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화
[5회차] 졸업생 페스티벌
마왕의 방 주변에는 다른 악마가 없었다. 종족의 벽을 뛰어넘은 남녀의 밀회를 훔쳐볼 만큼 눈치 없진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내 기습은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
더없이 완벽한 타이밍.
“아줌마는 빠져!”
옥좌까지 단숨에 돌진 후, 마왕의 허벅지에 앉아있는 요정 왕비의 탱탱한 궁둥이를 힘껏 걷어차서 옆으로 치웠다.
“꺅?!”
걸리적거리는 방해꾼이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건,
“커억-?!”
푹!
나는 성검2의 칼끝을 무방비상태에 놓인 마왕 페도나르의 가슴 깊숙이 찔러 넣어줬다.
1레벨로 급락한 마왕은 피하긴커녕 옥좌에서 일어서지조차 못했다.
내 노림수가 제대로 먹혀든 셈.
“용사가 비겁하게 암살을…! 쿨럭!”
페도나르는 자기 죽음보다도 내 용사다움에 경악한 듯했다.
“이런 걸 전술적 승리라고 부르지! 놀랐어?”
“......”
하지만 이미 숨이 멎은 마왕은 대꾸하지 못했다. 1레벨로 하락하면서 생명력과 회복력마저 깎인 탓이다.
“하으응…. 이게 대체….”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며 요염하게 일어서는 요정왕 마누라는 무시했다. 지금은 남의 여자에 눈독 들일 때가 아니었다.
자, 어서!
▷용사님. 모험은 즐거우셨나요?
채점이 바로 시작됐다.
▷진정한 용사의 길은 실로 험난합니다. 하지만 꿈과 희망을 잃지 않은 당신을 응원해준 수많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우정과 사랑을 배우며 함께 성장한 당신은 마침내 사악한 마왕을 처치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인간적으로 이건 너무 성의 없는 게 아닐까?
4회차에선 인연이 전혀 없었거늘.
▷지금부터 성적을 알아볼까요?
하지만 나는 웃는 얼굴로 대범하게 넘어갔다.
내 계산대로라면, 이번에는 확실하게 졸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채점자에게 꼬투리 잡힐 부분이 전혀 없다.
자! 얼른 성적표 까봐. 얼른~
▷성적표를 꼼꼼히 확인해주세요!
성적표
이름 강한수
전투력 업적 평판 인성
C+ SSS C C
비고 재시험이 낳은 괴물인가…?
괴물이라니. 섭섭하게.
지능적인 학생이라고 불러주면 좋겠다.
1레벨이라서 전투력이 낮게 책정된 게 유일한 흠이지만, 딱히 문제 될 수준은 아니었다.
어차피 평균성적으로 졸업이 결정되는 게 아니다.
각 과목의 성적이 최소기준만 넘기면 끝.
대학입시랑 똑같다.
목표로 하는 대학이 요구하는 등급만 받으면 된다.
물론, 대학입시는 수험생들 간의 경쟁 탓에 턱걸이는 불안하지만, 내가 보는 이 시험은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합격했습니다.
예상대로의 결과가 나왔다.
“드디어…!”
이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를 탈출해서 집에 갈 수 있게 됐다.
주르륵.
감격의 눈물이 앞을 가렸다.
코도 찡해지면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하! 너무 길었잖아!”
대충 11년쯤 이곳에 갇혀 있었다.
지구로 돌아가면 부모님께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사악한 외계인들의 실험실에 납치당했다고?
당장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건 돌아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
▶축하: 강한수 생도님! 축하드려요! 저는 아무것도 도운 게 없어서 이 말밖에 전하질 못하지만, 제 일처럼 정말 기쁩니다! 졸업을 정말 축하드려요!
무슨 소리. 교생 아가씨도 도움 됐어.
도덕 선생처럼 잔소리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빵긋: 교생실습 하루 만에 실적이 생길 줄은 몰랐어요! 동료들이 알면 엄청 부러워할 거예요. 강한수 생도님께는 뭐라고 감사드려야 좋을지…. 아! 혹시라도 사회에서 만나게 되면, 그때는 친구가 되어드릴게요. 약속합니다!
그래. 그냥 친구 말고 비밀 친구다?
교생 아가씨가 훌륭한 선생이 되길 빌어줄게.
▷교직원 일동이 당신의 건승에 전율합니다.
내 치밀한 시험전략에 교직원들도 놀란 모양이다.
시험은 이렇게 보는 거다.
“이봐! 교직원 일동. 듣고 있어? 그동안 함께해서 스트레스였고, 우연히라도 다시 만나지 말자!”
▷졸업을 축하합니다.
▷상장: 위 학생은 평소 모험을 성실히 하고 바른 선행을 스스로 실천하였습니다. 또한, 항상 동료들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모습으로 판타지아 원주민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에 위 학생을 B급 용사로 임명합니다.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맙소사!
상장 수여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성의 없는 복사&붙여넣기 냄새가 짙었다. B급 용사란 표현도 거슬렸다.
그러나 내가 목표로 했던 판타지 탈출이 달성됐기에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훌쩍: 괜스레 눈물이 나오네요.
교생 아가씨는 울보로구먼!
도덕 선생보다는 인간적이라서 마음에 드네.
파아앗--
어머니의 자궁처럼 따스한 빛이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회귀할 때하고 별 차이 없는 것 같지만….
기분 탓일 것이다.
지구 양! 이제 만나러 갑니다!
*
나는 정신이 들자마자 주변부터 살폈다.
“...동굴인가?”
내가 눈을 뜬 장소는 어두컴컴한 방이었다.
바위를 깎아서 만든 듯한 원시적인 옥좌에 앉은 채, 미미한 빛이 새어드는 출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를 힐끔 둘러보니, 정면의 터널 외에는 길이 없었다. 노골적으로 “손님. 출구는 저쪽입니다.”라고 안내하는 듯했다.
우선, 가장 중요한 내 몸부터 살폈다.
팔다리의 움직임은 멀쩡했다.
시각, 청각, 후각 등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다음으로는 능력치.
▷종족: 아크 휴먼
▷레벨: 1
▷직업: 무직(경험치 110%)
▷스킬: 통역A ■■E
▷상태: 양호
나는 직업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째선지 ‘용사’가 사라졌다.
“맙소사! 무직. 백수가 됐잖아? 용사로 임명한다더니, 졸업생에게 취업은 시켜주지 못할망정 있던 것도 빼앗네. 이게 무슨 횡포래.”
하지만 괜찮다.
직업 용사가 지나치게 사기적이었을 뿐, 괜찮은 직업은 많다.
암살자, 투사, 추적자, 검객, 도적, 간웅...
전문가라는 측면에서 보면 용사보다도 낫다.
내가 가정했던 최악은 능력치가 ‘개꿈’처럼 사라지는 상황. 거기에 비하면 이건 상정범위 안이다.
현재, 내 복장은 후줄근한 갈색 면티와 면바지뿐이었다.
놀랍게도 속옷조차 입고 있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빈손이고, 호주머니에는 기초생활자금조차 안 들어있었다.
즉, 가난한 백수.
“허! 거참! 판타지 신(神)은 양심도 없나? 졸업선물 하나 안 주고 싹 압수하다니.”
가볍게 불평을 늘어놓은 나는 옥좌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블랙박스를 활성화했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1
▷직업: 무직(경험치 110%)
▷스킬: 패기SSS 마기SSS 몰살SS 혼돈SS 파괴SS···
▷상태: 양호, 성검
스킬 SSS등급, SS등급, S등급.
능력치가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아름답게 채워졌다.
탁.
성검2도 별다른 제약 없이 소환됐다. 스킬 효과를 증폭해주는 기능도 그대로였다.
육체의 업그레이드도 금방 끝났다.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의 서바이벌에 특화된 전투민족으로 다시 태어났다.
튼튼하고, 유연하며, 영민하게.
“귀환준비 끝.”
감출 수 없는 기대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제, 동굴 밖으로 나가서 지구의 삶을 만끽하기만 하면 된다. 가장 먼저 부모님부터 찾아뵙고 밀린 영화와 드라마를 몰아보자.
할 일들이 태산이다.
곧바로 어두운 동굴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여긴 100번 양보하더라도 지구가 아닌데…?”
확 트인 경치를 쓱 둘러본 나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아니면 내가 없던 11년 사이에 지구의 환경이 급변한 걸까?
고층빌딩처럼 거대한 나무의 숲.
지구에는 이런 품종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에 떠 있는 2개의 달.
달이 새끼를 쳤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야! 교직원! 또 무슨 지랄인데. 당장 설명해!”
정말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류됐습니다.
▷사유: 출제자가 의도하지 않은 수단과 방법으로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졸업자 명단에는 등록되지만, 시험을 올바른 양식으로 통과할 때까지 실질적인 졸업은 보류됩니다.
▷비고: 같은 꼼수는 이제 안 통해. 알간?
알긴 뭘 알아, 등신아.
이걸 꼼수, 부정행위라고 우기는 네 철면피나 뚫어라.
자기들이 채점 기준과 시험을 엉터리로 만들어놓고 학생 탓으로 돌린다. 인성과 양심이 FFF학점 수준이다.
“그나저나, 여긴 대체 어디야?”
정상적으로 회귀했다면 “환영합니다, 용사님!”이라고 지껄였을 라누벨과 차원이동 마법진이 보이지 않았다.
“이봐요! 여기 처음이세요?”
그 대신, 초면의 여자가 대뜸 내게 접근하며 묻는다.
깔끔히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나는 멈칫했다.
뭐지? 이 여자.
나는 말을 걸어온 여자를 다시금 관찰했다.
예쁘장한 얼굴에는 옅은 화장기가 있었고, 복장과 액세서리는 촌스러운 판타지가 아닌 현대 지구의 세련된 디자인과 소재를 사용했다.
지크처럼 소환된 용사일까?
나는 그녀의 능력치를 빠르게 훑었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496
▷직업: 전사(위기→투기↑)
▷스킬: 통역A 회피D 투기D 검술E 재생E…
▷상태: 강화, 축복, 도핑
1레벨이 아니고, 직업 또한 ‘용사’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잘못 본 걸까?
정보가 필요했다.
“말씀처럼 처음입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서 무척 혼란스럽고요. 아름다운 숙녀분. 초면에 실례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제가 가르쳐줄 수 있을까요? 사례는 꼭 하겠습니다.”
나는 신사들의 언어로 소통을 시도해봤다.
“네. 여기는 말이죠…. 얍!”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설명해줄 것 같았던 여자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으면서 내 목을 찔러왔다.
푹!
하지만 내가 더 빨랐다.
상체를 숙이면서 성검2를 소환한 후, 늘씬하게 뻗은 여자의 두 다리의 발목을 싹둑 잘랐다.
“꺅- 푸하…!?”
나는 여자의 비명이 크게 터지기 직전, 신발 없는 맨발로 그녀의 가슴을 힘껏 밟았다.
폐의 공기가 빠지며 무음(無音)으로 그쳤다.
그걸로 상황은 종료.
나는 이 여자가 친근한 얼굴로 접근할 때부터 눈치챘다.
내게는 매우 낯익은 표정이었기 탓이다.
신성제국의 황녀.
미인계와 눈물로 용사 파티를 현혹하고, 끝끝내 신성제국의 여황제까지 오른 그녀랑 똑같았다.
나는 짓누르고 있던 여자의 가슴에서 발을 떼며 말했다
“네 창자로 주둥이를 틀어막기 전에 닥쳐.”
“......”
바로 얌전해졌다.
“예쁜 쌍년아. 다시 물을게. 여긴 어디니? 내가 나쁜 말로 할 때, 대답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을 거야.”
“포, 포기.”
겁에 질린 여자가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래. 우리는 아직 초면이었지? 일단은 몸으로 대화한 후에 다시 이야기를 진행- 어?!”
뿅!
내 눈앞에서 피투성이 여자가 대뜸 사라졌다. 온라인게임의 ‘접속종료’처럼 아무런 징조도 없이 깔끔하게.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일까?
친절하게 설명해줄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했다. 도덕 선생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다.
▷교직원 일동이 당신의 복학에 식겁합니다.
▷전문교사가 파견됩니다.
▷전문교사가 파견됩니다.
▷전문교사가 파견됩니다.
▷파견할 전문교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정말로 내민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농담과 진담을 구분 못 하는 걸까?
▶깜짝: 안녕하세요! 강한수 생도님. 금방 또 뵙네요! 졸업이 보류됐다는 소식을 막 들었어요. 무척 속상하시죠? 그래도 다시 힘내보도록 해요. 제가 곁에서 응원할게요!
환영해. 교생 아가씨.
내 4회차 입학식부터 졸업식까지 함께한 우리 사이에 가식적인 겉치레는 필요 없다고 본다. 우리는 좋은 친구다.
어때? 내 말이 틀렸어?
▶난감: 그렇게 말씀하시니 엄청 길게 들리는데요. 고작 하루인데…. 하지만 맞아요! 인연의 깊이는 시간으로 잴 수 없죠. 하지만 친구는 너무 성급한 감이...
어허! 교생 아가씨. 벌써 약속을 잊었어?
나도 이제 졸업생이야. 사회인이라구?
▶수긍: 맞네요. 약속했었죠. 사회에서 다시 만나면 친구가 되기로...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날 줄은 몰랐지만요.
역시! 말귀가 잘 통하는 교생 아가씨답다.
나는 숲을 가리키며 질문했다.
“여긴 어디야?”
조금 전에 마주친 여자의 복장은 딱 지구인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구가 아니다.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의 “환영합니다, 용사님!”으로 시작하는 단순한 회귀, 재시험이 아니란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
교생 아가씨가 거침없이 답했다.
▶설명: 안타깝게 보류되긴 했지만, 강한수 생도님도 엄연한 졸업생이니까요. 딱 좋은 시기에 졸업하셨어요. 듣고 놀라지 마세요. 짜잔! 이곳은 졸업생들만 들어올 수 있는 축제의 장이랍니다!
동문회 비슷한 걸까?
불길한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소개: 강한수 생도님! 용사 페스티벌에 어서 오세요! 다양한 이벤트와 먹거리가 준비되어있고, 축제에 참여한 모든 졸업생을 무찌른 우승자에게는 푸짐한 상품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무찔러? 다 죽이란 소리?
▶식겁: 방금처럼 포기시켜도 돼요! 그리고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했네요. 전부 무찌를 필요는 없어요. 상품은 마지막까지 생존한 3명에게 골고루 수여되거든요. 그러니 셋이서 파티를 맺고 사랑과 우정의 힘으로…. 강한수 생도님? 듣고 계세요?
응. 귀 씻고 경청 중이야, 교생 아가씨.
용사 페스티벌.
상품 3인분을 전부 먹으려면, 나를 제외한 마지막 3명을 동시에 처리해야 한다.
▶당혹: 어, 어떻게 그런 해석이…?
조언 고마워, 비밀 친구.
몰랐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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