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44화 (44/430)

 044화

[5회차] 오 나의 성자님!

▷종족: 아크 휴먼

▷레벨: 586

▷직업: 검객(체력=검술↑)

▷스킬: 통역A 기력B 체력B 매력C 검술D…

▷상태: 양호

동창A의 능력치.

내가 축제에서 마주친 수많은 졸업생의 능력치랑 비교하면, 동창A는 꽤 준수한 편에 속했다.

검객에게 가장 중요한 검술이 너무 낮은 거 아닐까?

하지만 이런 걱정은 솔직히 무의미했다. 스킬 최고등급이 D등급밖에 안 되는 용사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걸 고려하면, 동창A는 상위권 능력치라고 할 수 있었다.

“일단은 자리를 옮기자.”

“그래.”

우리(동창A 포함)는 탐스러운 열매들을 구경하기 바쁜 보스K를 질질 끌다시피 해서 도시 안쪽의 시장으로 이동했다.

어딜 가도 시끌벅적.

시작 도시는 판타지아 대륙의 도시랑 달랐다.

현대와 중세를 합쳐놓은 유럽의 관광도시 같은 분위기. 겉보기에는 좀 낡았으나, 편의시설과 첨단문물이 조화롭게 잘 갖추어져 있었다.

현대에 익숙해진 졸업생들을 배려한 걸까.

이걸 교직원 일동이 준비했다고?

▶우쭐: 네! 큼직한 건물은 기본이고, 길가의 꽃과 음습한 골목, 안 보이는 하수구까지. 정성이 안 들어간 곳이 없답니다! 가장 먼저 선보이는 장소가 변변찮다면 누구라도 실망할 테니까요.

교생 아가씨가 신나게 설명했다.

대단한 자부심만큼이나 유용한 정보가 톡톡 흘러나왔다. 나중에 꼭 활용하기로 했다.

딸랑딸랑~♪

우리는 문에 방울이 달린 운치 좋은 카페로 이동했다.

원래는 술집으로 가려 했다.

“한수야. 우리는 미성년자잖아?”

그런데 동창A가 천연덕스럽게 이따위 소리를 해서 기각됐다.

어째서 판타지 세계에 알코올이 아닌 커피가 흥행하는지 따지고 싶었지만, 카페에 설치된 벽걸이 에어컨을 본 시점에 포기해버렸다.

여기는 판타지의 탈을 쓴 지구였다.

“지상은 정말 많이 변했네요.”

“그렇구나. 하지만 변치 않는 것도... 후후!”

지하감옥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K부녀는 도시에 펼쳐진 선진문물에 할 말을 잃은 얼굴들이었다.

이 촌스러운 요정들이랑 같이 못 돌아다니겠다.

“용사님. 카모마일 티가 뭐예요?”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의 차이가 뭡니까?”

메뉴판을 물끄러미 올려다본 촌스러운 부녀가 내게 묻는다.

카모- 뭐?

“직원에게 물어봐.”

나는 밀린 주문으로 바쁜 인어 점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때, 동창A가 불쑥 참견했다.

“카모마일은 땅에서 나는 사과라는 뜻의 사과향이 나는 하얀 꽃입니다. 거기 요정님처럼 아름다운 숙녀분의 피부 보습과 진정, 숙면에 도움을 줍니다. 카모마일 티는 그 꽃을 우려낸 차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에스프레소는 곱게 갈아서 압축한 원두 가루를 뜨거운 물에 고압으로 통과시켜서 만든 진한 커피입니다. 반면, 아메리카노는 제 고향별의 미국이란 나라 사람들이 즐겨 마시던 연한 커피에서 유래됐습니다. 커피가 처음이시라면 연한 아메리카노를 추천합니다.”

두 커피의 차이에 대해서도 막힘없이 시원시원하게 설명했다.

현지민이라고 해도 믿겠- 현지민이 맞았다.

묘한 패배감이 엄습했다.

▶토닥: 강한수 생도님, 힘내세요. 11년이면 유행을 못 따라가서 촌스러워지기에 충분한 시간이니까요. 블랙은 아직 기억하시나요?

컥-!

교생 아가씨의 말이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말도 안 돼! 내가 촌놈이라니!

우리는 마시고 싶은 음료를 각각 주문한 후, 동그란 테이블에 빙 둘러앉았다.

나는 동창A에게 먼저 운을 뗐다.

“너는 판타지에 얼마나 있었어?”

직업 용사를 잃은 졸업생들이 터무니없이 약하다는 건 잘 알겠다.

하지만 그들이 정확히 얼마 동안 판타지 세계에서 모험하다가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리고 졸업했는지는 모른다.

조사해둘 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3년.”

동창A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정말로? 겨우 3년이라고?”

“그래. 그때는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부하 악마들로 찔끔찔끔 귀찮게 하는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린 후에 느긋하게 하렘을 완성하려고 했었거든? 그런데 마왕을 죽이자마자 지구로 귀환해버렸어.”

동창A는 자신의 모험담을 읊기 시작했다.

내 1회차랑 여러모로 흡사했다.

우연히 경매장에 구경 갔다가 노예로 전락한 요정 공주 실비아를 사서 동료로 영입하고, 얼마 안 지나서 인어공주와 성녀A가 세트로 동창A의 파티에 합류했다.

약 1년 뒤.

동창A와 잡것들은 중앙대륙에서 북대륙으로 넘어갔다.

거기서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나를 쓰러트린 사내랑 결혼할래!”라며 버티는 검희(劒嬉)에게 도전했다가 처음으로 패배!

“진짜 강하더라고.”

“그 미친년이 좀 세긴 하지.”

나도 겪어봐서 잘 안다.

하지만 나는 검희랑 결혼할 목적으로 도전한 건 아니었다. 그 미친년이 내게 먼저 시비를 걸어왔었다.

“흐흐. 몸도 미쳤었지.”

동창A가 눈가를 찡그리며 음흉하게 웃었다.

“용케도 칼부림 안 난 모양이네.”

그년의 부주의로 알몸을 봤다가 살해당할 뻔했다.

“음? 얌전하던데?”

“...음?”

동창A는 검희를 함락시킬 방법을 곰곰이 연구했다. 그리고 해결책으로 북대륙에 잠든 전설의 성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러쿵저러쿵해서 성검1 획득!

검희에게 재도전한 동창A는 성검1의 자동전투 기능으로 무난하게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승복하지 않고 3차례나 더 도전했다. 그러나 사기적인 오토매틱을 이길 순 없었다.

결국, 약속대로 용사님의 여자가 되었다.

“결혼식은 치렀는데, 우리 둘 다 19세 미만 미성년자라서….”

“어이?”

이 동정(童貞) 실화냐?

앞으로는 동창A이 아니라 동정A라고 부르자.

“한수야. 듣고 놀라지 마라. 나는 북대륙에서 악명 높았던 얼음공주까지 내 하렘에 넣는 데 성공했다! 현자의 지팡이를 줘서 폭주하는 힘을 제어시켜줬더니 고맙다며 따라오더라.”

그런 공략법이 존재했었군?

나는 썰어버렸는데.

동료들은 불쌍하다며 만류했지만, 폭주하면서 수백 명의 사람을 꽁꽁 얼리는 여자를 가만 놔둘 순 없었다.

“그럼, 현자는?”

“남자잖아?”

“흠. 그렇군.”

죽여서 지팡이를 빼앗았다는 모양이다.

계속 들어보니, 동정A의 모험에는 남자 동료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여간 굉장하네.”

내 칭찬이 마음에 든 걸까?

동정A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이어서 말했다.

“이런 식으로 3년 동안 18명의 미녀가 내 하렘 파티에 합류했어. 그러자 마왕이 부러웠던지 내 연애를 귀찮게 방해하기 시작하더라? 그것도 모자라서 내 여자들을 죽이려고까지 하고!”

“그래서 마왕의 성으로 쳐들어갔다?”

“당연하지!”

나는 동정A에게 미친놈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루 만에 쳐들어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마왕의 성까지 가는 길은 1회차 용사에게 만만치 않다.

그런데 동정A는 해냈다.

“어떻게?”

“내 여자들이 우수했거든.”

사랑의 힘!

동료와 연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강해지는 성검1의 필살기 앞에서는, 그 아무리 강한 악마도 부질없는 저항이었다.

그리고 동료들 자체도 강했다.

“마왕은?”

“이름 있는 악마 중에서 가장 약하던데? 내가 나설 것도 없이 마누라들이 쉽게 쓰러트리더라.”

“...그렇군.”

마왕의 페널티.

그건 아무래도 ‘용사의 동료’까지 적용되는 듯했다.

이게 만약 사실이라면, 동료들보다 용사 레벨이 낮으면 마왕을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교생 아가씨. 내 짐작이 맞아?

▶긍정: 사랑과 우정을 중요시하는 이유랍니다. 시작부터 답안지를 공개한 셈이죠. 그런데도 마왕 앞까지 못 가고 죽어서 재시험 보는 생도가 부지기수지만요.

그렇다고 한다.

“강한수, 너는?”

실컷 자신의 모험담을 늘어놓던 동창A가 역으로 물었다.

뭐라고 답해주는 게 좋을까?

“하루.”

11년이라고는 죽어도 대답 못 한다.

“하, 하루? 농담이 심하네. 하하!”

동정A가 배꼽을 잡고 웃는다.

엄한 자존심을 세운 내가 생각해도 하루는 좀 무리수였다. 순수한 1레벨로 마왕의 성까지 홀로 가는 건 불가능하니까.

“운이 좋았지.”

“풋! 됐어. 말하기 싫다면 하지 마. 모험을 캐묻지 않는 건, 용사들 사이의 불문율이니까.”

그렇게 말한 동정A는 K부녀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하지만 그도 요정이라면 많이 봤었는지 금세 흥미를 잃었다.

이 뒤로는 현실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음악, 게임, 만화, 소설, 운동….

내게는 고대의 유물이랑 동급으로 들리는 고유명사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노는데 질려서 잘 모르겠네.”

“하하! 그건 나도 공감. 미녀들이랑 함께하는 판타지 모험이랑 비교하면 지구의 오락은 좀 따분하지.”

동정A는 내 생각하고 정반대였다.

그게 아니면, 내가 향수병이 심해져서 지구의 추억을 미화한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어떻게든 지구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동정A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내 부모님은 잘 계셔?”

내 질문에 동정A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너도 지구로 귀환한 용사이면서 네 부모님 안부를 왜 내게 묻냐?”

“......”

그것도 그렇네!

성급했다. 둘러댈 변명이 영 떠오르질 않았다.

“아! 혹시? 강한수, 너도 요즘 기승이라는 그거냐?”

“그거?”

“지구 부적응자. 살던 고향과 집으로 안 돌아가고 판타지 모험 비슷한 삶을 끊임없이 찾아 배회하는 사람들.”

“어…. 응. 맞아.”

지구는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

동정A에게 부모님 소식을 듣진 못했다.

대신, 축제가 끝나고 지구로 돌아가거든 나 대신 아들놈이 무사하다는 안부를 꼭 전해주기로 약속했다.

“강한수! 다음에는 서울에서 보자!”

“그래. 너도 잘 지내라.”

우리는 서로에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

“오빠~♪”

카페를 나온 동정A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은 고등학생 또래의 여자애가 팔짱을 끼고는 나란히 걸었다.

세련된 패션으로 보아선 저 여자도 용사.

동정A는 그 상태로 멀어져갔다.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미성년자는 개뿔.”

판타지 세계에서 3년을 보냈으면 정신연령은 이미 성인이다. 무르익은 육체는 짝짓기하기 좋은 상태고.

젠장! 지구산 여자친구라니!

부러우면 지는 거다.

“용사님. 이제 어쩌실 거예요?”

판타지산 요정K가 묻는다.

정말로 내 계획을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터.

어지간히 이 도시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여기가 도적질로 아비규환이 안 되길 바라는 눈치였다.

“도시의 물이 참 좋습니다. 아! 아메리까노 말입니다. 흠흠!”

프린트 스캐너처럼 쉴 틈 없이 눈알을 좌우로 움직이는 보스K도 비슷한 마음인 듯했다.

사실, 지하감옥에 오랫동안 유폐되어있던 이 부녀라면 모래뿐인 사막을 데려가도 새롭다며 좋아했을 것이다.

아무튼,

계획 중지는 안 될 말이다.

직업 도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도둑질은 필수.

내 목표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시작 도시 중앙의 대광장 옆에 자리한 대신전 건물. 그곳에서 졸업생들이 차례차례 소환된다.

하지만 대신전의 용도는 그것만이 아니다.

대형 이벤트의 보상 저장고 역할도 겸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부터 대신전을 공략한다.”

행인23의 정보에 따르면, 대신전의 방비는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수 없는 철통의 보안을 자랑한다.

교직원 일동이 심혈을 기울인 건물이니 당연한가?

▶충고: 강한수 생도님. 포기하세요. 이번 선택은 진짜로 자살행위에요.

괜찮아. 교생 아가씨.

죽어봐야 6회차밖에 더 되겠어?

게다가 행운 B등급 효과로 함정에 절대 걸리지 않는 나라면 충분히 침투할 수 있다. 우주의 기운도 나를 돕는 중이고.

“K부녀는 밖에서 소란 좀 일으키고 있어.”

“정말로 하시는군요...”

“쩝. 은인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K부녀에게 시선이 쏠린 틈에 나는 대신전으로 침투할 계획이다.

대신전 내부구조는 교생 아가씨도 모른다고 하니, 이번에는 순전히 내 감과 운에 의존- 음?

도적→성자(신성=날조↑)

신성 등급이 오른 탓일까?

도적에서 ‘성스러운 자’로 직업이 바뀌었다.

성자(聖者).

그 특전의 성능은 성녀와 교황 사이. 종교계열 2위의 최상위권 직업으로 불린다.

하지만 나는 전혀 웃을 수 없었다.

서둘러서 성검2를 소환한 후, 행운 효과를 확인했다.

▷종류: 스킬

▷명칭: 행운(+)

▷등급: A(+)

▷S: 운이 마르질 않는다.

▷A: 우주의 기운이 간혹 돕는다. (+)

▷B: 함정을 간혹 무시한다. (+)

▷C: 운이 제법 상승한다. (+)

▷D: 추락해도 조금 다친다. (+)

▷E: 눈먼 화살을 간혹 피한다. (+)

▷F: 운이 좋아진다.

완전히 망했다!

성검2의 증폭을 받고도 스킬 효과가 애매해졌다.

무작정 믿고 돌진하기엔 너무나 불안했다.

“허! 진짜 돌겠네! 성자 같은 보조직업으로 뭘 하라고….”

갑자기 뒷목이 확 땅겼다.

그때,

“성자께서 강림하셨다!”

“오오! 성자께서 이 땅에...!”

“성자님! 제 아들을 치료해주세요!”

나를 본 우매한 원주민들이 호들갑 떨기 시작했다. 그 소란은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도시 전역으로 확장됐다.

“와! 대박! 성자는 미구현 아니었어?”

“성자가 된 졸업생은 처음 봐.”

졸업생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존경심 대신 희귀한 천연기념물을 바라보는 시선이긴 했지만, 나를 시기와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건 느껴졌다.

대체 왜?

“위대한 성자님. 실례가 안 된다면, 소녀가 대신전까지 모셔도 될는지요?”

대신전 입구에서 나온 성녀(聖女)의 동행요청.

나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대신전에 침투하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하긴 했지만….’

우주의 기운이 너무 강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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