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40화 (40/430)

 040화

[5회차] 내가 용사 경력 11년이야!

나는 새까만 구덩이 아래로 하염없이 떨어졌다. 낙하산을 깜빡하고 뛰어내린 스카이다이버가 된 기분.

착.

그래도 무사히 밑바닥에 착지했다. 내 육체 성능이 우수하기도 했지만, 행운 D등급의 ‘추락해도 안전하다.’ 효과가 가장 컸다.

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보았다.

여기가 땅속이란 게 믿기지 않은 넓은 공터에 세워진 웅장한 건축물.

이건, 궁궐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 위쪽에 심어진 거대한 느티나무가 짓누르는 모양새였다. 나무뿌리는 궁궐 내부로 침식해서 벽의 균열을 넓히고.

하지만 내 관심을 끈 부분은 이게 아니었다.

“묘하게 친숙한 궁궐 디자인이네.”

내가 판타지아 대륙에서 보아온 다양한 종족과 수많은 문화의 건축양식 중에는 이런 느낌이 없었다.

이것은 지구 동양의 멋이었던 탓이다.

대한민국 경복궁, 일본 히메지성, 중국 자금성···.

지붕의 기왓장부터 병풍, 창문, 벽화에 이르기까지, 이것저것 좋다는 건 다 가져다가 버무려놓은 느낌이다.

아니면 그 반대일까?

여기가 원조고 지구가 짝퉁?

뭐가 됐든 간에 이걸 보자마자 촉이 왔다.

“세계의 비밀이나 진실을 찾는 여행은 질렸는데···.”

용사 경력 11년 차.

별 시답잖은 진실을 파헤치는 삽질을 많이 해봤다.

전설이나 신화란 단어로 거창하게 포장했지만, 막상 까놓고 보면 유치하거나 허무한 진실이 수두룩했다.

그 대표 격이 ‘전설의 용사’ 아니던가?

판타지 원주민들은 신에게 선택받은 용사가 굉장한 인간이라고 굳게 믿지만, 실상은 지구의 사회 부적응자들을 납치해서 재활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용사는 직업 특전과 성검 빼면 시체다.

나 빼고!

▶깜짝: 이런 거대한 건축물이 페스티벌 대륙 아래에 묻혀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어요!

어? 잠깐. 교생 아가씨도 이걸 모른다고?

▶긍정: 네. 전혀 몰랐어요.

절대적인 교직원 관계자조차 모르는 장소란다.

아직 정식교사가 아닌 임시교사라서 열람 못 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든 간에 수상하다는 건 틀림없다.

교직원도 모르거나 감춘 무엇.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조사할 가치는 충분했다.

“우선은 출입구부터 만들어볼까.”

벽을 힘껏 걷어찼다.

쾅-!

오래된 궁궐치고는 벽이 제법 튼튼했지만, 온갖 스킬로 강화된 내 각력(脚力)을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제법 좋은 입구가 만들어졌다.

▶당황: 강한수 생도님?! 입구는 저쪽에 버젓이 있는데요?!

쯧쯧. 교생 아가씨. 잘 들어. 그건 1차원적인 접근법이야.

자고로 도굴은 ‘용사’가 전문이다.

특히, 내 손에 걸리면 항아리 속 금화 한 닢까지 탈탈 털린다.

이처럼 오랫동안 방치된 유적일 경우, 입구에 멀쩡한 함정과 파수꾼이 덕지덕지 배치되어있기 마련.

굳이 내 발로 찾아갈 이유는 없었다.

“흥~ 흐응~♪”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따끈따끈한 새 입구로 궁궐에 입장했다.

시작부터 코앞에 갈림길 같은 게 보였다.

오른쪽과 왼쪽.

친절한 표지판은 없고, 좌우 대칭이라서 판단 기준으로 삼을 힌트나 실마리도 없었다.

빙빙 돌지 않을 확률은 반반.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고전적인 미궁 방식이로군?”

대박을 노리며 찾아온 방문객을 눈속임과 스트레스로 쓰러트리겠다는 제작자의 악의(惡意)가 절절히 느껴졌다.

나도 1회차 때 수없이 당해봤다.

▶조언: 인생은 크고 작은 선택의 연속이랍니다. 실패가 두려워서 망설인다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어요. 강한수 생도님. 용기를 내세요. 제가 곁에서 응원할게요!

고마워. 생기발랄한 교생 아가씨.

맞다. 그녀의 말대로다.

실패를 두려워해선 안 된다.

그런데 나는 굉장히 중요한 세계의 비밀을 간직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궁궐이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방금까지 걱정하며 망설였다.

지금부터라도 반성하자.

▶의문: 저기, 강한수 생도님? 무너진다는 건 대체···?

나는 성검2를 소환한 후, 행동으로 답을 대신했다.

슈우우웅--

성검2의 붉은색 칼날을 감싸기 시작한 시커먼 마기SSS. 그 기류를 중심으로 방대한 힘이 집결했다.

공격계열 스킬들이 중첩되면서 시너지의 시너지를 일으키고, 이걸 또 성검2가 증폭했다.

여기에 어째선지 ‘우주의 기운’마저 합류.

군주A와 잡것들을 사냥한 덕분에 레벨도 충분했다.

“이것이 내 선택이다.”

나는 성검2를 정면으로 찌르듯 내질렀다.

파아아앙-

일직선으로 뻗어가는 마기SSS.

그 새까만 기운은, 앞을 가로막는 궁궐의 벽과 유물 등을 불도저처럼 가차 없이 밀어버렸다.

펑! 쾅! 쿵! 팡!

수십 겹의 벽을 관통하며 넓은 터널이 생겼다.

나는 제3의 선택으로 떠나겠다.

▶당혹: 에···. 이것도 선택은 선택이네요. 이 궁궐을 건축한 기획자가 의도한 미지의 모험은 아니겠지만요···.

이봐. 교생 아가씨.

모험은 약자들이나 하는 거야.

미궁을 부순다는 정공법을 못 하는 연놈들이 도박처럼 “어떻게든 잘 될 거야.” 같은 막연한 희망에 매달리는 것이다.

딱, 지크 같은 사고방식이다.

“...그 자식은 지금쯤 어떻게 됐으려나?”

4회차가 시작되자마자 내게 턱주가리를 맞고 혼절한 지크. 곤히 자다가 5회차로 바로 넘어가서 당황하지 않았을까.

그건 좀 웃기겠네.

▶흐뭇: 아닌 척하지만, 강한수 생도님은 무척 자상하시네요. 동기를 걱정해주시다니. 우정은 날개 없는 사랑이라고···.

잠깐! 교생 아가씨!

▶대답: 네? 말씀하세요.

지크랑 우정? 사랑?

어디 가서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교직원 일동이 오해해서 지크랑 또 붙여주면, 내 혈압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교생 아가씨. 내 말 알아들었어?

똑바로 알아듣지 않으면 남자라고 소문낸다.

▶경악: 남자 아니래도요!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고.

용사는 도굴이 전문, 선동과 날조가 취미다.

*

나는 제3 통로를 따라서 신전 내부로 쭉쭉 들어갔다.

팔면 돈벌이 좀 될 것 같은 예술품과 골동품이 듬성듬성 보였지만, 페스티벌에서 얻은 것들은 외부로 유출할 수 없다고 해서 포기했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교생 아가씨 왈.

1) 레벨 경험치

2) 스킬 숙련도

3) 이벤트 상품

이 셋만은 계속 유지된다고 한다. 그렇기에 나는 자잘한 물욕을 포기하고 궁궐 심층부까지 빠르게 진격했다.

▶빼꼼: 너무 서두르시는 거 아니에요?

응. 서두르는 거 맞아.

궁궐의 동양적인 건축양식이 흥미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밖에서는 내 이벤트 상품을 노리는 먼지들이 부지런히 활동 중이다.

그 사실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여유 부릴 시간 따위 없다.

“행운 효과로 함정들을 무시하니 참 편하-”

철컥.

내 움직임을 감지한 장치가 작동했다.

어라? 이상하다.

함정을 무시해야 정상일 텐데?

그 원인을 분석해보니, 내 왼손이 오른손 모르게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쥐고 있었다.

왼손이 함정을 대놓고 건드려서 발동한 모양이다.

하하! 이 요망한 왼손 같으니.

“OwOw···!”

“OwOoow···!"

신전 여기저기에 배치된 쇠창살이 열리고, 몬스터 5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내게 덤벼들었다.

이쪽도 궁궐처럼 꽤 동양적으로 생겼다.

▷종족: 오우거

▷레벨: 947

▷직업: 투사(위기→투기↑)

▷스킬: 철권B 맹독B 투기C 광기C 불사D···

▷상태: 해동, 폭주, 흥분, 격노

오우거(Ogre).

토종닭처럼 구수하게 부르면, 도깨비.

놈은 이마에 뾰족한 뿔이 돋아난 인간형 몬스터다.

평균 신장은 5m. 팔다리는 드럼통처럼 굵직하고, 우락부락한 몸통은 덤프트럭을 연상시킨다.

영악한 트롤이랑 달리, 오우거는 굉장히 멍청하다.

전술이나 협력 같은 생각 자체가 없다.

대신, 타고난 전투본능과 육체는 모든 몬스터를 통틀어서 최상위권에 속한다.

취미는 식인(食人)이다.

“OwOw-!”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오우거가 전기밥솥 크기의 주먹을 내게 내질렀다.

“딱 봐도 축제용은 아니네.”

이놈들은 보통 오우거보다 강했다.

당장 레벨만 봐도, 오우거의 평균 300레벨을 아득히 웃돌고 있었다.

이 신전의 오우거 100마리만 지상에 풀어놓으면, 용사 페스티벌은 오우거 미식회로 탈바꿈할 것이다.

용사 바비큐, 용사 스튜, 용사 베이컨···.

그만큼 이 오우거들은 강했다.

서걱- 푸화악!

물론, 먼지들 기준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성검2로 가볍게 어루만져줬더니, 5마리 오우거가 양단되면서 먼지투성이 대지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Ow···.”

“OwOw···."

생명력이 질기기로도 유명한 오우거들은 하나둘 숨이 끊기며 경험치로 치환됐다.

나는 일일이 확인해보지 않고 빠르게 그곳을 지나갔다. 산책 중에 마주친 개미 때문에 멈출 필요는 없잖은가?

그렇게 3번쯤 방해받았을까.

내 경험과 직감이 목적지에 다 왔음을 알려줬다.

“여기로군.”

굳게 닫혀있는 웅장한 출입문의 장식부터 무척 호화찬란했다.

이 안쪽에 신전의 보물이나 보스가 있을 것이다.

▶제안: 강한수 생도님. 너무 성급한 판단 아닐까요?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가란 말이 있잖아요.

거참! 교생 아가씨. 내가 용사 경력 11년 차야.

도굴은 내 전문분야야. 알겠어?

▶삐죽: 네.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교생 아가씨가 믿질 못하는 듯하니, 가볍게 시범을 보여주기로 했다.

제자리에서 가볍게 점프, 점프.

“하나, 둘, 하나, 둘~♪”

리듬에 맞춰서 골반을 좌우로 흔들었다. 허리디스크가 오지 않도록 가볍게 허리를 풀어주는 운동이다.

그 뒤,

오른발을 뒤로 당겼다가 힘껏 내질렀다.

마왕 페도나르가 4회 연속으로 인정한 발차기. 그 위력과 퍼포먼스는 나무랄 곳이 없다.

쾅-!

거대한 문짝이 종잇장처럼 파괴됐다.

“헉! 누구냐!”

“빙고.”

방 안쪽에는 내 예상대로 보스가 있었다.

보스는 요정왕이랑 무척 닮은 얼굴의 요정 수컷이었다. 이미 유전자 단위에서부터 사악함이 좔좔 흘렀다.

내 11년 경력이 속삭였다.

저것은 악(惡)의 화신이 틀림없다고.

옥좌에 앉아있던 사악한 보스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그 검은 설마···!”

성검2를 아는 눈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가운 소식이다.

마왕 페도나르가 죽기 전에 “망룡왕에게 성검2를 보여줘라.”라는 의미심장한 떡밥을 남겼기 때문이다.

4회차에선 바로 마왕 잡고 끝.

그런데 엉뚱한 장소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했다.

“이 성검에 대해 알아?”

“물론! 매우 잘 알고 있소.”

“호오.”

“그런데 용사여. 어째서 여기까지 혼자 온 것이오. 궁궐 정문(正門)으로 마중 나간 짐의 여식을 보지 못- 꾸엑?!”

빡-!

나는 보스의 시선을 성검2로 유도한 후, 그의 갸름한 턱주가리를 힘껏 날려줬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베고! 찌르고! 떼리고!

“몰랐으면 진짜 위험할 뻔했네.”

“크, 크윽···. 용사여, 어째서 공격을···?”

왜냐고?

나는 보스의 말에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이와 비슷한 괴물이 또 있다는 것.

▷종족: 카오스 엘프

▷레벨: 999+

▷직업: 폐왕(명성=권위↓)

▷스킬: 정령SSS 궁술SS 망각SS 축복SS 인내SS···

▷상태: 봉인, 경악, 혼란, 공황, 충격

보스의 능력치다.

마누라를 마왕에게 빼앗긴 한심한 요정왕이랑 격이 달랐다.

둘이 비슷한 건 외모뿐.

보스의 스킬은 등급과 구성이 끔찍한 수준이었다. 방어계열 스킬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게 그나마 다행일까.

일대일이라면 해볼 만하다.

하지만 둘은 무리다.

그러니,

“닥치고 얼른 뒤져!”

궁궐 입구에 잠복해있다는 보스의 딸년이 눈치채기 전에 각개격파해야 한다.

“요, 용사여! 잠시만 대화를···!”

불리해진 보스가 평화적인 대화를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그의 평화제의에 마음이 약해지며 빈틈을 보이는 순간, 억울한 척하던 보스는 입 싹 닦고 반격해올 것이다.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다.

보스의 딸년이 돌아오는 중일지도 모른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내가 불리해진다.

▶혼란: 생활기록부를 대충 훑어보긴 했는데요. 강한수 생도님은 11년 동안 대체 어떤 경력을 쌓아온 건가요···?

나?

동료들의 기만과 통수 속에서 살아왔지!

“이젠 안 속아.”

“큭! 용사란 자가 어찌 이리도 성급할 수-”

털썩.

성검2에 심장을 관통당한 보스의 숨통이 끊어졌다.

레벨이 쭉쭉 올라갔다.

■■E→■■D

그리고 블랙박스도 승급했다.

“흐음. 비슷한 속성의 종족끼리 통하는 연관성이 있는 건가···?”

카오스 드래곤.

카오스 타이탄.

카오스 머메이드.

카오스 엘프.

이젠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등신들만 졸업시키는 판타지 신(神)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이건 조사해볼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좋을지···.

“아바마마. 지하감옥의 봉인을 푼 용사가 보이지 않···. 아바마마!?”

바로 조사할 수 있겠다.

4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