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3회차] 불량품을 획득했다!
악마들의 지휘체계는 매우 단순명료하다.
마기가 높은 놈이 무조건 상관(上官).
내 마기는 현재 SS등급으로, 성의 옥좌에 틀어박힌 마왕 페도나르를 제외하면 견줄 자가 대공A와 왕자1밖에 없다.
하지만 그 둘은 최소 5년 동안 활동이 없으니, 내가 실질적인 이인자인 셈이다.
현재, 판타지 인간들은 전란이 없는 평화의 시기라고 믿지만, 5개 대륙은 이미 수많은 악마가 깊게 뿌리 내린 지 오래다.
그들이 여태 얌전히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인류의 수호자.
이 존재가 두려워서 암약만 하는 것이다.
그건 다시 말해, 암약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쑤 용사님이 대단하대!”
“그분이 뭘 했는데?”
“뭔지 몰라도 대단하대!”
“그, 그렇구나! 대단하시군!”
...이런 식으로 대륙의 여론을 싹 바꿨다.
정보교류와 소통이 쉽지 않은 세상에서 바람잡이와 음유시인들이 부지런히 선동하면, 거짓도 진실로 탈바꿈한다.
내 평판이 무한정 치솟았다!
또한,
“지난 홍수는 지크 때문에 벌어졌대.”
“한쑤가 아니라? 자세히 얘기해줘.”
“자세히는 나도 몰라. 그렇다고 하더라.”
견제는 기본이다.
“용사 지크가 온종일 여자들이랑 논다더군!”
“나도 봤어. 거리에서 시시덕거리는 광경을.”
“반면에 한쑤 용사님은 의젓하시지!”
“맞아. 미녀 엉덩이도 가차 없이 걷어차시더라!”
지크는 방탕한 카사노바로 몰고, 나는 여자에게 절대 흔들리지 않는 강철의 용사로 널리 홍보했다.
아직 동정(童貞)도 못 뗀 지크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승부의 세계는 원래 냉혹한 법이다.
자비는 베풀지 않으리라!
“우후후후….”
“용사님. 무척 즐거워 보이시네요. 제가 이렇게 팔짱을 껴도 가만히 놔두시고~♪”
아쿠아가 육감적인 몸을 비비며 싱글벙글 웃었다.
“기분 좋지. 좋고말고.”
지능적인 냉전이 시작된 이후부터 내 여행은 탄력을 받았다.
이래저래 운이 정말 좋았다.
위기에 빠진 상단이나 마차의 구조요청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부 기분 탓이다.
용사A와 잡것들은 계속 직진했다.
하루, 열흘, 보름, 달포….
울룰루가 맹목적으로 가려던 방향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몬스터에게 쫓기는 사람 따위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허! 바닷속이라니.”
1회차에서 그 존재조차 몰랐던 게 당연했다.
용사는 물고기가 아니다.
마왕도 물고기가 아니다.
그렇기에 1회차 10년 동안, 내가 바닷속에 들어간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다른 대륙으로 넘어가기 위해 배를 탄 적은 자주 있었지만, 유령선이나 물에 잠긴 사원, 해저 동굴은 1번씩밖에 가지 않았다.
이 바닷가에는 하나의 전설이 있었다.
인근 어부들만 아는 이야기다.
“용사님. 정말로 이 앞의 해저(海底)에 절세미녀가 살까요?”
라누벨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신반의했다.
심기가 불편한 성녀A가 참견했다.
“헛소문일 겁니다, 고고학자 라누벨. 아름다운 여자가 전설의 성검(聖劍)을 지키고 있다니요? 성검은 세상에 단 한 자루뿐입니다. 북대륙의 전대 용사 무덤에 잠들어 있어요.”
전설을 요약하면 둘의 이야기가 맞다.
이 앞에 두 번째 성검이 있단다.
“확인하고 싶어도 망망대해에서 어떻게 찾느냐가 문제인데….”
“용사님. 제가 잠수해서 확인해볼까요~♪”
아쿠아가 옷을 벗으면서 말했다.
이 멍청한 물고기 년은 갑갑한 가죽옷을 벗을 핑계와 명분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말 그대로, 물 만난 물고기다.
“너는 민물인어잖아. 소금에 절인 인어 젓갈이 되고 싶니? 아! 맛이 궁금하긴 하네.”
“잠깐이라면 괜찮아요~♪”
바로 그때였다.
“Ulluuu….”
“Ulluuuuu….”
“Ulluuuuuuu….”
파도에 섞인 울룰루의 울음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 카오스 타이탄은 내 경험치가 되어 영원히 함께하고 있다. 그러니 당사자가 낸 소리는 아닐 터.
저 바닷속의 누군가가 울룰루의 힘을 느낀 듯했다. 그래서 저리 구슬프게 부르는 게 아닐까.
“흠…. 이걸 어쩐다…?”
그 메기는 이미 내 뱃속에 들어갔다고 답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파아아앗--
바닷속에서 붉은색 빛이 반짝였다.
마치, 내가 여기에 있다고 알려주는 듯했다.
“...거참. 부른다면 가야지. 너희는 전설을 들려준 어촌에서 대기하고 있어. 따라오면 죽인다.”
절세미녀가 지킨다는 두 번째 성검.
어디, 맛이나 한번 볼까?
둘 다.
*
내 스킬들은 2회차 때 얻은 것뿐이다.
바닷속은커녕 호수조차 들어갈 일이 없었기에 수영 계열의 보조계통은 익히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수중호흡은 간단하지.”
물고기의 아가미 비슷한 호흡기관을 만들면 그만이다.
마스터 몰랑처럼 무호흡의 완전한 생명체로 거듭나고 싶지만, 아직은 연구와 자료가 더 필요했다.
그래도 수중호흡까진 간단했다.
인어공주 아쿠아의 허파를 참고했다.
그 뒤, 나는 물속을 천천히 나아갔다.
붉은색 빛이 반짝인 곳으로.
하지만 수상하거나 숨겨진 비밀장소가 늘 그렇듯, 여기도 초대하지 않은 외부인을 쉽게 들여보내지 않았다.
방해꾼? 파수꾼이라 해야 할까.
▷종족: 아크 머메이드
▷레벨: 999+
▷직업: 수호자(수호→피해↓)
▷스킬: 수호SS 창술S 회피S 통솔S 면역S…
▷상태: 흥미
종족부터 격이 다른 보스가 나타났다.
아쿠아도 인어공주로 불리지만, 특별한 힘을 가진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신분이 공주일 뿐이다.
하지만 이쪽은 태생부터 진짜 왕족이었다.
“현생의 용사여. 물러나세요.”
물이 진동하며 아름다운 음파가 내 고막을 때렸다.
상대는 머리부터 꼬리지느러미까지 고귀한 공주님이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바다인어였다.
유려한 몸의 곡선이 내 눈을 현란하게 했다.
참 먹음직스럽게도 생겼네.
하지만,
“지나가겠다면 어쩔 건데?”
나는 흉흉하게 웃으며 질문했다.
지크가 이 인어랑 마주쳤다면 100번 싸워서 100번 졌겠지만, 내게는 가소로운 생선일 뿐이다.
인어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유감스럽게도 그 바람은 무리입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요. 해변에서 눈을 뜬 용사님은 다시 아름다운 모험을 떠나게 될 거랍니다. 랄랄라~♪♬”
노래가 들려왔다.
자장가처럼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비싼 생선아. 내 기억이 어쨌다고?”
“랄라~♪ 랄- 꺅?!”
물살을 헤치며 도약한 나는 인어의 머리채를 잡아서 고정한 후, 무릎으로 그녀의 예쁜 얼굴을 찍었다.
빠각!
한 방에 제압할 의도였는데, 인어의 수호자 직업과 SS등급 수호 스킬의 효과로 실패했다. 피해감소가 양심 없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빠각! 빠각! 빠각!
기절할 때까지 찍으면 그만이다.
“우으으….”
팔딱거리던 인어의 양팔과 꼬리지느러미가 축 늘어졌다.
가지런했던 앞니와 높은 콧대가 전부 부러지며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내 기억이 어쨌다고?
건방진 생선 대가리는 응징이다.
“하지만 내 기억 운운하는 꼴을 보니, 제대로 찾아오긴 한 모양이네.”
어쩌면 1회차 때도 이런 장소를 우연히 발견하지 않았을까. 10년이나 대륙을 샅샅이 돌아다녔으니 말이다.
단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면?
하지만 3회차의 나는 다르다.
▷종류: 스킬
▷명칭: ■■
▷등급: E
▷D: □□□□ □□□.
▷E: 파괴되지 않는다.
▷F: 망각하지 않는다.
인어의 노래는 블랙박스 F등급 효과에 간단히 막혔다.
“정말로 두 번째 성검이 존재하는 건가…?”
“......”
나는 인어를 바로 죽이지 않고 질질 끌고 갔다.
번거롭긴 하지만, 일부 비밀의 장소는 수호자가 아니면 쉽게 들어갈 수 없도록 꽁꽁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말고.
스르륵….
스륵….
감옥의 쇠창살처럼 진로를 가로막고 있던 산호초들이 좌우로 벌어지며 길을 열었다.
빙고!
정말로 수호자에게 반응하는 듯했다.
울룰루가 애타게 가고자 했던 장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쁜 생선아. 안내해줘서 고마워.”
우득.
나는 고마움의 표시로 깔끔하게 인어의 목을 분질러줬다.
들어오는 경험치로 수호자가 확실하게 죽었음을 확인한 후, 느긋하게 주위를 구경했다.
이곳은 소박한 인어의 집이었다.
바다에서 구할 수 있는 조개와 산호 등으로 만들어진 가구와 생활용품이 즐비하고, 지상에서 수입한 물건들이 간간이 보였다.
나는 지상에서 넘어온 물건들에 주목했다.
“무척 오래됐네.”
고대의 유적에서나 출토될 법한 골동품들이었다. 수호자는 이것들을 용케도 버리지 않고 사용했다.
이 인어가 육지로 올라가서 거래하지 않고 묵묵히 이곳만을 지켰다는 방증이었다.
매일 똑같은 풍경과 생활이 갑갑하지도 않나?
무엇을 지키고 있었기에 그렇게까지?
집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Ulluuu….”
해변에서 들었던 그 소리가 틀림없었다.
천천히 소리의 근원지로 다가간 나는 해초와 산호 등으로 뒤덮인 사람 형태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관찰한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종족: 카오스 머메이드
▷레벨: 1
▷직업: 해왕(바다→가호↑)
▷스킬: 가호SSS 파괴S
▷상태: 경직, 수호, 시체, 보관
종족이 특이한 인어였다.
심연의 잔잔한 바다 같은 남청색 눈은 지적이고, 파도처럼 물결치는 남청색 머리카락은 생동감이 넘쳤다.
가녀린 목부터 좁은 어깨, 봉긋한 젖가슴, 잘록한 허리, 뇌쇄적인 골반에 다다르는 곡선은 예술품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두 다리 대신 달린 지느러미가 매우 아쉬웠다.
내가 이런 말은 잘 안 하는데….
“포르말린에 담가서 소장하고 싶군.”
어떤 맛일지도 궁금하다.
아무튼,
그 인어 곁에는 검(劒) 한 자루가 함께했다.
꼬리지느러미에 칼끝이 박혀 있다.
그녀 스스로 박은 듯한데, 하트(♡) 모양의 유치한 칼자루를 자기 심장처럼 양팔로 소중히 끌어안은 채였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성검. 전설이 정말이었네…?”
내가 익히 아는 황금색 바스타트 모양의 성검이 아니었다.
붉은색 브로드소드(broad sword).
널찍한 칼날부터 자루까지 온통 새빨간 탓일까? 성검보다는 마검에 더 가까운 불길한 분위기를 풍겼다.
“색감이 딱 내 취향이네!”
성검의 사용법이라면 1회차에서 충분히 인지해뒀다.
나는 감상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이곳의 수호자가 죽었다.
그 이변을 눈치챈 누군가가 새로운 훼방꾼으로 나타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도덕 선생이라던가?
▷경악: 자, 잠시만요-!
등장 타이밍이 예술이었으나 내가 더 빨랐다. 내 오른손은 이미 붉은색 성검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용사와 성검은 원래부터 짝꿍.
정령검 엔드미온처럼 길들일 필요도 없다.
스르르….
내 영혼에 무언가 침투하는 기분이 든 직후, 인어의 꼬리지느러미에 막혀 있던 성검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성검은 소멸한 게 아니다.
착검(着劍) 상태.
용사가 성검의 칼집 역할을 하는 것이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936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패기SSS 마기SS 혼돈SS 파괴SS 맹독SS…
▷상태: 범죄, 흡수, 성검
내 상태에 ‘성검’이 추가됐다.
완벽한 도난방지 서비스!
탁.
정신을 집중하면 언제든 성검이 소환된다.
기존 성검보다 묵직해서 좋군?
벌써부터 손맛이 기대됐다.
▷체념: 인류의 수호자를 살해하고, 봉인해둔 불량품을 탈취해서 어쩌자는 건가요…. 하나의 검집에 들어갈 수 있는 검은 한 자루뿐. 당신은 이제 원래의 성검을 쥘 수 없어요.
도덕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성검 없이도 마왕은 잘만 잡았습니다.
▷절망: 그런 당신이 이상한 겁니다! 마왕을 성검과 동료 없이 쓰러트린다는 대전제부터 비정상이에요! 아아! 사유서를 작성하는 틈에 이런 대참사가 또 벌어지다니…! 그리고 강한수 학생. 인류의 수호자를 살해하고도 인성 점수가 무사하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요?
정당방위였는데요?
기억이 지워질 뻔했습니다.
▷황당: 본인이 무단침입한 무장강도란 자각은 없나요?
도굴과 약탈은 용사의 미덕입니다.
그 얼빠진 지크도 출입금지의 유적 하나를 털었는걸요.
▷불안: 으으. 경질당할지도….
도덕 선생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경질되면 다른 선생이 오는 걸까? 온다면 잔소리 말고 말귀가 좀 통하는 친구였으면 좋겠다.
“Ulluu….”
내게 성검을 빼앗긴 인어의 도톰한 입술 사이로 그런 웅얼거림이 재차 들려왔다.
울룰루랑 친구였던 걸까?
연인 사이는 아니었다고 믿고 싶다.
보글보글.
아름다운 인어의 탐스러운 몸이 물거품으로 변하면서 바닷물에 사르르 녹아들었다.
성검을 뽑기 전에 맛부터 봤어야 했나?
살짝 아쉬움이 남았다.
그나저나,
“이 성검이 불량품이라고…?”
착착 감기는 손맛이 일품이거늘.
정령검 엔드미온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사랑과 우정은 원래 돌고 도는 법이다.
성검2.
우리는 좋은 한 팀이 될 것 같다.
내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
성검2를 획득하고 육지로 올라온 용사A. 곧바로 인근 어촌에서 잡것들이랑 합류했다.
그런데 뭔 일이 터졌는지 마을이 시끌벅적했다.
“용사님! 용사님! 큰일 났어요! 인간들에게 범해진 딸을 보고 분노한 요정왕이 선전포고해왔어요!”
“지크도 요정들이랑 함께 있다고 합니다.”
라누벨과 성녀A가 초조한 얼굴로 조잘댔다.
변태 귀족에게 팔려간 실비아를 지크가 구출한 모양이다.
그래서?
진짜 별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이다.
“좀 닥쳐봐. 따끈따끈한 성검으로 베어버리기 전에.”
“......”
“......”
이게 나비효과란 걸까?
실비아 공주가 변태 귀족에게 팔려가도록 놔뒀더니 몇 달 만에 종족전쟁으로 확대됐다.
내게도 일부 책임이 있었다.
그러니,
“이 용사님만 믿어달라구! 종족전쟁을 막을 좋은 묘수가 있어!”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안 마주치면 전쟁도 없다.
업적 SS학점을 수확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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