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53화 (53/430)

 053화

[6회차] 친절한 마을주민들

달라진 풍경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던 나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그리고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숲, 밭, 목조건물, 비포장도로, 사람, 가축….

이곳은 전형적인 판타지 마을이었다.

수세식 변기가 없는 판타지 세계에서도, 가장 위생시설이 떨어지는 최악의 주거지역.

판타지 원주민들의 청결함이란, 나 같은 지구인에게 “어떻게 이런 생지옥에서 태연하게 살지?”라는 감상밖에 안 든다.

말 그대로 죽지 못해서 산다는 느낌.

“오빠. 얼른 옷 갈아입고 밥 먹어.”

현지민 취급하면서 복장은 지구의 교복 그대로다.

이걸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라누벨이 무척 수상했다. 그래서 시험해보기로 했다.

“라누벨.”

“응?”

“내 이름이 뭐지?”

아까부터 계속 오빠라고 부르는 그녀가 매우 거슬렸다. 귀여운 척이 한층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다.

하지만 일 처리가 역시 엉성하다. 생판 남의 집에 던져놓고 가족으로 묶어버리다니? 지나치게 무리수다.

교직원 일동이 대충 짜깁기한 설정 따위-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오빠는 오빠잖아. 오빠가 가르쳐주지 않은 이름을 어떻게 알아?”

“......”

라누벨에게 말도 안 되는 논리로 핀잔을 들었다.

내 주먹이 울었지만, 초월적인 인내심으로 꾹 참았다. 시작부터 ‘여동생 폭행’으로 인성논란에 휩싸일 순 없기 때문이다.

그 뒤,

“옷들이 참…. 진정한 흙수저로군.”

나는 누추한 옷장에서 옷들을 쭉 훑어봤다.

누구나 무난하게 입을 수 있도록 펑퍼짐하게 재봉한 상의와 하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구처럼 자기 몸에 딱 맞춘 옷은 판타지 서민들에게 사치. 여기선 생일날 받은 옷으로 3년씩 버틴다는 개념이다.

그렇기에 서민들은 옷에 맞는 옷걸이가 되어있다.

남자는 생수병, 여자는 콜라병.

성장해서 옷이 안 맞으면 이웃이나 친척에게 대물림하기 좋도록 이 규격에 맞는 몸매를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그래서 몸 좋은 아가씨가 많은 걸까?

“오빠! 여동생이 보는 앞에서 무슨 짓이야!”

지금부터 내가 옷 갈아입을 걸 모르지 않았을 라누벨, 이 계집애가 멀뚱멀뚱 구경하다가 얼굴을 사르르 붉히면서 내게 항의했다.

팍!

나는 그런 라누벨의 얼굴에 교복을 던졌다.

판타지 신(神)의 편협한 주장처럼 내 인성이 정말 밑바닥이었다면 교복 대신 0.3mm 샤프펜슬을 투척했을 것이다.

“라누벨. 홀딱 벗기기 전에 닥쳐.”

“우우….”

나는 누추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쫄래쫄래 따라오는 라누벨을 달고 침실에서 거실로 장소를 옮겼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빠. 왜?”

“...아니.”

다행히도 “I am your father.” 같은 설정은 없는 듯했다.

이것마저 교직원 일동이 인위적으로 짜깁기하고 강요했다면 진심으로 분노했을 것이다.

라누벨이 식탁 위에 미리 차려놓은 요리들은 제법 준수했다.

따끈한 버섯 수프, 부드러운 호밀빵, 훈제 양고기, 신선한 샐러드, 시원한 말젖, 후식용 과일...

솔직히, 서민가정의 한 끼 식사로는 지나치게 진수성찬이었다.

‘이걸 다 라누벨이 요리했다고?’

1회차 내내 겪어본 바에 따르면, 라누벨의 요리실력은 나쁘긴커녕 썩 우수한 편에 속했다.

열악한 환경과 식자재, 요리도구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뚝딱 만들어내는 능력이 정말 대단했다.

물론, 판타지 요소는 기본이다.

달그락.

촤악.

식사 후, 라누벨은 생활마법으로 설거지했다.

따뜻한 수프와 차가운 말젖 등도 그녀의 보조마법으로 온도를 조절해서 나온 결과물이다.

내가 요구하면 후식으로 과일 빙수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뭐든 간에 한 끼 식사로는 좀 과했다.

“최후의 만찬 같은 느낌인걸…?”

마왕 페도나르가 갑자기 튀어나와도 놀라지 않을 자신 있다. 내가 아닌 마왕의 제삿날이 되겠지만.

“잘 먹어놓고 너무해!”

먹고 남은 음식은 바로 급속냉동시켜서 4차원 공간에 싹 욱여넣은 라누벨이 칭얼댔다.

나는 그녀의 4차원 공간 마법을 보고 살짝 놀랐다.

저건 1회차 라누벨이 한참 뒤에나 익힐 수 있었던 최상급 보조마법이기 때문이다.

설마, 설정뿐만 아니라 능력치도 달라졌나?

▷종족: 휴먼

▷레벨: 200

▷직업: 학자(지식=마술↑)

▷스킬: 마법A 마술A 매력B 요리B 불로C…

▷상태: 기쁨

그렇진 않았다.

내 기억 속의 “환영합니다, 용사님!”이라고 외치는 고고학자 라누벨 초창기 능력치 그대로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학자’란 직업에 주목했다.

학자(學者).

지식이 쌓일수록 마술이 올라가는 직업.

몸과 마음을 골고루 단련하는 ‘기력’이 높아질수록 마술이 향상되는 직업 ‘마술사’랑 차별됐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해진다.

‘판타지 신에게 지식을 잔뜩 주입받았다는 건가…?’

내 여동생이란 설정도 그 일환일 것이다.

교육과정이 바뀌면서 라누벨에게 무슨 지식을 추가했는지 모르지만, 나를 통제하려는 사악한 음모가 틀림없을 터.

자칭 여동생을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고로,

나는 혼자서 ‘시작 마을’을 산책했다. 은근슬쩍 따라오려는 라누벨을 따돌려서 떼어놓은 후, 상황을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

우선은 내 능력치.

▷종족: 아크 휴먼

▷레벨: 1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통역A ■■D

▷상태: 양호

너무나 귀엽고 소박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바로 블랙박스를 활성화했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1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신성MAX 패기SSS 마기SSS 몰살SSS 날조SS 혼돈SS 파괴SS 내성SS 맹독SS 근력SS 맷집SS 민첩SS 투기SS 오감SS 검술SS 위엄SS 망각SS 통치SS 수영SS 권투SS 검기SS 학살SS 심판SS 불사SS 광기SS 소환S 감응S 격투S 체술S 교화S 불굴S 돌파S 체력S 협상S 색적S 숨결S 회복S 거래S 인내S 활력S 근성S 선동S 저항S 기력S 재생S 돌파S 면역S 냉정S 철벽S 금강S 조교S 투창S 포효S 도발S 협박S 금기S 추적S 지력S 살인S 위압S 격노S 강탈S 회유S 조련S 명중S 회피S 질주S 지휘S 탐색S 축복S 행운A…

▷상태: 성검, 성녀

아름다운 스킬의 향연!

하지만 레벨은 복구되지 않고 초기화됐다.

회귀하는 과정에서 블랙박스가 비활성화된 탓이다.

종속시킨 성녀H를 통해서 습득한 ‘관리자 스킬’ 무한E도 회귀 앞에선 맥을 못 쓴다는 의미.

그렇다고 이 스킬이 쓸모없다는 건 아니다.

▷종류: 스킬

▷명칭: 무한

▷등급: E

▷D: 종족차별이 사라진다.

▷E: 레벨이 감소하지 않는다.

▷F: 등급이 내려가지 않는다.

성직자에게 치유나 축복을 무한정 받아도 레벨과 경험치 손실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에 띄는 D등급 효과.

조금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족차별이 사라진다고?”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이랑 비슷한 걸까.

당장은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오기에 현실적인 문제로 넘어갔다.

나는 확인할 틈도 없이 6회차로 넘어오는 바람에 보류됐던 신성MAX의 ‘자세히 알아보기’ 기능을 활성화했다.

▷종류: 스킬

▷명칭: 신성

▷등급: MAX

▶Z: 아무튼 신성하다. (0%)

▷SSS: 경배받는다.

▷SS: 신성한 반사를 행사한다.

▷S: 일반속성 공격을 무시한다.

▷A: 찬양한다.

▷B: 마기를 정화한다.

▷C: 신성한 방어를 행사한다.

▷D: 축복한다.

▷E: 마기를 견뎌낸다.

▷F: 신성한 공격을 행사한다.

여태까지 나는 ‘SSS등급 숙련도 100%’를 뜻하는 MAX등급이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매표소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도 ‘자세히 알아보기’로 알게 된 정보다.

▷MAX: 일반영역의 성장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한계를 돌파하려면 다른 스킬을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제물의 등급이 높을수록 달성도가 많이 오릅니다. 초월영역 Z등급부터는 일반영역의 숙련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물이라….”

산 넘어 산이었다.

하지만 나는 준비된 남자였다.

회차를 거듭하면서 쌓인 스킬들이 아주 많았다.

나는 잘 사용하지 않거나 불필요한 B등급 이하의 모든 스킬을 신성 Z등급 도달을 위한 제물로 바쳤다.

▷종류: 스킬

▷명칭: 신성

▷등급: MAX

▶Z: 아무튼 신성하다. (6%)

하지만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고작 6%라고…?

▶빼꼼: 강한수 생도님. 또 안녕하세요? 선배님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이번에도 맡게 됐답니다. 새로운 교육과정에는 잘 적응하는 중이신가요? 심각한 표정으로 보아선 아닌 것 같지만요.

아! 교생 아가씨. 들어봐.

이 한계돌파라는 거, 완전히 미친 거 아니야?

▶공감: 아! 저도 미쳤다고 생각해요. 고등교육과정 수험생들도 포기할 만큼 난이도가 극악이랍니다. 그러니 신중하게 선택해주세요! 한계돌파가 끝날 때까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스킬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A등급과 S등급을 싹 갈아 넣었다.

▷종류: 스킬

▷명칭: 신성

▷등급: MAX

▶Z: 아무튼 신성하다. (28%)

그러나 여전히 부족했다.

하지만 제물의 스킬 등급이 높을수록 달성도가 많이 오른다는 설명은 틀림없는 듯했다.

▶걱정: 지금이라도 멈추시는 게 어떠세요?

나는 교생 아가씨의 만류를 한 귀로 흘려넘겼다.

그녀가 보기엔 대단히 아깝겠지만, 내 관점에선 고작 1년 동안 쌓은 돼지저금통의 배를 가르는 정도의 감상이었다.

진짜 아까운 건 따로 있다.

“빌어먹을 회귀.”

내 판타지 모험 1회차는 무려 10년짜리였다. 그 과정과 결과가 좋았든 나빴든 내가 걸어온 인생이었다.

그런데 회귀 한 방에 내 10년이 부정당했다. 이때 느낀 상실감에 비하면 1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SS등급 스킬들도 아낌없이 갈았다.

중요하거나 당장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스킬 몇 개만 남기고 깡그리 제물로 넣었다.

▷종류: 스킬

▷명칭: 신성

▷등급: MAX

▶Z: 아무튼 신성하다. (75%)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결국에는 SSS등급까지 출혈을 강요받았다.

교생 아가씨가 자기 일처럼 괴로워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1년 동안 쌓인 짐을 정리하는 홀가분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중에라도 쉽게 올릴 수 있다고 판단되는 SSS등급 둘을 제물로 바쳤다.

그래도 부족해서 SS등급과 S등급 중 아껴둔 스킬을 추가로 포기해야만 했다. 이때는 나도 속이 조금 쓰렸다.

그리하여 완성됐다.

신성MAX→신성Z

내가 1년 동안 쌓은 스킬들을 한계돌파의 제물로 바치기까지 걸린 시간을 계산하면 10초도 안 됐을 것이다.

성인용 캐시 게임에 돈을 꼬라박은 기분.

▶전율: 한계돌파는 금수저만의 전유물일 텐데요…. 강한수 생도님이 여기에 해당할 줄은 몰랐어요.

오! 교생 아가씨의 통찰력이 제법이네.

내가 스킬 물고 태어나긴 했다.

이건 그 결과물이고.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1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신성Z 마기SSS 날조SS 소환S 행운A 통역A 창고C ■■D 축제E 무한E

▷상태: 성검, 성녀

능력치가 갑자기 허전해져서 헛웃음이 나왔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된 것 같다.

그러나,

우우웅―

내가 약해졌냐고 묻는다면 그렇진 않았다. Z등급부터 초월영역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겠다.

신성Z 효과가 자연스럽게 발현됐다.

“오오! 이 신성함은…!”

“저, 저분은 대체…!”

“맙소사! 신이시여…!”

방금까지 나를 백수A 취급하던 마을주민들이 무릎 꿇고 감격의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뚜렷한 이유 따위는 없다.

아무튼, 나는 신성하기 때문이다.

“누추한 마을주민들은 들어라! 내 눈을 바라보면 행복해질 것이다!”

“아아!”

“오오!”

나의 발언, 행동, 형편, 취미, 상태….

이 모든 게 신성해졌다.

그때,

“오빠! 여동생을 버려두면 천벌 받아! 지금부터 내가 이웃들을 소개해줄게! 모두가 좋으신 분들…. 어?!”

뒤편에서 라누벨의 귀여운 척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맞아. 꽤 좋네.”

악마숭배자들보다 다루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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