘을 강하게 준다.
한 번 해보자는 거지?
환영하는 바이다.
퍽!
빠득-!
우리는 사나이답게 한 방씩 주고받았다.
“커억-?!”
수많은 스킬이 중첩된 나는 철벽처럼 굳건했지만, 그러지 못한 알렉스는 자기 배를 부여잡으며 무릎 꿇었다.
내 복부를 때린 주먹은 피투성이.
나를 올려다보는 알렉스의 눈빛이 묻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한 거냐고.
빠각!
대답해줄 의무는 없었다.
아직 내 공격은 끝나지도 않았고.
291레벨 알렉스의 머리를 힘껏 걷어찼다. 3레벨 지크를 상대할 때처럼 힘을 조절할 필요가 덜해서 경쾌한 맛이 있었다.
“이, 이…. 엌?!”
“또 간다.”
본인도 약자란 생각은 못 했던 걸까?
공황에 빠진 알렉스의 짧은 머리채를 덥석 움켜쥔 후, 투포환처럼 빙글빙글 돌리며 멀리 내동댕이쳤다.
쿵-!
알렉스의 덩치가 큰 만큼 떨어지는 소리도 우렁찼다.
“내가 용사 따위- 컥?!”
“용사님이라고 경칭을 붙여. 잔챙이 주제에.”
마무리는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
높이 뛰어오른 나는, 무르팍으로 알렉스의 등을 유성처럼 내리찍어서 만성 허리디스크를 선물해줬다.
우드, 드드득.
허리가 아플 때마다 내 얼굴을 떠올려줬으면 기쁘겠다.
“네놈…! 흐허어어?!”
분개하며 벌떡 일어선 알렉스는 양손으로 급히 등허리를 부여잡으며 도로 고꾸라졌다.
허리디스크가 제대로 온 모양이다.
“알렉스. 네 오리엔테이션은 즐거웠어.”
2회차 때보다 재미있었다!
그날로 나는 알렉스의 훈련에서 열외 됐다.
*
무더운 열대야가 시작됐다.
중앙대륙은 가뭄으로 난리가 났다.
무료로 왕국을 지배 중인 나도 이 가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 중이었다.
물이 부족해서 식량난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전쟁이라도 벌여서 인구를 줄여볼까?
너무 바빠서 왕궁전용훈련장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간간이 알렉스와 지크의 대화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청력이 너무 발달해도 피곤하군.
“지크! 당장 일어서! 아니면 엉덩이에 칼침을 놔줄까? 그놈에게 복수할 때까지 너에게 휴식은 사치다!”
“더, 더는 무리- 꾸엑?!”
“포기하지 마라! 지크! 너는 할 수 있어! 두려워하지 말고 죽을 각오로 덤벼! 마법사와 치유사가 항시 대기 중이다!”
“아아아앜~~!?”
어떤 고강도 훈련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날마다 포기하려는 지크를 다그치는 알렉스의 목소리에는 진심과 열의가 묻어나 있었다.
내 1회차 때처럼 장난스러운 어투가 아니다.
둘의 관계는 매우 명료했다.
불량학생 vs 열혈교사
훈련받기 싫어서 야반도주하려다가 알렉스에게 걸려서 질질 끌려오는 지크를 3번쯤 본 것 같다.
진짜 글러 먹은 친구다.
하지만 알렉스는 인내심을 갖고 열정적으로 지크를 가르쳤다. 강해지기 싫다는 지크의 황당한 어리광조차 전부 받아주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지도해준다.
“지크! 허리가 또 비었잖아! 빠샤!”
“아앜~!? 죽인다! 알렉스! 죽여버린다!”
“명심해. 싸움에서 냉정함을 잃으면 죽는다.”
“커어어억- 우엑?! 켁켁!”
1회차에선 볼 수 없었던 알렉스의 놀라운 변화. 지크에게 아무리 욕을 먹어도 절대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내가 욕하거나 대들면 죽도록 팼었는데….
지크의 변화 또한 눈부셨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3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통역A 살기B 검술C 통감C 체력C…
▷상태: 졸도, 환장, 병신, 출혈
온종일 훈련장에만 있어서 레벨에는 진전이 없었지만, 스킬 등급의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냈다.
다채로운 상태가 좀 걱정되긴 했지만, 빠른 성장에는 늘 대가와 부작용이 따르는 법이다.
그리고 솔직하게 인정할 건 인정하자.
알렉스의 열정이 빛을 발한 걸까? 같은 시간 대비, 1회차의 나보다 지크의 성장 속도가 훨씬 빨랐다.
“과연….”
모범생 하나 던져주고 알아서 배우라는 무책임한 도덕 선생의 교육방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딱 봐도 알겠다.
지크는 나보다 용사의 자질이 우수하다.
저 속도라면, 3년 안에 악마 대군을 홀로 뚫고 마왕의 멱까지 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10년이나 걸렸거늘.
팩트가 묵직하다!
▷당혹: 저기, 강한수 학생?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
어이쿠! 도덕 선생님! 진짜 오랜만에 오셨네요!
보시다시피 모범생을 관찰 중이었습니다.
▷두통: 끓는 솥에 찬물을 붓는 것은, 아궁이에서 불을 빼내는 것만 못하다고 합니다. 제가 추천한 용사 후보도 아직은 미성숙한 성장 단계입니다. 저 상태는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닌데요.
...아니라고요?
그러면 당장 죽여야지.
안 그래도 자주 의심스러웠는데.
▷깜짝: 자, 잠시만요! 빵 조각보다는 말을 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진정하고 제 이야기를 다시 들어주세요!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말은 나의 노예이며, 입 밖으로 내는 말은 나의 주인입니다.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저 후보가 무척 힘들어 보인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어요.
알렉스의 짝사랑으로 힘들어 보이긴 하네요.
그러면 알렉스를 죽일까요?
▷당혹: 죽인다는 선택지 외의 방법은 없나요? 한두 가지쯤 생각해뒀을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분명히 아침까지만 해도 100가지쯤 있었는데, 시녀의 앙증맞은 가슴에 놓고 왔나 봅니다.
지금부터 다시 생각해보죠.
▷제안: 요즘 날씨가 매우 덥습니다. 남자 둘이서는 삭막하니, 아름다운 여인들과 물 좋은 곳에서 휴식을 취해보는 게 어떤가요?
도덕 선생님. 실망입니다.
지크는 아직 17살, 미성년자입니다. 판타지 법규상으로는 남자는 16세, 여자는 15세부터 짝짓기해도 되긴 합니다만.
▷식겁: 바다나 계곡을 말한 거였습니다!
아, 네.
조건이 까다롭다. 예쁜 여자와 물이 있는 곳. 여기가 지구라면 해수욕장으로 직행했을 텐데….
“아…!”
촤르르륵.
나는 집무실 책상 구석에 놓인 지도를 펼쳤다.
왕국은 현재 가뭄으로 고생 중이다. 하지만 정말로 물을 구할 곳이 없어서 농사를 못 짓는 건 아니다.
물은 풍부하다.
그 물을 쓸 수 없을 뿐.
커다란 호수를 독점하는 사악한 종족 탓이다.
인어(Mermaid).
이 물고기들만 처리하면 된다.
가뭄도 해결하고, 지크 레벨도 올리고, 뽕도 뽑고. 회 쳐 먹고. 옛 동료도 죽…. 아무튼, 나는 천재인가?
도덕 선생은 맹렬하게 반대했으나 지크는 반색했다.
“이거 괜찮은 거야? 인어는 서식지를 침범당하는 걸 끔찍이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싫으면 말고.”
“누가 싫대! 흠흠! 인어공주님도 있어?”
“당연하지.”
때깔도 좋고 맛도 좋았던 거로 기억한다.
“그런데 한수야.”
“왜?”
“동행이 왜 이렇게 많아?”
우리는 아기자기한 소수정예로 가지 않는다.
만두 국왕의 협찬을 받았다.
1회차 때처럼, 인어들이랑 화합과 공존이랍시고 여러 손해와 양보를 감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왕국은 올해 농사를 지을 물이 꼭 필요하고, 인어들은 호숫물이 줄어들면 삶의 터전이 좁아진다.
생존경쟁(生存競爭).
여기에 타협의 여지는 없다.
“전리품 분배는 너무 걱정하지 마. 인어공주가 5마리쯤 있는데, 전부 너에게 줄게.”
“그런 얘기가 아닌데….”
코흘리개 용사 지크의 모험이 마침내 시작됐다!
듬직한 동료가 3만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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