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화
[6회차]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비좁은 콜로세움에 수백 명의 졸업생이 소환됐다.
얼떨결에 “당신은 최후의 3인입니다.”란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게 어딜 봐서 3명인데?
보상을 받은 기억이 없는데?
그들은 이 의문을 풀려고 애써 고민할 필요 없었다.
내가 지금부터 빠르게 퇴장시켜줄 테니까!
“커억?!”
“꺅?!”
흑백의 회오리가 몰아치는 성검2의 검기(劍氣)를 내포한 몰살SS 효과가 졸업생 무리를 주르륵 긁고 지나갔다.
타이밍 좋게 직업도 바뀌었다.
□□□→학살자(학살=몰살↑)
내 학살은 SS등급.
덕분에 몰살SS 효과가 대폭 상승했다.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내 공격의 약 15%가 전체광역으로 졸업생들을 덮쳤다.
이걸 순수한 방어력으로 견딜 수 있는 졸업생은 정말 극소수뿐이었고, 나머지는 ‘광역피해 감소’ 같은 특수효과로 살아남았다.
뭐든 간에 생존자는 별로 없었다.
뿅! 뿅! 뿅! 뿅!
그 많던 졸업생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시장바닥처럼 비좁게만 느껴졌던 콜로세움이 한산해졌다.
“포, 포기!”
“포기!”
뿅! 뿅! 뿅!
몰살SS로 처리되지 않은 생존자들도 줄줄이 “포기!”를 외치면서 페스티벌 폐막식 콜로세움을 이탈했다.
먼지다운 올바른 선택이다.
“어디 보자….”
나는 주위를 쓱 둘러봤다.
하나, 둘, 셋, 넷….
텅텅 빈 콜로세움에는 나를 포함해서 7명만 남았다.
“하압!”
정정한다.
이제 6명 남았다.
촥-!
내 뒤통수를 노리고 덤벼든 친구를 수직으로 예쁘게 베어줬다.
직업이 암살자인 거로 봐서는 꽤 자신했던 모양인데, 능력치가 이만큼 차이 나면 직업 특전도 무의미하다.
“거참! 기습할 거면 주둥이라도 닫던가.”
기합과 근성이면 다 되는 줄 아는 걸까?
“타핫!”
“얍!”
다음으로 내게 덤벼든 상대는 아름다운 커플이었다.
복장도 예쁘게 통일했다.
음양의 조화로 일궈낸 합체기는 없는 모양이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뜨거운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언어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의 힘!
“그건 침대에서 써라.”
괘씸죄는 적용하지 않고, 무난하게 밟아주겠다. 커플이란 건 상승효과보다 약점이 훨씬 많은 조합이다.
가령, 이 커플은 실력까지 엇비슷하지 않았다.
남자 쪽이 훨씬 강한 편.
그렇기에 나는 여자를 노렸다.
팅-!
일직선으로 돌파하듯 찌르고 들어간 성검2를 남자가 막아섰다.
휘청~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고자 무리하게 나서서 막은 탓에 몸의 균형이 깨졌다.
“사랑의 힘. 좋지.”
자기 목을 조이는 용도로.
나는 애초부터 이렇게 흘러갈 줄 알았다. 그렇기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계기를 꽂았다.
퍽!
남자의 턱주가리에 주먹을 박아줬다.
“어엌…!”
그러나 고개가 뒤로 젖혀지다가 멈춘다.
“어쭈?”
완전히 나가떨어질 줄 알았던 남자가 악착같이 버틴다.
휙!
심지어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반격을 시도했다. 손아귀에서 놓칠 뻔한 검을 휘두른다.
자기가 패배하면 뒤에 여자가 당하리란 걸 알기에 억지로라도 싸우려는 것이다.
사고구조가 참으로 알기 쉬웠다.
그렇기에,
나는 성검2로 다시 한번 여자를 노렸다.
“비겁한…!”
피 토하는 심정으로 외친 남자가 이를 악물며 막아섰고, 나는 성검2의 궤도를 틀어서 그대로 어깨부터 목까지 반듯하게 그를 베어줬다.
촤악-!
절단면에서 붉은색 피가 낭자했다.
그러나 금세 사라졌다.
뿅.
“허허. 완전히 게임이로구먼.”
결국은 페스티벌, 즐거운 축제란 뜻이다.
죽으면 레벨이 조금 하락한 상태로 지구에서 부활한다. 롤플레잉게임의 재시작이랑 하등 다를 게 없다.
그렇기에 나도 별 감흥 없었다.
진지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졸업생들이랑 놀아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포, 포기!”
남자가 죽자마자 사색이 된 여자는 바로 도망쳤다.
뿅.
“이제…. 넷 남은 건가?”
한 명만 더 처리하면 된다.
남은 시간은 약 8분.
넉넉하다.
하지만 누굴 처리해야 공명정대하다고 소문이 날지….
선택한다고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허! 참으로 몹쓸 종자로구나! 연약한 여자를 먼저 노리다니? 그러고도 네가 사내대장부라고 할 수 있느냐! 정정당당하지 못한 네놈에게 이 몸이 진정한 사나이가 무엇인지 뼈에 새겨주마!”
그렇게 도발하면서 내게 다가오는 사나이가 있었다.
성큼성큼 당당한 걸음걸이와 열혈로 타오르는 두 눈에는 자기가 이길 거란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솔직히 나로선 영 이해되지 않았다.
뭘 믿고 저리 기고만장한 걸까?
▶해답: 능력치를 비교해보고 그런 거 아닐까요?
방해 안 되게 잠자코 있던 교생 아가씨가 불쑥 참견했다.
우리의 능력치를 비교해봤다고?
우선, 사나이를 살폈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999+
▷직업: 권사
▷스킬: 신성SS 격투S 맷집S 민첩S 금강S…
▷상태: 고양
대신전의 악마숭배자 한둘쯤 간신히 상대할 수 있는 콩고물 수준이었다.
이걸 믿고 내게 덤빈 듯했다.
교생 아가씨. 내 능력치가 어떻게 보이는데?
▶종족: 아크 휴먼
▶레벨: 999+
▶직업: 학살자(학살=몰살↑)
▶스킬: 신성SSS 날조SS 수영SS 소환S 통역A…
▶상태: 성녀
교생 아가씨가 일하다니!
처음으로 비밀 친구가 일하는 모습을 보았다!
▶뿌잉: 축제 내내 도와드렸잖아요!
아무튼, 남들에게 보이는 내 능력치는 엄청 애매했다.
직업 ‘학살자’만 보면 싸움 좀 잘하게 생겼는데, 스킬 구성은 바닷가와 섬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순진한 어부와 해녀들을 등쳐먹는 사기꾼의 표상이었다.
용사 페스티벌 기간에 얻은 스킬들만 표시된 듯했다.
저 자칭 사나이가 기고만장할 만했다.
하지만,
퍽!
빠각!
안 보인다고 내 능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나는 오른손에 쥔 성검2를 횡으로 휘두르는 척하면서 몸을 회전, 그 원심력이 가미된 오른발 돌려차기를 먹여줬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공격했고, 바로 결판이 났다.
“컥?!”
“사나이라며?”
내 발차기는 녀석의 턱주가리에 정확히 꽂혔다.
성검2를 피했다고 방심한 결과였다.
자칭 사나이의 어정쩡한 주먹은 내 얼굴을 끝까지 노리지 못하고 어깨를 때렸다가 손목만 부러졌다.
능력부터 배짱까지 내 상대가 아니었다.
“포오오...”
퍼억-!
나는 녀석에게 “포기.”라고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지구로 귀환하면 어차피 완치될 터. 돌아가서도 잊지 못하도록 영혼 깊숙이 새겨줄 한 방이 포인트다.
사나이 타령하던 녀석의 입안 깊숙이 주먹을 박아준 후, 마기SSS를 활성화했다.
휘이잉~
그의 머릿속을 신나게 휘저어줬다.
날이면 날마다 악몽에 시달리길 기원해주자.
뿅!
“이걸로 셋.”
실질적인 전투보다 잡다한 개소리를 들어주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6분쯤 남은 듯했다.
지금부터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나를 제외한 생존자 둘은 모두 여성.
수컷의 전투본능을 마음껏 표출한 남성들이 먼저 덤벼주면서, 자연스럽게 여성만 남은 듯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긴 심심했던 나는 두 생존자의 능력치를 살펴보기로 했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999+
▷직업: 마술사(기력=마술↑)
▷스킬: 기력SS 마술SS 검술S 면역S 통역A…
▷상태: 긴장
매우 희귀한 직업이었다.
마술사(魔術師).
마법이 99%의 재능으로 씹어먹는 천재들만의 영역이라면, 마술은 49%의 노력과 49%의 자금, 1%의 영감으로 성장하는 학문이다.
마술사의 특기는 마법 각인.
보통은 마법사가 교양처럼 마술도 겸한다.
하지만 이 여자처럼 순수한 마술사도 간혹 있다.
그럴 때는 스킬과 복장이 판이해진다.
단검, 핫팬츠, 망토, 롱부츠, 멜빵….
활동이 편한 여행자 복장.
하지만 그녀의 골반에 요염하게 걸쳐진 허리띠에는 각종 두루마리가 연장처럼 주르륵 매달려 있다. 멜빵과 롱부츠에도 약병들이 주렁주렁.
전부 마술로 자체 제작한 것이리라.
“그렇게 긴장하지 마. 안 잡아먹어.”
나는 그 마술사 여인에게 안심하란 미소를 지었다.
어째선지 더욱 긴장하는 듯했지만.
“마술로 능력치를 감춘 건가요?”
내게 질문하는 마술사는 완전한 전투태세였다.
오른손에는 마법이 각인된 단검, 왼손에는 마법이 담긴 두루마리를 쥐고, 손가락 마디 사이마다 작은 약병이 끼워져 있다.
수류탄처럼 미리 준비한 소모성 무기들.
대신, 그 전투력은 동일 레벨과 스킬의 마법사를 가볍게 압도한다.
“아가씨. 너무 멍청한 질문인걸.”
판타지 세계에서 남의 능력치를 지나치게 맹신하지 말라는 교훈을 배우지 못한 걸까.
능력치는 999레벨 이후부터 보이지 않는다.
이 하나만 신경 써도, 상대의 역량을 어림짐작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이번 축제. 당신이 뭔가를 했군요?”
교활한 뱀처럼 두 눈을 게슴츠레 뜬 마술사 여자가 내게 유도신문(誘導訊問)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미 흥미를 잃은 나는 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3명이 화합과 공존하면 대량의 경험치 보상을 준다는 메시지. 당신 혼자서 수백 명을 학살하긴 했지만, 시스템은 문제 삼지 않겠죠. 이 보상을 노리고 저희 둘만 살려둔 건가요?”
마술사 옆의 여자는 별 볼 일 없었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999+
▷직업: 검객(체력=검술↑)
▷스킬: 검술S 체력S 활력A 근성A 맷집A…
▷상태: 긴장
능력치만 보면, 검왕 알렉스의 하위 버전.
그래도 지구에서는 이 정도가 상위 1%쯤 하는 듯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제 1분도 안 남았다.
무시 중인 마술사 여자는 여전히 말하고 있었다.
“제 본명은 모르셔도 요마(妖魔)는 들어보셨…. 어휴! 끝까지 무시인가요. 좋아요! 저는 기억력이 매우 좋은 편이에요. 당신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두겠어요. 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반드시 찾아낼 테니, 지구에서 다시 만나서 이야기해요.”
...스토커인가?
그래도 스타일이 굉장히 좋았다.
이 정도면 페스티벌이 끝나고 하룻밤쯤 할애해줄 의향이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내가 지구에 없다.
망할 교직원 일동! 저주나 받아라!
▷10분이 지났습니다. 한자리에 모인 페스티벌 최후의 3인은 화합과 공존을 선택했습니다. 어려운 결단을 내린 당신들에게 대량의 경험치가 주어집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경험치라고 해서 레벨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모든 스킬 숙련도가 골고루 상승했다.
“허! 이건 또 몰랐네.”
능력치를 확인한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숙련도를 올릴 방도가 전혀 없는 스킬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무한F→무한E
축제F→축제E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번 축제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는 신성. 천사들의 협조를 받았음에도 SSS등급을 넘지 못해서 못내 아쉬웠었는데, 폐막식이 마침표를 찍어줬다.
신성SSS→신성MAX
MAX등급.
내 판타지 경력 11년을 통틀어 봐도 최초였다.
스킬을 자세히 살펴볼-
▷시상식이 종료됐습니다.
어머! 성급하기도 하셔라.
신성MAX의 효과는 판타지아 대륙에서 확인해보기로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당신, 꼭 찾아내겠어요!”
뿅! 뿅!
두 여자가 먼저 사라졌다.
지구로 귀환하기 직전, 내게 윙크하던 마술사 아가씨에게 중지(中指)로 회신해줬다.
그때의 표정이 참…. 히쭉.
▷재시험을 시작합니다.
지긋지긋한 빛이 내 몸을 빠르게 감쌌다.
저항은….
유감스럽게도 무리였다.
▷교직원 일동이 당신을 어찌할지 회의합니다.
▷전문교사가 파견됩니다.
▷전문교사가 파견됩니다.
▷전문교사가 파견됩니다.
▷파견할 전문교사가 없습니다.
*
살짝 몽롱한 정신을 일깨웠다.
6번째면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나도 스킬이 많아지면서 마왕 페도나르처럼 레벨이 감소할 때 반동이 크게 오는 듯했다.
이건 좀 진지하게 고민해볼 문제인걸.
“오빠! 밥 먹어!”
어김없이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놈의 용사님 타령은…. 음?
“오빠라고?”
“응. 백수 오빠. 얼른 일어나~ 얼른~”
깃털과 솜을 넣어서 만든 왕궁의 최고급 침대가 아니었다.
나무판자 위에 양가죽을 대충 씌운 서민용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라누벨이 흔들어 깨운다.
“라누벨?”
“응! 오빠랑 전혀 닮지 않은 깜찍한 여동생 라누벨이야!”
“...그런 설정인가.”
그리고 “부활한 마왕으로부터 이 세계를 구해주세요!”라는 튜토리얼 설명은 아예 생략해버린 듯했다.
“설정?”
고개를 갸웃하며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의 목을 부러트리지 않은 내 인내심과 절제력에 감탄하길 10초.
나는 삐꺽거리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누추한 실내장식.
누추한 냄새.
누추한 여동생.
만두 왕국의 왕궁 마구간도 여기보단 화려할 터였다.
나는 하나뿐인 창문을 활짝 열었다.
역시….
“허허허! 그래. 용사를 꼭 수입하란 법은 없지.”
토착민 취급당했다.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