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화
[5회차] 보스의 딸 ⑮
나는 보스의 딸로 짐작되는 아가씨의 비탄 잠긴 목소리가 들려온 입구 쪽으로 몸을 돌린 후, 힘차게 도약했다.
우리에게 대화는 불필요했다.
변명할 생각도 없다.
나는 그녀의 친부를 살해한 철천지원수!
이해와 용서는 바라지 않는다.
정의로운 전쟁?
전쟁은 남의 가정과 평화를 파괴하는 쓰레기다.
용사는 그 쓰레기를 미화한 폐기물이고.
나는 보스의 딸이 가족의 죽음으로 충격받아서 한눈판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 기회를 살려서 성검2를 휘둘렀다.
휭-!
그러나 허공만 갈랐다.
“뭣-?”
요정은 연체동물 같은 움직임으로 내 기습을 피해냈다.
그녀의 가느다란 팔다리가 세련되게 흐느적거린다.
오장육부가 들어갈 자리나 있을지 의심스러운 개미허리는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휙휙 구부러진다.
음극과 음극, 양극과 양극.
같은 극의 자석처럼 성검2의 칼날과 요정의 피부는 닿지 않고 끊임없이 비껴갔다.
우리는 액션 영화를 찍는 게 아니다.
그저, 내 공격이 그녀에게 유효한 타격을 주지 못할 뿐.
그만큼 보스의 딸은 빠르고 유연하며 늘씬했다.
심지어 간간이 역습까지!
챙! 챙!
보스의 딸이 쓰는 무기는 레이피어였다.
레이피어는 칼날이 가벼워서 비실비실한 요정들이 애용하는 무기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요정은 진정 처음 보았다.
한 방! 딱 한 방이면 되거늘!
그 한 방 맞추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이거, 이상한데…?”
등골이 싸해진 나는 곧장 그녀의 능력치를 열람했다.
▷종족: 카오스 엘프
▷레벨: 999+
▷직업: 기사(충절→불굴↑)
▷스킬: 민첩SSS 오감SS 매력SS 불굴SS 검술SS···
▷상태: 봉인, 경악
보자마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민첩이 SSS등급이라고?
이 여자는 24시간, 365일 요가만 하며 살아온 걸까. 민첩이라고 해서 단순히 몸을 빠르게만 해주는 게 아니다.
관절도 유연하게 해준다.
하물며, 막대기 같은 육체를 타고난 요정들은 스킬이 없이도 상당히 유연한 편이었다.
잡을 곳도 없어서 흠이지만!
보스의 딸은 자기 종족의 특성을 극대화했다.
“당신이 정말로 용사?”
나머지 스킬들도 대충 훑던 중, 그녀가 불쑥 입술을 떼며 내게 질문했다.
나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러는 너는 해파리 같은데?”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탓일까.
이 요정의 머리카락은 은빛이 감도는 백색이고, 피부는 뽀얀 우윳빛을 넘어선 백광(白光)이었다.
여기에 몸이 흐느적거리기까지 하니….
솔직히 좀 징그러웠다.
“용사가 어째서 우리를 적대하는 거죠?”
“내가 더 약해서?”
대화는 대등할 때나 성립한다. 아니면 내가 더 강하던가. 그것이 나의 생존전략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논리….”
“이해를 바라진 않아.”
중간중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접전은 길어졌다.
요정의 회피 솜씨가 일품이기도 했지만, 그녀를 공격하는 내 모든 공격이 얕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보스의 딸을 죽여선 안 되기 때문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나는 보스를 죽였다.
내게 세계의 진실을 들려줄 수 있는 ‘이벤트 캐릭터’는 이제 눈앞의 요정 하나뿐.
여기까지 와서 허탕만 치고 갈 순 없었다.
그런데 그 제압이 무척 힘들었다.
요정의 팔다리를 잘라서 무력화하고 싶은데, 연체동물처럼 움직이는 팔다리는 내 성검2의 예리한 날에 닿아주질 않았다.
가장 면적이 넓은 몸통은?
이쪽은 내가 살짝만 건드려도 치명상으로 죽어버릴 것 같아서 베거나 찌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푹-
나는 의도적으로 요정의 레이피어에 찔려줬다.
레이피어의 얇은 칼날이 내 몸에 박혔지만, 행운이 팡팡 터지면서 중요한 장기와 힘줄은 전부 피했다.
즉, 피해는 미미했다.
불끈.
나는 그 상태에서 근육의 힘을 꽉 줬다.
생명과학의 힘으로 강화된 내 근섬유는 밀도가 매우 높은 편. 아무리 날카로운 명검이라도 잠깐이라면 붙잡아둘 수 있다.
“이런…!”
내 의도를 눈치챈 보스의 딸이 레이피어의 손잡이를 놨다.
그녀는 뒷걸음치며 빠르게 후퇴했다. 그리고 방 주위의 벽걸이에 장식된 다른 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도 그쯤은 예상했다.
젓가락질이 어렵다면 손으로 집어 먹으면 그만.
덥석!
이 요정이 빠르고 유연해서 날붙이로 벨 수 없다면, 빠져나갈 수 없도록 우악스럽게 붙잡아서 제압하면 된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담아서 외쳤다.
“드디어 잡았다, 요년!”
“꺅?!”
나는 활짝 벌린 양팔로 요정의 가녀린 몸을 끌어안았다. 절대로 놓치지 않기 위해 양손의 깍지까지 꼈다.
대굴대굴.
우리는 살과 살이 뒤엉킨 채로 바닥을 굴렀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요정의 민첩SSS가 발동했다. 생포했다고 확신했던 그녀의 몸이 뱀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사기 아닐까?
참기름을 바른 미꾸라지를 맨손으로 잡으려고 애쓰는 기분이다.
나는 바쁘게 팔다리를 움직이며 그녀의 탈출을 저지했다.
물론,
빡-!
“커읔-?!”
보스의 딸도 내게 마냥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고사리 같은 손을 앙증맞게 꽉 쥐고는 내 얼굴을 후려쳤다. 얼마나 세게 쳤던지 한 방에 코피가 터져버렸다.
호리호리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힘!
이 요정은 스킬보다도 레벨이 더 깡패였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만만치 않다.
나는 레벨보다 스킬 쪽이!
바로 복수해줬다.
퍽.
무릎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찍었다.
“윽!”
보스의 딸 입이 벌어지며 짧은 비명이 터졌다.
그러나 주술사 계열이었던 ‘폐왕’보다 압도적으로 몸이 튼튼한 ‘기사’의 움직임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반격할수록 약해지긴커녕 그녀의 저항만 더욱 거세졌다.
그렇다면,
나는 요정이 가장 민감한 부위를 공략하기로 했다.
텁, 텁.
양손으로 그녀의 뾰족한 귀를 붙잡았다.
“아응~?!”
요염한 비음을 흘리는 보스의 딸.
사람이라면 꿀밤 같은 벌칙 수준이지만, 요정에게 귀는 대단히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감각기관이다.
외부의 자극이 가해지면 정신이 하나도 없을 만큼.
그래서 요정을 고문할 때도 자주 쓰인다.
“항복해.”
“웃, 아읏….”
“후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쓰러진 요정의 잘록한 허리 위에 엉덩이 깔고 앉았다. 아무리 그녀가 강해도 귀가 잡힌 이상 끝난 거나 다름없다.
자! 어서 항복하시지!
“으, 아으- 얍!”
그렇게 으스대는 중에 들어온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았다.
“커엌?!”
이번에는 좀 센데?!
퍽! 퍽!
요정이 앙증맞게 쥔 주먹이 내 안면과 하복부를 각각 때렸다.
엔도르핀 덕분에 고통은 없었으나, 끔찍한 충격이 내 보물 1호를 강타했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이런 약점이···!
▶난감: 이건 누가 봐도 범죄의 현장인데요? 가해자는 당연히 강한수 생도님이고요.
교생 아가씨! 싸움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도 이젠 열 받았다.
턱! 턱!
양손을 요정의 귀에서 뺨으로 이동했다.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그녀의 얼굴을 꽉 붙잡서 고정한 후, 시원한 이마에 박치기했다.
빡-!
뼈 울리는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왔다.
열심히 바둥거리던 요정의 팔다리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제압 완료.
“우후후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 세계의 비밀을 물어볼까? 아니면 성검2부터? 몸으로 마저 대화한 후에 진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히익?! 안, 안 돼요!”
높은 레벨과 스킬의 회복력으로 뇌진탕에서 금방 회복된 보스의 딸이 오들오들 떨며 사양했다.
그러나 이전처럼 거세게 저항하진 않았다.
예민한 귀를 마구 만진 탓일까?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다.
“아가씨. 무슨 생각을 한 거야? 혹시...?
“아, 아니에요!”
“흐흐. 요정답지 않게 은근히 밝히네!”
“나, 나는 그저 책에서 본…. 으으….”
우리의 분위기가 살육에서 낭만으로 급전개됐다.
이 여자는 친아버지를 살해한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걸까?
고도의 미인계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때,
“크흠!”
우리의 뒤편에서 남성의 과장된 헛기침 같은 게 들려왔다.
목소리가 어째선지 낯이 익다.
나는 고개만 슬쩍 돌려서 얼굴만 확인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말도 안 돼! 분명히 죽었을 텐데…!”
보스가 무척 난감하다는 얼굴로 내 뒤편에 서 있었다.
확실하게 죽여서 경험치까지 먹었던 보스가 되살아나는 패턴은 처음 겪는 기사(奇事).
경험치는 곧 힘이기 때문이다.
힘이 깎인 상태로 부활해봐야 또 죽을 뿐.
하지만 이 보스는 되살아났다. 내가 베고 찌른 자국이 옷 여기저기에 상흔처럼 남아있으나, 그 안쪽의 맨살은 멀쩡했다.
그렇다면 능력치는 어떨까?
▷종족: 그랜드 엘프
▷레벨: 999+
▷직업: 주술사(축복=정령↑)
▷스킬: 정령SSS 궁술SS 망각SS 축복SS 인내SS···
▷상태: 봉인
미친!
보스는 직업이 바뀌면서 더 강해졌다.
내 기습으로 엉망진창이 됐던 상태도 회복했고, 종족이 ‘카오스’에서 ‘그랜드’로 바뀐 것도 큰 변수로 작용했다.
보스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먼저 입술을 뗐다.
“용사여. 이 지하감옥에선 누구도 죽지 않소.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되살아난다오.”
“여기가 지하감옥이라고?”
“그렇소. 이곳은 안식이 허락되지 않는 무간지옥. 이 위에 사는 동족의 선조들이 짐과 딸아이를 이곳에 가뒀다오. 부녀지간이라고 하나, 정말 힘든 인고의 시간이었지! 만약, 짐의 취향이 큰 게 아니었다면…. 크흠! 아무튼, 용사여! 이만 대화에 응해주지 않겠소?”
보스의 한결같은 태도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기만책인지는 당장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부활한 보스는 자기 딸이 공격받는 중에도 내 뒤통수를 노리지 않았다.
이것만은 확실한 진실.
내 1회차 동료들이랑 달랐다.
“...뭐, 좋아.”
안 그래도 궁금한 게 많던 참이다.
특히, 블랙박스에 대해 알고 싶었다.
▷종류: 스킬
▷명칭: ■■(+)
▷등급: D(+)
▷C: □□□ □□□□□.
▷D: 절대 혼동하지 않는다. (+)
▷E: 절대 파괴되지 않는다. (+)
▷F: 절대 망각하지 않는다. (+)
불확실한 주식에 전 재산을 쏟아붓는 건 위험하다.
이 블랙박스도 마찬가지.
놔둬도 알아서 잘 크는 중이지만, 교직원 일동과 채점자에게 치명적인 비수로 적용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간신히 제압해둔 보스 딸에게서 천천히 떨어졌다.
참으로 멀리도 돌아오고 말았다.
이게 다 망할 요정 부녀(父女) 탓이다.
▶황당: 강한수 생도님. 따져보면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평범하게 정문으로 들어왔다면 좋게 풀렸을 거라고요….
나는 승리자처럼 우쭐대는 교생 아가씨의 잔소리를 대충 흘려넘기며, 근처에 굴러다니는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보스. 이해하기 쉽게 핵심만 요약해서 부탁합니다.”
나는 진실을 들을 준비가 됐다.
“용사여. 짐의 이름은….”
“보스K. 서로 바쁜 몸이니 자기소개는 생략하고, 유익한 정보만 빠르게 교환하고 헤어집시다.”
보스K가 한숨을 푹 내쉬며 답했다.
“짐이 3대 요정왕으로서 영겁의 세월을 살아왔소만, 그대처럼 성급한 용사는 진정 처음 보오.”
“그래서 불만?”
“불만이라면….”
두드드드드-
갑자기 궁궐 전체가 흔들렸다.
보스K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넋두리했다.
“...없소, 현대의 용사여. 우리 때는 배려와 인내가 당연했었는데, 시대가 바뀐 모양이오.”
나도 그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순조로운 진행을 지연시키는 돌발이벤트.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보스K. 침입자가 온 건가?”
“그렇소. 용사여. 짐과 여식을 가둬둔 이 지하감옥의 봉인이 풀렸다는 것을 그들이 눈치챘소.”
“인칭대명사 쓰지 마라.”
이 야만인들은 설명의 기본이 안 되어있다.
“인칭- 뭐?”
“그들이 누군지 똑바로 말하라고.”
드디어 말귀를 알아들은 보스K가 원한 깃든 어조로 답했다.
“현대의 용사여. 이 시대에선 그들을 뭐라고 부르는지 짐은 모르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불렀소.”
그는 경멸을 담아서 그 이름을 말했다.
“천사(天使)라고.”
가장 길었던 내 1회차 모험 중에도 보지 못했던 불분명한 종족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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