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화
[5회차] 페스티벌 폐막식
“혼돈이랑 충돌한 이상,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운명이겠지요. 승자께 저희가 가진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뒤편의 여자와 아이들만 살려주십시오. 이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무릎 꿇고 애원하는 대표A.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나야 뭐, 오지랖이 더럽게 넓은 호구 용사님이라서 보상만 충분하다면 용서해줄 의향이 있지! 다만, 내 동료는 종족이 전혀 달라서 여자와 아이라고 봐주지 않을 것 같은데···.”
“Chaooooo···.”
망룡왕 뇌비우스가 흉흉한 시선으로 천사들을 내려다봤다.
대표A가 덜덜 떨면서 서둘러 말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설득할 시간을···!”
“오냐. 지껄여봐.”
“천사들의 주거지역은 역할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중에 저희는 보물의 보관을 맡았습니다. 그렇기에 축제의 마지막 보상 외에도 다양한 보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방공호 안에서 이것저것 들고 나왔다.
무기, 방패, 물약, 의류, 도구, 서적, 장신구···.
그 종류와 쓰임새가 무척 다양했다.
품질 또한 손색이 없었다.
내 1회차 때, 재료를 모아서 전설의 대장장이나 재봉사란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제작한 최종장비도 이렇게까지 호화롭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시큰둥할 따름이었다.
좋은 스킬로 떡칠한 내 몸뚱이가 훨씬 튼튼한 탓이다.
이 위에 갑옷을 걸친다면 방어력이 조금은 올라가겠지만, 서로 한 방씩 주고받는 전투 스타일을 추구하는 내게 이것들은 일회용품이나 다름없었다.
즉, 질이 떨어진다.
내게 어울리는 갑옷이나 방패가 되려면 이것들보다 훨씬 품질이 좋아야 한다.
못해도 성검2 수준은 돼야 품격에 맞는다.
그런고로, 내 관심사는 몰살 이벤트로 빠르게 넘어갔다.
“메인이벤트 보상은?”
“이겁니다.”
대표A가 야구공 크기의 고풍스러운 상자 3개를 내게 내밀었다. 상자에는 친절하게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최상급 소환 반지 A형: 엉큼한 천사]
[최상급 소환 반지 B형: 깜찍한 천사]
[최상급 소환 반지 C형: 발랄한 천사]
이것들을 보자마자 내 눈이 착 가라앉는 걸 느꼈다.
나는 대체 무엇을 기대한 걸까···?
“페스티벌 최후의 3인에게 주어지는 보상입니다. 반지 안에는 처벌 대기 중인 사고뭉치 아이들이 하나씩 봉인되어 있습니다. 지상의 삶을 동경하던 아이들이니 불만은 없겠지요. 능력은 확실합니다.”
대표A가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주위의 천사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 강한수 생도님! 정말 엄청나지 않나요? 전투부터 가사노동까지 도와주는 만능 천사! 그리고 이건 영업비밀인데요. 평소에도 친했던 세 천사가 모이면 강력한 합체기도 구사할 수 있답니다!
교생 아가씨가 지원하듯 홍보를 곁들였다.
“만능이라···.”
나는 조용히 반지 A형을 끼고 천사를 소환해봤다.
반지가 빛에 휩싸이고-
번쩍!
“주인님의 엉큼한 수호천사 섹시리엘 등장~☆”
알록달록 무지갯빛 신성을 뽐내는 요란한 퍼포먼스와 함께, 20대 초반 외견의 예쁜 천사가 출현했다.
척, 척, 척, 살랑살랑~
팔다리와 허리, 골반을 어여쁘게 흔들기까지.
심혈을 기울여서 오랫동안 준비한 안무(按舞)임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조잡한 철판으로 중요부위만 간신히 가린 아슬아슬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목, 어깨, 허리, 엉덩이, 허벅지, 가슴···.
베거나 찌르기 좋게 맨살이 훤히 드러나 있다.
오른손에 쥔 창이 장식품이 아니라면 전사계열이란 뜻인데, 주인님을 수호해주긴커녕 역으로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종족: 엔젤
▷레벨: 800
▷직업: 창기병(승마=창술↑)
▷스킬: 창술S 신성S 승마A 통역B 잡역B···
▷상태: 기대, 흥분
복장이나 정신상태야 어떻든 천사의 능력치 자체는 준수한 편이었다.
물론, 그 평가 기준은 내가 아닌 졸업생들.
참혹한 능력치를 가진 그들에게는 이 천사의 합류가 엄청나게 든든할 게 틀림없다.
나는 총평을 내렸다.
“이런 쓰레기를 보았나···!”
3개의 반지가 전부 이렇다고 보면 될까?
막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성검2가 부르르 떠는 걸 느꼈다. 실망스러운 메인이벤트 보상에 반응한 것이다.
그 진동은 3개의 반지까지 닿았다.
빠득, 빠득, 빠득.
고리에 균열이 생기는가 싶더니 그대로 파괴됐다.
“이, 이게 뭐얏?!”
A형 반지에서 소환된 엉큼한 천사가 깜찍한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뭔가 해볼 틈도 없이 파괴된 반지처럼 빛의 알갱이로 변하면서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파스스스···.
파츠츠···.
아예 등장조차 못 했지만, B형과 C형 반지에 들어있던 두 천사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메인이벤트 보상이 어처구니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냥 파괴되고 끝나진 않았다.
휘이이잉~
성검2를 감싼 흑백의 회오리가 파괴된 3개 반지의 잔해와 A형 천사였던 빛의 알갱이를 게걸스럽게 흡수했다.
소환D→소환B→소환A→소환S
반지에 내장되어 있던 소환 능력이 고스란히 내게 넘어왔다.
덕분에 스킬 ‘소환’이 단번에 S등급까지 급상승!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 어어-?! 주인님?!”
여전히 목줄을 차고 있던 성녀H가 비명을 지르듯 나를 불렀다.
촤르르르-!
은색의 고삐가 성검2의 칼자루에 착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낚싯바늘에 걸린 참다랑어처럼 성녀H를 끌어당기는 게 아닌가.
뿅! 뿅!
성녀H는 진공청소기에 흡입되듯 사라졌다.
목줄과 고삐도 함께.
“...이게 대체 뭔 일이래?”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 판타지 경력 11년을 통틀어 보아도, 이렇게 황당한 전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스르륵···.
성검2의 형태가 변화했다.
붉은색 하트 모양의 칼자루에 새하얀 날개 1쌍이 추가됐다.
그걸 본 나는 전율을 금치 못했다.
“촌스러움에 여성스러움까지···?”
사나이의 클레이모어에 대체 무슨 짓을!
큐피드 화살처럼 푹 찌르면, 싸늘한 시체 대신 뜨거운 사랑의 노예가 될 것만 같은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깜짝: 강한수 생도님! 위를 보세요! 위! 위!
교생 아가씨가 갑자기 호들갑 떨었다.
성검2의 달라진 디자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을까?
슬쩍 머리 위를 봤더니···.
▷종족: 카오스 엔젤
▷레벨: 1
▷직업: 성녀(신앙→부활↑)
▷스킬: 통역S 축제F 무한F
▷상태: 소환
성녀H랑 똑같이 생긴 천사가 허공에 두둥실 떠 있었다.
등에는 새하얀 날개 3쌍이 돋아나 있었으며, 어째선지 포인트로 구매한 가터벨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목줄.
성검2랑 반투명한 쇠사슬로 이어져 있었다.
이런 배덕한 스타일이랑 별개로, 그녀는 여신(女神)이 강림했다고 해도 믿어질 자태를 뽐냈다.
“찰떡?”
축제 마스코트를 그렇게 부르지 말라는 교생 아가씨의 잔소리는 무시하고, 나는 성녀H의 반응을 살폈다.
“네, 주인님.”
야무지게 대답하는 호칭이나 억양을 보니, 종족이 바뀌었어도 정신과 기억은 그대로인 듯했다.
그렇다면,
“들어가.”
“네···?”
우아하게 날고 있던 성녀H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나는 능력치를 힐끔 살펴봤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999+
▷직업: □□□(혼돈=■■↑)
▷스킬: 패기SSS 신성SSS 마기SSS 몰살SS 날조SS 혼돈SS 파괴SS 내성SS 맹독SS 근력SS 맷집SS 민첩SS 투기SS 오감SS 검술SS 위엄SS 망각SS 통치SS 수영SS 권투SS 검기SS 학살SS 심판SS 소환S···축제F 무한F
▷상태: 성검, 성녀
스킬에 변화가 있었다.
방금까지 없던 스킬 2가지가 추가됐다.
축제F
무한F
성녀H의 천사 버전이 가지고 있던 스킬들.
소환했을 때는 별개로 취급되지만, 경험치처럼 하나가 되면 그녀의 스킬을 고스란히 계승하는 듯했다.
일단, 하나씩 살펴보기로 했다.
▷종류: 스킬
▷명칭: 축제
▷등급: F
▷E: 이벤트를 진행한다.
▷F: 축제 관계자로 인정된다.
이 스킬은 딱 봐도 용사 페스티벌 전용이었다.
대신전에서 성녀H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감추어져 있었다가 이번에 드러난 듯했다.
숨겨져 있을 때는 등급이 더 높지 않았을까?
현재로썬 그 쓰임새가 불분명했다.
하지만,
▷종류: 스킬
▷명칭: 무한
▷등급: F
▷E: 등급의 한계를 돌파한다.
▷F: 등급이 하락하지 않는다.
이건 달랐다.
“대박···!”
직업 ‘용사’를 잃으면서 나도 총체적 난국이었다.
용사 페스티벌에 참가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은 눈에 띄게 티가 나진 않았지만,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았던 B등급 이하의 스킬들은 등급이 하나둘 하락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젠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스킬 무한F가 지켜줄 테니!
▶전율: 관리자 스킬이 일반인에게 2개씩이나···?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교생 아가씨가 말을 잇지 못한다.
관리자 전용이란다.
그만큼 좋다는 뜻이겠지?
“어째서 아무런 일도···.”
“축제가 대체 어떻게···.”
대표A를 포함한 천사들은 망연자실 중이었다.
왜?
▶해설: 대신전에서 경험해보셔서 아시겠지만, 이벤트 보상에는 방범 시스템이 걸려 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작동하지 않았답니다. 선배님들이 깜빡하신 걸까요? 저도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네요.
천사들이 순순히 메인이벤트 보상을 넘긴 속셈은 따로 있었다.
대신전을 지키던 3,141기 골렘처럼, 하늘 곳곳에 배치된 강력한 파수꾼들을 깨울 목적이었다.
하지만 파수꾼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쩐지 너무 쉽다더니.”
교직원 일동이 설치한 방범 시스템이 먹통이었던 덕분이었다.
명확한 원인은 불분명.
“이걸로 메인이벤트는 끝난 건가?”
지금부터는 언제 용사 페스티벌이 종료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도 조금은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뿅, 뿅, 뿅, 뿅.
천사들의 보물 중 일부를 ‘창고’에 담았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담아가고 싶었지만, D등급으로는 한참 역부족이었다.
“Chaooo.”
나는 이걸로 용무가 끝났지만, 젊은 망룡왕은 천사들을 내려다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히익?!”
“여자와 아이들만이라도!”
“헉! 제발 목숨만은···!”
여태까지 사육당한 망룡왕 뇌비우스가 느낀 굴욕과 수치를 천사들이 잘 달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지금부터 나는 제삼자다.
그때,
▷용사님. 축제는 즐거우셨나요?
교생 아가씨나 도덕 선생이 아니었다.
징글징글한 복사&붙여넣기였다.
▷진정한 용사의 길은 실로 험난합니다. 하지만 꿈과 희망을 잃지 않은 당신을 응원해준 수많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우정과 사랑을 배우며 함께 성장한 당신은 마침내 최후의 승자가 됐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최후의 승자는 개뿔!
지상에는 여전히 졸업생이 바글바글하다.
하지만 내가 메인이벤트 보상을 독점하면서 강제적으로 폐막식이 진행되는 듯했다.
▷지금부터 성적을 알아볼까요?
어머나! 축제라더니? 이것들이 또 사기 치네!
▶변호: 강한수 생도님.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잖아요. 용사 페스티벌은 졸업생들이 수업내용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복습한다는 취지도 있다고요. 하지만 성적이 잘 나온다고 뭔가 특별한 혜택은 없으니, 그냥 마음 편히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오! 그렇단 말이지?
교생 아가씨의 말처럼 편하게 감상하기로 했다.
▷성적표를 꼼꼼히 확인해주세요!
성적표
이름 강한수
전투력 업적 평판 인성
SSS SS FF FFF
비고 힘들게 준비한 축제가 이렇게···.
참으로 아름다운 성적표였다.
평판보다 인성 학점이 더 낮은 이유가 영 수긍 안 됐지만, 전투력과 업적 과목은 제법 객관적으로 채점된 듯했다.
▷축제가 끝났습니다.
성적표를 받으면 늘 이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빛이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번쩍!
*
그리고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음?
“여긴 어디래?”
라누벨이랑 왕궁기사들이 안 보였다. 심지어 왕궁도 아니었다.
여긴, 콜로세움인가?
▷진정한 용사의 길은 실로 험난합니다. 지금부터 당신은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페스티벌 최후의 3인이 한자리에 모여있습니다. 다른 생존자를 죽이고 보상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합과 공존을 선택한다면 대량의 경험치가 주어집니다. 제한시간은 10분입니다.
설명을 듣고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대량의 경험치라고?
“여긴 대체 어디야?”
“축제가 벌써 끝났다고?”
“꺅! 보지 마요!”
콜로세움 안에는 나처럼 소환된 졸업생들로 바글바글했다.
몬스터랑 전투 중에 소환된 놈, 샤워하다가 소환된 년, 침대에서 뒹굴다가 소환된 커플···.
별의별 군상이 다 모여있었다.
최후의 3인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난감: 뜻하지 않은 사태로 축제가 강제종료되면서 내부시스템이 꼬인 것 같아요···.
교생 아가씨.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
이 용사님이 무료로 도와줄게!
“10분 안에 2명만 남기고 싹 죽이면 되는 거잖아?”
나는 성검2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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