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화
[4회차] 하루면 끝나는 판타지 모험
▶깜짝: 안 돼요! 안 돼! 그런 배덕한 짓은! 당신은 학생, 저는 교사-가 될 몸. 선을 넘으면 안 돼요! 위험을 즐기는 자는 그 위험으로 망한다고 했어요!
고지식하긴.
그래서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어?
▶갈등: 그, 그건…. 알겠어요. 비밀 친구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친분이라면…. 어디까지나 원활한 교육을 위해서요! 교육!
오! 융통성 있는 교생이네.
언젠가 훌륭한 선생이 될 거야.
“저기, 용사님…?”
나는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의 소곤소곤한 목소리에 소름이 쫙 돋는 걸 느끼며 현실로 돌아왔다.
피떡이 된 얼굴을 치료받는 중인 지크.
살짝 긴장한 얼굴로 나를 보는 왕궁기사들.
귀여운 척으로 무장한 고고학자 라누벨.
그리고 4회차!
전투력, 평판, 업적.
세 과목은 우수한 성적이 틀림없다. 평판이 A학점인 건 다소 불만스럽지만, 그래도 불합격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문제는 인성.
2회차보다 더 떨어져서 FF학점을 받았다.
채점자의 불합리한 횡포가 극심했다.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다 생각이 있지….”
“뭐가요?”
라누벨이 고개를 갸웃하며 참견했다.
나는 그녀에게 “귀여운 척하지 마!”라고 핀잔주는 대신,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라누벨. 폐하께 어서 안내해주렴.”
지크가 딱 이렇게 해서 호평을 받았었다.
여기에 서비스로 미소까지.
“저기요, 용사님? 폐하를 죽이시려는 건 아니시죠…?”
“내가 왜?”
만두 국왕을 죽여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3회차에서도 꼭두각시로 만들지언정 죽이진 않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그대로 알현실까지 직행했다.
턱주가리가 날아간 지크는 치료받고도 끝끝내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서 만두 국왕은 나 혼자 만나게 됐다.
대화는 굉장히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걸로 4번째 만남.
만두 국왕의 취향과 성격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
물론,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왕비에 대해서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다.
“용사여. 이 왕국을 구해다오!”
“물론입니다.”
나는 아무런 조건 없이 무료봉사를 약속했다.
왕국을 돕긴커녕 요정들 편에 서서 공격했던 배은망덕한 용사 지크처럼 “모든 문제는 저에게 맡겨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거짓말인 줄 모르는 만두 국왕은 무척 기뻐하는 눈치. 귀족들도 만족하는 얼굴들이다.
덕분에 회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끝났다.
이제,
“라누벨. 꺼- 내일 보자.”
“하지만 용사님. 저희는 이제 막 만났는걸요? 제가 판타지아 대륙에 대해서 세세하게 알려드릴게요!”
“내일 말해.”
내가 판타지아 경력 11년 차다.
세계의 비밀, 숨겨진 유적, 불편한 진실, 수호자의 은신처, 여러 비밀결사, 고대의 미궁, 세계의 불가사의, 망룡왕의 둥지, 향후의 날씨와 전쟁, 은밀한 흑막, 각국의 정세, 암흑상회의 암호….
라누벨보다 훨씬 잘 안다고 자부한다.
“우우…. 아! 지금 출출하지 않으세요? 제가 굉장히 맛있는 음식집을 알고 있어요! 이건 비밀인데요. 왕궁 주방장보다 요리실력이 좋아요.”
“그것도 내일.”
그리고 라누벨이 추천하는 음식집은 더럽게 맛없다.
달고, 짜고, 시다.
그녀의 자극적인 입맛에 맞춰져 있다.
“우음. 그러면….”
라누벨은 쉽게 꺼져주지 않았다.
“야! 라누벨. 내가 웃는 얼굴로 부탁할 때 잘 들어. 우리는 이제 내일 볼 거야. 제대로 알아들었지? 내일이다, 내일. 오늘은 너랑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전부 내일요?”
“그래.”
“우우…. 그러면 내일 뵐게요!”
간신히 설득해서 떼어낼 수 있었다.
저 거머리가 내 인성 점수를 말아먹은 원흉 아닐까?
“일단은 참자, 참아.”
내가 배정받은 침실까지 안내해준 왕궁기사를 끝으로, 나는 간신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 중간점검에 들어갈 차례다.
교생 아가씨. 전부 보고 있었지? 어떻게 생각해?
▶감탄: 혼자서도 잘하시네요!
바쁘다는 핑계로 휙휙 사라지던 도덕 선생이랑 달리, 이 교생은 나만 전담으로 맡은 까닭에 시간이 넉넉하다고 한다.
설마, 밤에도 지켜보는 건 아니겠지?
그건 좀 많이 곤란한데!
“뭐, 이번에 졸업할 테니 문제없으려나?”
4회차에서도 알렉스의 신나는 오리엔테이션은 닷새 뒤로 잡혔다.
물론, 나는 그때까지 기다려줄 마음이 없었다.
블랙박스를 활성화했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1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패기SSS 마기SSS 몰살SS 혼돈SS 내성SS 맹독SS 근력SS 맷집SS 민첩SS 투기SS 파괴SS 오감SS 검술SS 위엄SS 망각SS 통치SS 권투S 검기S 학살S 격투S 체술S 불굴S 돌파S 체력S 수영S 심판S 불사S 숨결S 회복S 인내S 활력S 근성S 선동S 저항S 날조S 재생S 면역S 냉정S 철벽S 금강S 투창S 포효S 도발S 광기S 추적S 기력S…
▷상태: 혼돈, 성검
3회차보다 더욱 혼잡해진 능력치가 펼쳐졌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상태다.
성검.
“이야! 파트너! 다시 만나서 정말 기쁘다!”
성검2가 4회차까지 딸려왔다.
블랙박스 F등급 효과 ‘망각하지 않는다.’는 아무리 봐도 연관이 없는 듯하니, 이건 E등급 효과라고 봐야 했다.
파괴되지 않는다.
이건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왜냐하면,
탁.
성검2를 소환해서 오른손에 가볍게 쥐자마자 스킬 효과가 기하급수적으로 뻥튀기됐다.
시너지의 시너지가 더 큰 시너지로 탈바꿈한다.
갑자기 500레벨이 된 기분이다.
▶깜짝: 성검이 어째서 강한수 생도님에게 있는 거죠?!
교생 아가씨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 잔소리꾼 도덕 선생이 진실을 은폐했을 가능성은 적으니, 교직원 일동은 내가 회귀하면 성검2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줄 알았던 게 틀림없다.
하지만 성검2는 파괴되지 않았다.
온전한 내 힘이 되었다.
교생 아가씨. 비밀 친구 하지 않을래?
서로의 은밀한 비밀까지 공유하는 진정한 친구.
▶움찔: 돼, 됐어요! 안 궁금해요!
언제든 마음 바뀌면 말해. 히쭉.
*
알현실에서 보여준 내 대응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모든 회차를 통틀어서 가장 좋은 방을 소개받았다.
시녀 두셋 끼고 밤새도록 놀아도 될 만큼 넓은 침대, 귀족들의 프라이버시를 위한 두꺼운 방음벽, 당당히 탁자 위에 놓인 정력제와 술 또한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용사님. 무엇이든 시켜주세요. 무엇이든.”
달밤의 외로움을 달래줄 여인까지.
왕궁에서도 손꼽히는 미모의 시녀가 뜨거운 눈길로 내 위아래를 바라보며 말한다. 남자라면 절대 모를 수 없는 청신호였다.
“응. 나가.”
하지만 오늘은 안 된다.
“네?”
“부를 일 있으면 초인종을 흔들 테니 나가. 그리고 아무도 내 방에 들여보내지 마. 절대로.”
“아, 알겠습니다. 용사님.”
끼익- 탁.
시녀가 공손히 침실 문을 닫으며 퇴실했다.
이제, 아무도 나를 간섭하지 않는다.
햇볕이 잘 드는 창문 하나가 있긴 했지만, 왕궁의 4층 높이 방을 훔쳐볼 만큼 높은 건물이나 구조물은 이 근처에 없다.
사색하기 딱 좋은 조용한 공간.
기분이 묘했다.
“이런 차분함도 참 오랜만이네.”
내가 홀로 가만히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게임, 노래방, 인터넷, 영화, 오락, 쇼핑….
현대 지구의 자극적인 삶을 기억하는 나로선, 판타지아 대륙은 정적이고 따분한 세계였다.
그렇다고 한가하진 않았지만.
1회차 때는, 동료들이 멋대로 폭주하며 벌여놓은 사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그러다가 간혹 여유가 생기면?
단련의 단련을 거듭하며 내 전투력을 키웠다.
동료들이 승전파티를 벌일 때마저도, 나는 이 야만적인 세계에서 탈출하겠다는 일념으로 몸과 마음을 혹사했다.
모든 건,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지금도 마찬가지다.
▶빼꼼: 강한수 생도님. 뭘 하시려고요?
교생 아가씨. 아주 좋은 질문이야!
3회차 내내 무료봉사로 바빠서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스킬 등급이 반복작업의 숙련도로 올라가는 건 맞지만, 정령이나 신앙처럼 정신적인 성장을 요구하는 스킬들도 있다.
나는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웠다.
툭.
증폭기 성검2도 소환했다.
시간 단축과 원활한 진행을 위한 도핑은 기본.
흐트러진 영혼의 조각모음을 시작했다.
광기S→광기SS
지력A→지력S
행운D→행운C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집중해서 약간의 성장을 해냈다. 이것도 용사의 경험치 500% 특전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대작업이다.
그만큼 불분명하고 난해한 수련법인 탓이다.
광기의 성장은 크게 두드러질 게 없었다.
SS등급 효과가 좀 사기적이긴 한데….
늘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내가 광기 상태에 빠질 일은 없으니, 그다지 존재 의미가 없었다.
즉, 광기는 계륵(鷄肋) 같은 스킬이다.
아! 지력은 조금 좋다.
다만, 이건 똑똑해지는 스킬이 아니다.
바보는 바보, 천재는 천재.
지력 스킬이 성장하면 생각하는 속도가 빠릿빠릿해진다.
예를 들어, 푸는 데 10초쯤 걸리던 수학식이 8초로 단축된다. 하지만 애초에 멍청해서 못 푸는 수학식은 빨리 풀어도 틀리잖은가?
지력은 딱 그런 수준이다.
그래도 등급을 올려두면 좋다는 건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행운이라…?”
이 스킬이 언제 C등급까지 올랐는지 모르겠다. 하늘에서 우연히 뚝 떨어진 걸 주운 기분이다.
도굴꾼과 도박꾼의 필수 스킬.
행운을 A등급까지 정공법으로 올리려면 나라를 말아먹을 만큼 오랫동안 도박에 심취하거나, 목숨을 100번쯤 건져야 한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올리기가 쉽지 않다.
현재는 어두컴컴한 심야(深夜).
내가 침대에 누워서 명상하는 사이에 모두가 꿈나라로 넘어갔다.
사실, 내 목적은 스킬의 성장이 아니다.
기다리기 따분한 시간을 유익하게 보냈을 뿐.
▶관찰: 밤이 되길 기다리셨다고요? 왜요?
내가 명상을 시작한 이후부터 쭉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교생 아가씨가 슬그머니 질문해왔다.
이건 가르쳐줘도 괜찮겠지.
나의 4회차 목표는 이미 정해져 있다.
“아무것도 안 하기 위해서.”
내 3회차 인성은 FF학점.
상식적으로 나올 수 없는 최하위 점수였다.
불공정하고 비합리적인 채점자는 온갖 생트집을 잡으며 내 인성 점수를 떨어트리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한 가지 계획을 짰다.
끼익-
나는 침실의 창문을 열고 주위를 둘러봤다.
왕궁의 아름다운 정원 외곽으로 왕궁기사 둘이 순찰하는 게 보였지만, 현대의 형광등이랑 비슷한 ‘마법의 등불’의 대량생산이 힘든 판타지 세계의 밤은 매우 어두운 편이다.
도시와 왕궁도 예외는 아니다.
“허술하구먼.”
이제 막 소환된 1레벨 용사라고 얕잡아보는 걸까.
나는 헛웃음을 터트린 후, 창문 밖으로 사뿐히 뛰어내렸다.
▶궁금: 강한수 생도님. 외출하시게요?
아니. 외출이랑 조금 달라.
이대로 마왕의 성까지 가서 안 돌아올 생각이거든. 히쭉.
▶당황: 네?! 첫날부터 마왕이요?!
착.
4층 높이의 창문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성검1이라면 들켰을지도 모르지만, 수수한 붉은색 디자인의 성검2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암살용으로도 매우 쓸만하다.
나는 이 기세로 왕궁과 수도를 벗어나서 초원을 달렸다.
“흥! 내 인성이 문제라고?”
세 과목이 100점이고, 한 과목이 0점이라도 평균이 75점으로 졸업할 수 있는 시스템일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모든 과목을 따로 계산하고 있었다.
대신, 최저점수 허들은 그리 높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내가 취할 방법은 정해져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꼬투리도 잡지 못할 터!
나는 꼬투리를 안 잡히기 위해 야생 몬스터도 잡지 않고 피했다. 사람이랑 안 마주치는 건 기본이다.
그랬더니 심심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교생 아가씨. 노래 잘해?
▶흠칫: 비밀이에요.
교생 아가씨는 신상정보를 한 번 털린 이후부터 철벽이었다. 하지만 이제 고작 하루 지났으니 서두를 필요 없다고 본다.
나는 반나절도 안 지나서 왕국의 국경을 지나 마왕의 영토에 침입했다.
“음? 뭔가 지나간 듯했는데.”
“잘못 본 거겠지. 기분 탓.”
야생에서 배회하는 하급 악마들 또한 깡그리 무시했다.
편파적인 채점자라면, 무고한 악마를 죽였다고 빽빽거리며 내 인성 점수를 깎을지도 모르니까.
망룡왕과 성검2 떡밥도 같은 이유로 아웃(Out).
아예 빌미를 주지 않을 생각이다.
휙, 휙, 휙.
마왕 페도나르의 영토 곳곳에 설치된 함정과 미로 등도 내게는 전혀 장애물이 못됐다.
내가 이 길만 3번 뚫었다.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황당: 말도 안 돼…. 정말로 와버렸어…?
만두 왕국에서 마왕의 성까지 하루.
1레벨로 들키지 않는다고 애쓰느라 시간이 좀 지체됐다. 지금쯤 왕궁에서는 사라진 나를 찾는다고 시끌벅적하겠지.
숨어든 ‘마왕의 방’도 꽤 소란스러웠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 하지 마라.”
“저에게는 남편과 아이들이….”
“하지 말라고 했다.”
넓은 옥좌에 앉아있는 마왕의 튼실한 허벅지 위에 올라탄 요정왕 마누라가 비탄에 찬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저는 포로의 몸이니 괜찮겠죠.”
“그게 대체 무슨 논리지?!”
그녀를 상대해주는 마왕의 얼굴은 피로로 가득했다.
옥좌 아래에는 왕비의 드레스가 떨어져 있었다.
옷의 주인이 보채듯 말했다.
“마왕님. 어서…. 몸이 식기 전에.”
“내가 다 잘못했다! 요정왕 녀석이 하도 마누라 자랑을 일삼기에 심기가 불편해져서 납치해봤다. 집에 곱게 보내줄 테니 얼른 가라.”
“너무 늦었어요.”
“안 늦었다. 우리는 손만 잡아봤다.”
“아니요. 당신의 그것을 알게 된 저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마저도 포로가 돼버렸답니다. 그러니 얼른….”
계속 듣고 있으려니 화가 솟구쳤다.
▶공감: 맞아요! 불쌍한 요정 왕비님! 저열한 욕망에 지배받을 만큼 타락하다니! 저 마왕은 정말 사악한….
할 거면 빨리하던가!
▶경악: 엣?! 분노한 이유가 그건가요!?
답답해서 더는 못 기다려주겠다.
쾅!
“요, 용사?! 어제 소환된 용사가 어째서 여기에…!”
“당연히 내 발로 왔지!”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