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화
[5회차] 혼돈! 혼돈! 또 혼돈!
“꾸엑?!”
“컥-?!”
골렘과 악마숭배자, 두 무리가 충돌했다.
부수고 죽이는 치열한 전투가 대신전 곳곳에서 벌어졌다.
마음 없는 골렘에게 자비와 용서를 바라는 건 무의미하고, 악마숭배자들의 사전에 평화와 후퇴는 없었다.
여기에 휘말린 졸업생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수준이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
축제 최심부를 지키는 파수꾼도 터무니없이 강했지만, 그 최심부에 갇혀 있던 영웅들은 그보다 더한 괴물들이었다.
졸업생 따위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먼지처럼 쓸려갔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 으앜?!”
“오빠야?! 꺄으읔-?!”
동정A와 그의 여자친구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다.
그동안 나도 놀고만 있지 않았다.
팅!
보스K처럼 물약을 마시고자 유리병으로 손을 뻗었으나 실패했다. 무형의 무언가에 막혀서 닿지 않았다.
“...방범 시스템인가.”
이 세계의 원주민이 아니면 제약이 있는 듯했다.
이벤트 보상 외에는 축제 후 전부 반납한다고 했으니, 아주 이해 못 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성녀H는 어떨까?
“찰떡. 이벤트 보상을 챙길 수 있겠어?”
“해보겠습니다. 주인님.”
더는 감추거나 거리낄 게 없어졌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두컴컴한 정원에서 서로에게 쓰던 호칭과 말투를 사용했다.
▶황당: 축제 마스코트에게 찰떡이라니요···.
왜?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교생 아가씨가 극구 반대해서 찰떡은 기각됐다.
아무튼,
“저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성녀H가 근처에 진열된 물건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나랑 마찬가지로 거부반응이 발생하면서 실패했다.
K부녀만이 자유롭게 만질 수 있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나는 K부녀에게 보물창고 쇼핑을 지시했다. 가만히 남겨둬서 뭐하겠는가?
“꿀꺽.”
“꿀꺽.”
축제 진행을 위해 교직원 일동이 준비한 온갖 스킬 상승 물약이 보스K와 요정K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이걸로 이벤트 수백 개가 보상 부재로 무산됐을 것이다.
▶체념: 올해 축제는 완전히 끝장이네요.
교생 아가씨. 궁금한 게 있어.
▶쫑긋: 뭐가요?
선생들은 다 어디 갔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용사 페스티벌이 파탄 나게 생겼다. 어떻게든 수습하거나 나를 제재하고자 모습을 드러내는 게 정상 아닐까.
하지만 여전히 코빼기도 안 비췄다.
▶교육방침이에요. 강한수 생도님에게 다른 생도를 붙여줬던 것처럼 시작 단계에서 조정은 가능하지만, 교직원이 중간에 간섭하는 행동은 엄격히 금지되어있답니다. 축제도 마찬가지고요.
즉, 교직원 일동은 어떤 비상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손가락 빨면서 구경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로선 아쉬우면서도 희소식이었다.
“아깝네. 도덕 선생이 보이면 죽창으로 찔러줄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이 또한 나쁘지 않았다.
절대적인 지위의 선생이 간섭하지 않는다면, 변수도 그만큼 줄어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교직원 일동이 준비한 최고 전력은 3,141기의 골렘이 끝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리라.
그렇다면 두려울 게 없다.
나를 따르는 악마숭배자들이 해일처럼 밀고 나갔다.
쾅, 콰직!
단단한 골렘이 줄줄이 파괴됐다.
골렘의 성능이 우수하다는 건 틀림없지만, 스킬 구성과 전투 방식이 양산형처럼 일정했다.
반면에,
악마숭배자들은 개개인의 특징이 뚜렷하고, 과거에 영웅이었던 만큼 전투경험도 풍부했다.
공략 요령이 생기면 골렘은 아무것도 아니다.
“컥?!”
“꺄읔?!”
그렇다고 해도 악마숭배자들의 손실 또한 적지 않았다.
이대로 흘러가면 양패구상으로 끝날 조짐이 컸는데, 내게는 아직 최고의 카드가 남아있었다.
“싹 부활시켜.”
“네. 주인님. 아아~♪”
성녀H가 양손을 합장하고는 가사 없는 노래를 불렀다.
판타지 신(神)을 위한 찬가는 아니다. 그녀는 카나리아처럼 하늘을 향해 아름다운 음율을 지저귀었다.
그 직후,
번쩍-!
성녀H를 중심으로 성스러운 빛무리가 퍼져나간다.
고운 선율을 멈춘 그녀가 외쳤다.
“일어나라! 나의 용사여!”
기적이 벌어졌다.
“쿠오오!”
“부활인가···!”
“와아아!”
차가운 대지에 쓰러진 악마숭배자들이 일제히 벌떡 일어섰다.
감소한 레벨은 시신의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지만, 다시 싸울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쿵! 콰직!
마지막 골렘이 파괴됐다.
성녀H의 특전으로 끊임없이 재활용되는 악마숭배자들의 물량공세를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대신전 측의 패배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셈.
용사 페스티벌 핵심시설인 대신전이 내 손아귀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나의 종자들아! 대신전의 보물들로 무장을 갖춰라!”
본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네. 왕이시여.”
“오오! 감사합니다!”
악마숭배자들은 판타지 원주민에 속한다. 그렇기에 K부녀처럼 대신전의 보물들을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었다.
물약은 K부녀가 이미 싹쓸이했다.
하지만 무기와 갑옷, 장신구 등은 여전히 많이 남았다.
철컥, 찰칵.
대형 이벤트 우승자에게 주어졌어야 할 보상들이 악마숭배자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됐다.
성능과 품질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안 그래도 강력한 악마숭배자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 과거의 영웅이었던 그들은 더욱 막강한 신위를 발휘하게 됐다.
이게 끝이 아니다.
“아아~♪”
그들 뒤편에서 성녀H가 찬송가를 불렀다.
나를 따르는 모든 악마숭배자에게 성녀의 축복이 내려졌다. 용사 파티만 받는 축복인 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더욱 강하게! 더욱 단단하게! 더욱 민첩하게!
악마숭배자들의 강함이 배가 됐다.
▶창백: 정말 끔찍한 조합이 탄생했네요···.
교생 아가씨. 강하기만 하면 장땡이야.
완전무장을 갖추고 성녀H의 축복을 받은 악마숭배자들의 기세는 굉장히 흉흉했다.
그들은 대신전 밖으로 진격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용사를 척살하기 위해.
“으악?!”
“도, 도망쳐?!”
악마숭배자들은 살인광이 아니다.
전직 영웅들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이들이 악마숭배자로 변절하거나 전향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실망스러운 용사’에게 있었다.
그리고 용사들이 눈앞에 널려있었다.
졸업생들의 직업은 이제 용사가 아니었지만, 원주민이랑 차별된 알록달록한 복장과 개성적인 패션은 어딜 가더라도 눈에 띄었다.
“위선자에게 응징을!”
“죽어라! 호색한 쓰레기들!”
“내 철퇴로 회개하라!”
악마숭배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졸업생들을 죽였다. 선량하거나 예쁘게 생겼다고 봐주지 않았다.
예외 없이 몰살!
굳이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싹 쓸려갔다.
“사악한 악마숭배자들아! 내 칼을 받- 꾸엑?!”
“사랑과 정의의 힘으로 용서치- 꺅?!”
무슨 이벤트인 줄 알고 용감하게 맞서 싸우려는 졸업생도 더러 있었지만, 부질없는 발버둥이었다.
물론, 성검1이라도 있었다면 전투 양상이 크게 달랐을 것이다. 우정의 힘을 모으는 필살기는 그만큼 막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성검1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지금은 순수한 능력치 싸움이었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845
▷직업: 전사(전쟁→체력↑)
▷스킬: 체력A 통역A 무술B 맷집C 민첩C···
▷상태: 용맹, 투지
어느 길드의 마스터란 친구의 능력치였다.
지구에서는 저런 콩고물 수준도 강자로 취급해주는 걸까? 따르는 똘마니와 예쁜이들이 많았다.
“악마숭배자가 온다!”
“물러나지 말고 싸우세요!”
“방어대형을 유지해!”
마스터를 포함한 길드원 전체가 똘똘 뭉친 진영을 향해, 악마숭배자 하나가 겁도 없이 뛰어들었다.
성난 늑대처럼 광폭하게!
▷종족: 다크 휴먼
▷레벨: 999+
▷직업: 투사(위기→투기↑)
▷스킬: 마기SS 투기S 체력S 무공S 민첩A···
▷상태: 축복, 가호, 도핑, 강화, 고양
길드는 바람 앞의 먼지처럼 시원하게 쓸려나갔다.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길드 하나가 몰살당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능력치가 사기다! 도망쳐!”
“최상급 악마 수준이 널렸잖아?!”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이길 수- 꾸엑?!”
“포, 포기!”
이런 상황이 시작 도시 곳곳에서 벌어졌다.
행인56의 설명에 따르면, 페스티벌 대륙에서 가장 큰 번화가인 이 도시에 길드사무소를 세운 유명한 길드가 많았다.
하지만 이 길드들이 힘을 합쳐도 부질없었다.
먼지가 모인다고 바위가 될 순 없는 법.
전력 차이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포기!”
“포기할래! 포기!”
“나도 포기!”
사랑과 우정 타령할 때가 아니었다.
악마숭배자들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싶지 않았던 졸업생들이 줄줄이 포기를 외치며 페스티벌에서 이탈했다.
“하! 저것도 용사라고.”
그 광경을 본 내 입에서 헛웃음과 실소가 절로 나왔다.
나는 저딴 연놈들에게 밀려서 졸업이 보류됐단 말이지? 생각하면 할수록 뒷목이 땅겼다.
▶우울: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후후! 교생 아가씨. 느긋하게 즐기라구.
축제는 축제일 뿐이잖아?
▷초조: 축제를 축제답게 즐겨주세요! 소유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은 지푸라기로 불을 끄려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강한수 학생. 지금이라도 이 끔찍한 학살극을 멈추세요!
오! 오랜만입니다. 도덕 선생님.
▷생략: 인사는 나중에요! 모든 것을 탐하는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합니다. 이 방식은 옳지 않아요. 파멸에 앞서 교만이 있고, 멸망에 앞서 오만한 정신이 있습니다. 모두의 축제를 망쳐서 당신에게 득이 될 게 없어요.
잔소리가 성녀H의 엉덩이처럼 아주 찰지네요!
듣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쌓인다.
하지만 내가 축제를 망치고 있다는 건 동의할 수 없었다. 나도 다른 졸업생들처럼 축제를 즐길 뿐이다.
잘못은 약한 그들에게 있다.
“수준 떨어져서 같이 못 놀겠네~♪”
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느긋하게 산책하는 사이, 시작 도시에 상주하는 모든 졸업생을 처리한 악마숭배자들이 사방팔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더 많은 용사를 죽이기 위해!
물론, 그들이라고 무적인 건 아니다.
졸업생들의 비겁한 우정의 힘에 토벌된 자가 적지 않았다. 일부는 강력한 이벤트 영웅이랑 시비가 붙어서 당했다.
그래도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전의 악마숭배자들.
1호부터 514호까지 번호로 부르는 수준의 미미한 관계였다.
그들이 싹 전멸해도 나는 상관없다. 졸업생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처리해서 내 수고를 덜어주면 고마울 따름이다.
▷절망: 심혈을 기울인 페스티벌이···.
도덕 선생의 잔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제풀에 지친 모양이다.
갔나?
▶빼꼼: 네. 가셨어요. 휴우! 선배님은 언제 봐도 엄격하시네요. 강한수 생도님. 아직 확정된 사항은 아니지만, 담당이 저로 쭉 연장될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6회차에서도 잘 부탁합니다!
6회차라···.
교생 아가씨의 말을 들으니 한숨부터 나왔다.
▶응원: 힘내세요! 저랑 하나씩 짚어가시면 무난하게 이수하실 수 있을 거예요. 교육과정이 개편된다는 소문이 돌아서 불안하긴 하지만, 기분 탓일 거예요!
정말로 기분 탓이면 좋겠네!
“용사님! 용사님! 하늘을 좀 봐보세요!”
내 소매를 당기며 외치는 요정K의 호들갑에,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본 나는 진풍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저건, 설마···?”
칠흑빛 비늘의 거대한 날도마뱀이었다.
긴 목에는 은색의 목줄과 고삐 같은 게 채워져 있었는데, 고삐의 반대편 끝에는 천사 수십 명이 꽉 붙잡고 있었다.
천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녀석들이 끌고 온 용(龍)이었다.
“Chaoooo~!”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는 그리운 멜로디. 용의 패기와 위용에 대지가 떨고 하늘이 침묵했다.
나는 이 포효의 주인을 잘 알고 있다.
“망룡왕 뇌비우스···!”
5대 재앙도 축제에 동원된 듯했다.
▷종족: 카오스 드래곤
▷레벨: 999+
▷직업: 패왕(정벌→패기↑)
▷스킬: 혼돈SS 파괴SS 망각SS 패기S 맹독S···
▷상태: 고삐
하지만 내가 알던 ‘버스 기사’가 아니었다.
눈앞의 녀석은 황혼기의 망룡왕보다 덩치가 훨씬 작았고, 스킬 등급도 전체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젊은 망룡왕이라고 할까?
그래도 위험성이란 측면에선 둘이 별 차이 없었다. 젊은 망룡왕은 노안(老眼)이 없어서 명중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뇌비우스. 추악한 지상에 철퇴를!”
총대장처럼 도도하게 생긴 천사의 지시를 받은 망룡왕이 아가리를 쫙 벌렸다.
그리고 시커먼 기운을 토해냈다.
“Chaoooo···!”
젊은 망룡왕의 맹독 숨결이 대지를 강타했다.
콸콸!
그것은 악마숭배자와 졸업생, 원주민을 가리지 않았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폭포처럼 맹렬하게 쏟아진 후, 새까만 대홍수가 되어 주변의 모든 걸 쓸어버렸다.
“커, 커어억···!”
“맹독···!”
“수, 숨을 못 쉬-!”
순식간에 이 일대가 죽음의 땅으로 변했다.
망룡왕의 숨결에 중독되어 시커멓게 변하거나 녹아내린 참혹한 주검이 사방에 널렸다.
“두 분은 괜찮으신가요?”
“네.”
“감사하오.”
불사SSS의 성녀H는 멀쩡했다. 그녀의 성스러운 축복으로 보호받은 K부녀 또한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전멸했다.
“끄윽···.”
“원통하다···.”
기껏 교화한 악마숭배자들도 몰살당했다.
중독된 시체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성녀H의 부활로도 더는 재활용할 수 없었다.
나를 위해 몰살 이벤트를 도와줄 잡것들의 조기퇴장은 굉장히 뼈아픈 손실이었다.
“이거 참···.”
타이밍이 지나치게 절묘했다. 젊은 망룡왕을 끌고 온 천사들의 배후에 교직원 일당이 있는 걸까?
▶단호: 아뇨.
저기, 교생 아가씨? 평소에 눈치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듣지 않아?
배후에 사악한 도덕 선생이 있는 게 틀림없다!
스르륵-
나는 성검2를 소환했다.
그때,
“Chaooo···?”
시커먼 맹독 숨결을 머금은 아가리를 쫙 벌린 망룡왕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용의 시선은 성검2에 꽂혀 있었다.
“뇌비우스, 무슨 일인가요? 어서 응징을!”
“Chaoo.”
고삐를 당기며 앵앵거리는 천사의 명령에도 칠흑의 용은 꿈쩍하지 않았다.
탁한 눈동자가 성검2만을 바라본다.
“호오···?”
나는 마왕 페도나르가 뿌린 떡밥이 문뜩 기억났다.
망룡왕에게 성검2를 보여주라고 했던가?
돌발이벤트가 발생했다.
성자→□□□(혼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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