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화
[3회차] 성녀와 용사꾼
역대 용사들에게는 어여쁜 짝꿍이 있었다. 용사의 성별에 상관없이 이 존재는 늘 여성이었다.
성녀(聖女).
마음이 여린 용사를 위한 보험, 수호천사.
용사가 동료의 죽음에 자책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도록, 시체 부활이란 사기적인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단, 본인은 부활할 수 없다.
▷종족: 휴먼
▷레벨: 124
▷직업: 성녀(신앙→부활↑)
▷스킬: 신앙SS 치료S 마성S 고결S 설교A…
▷상태: 의심, 불안
후방지원답게 레벨은 매우 낮다.
보조직업은 전투계열 스킬이 없거나 변변찮기에, 적을 처치하고 경험치를 획득할 기회가 터무니없이 적으니 어쩔 수 없다.
대신, 특수한 시스템이 있다.
성녀와 치유사들은 환자의 상처나 질병 등을 치료해준 대가로 힘(경험치)을 받는다.
본인의 의사랑 상관없이 환자에게서 흡수한다.
환자는 레벨이 높고 부상이 심할수록 잃는 경험치도 많아진다. 그렇기에 치유사만 믿고 막 싸웠다가는 레벨이 역으로 떨어지는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된다.
만약, 환자가 1레벨이라면?
0레벨은 사망이다.
위이이잉--
성녀A의 손에서 발현된 순백의 광휘(光輝), 치유의 축복이 318레벨 인어공주의 몸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콜록콜록!”
죽기 직전에 눈을 뜬 아쿠아는 기침부터 했다.
내 맹독에 오장육부가 깡그리 망가졌음에도, 레벨을 대가로 순식간에 회복했다.
“당신…! 으읔!”
여관 침대에 눕혀져 있던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가 도로 쓰러졌다.
아무리 판타지 치료술이 만능이라도, 죽다가 살아난 인간을 바로 팔팔하게 할 만큼 게임적이진 않다.
한동안은 후유증으로 빌빌거릴 수밖에 없다.
이 방에는 나, 지크, 라누벨, 성녀A, 아쿠아. 이렇게 다섯이 있다. 내가 살짝만 어루만지면 성녀A는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
단, 감수해야 할 게 너무 많다.
“성녀님.”
지크가 성녀A를 무척 잘 따른다.
“네. 용사님.”
“성녀님.”
“네. 말씀하세요. 지크 님.”
“성녀님이 내 이름을...! 우헤헤헤!”
“저, 저기요…? 괜찮으신가요…?”
지크는 완전히 맛이 갔다.
저 녀석의 스마트폰 케이스에 그려진 성녀 캐릭터를 봤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성녀란 직업에 대한 환상이나 집착 같은 게 있는 듯했다.
저걸 페티쉬(fetish)라고 하던가?
그 심정을 아주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성녀A는 객관적으로 미인이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샘 같은 우윳빛 머리카락, 티끌 하나 없는 뽀얀 피부는 약간 발그스름한 홍조를 띤 황색이다.
작은 계란형 얼굴에 담긴 지적인 이목구비, 괘씸한 콜라병 몸매는 포교활동에 매우 유리하다.
미녀 of 미녀.
늙지 않는 건 보너스다.
“저는 매우 괜찮습니다! 성녀님! 한 번만 더 제 이름을 불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지크 님.”
“우헤헤헤!”
“......”
만약, 주름 자글자글한 할머니가 성녀였다면, 지크도 저렇게까지 흥분하며 열광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저 해괴망측한 웃음소리가 점점 거슬려진다.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저건 아무리 봐도 비정상이다.
그런데 도덕 선생은 지크가 훌륭한 모범생이란다.
나도 저렇게 해야만 이 야만적인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건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저건 허들이 지나치게 높잖아.
문제의 성녀A가 나를 돌아보며 입술을 뗐다.
“용사님. 어째서 아쿠아를 공격했는지 해명해주시겠어요?”
“평화를 위해.”
“저…. 음…. 제가 이해력이 부족한 건지 모르겠지만, 아쿠아가 무슨 해악이라도 저질렀나요?”
“아니. 평화를 위한 인질이야.”
인어여왕은 아쿠아를 대단히 아낀다.
그런 딸을 생포해서 고문하거나 시신을 모독한다고 협박하면, 여왕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 호수를 포위한 3만 대군.
이대로 흐지부지 장기전이 돼도 상관없다. 둑으로 막은 거대한 물줄기들을 왕국 방향으로 틀어서 가뭄을 해결하면 그만이다.
“인어들은 어떻게 하고요?”
내 계획의 전말을 들은 성녀A가 고운 이마를 찌푸리며 따졌다.
“뭐가?”
“호숫물이 줄어들잖아요.”
“줄어든다고 죽지 않아. 집이 좁아져서 조금 답답할 뿐이지. 하지만 왕국은 올해 농사에 실패하면 많은 사람이 죽어.”
공짜로 일해준 것도 서러운데 평판까지 떨어지는 건 곤란하다. 정말 곤란해서 바로 마왕의 멱을 따러 갈지도 모른다.
“인질 말고 대화로 풀면 되잖아요?”
“인질을 잡은 후에 유리한 조건에서 대화하려고 했어.”
인어는 왕국의 백성이 아니다.
세금을 안 내고, 국방에 보탬도 안 된다.
나는 이 무법자들을 상대로, 왕국이 유리한 조건의 거래를 성사시킬 의무와 책임이 있다.
아무리 공짜로 일한다고 해도!
성녀A가 한숨을 푹 내쉬며 반박했다.
“인질 때문에 협상이 더 어렵게 될 수도 있잖아요?”
“아니.”
용사의 피를 이어받은 영웅 아쿠아는 육지에서도 별 제약 없이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인어다.
여왕이 가장 아끼는 딸로서도 가치가 매우 크다.
즉, 아쿠아를 제압하고 둑을 막으면, 슬픈 노래의 호수 민물인어들은 100% 항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평화롭게 물을 구할 수 있다.
“그, 그건 그렇지만…. 으음….”
인어들 사정을 잘 아는 성녀A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나는 성녀님의 주장이 옳다고 봐!”
지크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읊어봐.”
“정의로운 용사가 무고한 공주님을 인질을 잡고 협박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하잖아! 그건 마왕이나 할 법한 짓이야!”
...마왕 페도나르가 인질을 잡고 협박?
그 마왕은 이런 구차한 방법을 써야 할 만큼 약하지 않다. 약하긴커녕 너무 강해서 여유와 자비가 넘친다.
이 순간에도 요정 여왕이랑 로맨스 중이겠지.
“지크. 농사를 망쳐서 굶어 죽게 생긴 수십만 군중들 앞에서 똑같이 말해봐. 내가 자리를 마련해줄게.”
“그, 그건 좀….”
“못 하겠으면 닥쳐. 얼간이처럼 끼어들지 말고.”
“......”
지크를 조용히 시킨 나는 성녀A를 돌아봤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둑이 완성되는 닷새 안에 상황이 끝나. 인어여왕이 타협하든 전쟁을 원하든 왕국의 승리는 확정된 사항이야. 성녀님만 이 계획을 방해하지 않으면 돼.”
성녀A는 성왕국의 대표다.
호수 근처에 1만 군대가 대기 중이고.
국제문제로 확대되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정녕 다른 길은 없나요?”
“비가 펑펑 쏟아지게 하는 기적이라도 발견한다면 또 모르지.”
내가 알기로는 없다.
“있어요.”
아쿠아가 나를 노려보며 끼어들었다.
“있다고? 정말로?”
“호수 밑바닥에 거대한 메기가 살고 있어요. 우리는 수호신 울룰루라고 부릅니다.”
수호신 울룰루.
인어들이 이 호수에 정착하기 전부터 살던 터줏대감.
그 울룰루가 울면 비가 내린다고 한다.
하지만 매우 난폭하기에 인어들이 매일 교대로 자장가를 부르며 500년 넘게 봉인해둔 상태라고….
“처음 듣는 얘기인데. 라누벨, 알아?”
“아니요.”
그렇다면 거짓말이 섞인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
나도 1회차에선 듣지 못했다.
“용사님들. 모두가 웃으며 끝낼 방법이 나왔습니다. 비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전설의 절반만 사실이라도 가뭄을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토벌한다면 호수의 인어들도 더는 울룰루를 걱정할 필요 없어지겠고요.”
성녀A가 상황을 빠르게 정리했다.
“한수야! 성녀님의 말씀대로 이게 최선 같은데? 그 울룰루란 메기 1마리만 쓰러트리면 모든 게 해결되잖아!”
내 눈치를 보던 지크가 성녀A의 주장을 지원하고 나섰다.
나는 곰곰이 따져본 후에 물었다.
“승산은?”
망룡왕 2탄은 사양하고 싶다.
태생이 메기라고 했으니 호수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겠지만, 5대 재앙은 그런 종족의 한계마저 뛰어넘었었다. 괜히 재앙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절망적이에요.”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아쿠아가 단언했다.
인어들의 힘으로 잡을 수 있는 터줏대감이었다면 50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장가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절망적? 그러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 말던가! 이 멍청한 물고기 년아! 지금이라도 당장 회 쳐줄까?”
“당신, 정말로 용사 맞나요?!”
그때, 방금까지 찌그러져 있던 지크가 씩씩하게 외쳤다.
“한수야. 싸워보기 전에는 몰라!”
“오냐. 네가 선두다.”
내가 녀석을 죽이는 건 어렵지만, 지크가 자의(自意)로 싸우다가 죽으면 내 평판이나 인성에 악영향을 안 줄 것이다. 음?
‘...생각보다 괜찮은 아이디어인데?’
이 하나만으로도 정체불명의 메기 사냥에 의미가 있었다.
지크를 내주고 업적과 평판을 얻는 것이다.
훌륭한 등가교환이다.
“나, 나는 아직 3레벨이라서 그건 좀 무리….”
“나도 아직 15레벨이란다.”
이미 결정된 사안이다. 물리기 없기다.
늘 새로운 지식에 목마른 고고학자 라누벨이 오른손을 번쩍 들며 귀여운 척했다.
“라누벨도 울룰루 토벌에 찬성해요!”
“안 물었다.”
“우우….”
그렇게 해서,
슬플 노래의 호수 터줏대감 울룰루 사냥이 결정됐다.
*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왕국의 실질적인 지배자로서 의무를 다했다.
“인어여왕님. 이 용사님이 좋은 말로 할 때, 여기에 서명해. 딸이 인간들의 식탁에 오르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기 싫다면.”
“어, 어찌 이리도….”
가장 아끼는 막내딸 ‘아쿠아’가 용사님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인어여왕은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내가 출발 전부터 미리 작성해둔 계약서를 읽어보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여전히 갈등하는 걸까.
“싫으면 지금부터 전쟁이다.”
“읔…!”
“나쁜 제안은 아니잖아? 왕국에 소속되고 왕국의 법을 따른다. 공주 중 셋을 왕궁 정원의 연못에 관상용으로 상주시켜야 하지만, 그 대가로 왕국과 용사의 비호를 받을 수 있어.”
물론, 왕국에 소속되면 인어들도 군사적으로 동원될 수 있다.
평소 업무는 국경을 마주하는 성왕국 견제.
굳이 인어들에게 세금을 걷지 않더라도, 이 하나만으로도 국방비를 대폭 절감할 수 있다.
내가 그린 최적의 시나리오다.
“우리는 지금까지 중립을 지켜왔어요….”
인어여왕이 아름다운 얼굴을 찌푸리며 쥐어짜듯 말했다.
“그렇다면 선택의 시간이 왔군.”
“...당신은 제가 사랑했던 용사님이랑 너무나 다르군요.”
“당연한 소리를.”
나는 전대 용사랑 다르다.
마왕 페도나르에게 절대 패하지 않는다.
“하아…. 여기요. 부디, 당신의 판단이 옳았기를 빕니다.”
인어여왕의 서명이 적힌 계약서를 쓱 확인해봤다.
흠. 문제없군.
“좋아. 이제부터 슬픈 노래의 호수 인어족은 왕국에 소속됐음을 선포한다! 왕국의 용사 지크가 그대들을 수호해줄 것이다.”
“어? 잠깐. 나?”
옆에서 얌전히 듣고 있던 지크가 화들짝 놀라며 묻는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답해줬다.
“군사동원부터 협상까지 내가 공짜로 도맡아서 처리했다. 지크. 너도 용사라면 하나쯤은 해라.”
“나는 고작 3레벨인데….”
지크가 레벨을 핑계로 자꾸 빼려 할 때였다.
“꺅! 빨리 도망쳐!”
“모두 물가로 얼른!”
“수호신이 깨어났어요!”
벌써 시작된 모양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수백 마리의 인어가 우르르 호수 밖까지 헤엄쳐서 뛰쳐나왔다.
보글보글….
특수한 거품에 휩싸인 그녀들의 꼬리지느러미가 비늘 하나 없는 인간의 늘씬한 맨다리로 변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인어들은 두 발로 서지 못하고 아기의 걸음마처럼 육지를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러나 그녀들은 멈추지 않았다.
“Ulluuuuuu!”
뒤편에서 포효를 터트리며 깨어난 거대한 존재 탓이다.
나는 여기가 물이 굉장히 풍부한 호수라고 1회차부터 쭉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촤아아아--
놈이 일어서자마자 수면(水面)이 낮아진다.
▷종족: 카오스 타이탄
▷레벨: 999+
▷직업: 수왕(호수→가호↑)
▷스킬: 파괴SS 가호S 맷집A 돌격A 혼돈A…
▷상태: 짜증, 몽롱
“메기는 메기인데….”
멍청한 물고기 년이 제대로 안 가르쳐줬다.
수호신 울룰루는 대가리만 메기였다.
쿵! 쿵! 쿵! 쿵!
고대부터 살아온 초대형 거인, 울룰루가 두 다리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지가 크게 뒤흔들렸다.
놈이 물가로 올라온다.
그리고는 우리를 무시한 채 미친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Ulluuuu…!”
만두 왕국의 영토로.
...뭐?
“형! 안 돼~! 돌아와~!”
내 평판과 업적이 몽땅 파괴되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