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화
[5회차] Fire in the hole...!
나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남동쪽으로 쭉 달렸다. 남서쪽에서도 뭔가 날아드는 듯했지만, 전부 기분 탓이다.
▶버럭: 남동풍이 어때서요!
교생 아가씨. 누가 뭐래?
용사 페스티벌이 벌어지는 대륙의 지형은 뭐든 큼직큼직했다.
나무, 풀, 돌멩이, 연못, 개울...
이벤트 인어를 만났던 옹달샘만 해도 그렇다.
선녀가 옷 벗고 목욕할 것 같은 아담한 냉탕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 옹달샘은 수영시합을 해도 될 면적이었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느티나무도 그러했다.
엄청 컸다.
전설의 바벨탑처럼 굵고 높다.
짙은 안개와 나뭇가지에 가려져서 위쪽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두꺼운 나무기둥의 울퉁불퉁한 껍질에 매미처럼 달라붙은 사람들은 포착할 수 있었다.
“다 저리 꺼져!”
“밀지 말라고! 헉!”
“으아아아~?!”
사람들은 느티나무의 가파른 나무기둥을 오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우정과 사랑이 넘치는 협동하곤 거리가 멀었다.
서로 밀치고 공격하는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저 나무의 꼭대기에 대단한 무언가가 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덥석!
“켁- 케켁?!”
지나가던 행인1의 목을 잡고 물어보기로 했다.
“머리 빨갛게 물들인 형씨. 하나만 좀 물어봅시다. 저 위에 뭐가 있기에 저리들 올라가려고 아등바등하는 겁니까?”
그가 말할 수 있도록 목을 쥔 손아귀의 힘을 살짝 풀었다.
숨통이 트인 행인1이 답했다.
“콜록콜록! 이 미친 새끼야! 내가 가르쳐줄 것 같-”
“어이쿠!”
우득!
손이 미끄러졌다.
그 바람에 목이 부러진 행인1은 옷가지와 소지품을 남기고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덤으로 경험치도.
나는 새로운 행인2를 물색했다.
이번에는 손이 미끄러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실례합니다. 짧은 치마 아래로 발칙한 속옷이 보이는 아가씨. 못 들은 척하지 말고 이쪽을 보는 편이 신상에 적당히 나쁠 겁니다.”
“히익?! 네네!”
“자, 그러면 하나만 좀 물어봅시다. 저 위에 뭐가-”
“요정왕의 눈물이요!”
행인2가 내 말을 자르며 잽싸게 대답했다. 그녀는 내가 행인1이랑 대화하는 걸 들은 모양이다.
요정왕의 눈물.
인간혐오가 극에 달한 경험치 덩어리의 눈물이 아니다. 시커먼 사내새끼의 눈물 따위는 줘도 안 갖는다.
이것은 엘브하임 왕국의 3대 비보 중 하나다.
▶참고: 모조품이긴 하지만요.
축제에 진품을 놓을 순 없다고 교생 아가씨가 덧붙였다.
아무튼,
요정왕의 눈물은 영약이다.
영원한 생명을 사는 요정 왕족이 태어날 때, 함께 흘러나오는 특별한 양수(羊水)를 버리지 않고 가공한 것이다.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만병통치약!
하지만 아크 엘프는 출산율이 극악인 생물이라, 요정왕의 눈물을 만드는 양수 또한 대단히 귀했다.
그렇기에 엘브하임의 3대 비보.
요정들이 필사적으로 요정왕의 눈물을 지키는 이유다.
“인간의 침입을 저지하세요!”
“성소(聖所)로 못 올라오게 막아!”
“화살을 아끼지 마십시오!”
거대한 느티나무에 셀 수 없이 많은 요정이 잠복해있었다. 그들은 나무를 오르는 인간에게 가차 없이 활을 쏘았다.
푱! 푱! 푱--!
“아악?! 내 눈-!”
“화살이 너무 많아!”
사람들이 요정의 화살에 맞고 나무 아래로 추락했다.
나는 이때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으아 아으···.”
여기, 추락해서 죽어가는 불우한 인간A가 있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586
▷직업: 마법사(나이→마력↑)
▷스킬: 통역A 마법C 정령D 축복E 매력E···
▷상태: 중독, 출혈, 골절
인간A는 마법사인데도 비행마법 하나 제대로 못 쓰고 땅에 떨어졌다. 화살촉에 묻은 독 때문이란 건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귀엽게 생긴 인간B가 다가온다.
“치료해드릴게요!”
인간B의 손에서 쏘아진 따스한 빛이 인간A의 몸에 스며든다.
뼈가 튀어나올 만큼 끔찍했던 부상이 단숨에 치료된다.
그리고,
▷종족: 아크 휴먼
▷레벨: 581
▷직업: 마법사(나이→마력↑)
▷스킬: 통역A 마법C 정령D 축복E 매력E···
▷상태: 양호
5레벨이나 하락했다!
만약, 인간B가 내게 저런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다면, 죽을 때까지 허리디스크로 고통받으며 속죄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A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떨어진 자기 레벨은 신경 쓰지 않고 인간B에게 고마워했다.
치료비로 막대한 경험치를 줘놓고 뭘 감사해?
이해되지 않았다.
“별말씀을요. 무운을 빌게요.”
하지만 그걸 또 당연하게 받아들인 인간B는 영업용 미소로 인간A를 배웅했다. 얼른 다시 싸우다가 다치라고 등을 떠민다.
▶감동: 멋진 협력체계죠?
교생 아가씨. 두 번 멋졌다간 사람 잡겠던데?
대단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래서 졸업생들의 레벨이 낮았던 거군···.”
졸업하면 직업과 성검만 반납한다.
능력치의 핵심인 레벨, 스킬은 그대로 유지된다.
그런데 웬걸?
졸업자들 상태가 전부 엉망이었다.
스킬은 용사가 아니게 돼서 그렇다고 치더라도, 999레벨조차 안 되는 낮은 레벨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그 협력체계를 보고 깨달았다.
“허! 지크 같은 연놈들이 사방에 널렸네!”
모험을 떠났더니 약해지는 놀라운 마법!
인간B에게만 좋은 일 해줬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999+
▷직업: 치유사(나이→치유↑)
▷스킬: 치유SS 통역A 매력B 건강B 영업C···
▷상태: 양호
치유에만 특화된 능력치!
싸우면 싸울수록 레벨이 하락하는 전투직종이랑 달리, 안전한 후방에서 경험치를 수확해온 인간B의 레벨은 정상이었다.
인간B만 그런 게 아니었다.
“치료해드릴게요!”
“환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갑니다!”
“아프시죠? 조금만 참으세요!”
군의관처럼 뛰어다니는 999레벨 치유사가 여럿 보였다.
환자보다 더 많은 것 같다.
“...꼴값들 하고 있네.”
탁.
성검2를 소환했다.
나는 이 야만적인 세계를 탈출하고자 11년이나 굴렀다. 그런데 졸업생이란 연놈들의 꼬락서니는 내 상상을 초월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간 노력했던 걸까?
이들보다 내가 못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니 배제하겠다.
휙- 휙- 휙-
의사와 환자가 몰려있는 곳을 향해 성검2를 휘둘렀다.
상대가 999레벨이라도 상관없다.
맷집 같은 방어계통 스킬 없이 치유만 무식하게 올린 ‘종이몸’을 썰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몰살SS로 스키장 면적을 난도질했다.
“크어어억?!”
“무, 무슨 일이- 컥?!”
“꺄악?!”
요정왕의 눈물을 쟁취하는 이벤트가 한창 진행 중인 나무 밑동. 그 일대가 인간들의 피와 살점으로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 참혹한 광경도 잠깐뿐이었다.
뿅! 뿅! 뿅! 뿅!
죽음 판정을 받은 졸업생들이 축제에서 추방됐다.
“포, 포기!”
“포기!”
“힉?! 포기요!”
뿅! 뿅! 뿅! 뿅!
운 좋게 몰살SS 범위를 벗어났거나 견뎌낸 자들도 빠르게 ‘포기’를 외치면서 퇴장했다.
바글바글했던 이벤트 장소가 한산해졌다.
▶황망: 먼지들이 남동풍에 싹 쓸려갔네요···.
오! 교생 아가씨. 운치 있는 표현이야.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376
▷직업: 도적(약자→행운↑)
▷스킬: 패기SSS 마기SSS 몰살SS 혼돈SS 파괴SS···
▷상태: 광폭, 광란, 광기, 성검
특색 없는 용사 특전은 이제 필요 없다. 5배로 열심히 사냥하면 레벨은 금방 오르기 때문이다.
상태는 사소한 문제니 신경 쓸 거 없다.
이제, 요정왕의 눈물을···.
“당신은 누구십니까?”
촤악-
지척에서 들려온 신사적인 청년의 목소리에, 나는 자동반사처럼 성검2를 휘둘렀다.
살짝 풀어졌던 긴장을 다시 끌어올렸다.
‘내가 인기척을 놓쳤다고···?’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있는 이곳은 보통이 아니었다.
용사 페스티벌.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린 용사들을 몰아넣은 축제의 장이다. 전투력이 우수한 용사가 하나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정말로 그랬다.
내 공격을 피해낸 그자는 먼지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이었다.
▷종족: 그랜드 휴먼
▷레벨: 999+
▷직업: 군주(신하→만능↑)
▷스킬: 검술SSS 신성SS 통솔SS 맷집S 면역S···
▷상태: 성좌, 축복, 마검, 도핑, 가호
능력치마저 놀라웠다.
내 1회차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스킬의 향연. 어떻게 저 많은 스킬의 숙련도를 ‘용사’ 없이 유지 중인지 신기할 지경이다.
해답은 아마 ‘만능’에 있겠지.
여기에 ‘그랜드 휴먼’이란 종족도 신경 쓰였다.
내가 모르는 종족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넌 누군데?”
“하하! 재미있는 분이군요. 제 얼굴을 모른다니. 졸업한 지 얼마 안 됐다는 걸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날뛸 리 없지요! 여기는 당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가 아닙니다. 규칙과 질서로 유지되지요. 또한, 처벌도 있습니다.”
툭.
운을 뗀 남자가 청동색의 고풍스러운 검 한 자루를 소환했다.
그의 상태에 표시되어있던 ‘마검’이었다.
내게도 그 검은 무척 낯이 익었다.
“그건, 검왕 알렉스 전용무기잖아···?”
검왕의 허리춤에 늘 연인처럼 따라다니던 마검이다.
성마검(聖魔劒) 소드마스타!
검술에 미쳐 살다가 정말로 미쳐버린 수호자 ‘검신(劒神)’을 순수한 검술로 쓰러트리면 획득할 수 있다.
분하게도 나는 얻지 못했다.
한 분야를 통달한 미친 재능이 내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하! 저는 특별하···.”
푸확-
잘생긴 그자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말 많은 남자는 질색이다.
그렇지?
▶난감: 무기째 베어버리셨네요? 저러면 뛰어난 검술도 소용없죠. 당한 신사분은 무척 황당하고 억울하겠지만요.
헹! 억울하면 성검2보다 좋은 무기를 쓰던가!
“꺅?! 김만천 님~?!”
“우리 길드마스터가 일격에-?!”
“뭐? 검성(劒星)이 당했다고?!”
“맙소사! 김만천 씨가···!”
근처에서 기웃거리던 구경꾼들이 호들갑 떨었다.
젊고 예쁜 여성의 비율이 극단적으로 높아 보이는 건, 절대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낭만을 아는 군주로구먼?
그게 네 패배요인이다! 군주A!
“여러분~ 축제는 즐거우셨나요? 이제 배턴터치하고 집에 돌아가서 잘 시간~♪”
*
싫다고 떼쓰는 구경꾼들을 예쁘게 달래서 전부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가고 싶어도 못 가거늘.
집의 소중함을 모르는 바보들이다.
얘가 마지막이다.
“김만천 님이 절대로 널 용서하지 않으실- 꺄읔?!”
앙칼진 목소리로 따분한 복수극을 예고하는 처자의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를 예쁘게 베어줬다.
“응. 사랑하는 임에게로 꺼져.”
“개새-”
뿅!
여성들은 잘록한 허리와 뽀얀 허벅지를 훤히 드러낸 복장들이 두드러지게 많았다. 검은색 망사스타킹과 가터벨트의 선정 비율도 높았다.
군주A의 취향이 반영된 코디일까?
방어가 허술해서 베기 편했다.
“그래도 뭐 좀 걸쳐줬으면 좋겠단 말이지. 사람 깔보는 건가? 설마, 실전과 코스프레를 구분 못 해서?”
뭐, 아무튼.
거대한 나무 주변이 한산해졌다.
▶한숨: 선배가 이 휑한 광경을 보면 울어버릴지도 몰라요. 요정왕의 눈물 쟁탈전 이벤트를 준비한다고 정말 열심히 뛰셨는데···.
교생 아가씨. 그렇게 안타까워할 필요 없어.
이 이벤트는 내가 접수할 테니까.
“멈춰라! 인간!”
“더 접근하면···. 에잇!”
피용-!
느긋하게 나무를 오르는 내게 요정이 화살을 쏘았다. 단순한 위협시위가 아닌 살상을 목적으로.
하지만 나는 화살을 피하거나 막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종류: 스킬
▷명칭: 행운(++)
▷등급: B(++)
▷A: 우주의 기운이 가끔 돕는다.
▷B: 함정을 항상 무시한다. (++)
▷C: 운이 엄청 상승한다. (++)
▷D: 추락해도 안전하다. (++)
▷E: 눈먼 화살을 전부 피한다. (++)
▷F: 운이 좋아진다.
행운B의 가호를 받는 내게는 화살촉이 닿지 않았다.
“저 인간을 쏴라!”
“전 부대 사격 개시!”
“보물을 지켜라!”
거대한 느티나무 곳곳에 잠복해있던 수천의 난폭한 요정들이 화살을 쏴대기 시작했다.
숑! 숑! 숑! 숑!
그러나 나는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다.
모든 화살이 거짓말처럼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강풍으로 경로가 휘거나, 화살끼리 도중에 충돌하며 무산됐다.
활대가 부러지거나 활줄이 끊어지기도 했다.
안 맞는 이유도 참 다양했다.
“흥~ 흐응~♬”
요정왕의 눈물이 보관된 장소까지 무혈입성(無血入城).
행운이 팍팍 터지면서 숙련도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내 직업이 ‘용사’였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행운B→행운A
우주의 기운이 내 몸에 깃들었다.
▶애도: 선배님. 당신의 이벤트가 이상해지고 있어요···.
퐁.
나는 요정왕의 눈물이 든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 마셨다. 모조품이긴 해도 효과가 제법 상당했다.
“...음?”
저건 뭐지?
이쪽으로 빠르게 떨어지는 거대한 무언가···.
콰아아앙-!
요정들이 깔짝대는 느티나무 위로 운석이 떨어졌다. 이벤트 장소와 관계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주의 기운이 굉장했다!
▶묵념: 선배님···.
교생 아가씨. 기도 좀 빨리 끝내주지 않을래?
나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불타서 사라진 대지를 보고 있었다. 뿌리 아래쪽으로 향하는 비밀통로 같은 게 눈에 띄었다.
이벤트의 연장선인 걸까?
▶곤혹: 글쎄요. 축제 준비가 번거롭다면서 모든 요정을 궁수로 배치한 선배인걸요. 이렇게 치밀한 설정을 짜뒀을 리가···.
“그래···?”
나는 시커먼 구덩이로 냉큼 뛰어내렸다.
우주의 기운을 믿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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