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6회차] 아무튼 용사임!
▶혼란: 좋은 이웃을 둔 자는 좋은 아침을 맞는다고 해요. 하지만 이 상황을 좋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네요…. 선배님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이 좋을까요?
교생 아가씨! 자신감을 가져!
나는 마을주민들이랑 빠르게 친해졌다.
친절한 그들은 내게 푸짐한 먹거리와 괜찮은 잠자리를 무상으로 제공해줬고, 마주치는 마을 처녀마다 쌀쌀한 밤에 끼고 잘 부드러운 핫팩이 필요 없냐고 넌지시 물어왔다.
그들의 친절을 다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할 지경이다.
그렇게 보름이 흘렀다.
“백수 오빠가...”
라누벨이 심통 난 얼굴로 뺨을 부풀리며 귀여운 척했다.
원래는 떼놓고 다녔는데, 시도 때도 없이 추파를 던지는 아가씨들을 몰아내는 용도로 쓸만했다.
물론, 이 누추한 여동생도 꽤 성가셨다.
“너는 뭐가 불만인데?”
“우음…. 그냥?”
자칭 여동생에게 교직원의 입김이 적용했음이 이젠 명확해졌다. 내 신성Z가 라누벨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용사의 동료들이 전부 이런 걸까?
기회가 되면 확인해봐야겠다.
“오늘 수확한 포도입니다. 받아주십시오.”
“밤마다 잠이 안 와요. 성자님. 아아! 성자님!”
“슬픈 일이 있었는데, 성자님 덕분에 나았습니다!”
“성자님. 저희 집에서 만든 사과잼이에요.”
시작 마을에서 ‘성자님’으로 통하는 내 인기는 최고였다. 때때로는 자기 자식과 노부모보다 나를 더 챙겨주려고 해서 난감했다.
특히, 유부녀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그런 아내를 “저분은 성스러우니 어쩔 수 없지.”라고 이해해버리는 남편들도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신성하기에 다 용서되는 모양이다.
주기적으로 마을을 방문하는 상인들도 내게 아낌없이 퍼줬다.
누추한 마을에서 구할 수 없는 특산품이나 귀중품을 선물처럼 무상으로 그냥 줬다.
돈 벌러 와서 돈 놓고 가는 상인들이었다.
이것도 내가 신성하기 때문이다.
▶평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강한수 생도님에게 선의를 베풀고 있으니, 평판이나 인성 점수에는 문제가 없을 거예요. 아마도? 선배님들에게 맞는지 확인해보려고 했는데, 다들 바쁘시다면서 상대를 안 해주시네요….
교생 아가씨. 괜찮아.
이번에는 느낌이 아주 좋거든?
무난하게 졸업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마왕 페도나르를 하루 만에 쓰러트려도 졸업할 수 없음을 4회차 때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정말 차근차근 진행했다.
▷종족: 카오스 휴먼
▷레벨: 13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신성Z 마기SSS 날조SS 맷집S 체력S…
▷상태: 성검, 성녀
나는 지난 보름 동안 기초능력을 빠르게 복구했다.
근력, 민첩, 체력, 맷집, 내성, 기력, 오감...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은 ‘복사&붙여넣기’의 진수를 보여줬다. 한 번 완성했던 육체를 고스란히 재현해냈다.
단, SS등급 달성은 쉽지 않았다.
모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경의: 강한수 생도님이 위대한 슬라임에게 배우셨다는 기술. 보고도 믿기지 않네요. 일부 스킬을 S등급까지 간단히 올릴 수 있다니! 다른 생도들이 알면 십중팔구 뒷목 잡을 거예요.
그래서 나도 편법을 생각했었다.
쉽게 올릴 수 있는 스킬들을 병렬방식으로 S등급까지 올린 후, Z등급의 제물로 끊임없이 갈아 넣자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꼼수는 3초 만에 폐기됐다.
체력SS를 제물로 바친 직후에 생성된 체력F를 바쳐봤지만, 신성Z의 한계돌파 달성도는 전혀 오르질 않았던 탓이다.
같은 스킬은 중복되지 않았다.
등급이 더 높은 쪽의 달성도만 적용됐다.
▶설명: 초월영역이니까요. 생명체가 편중된 영양소만으로 성장할 수 없는 거랑 같은 이치랍니다. 일반영역을 초월하려면 양질의 다양한 스킬을 양분으로 삼아야 해요.
교생 아가씨의 설명이었다.
그런고로 나는 6회차에서는 마기SSS를 언제든 한계돌파 할 수 있도록 미리 다양한 스킬을 골고루 성장시키는 걸 목표로 할 생각이다.
페스티벌을 바로 또 열어주면 안 되나?
마지막에 받은 모든 경험치 대폭 상승이 진짜 꿀이었다.
“오빠! 오빠! 여동생 말 좀 들어봐!”
“됐어.”
“그러지 말고 들어봐! 우리 마을에는 옛날부터 전설이 하나 내려오고 있어. 마을 북쪽 숲의 커다란 연못에 아름다운 인어가 사는데, 선택받은 용사님이 방문하면 연못 아래에 가라앉아있는 최강의 성검을 건져준대.”
혼자 신나서 조잘대는 라누벨.
변변찮고 촌스러운 청년이 우연히 성검을 뽑아서 용사가 된다는 이야기인 듯했다.
이미 내 직업이 용사이거늘.
스토리 전개 진행 순서가 뒤집힌 듯했지만, 허술한 교직원 일동이 짜낸 설정이 허술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관대한 내가 넘어가자.
“최강이라…?”
나는 북쪽 하늘을 올려다봤다.
정상이 M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으리으리한 휴화산이 보였다. 산의 중턱부터 꼭대기까지 만년설로 뒤덮여있다.
그래서 내가 붙인 이름도 설산M.
설산M은 판타지아 북대륙 중앙에 떡하니 자리한 관광명소로, 여기가 북대륙이란 확실한 증거이기도 했다.
내 지식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판타지아 대륙에서 구할 수 있는 성검은 오토매틱으로 떡칠한 성검1 하나뿐이다.
그것은 설산M의 ‘전대 용사의 무덤’에 감추어져 있다.
라누벨이 노골적으로 떡밥을 뿌리는 중인 ‘숲속의 연못’하고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내 성검2처럼 숨겨진 불량품일까?
일전에 성검이 여러 자루란 이야기를 천사들에게 듣긴 했는데….
▶두근: 강한수 생도님. 막 설레지 않으세요?
전혀.
▶당황: 왜, 왜요? 최강이라잖아요.
이미 나는 성검2를 소지한 상태다.
한 검집에 한 자루 검밖에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용사와 성검은 1대1 파트너의 관계다.
즉, 나는 다른 성검을 쓸 수 없다.
성검 없이도 마왕을 때려잡을 자신도 있고.
▶교훈: 성검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생도는 졸업하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있어요. 정말로 최강의 성검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속는 셈 치고 구경이라도 한번 해보세요~
...교생 아가씨. 솔직하게 말해봐.
본인이 궁금한 거지?
▶먼산: 와아! 오늘 날씨가 정말 좋네요!
하지만 교생 아가씨의 말도 일리가 있다.
내 목적은 판타지 모험이 아니다.
마왕 페도나르만 벌써 몇 번 쓰러트렸던가?
이 지긋지긋한 판타지 세상을 탈출해서 지구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자면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행할 필요가 있다.
무료봉사는 기본이고.
“성자님. 제 딸아이가 아파서 걱정입니다.”
우연히 마주친 마을주민K가 정말 뜬금없이 내게 말했다.
어린아이들은 성장통부터 시작해서 자주 아프다. 그런데 그걸 왜 나에게 말하는 걸까?
그때, 라누벨이 불쑥 끼어들었다.
“마구간 아저씨. 딸의 어디가 아픈데요?”
“열이 심해. 해열제를 만들려면, 숲의 북서쪽에 푸른 바위 아래에서만 자생하는 시원한 바람꽃이랑 전설의 연못에 사는 인어가 축복해준 깨끗한 연못물이 필요해. 내가 직접 숲에 들어가서 구하고 싶지만, 요즘 몬스터 출몰이 잦아져서 엄두도 못 내고 있단다.”
미리 준비한 각본처럼 쓸데없이 구체적이다.
그리고 몬스터 때문에 위험하면 남들 앞에서 언급 자체를 하지 말아야 정상 아닐까? 딸을 걱정하는 마을주민K가 말하는 모양새는 “위험하지만 네가 채집해줘.”였다.
자기랑 딸만 사람인가?
인성이 썩었다.
이 마을주민K만이 아니라 원주민들이 대체로 그렇다.
하지만 나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뭘 줄 건데?”
대가만 확실하다면 못 도와줄 것도 없다.
“아침에 짠 신선한 말젖을 드리겠습니다. 젊고 건강한 암말이 짜서 맛과 영양분이 듬뿍 들어….”
“터무니없이 부족하잖아. 딸의 목숨이 고작 말젖이라고? 이 순간에도 고열로 시달리는 딸을 떠올리면서 더 얹어봐.”
“그, 그건….”
공짜로 나를 부려먹으려던 마을주민K가 당황했다.
예전 같으면 내가 비난당했을 것이다.
사람의 목숨이 걸린 문제를 돈으로 환산한다고.
하지만 그건 주민과 동료들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남에게 위험한 일을 떠넘기면서 맨입으로 넘어가는 건 괜찮나?
아무튼, 나는 신성하다.
“신성한 분의 말씀이니….”
“마구간 형씨. 진짜 실망이야!”
“자네, 정말로 딸을 사랑하는 건가?”
“오늘도 너무나 신성하시네요.”
엿듣고 있던 마을주민들이 내 편을 들어줬다.
후루룩 마시면 끝인 말젖이랑 딸의 목숨을 저울질한 마을주민K를 함께 비난해줬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마을주민K가 무릎 꿇고 참회했다.
“흑흑!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협상에 들어갔다.
그 결과, 말젖이 나오는 젊고 건강한 암말이 최근에 낳은 망아지를 받기로 했다.
원래 주기로 한 말젖은 기본이고,
공갈F→공갈E
선동F→선동E
거래E→거래D
스킬 숙련도는 보너스다.
이후, 나와 라누벨은 마을주민K의 아픈 딸을 치료하기 위해 누추한 마구간으로 이동했다.
*
말가죽으로 만든 허름한 침대에 누워있는 마을주민K의 딸은 당장에라도 죽을 듯이 위태위태한 상태였다.
능력치에도 잘 나와 있었다.
▷종족: 휴먼
▷레벨: 1
▷직업: 주민(마을→건강↑)
▷스킬: 승마F
▷상태: 고열, 악몽, 사경
정말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태에 ‘사경(死境)’이 표시되면 숨넘어가기 직전이란 뜻이다.
길어봐야 하루.
이때까지 마을주민K는 뭘 한 걸까?
나는 따지고 싶은 마음과 의문을 몽땅 젖혀놨다. 깊게 생각할수록 피곤해진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이다.
쫄래쫄래 따라온 라누벨이 말했다.
“욕심 많은 오빠! 푸른 바위 아래에서만 자생하는 시원한 바람꽃이랑 전설의 연못에 사는 인어가 축복해준 깨끗한 연못물. 지금부터 서두르면 반나절 안에 전부 구할 수 있어!”
자칭 여동생은 나보다 의욕이 넘쳤다.
제멋대로 행동하던 1회차 동료들이 떠올랐다.
“라누벨.”
“응!”
“정신 사나우니 좀 닥쳐봐.”
“닮지 않은 여동생이라고 너무해!”
나는 칭얼대는 라누벨을 무시하고 아픈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붉게 달아오른 이마에 내 오른손을 얹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아으으…. 새근새근.”
당장에라도 숨넘어갈 기세였던 소녀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끔찍한 악몽도 사라졌는지 입가에는 미소마저 머물렀다.
약 따위 필요 없다.
성스러운 내 손이 약손이기 때문이다.
“이, 이럴 수가….”
“어머나!”
마을주민K와 그의 아내가 경악했다. 하지만 이내 무릎을 꿇고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나를 찬양했다.
그들은 아껴둔 말고기를 꺼내서 내게 대접했다.
특히, 말젖으로 만든 치즈가 일품이었다. 이것만은 어느 왕국의 왕궁요리사보다 나았다.
갈 때 좀 챙겨달라고 할까?
“킁킁! 엄마, 나도 배고파…!”
지독한 투병으로 그동안 공복이 심했던 소녀가 고소한 요리 냄새를 맡고 침대에서 벌떡 깨어났다.
내 치료가 과했던 걸까? 소녀는 무척 생기발랄했다. 늘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이 한순간 압도당했을 정도로.
나는 서두르지 않고 마구간에서 시간을 보냈다. 일찍 나가봐야 마을주민들이 또 뭔가를 부탁할 게 뻔하니까.
“성스러운 분이시여! 감사합니다.”
“제 보물을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치료해줘서 고마워요. 오빠.”
우리는 어두컴컴해지기 직전에 집을 나왔다.
직접 키우기 귀찮은 망아지는 당분간 마구간에 맡기기로 했다. 그러다가 깜빡해서 놓고 가면 어쩔 수 없고.
이걸로 문제는 일단락됐다.
“오빠, 진짜 너무해.”
라누벨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댔다.
“너는 좋게 해결돼도 불만이니? 우리가 해열제 재료를 구하러 간 사이에 소녀가 죽었으면 어쩔 건데?”
“그, 그건! 우우….”
여동생으로 설정이 바뀌었어도 라누벨의 천성은 바뀌지 않았다.
쉽게 해결하거나 무시하고 넘길 수 있는 사건과 문제를 복잡하게 진행하고 싶어 한다.
귀여운 척도 그렇고.
올바른 정신교육이 필요하다.
▶당혹: 해열제 재료를 구하면서 성검도 자연스럽게 획득하는 전개가 아니었을까요…?
교생 아가씨. 걱정하지 마.
성검은 나중에 꼭 구경 갈 테니.
6회차는 교직원 일동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주기로 했다.
주먹을 부르는 라누벨을 여동생으로 취급해주고, 귀찮게 뭔가를 부탁하는 마을주민들을 좋게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현재까진 이상 없다.
“꺅?!”
...라고 안심할 틈을 안 줬다.
길을 걷던 마을처녀B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인지 슬쩍 돌아보니, 날붙이와 가죽옷으로 무장한 사내들에게 손목이 붙잡혀 있었다.
그들은 마을 양아치 따위가 아니었다.
“오! 촌년치고는 제법 예쁜데?”
“이년. 앙탈 부리지 말고 오빠 품에 안겨봐.”
여기저기서 비슷한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마구간에서 한 끼 대접받는 사이, 외지에서 용병들이 이 마을로 흘러든 듯했다.
그 숫자가 백여 명으로 적지 않았다.
용병들은 마을의 여자들에게만 찝쩍대는 게 아니었다.
“여기의 과일들은 우리가 가져가지. 돈? 이 늙은이가 미쳤나! 잘 들어. 원래 같으면 이 마을을 하루 동안 지켜주는 우리 용병대가 역으로 돈을 받아야 해. 그러니 고마운 줄 알라고. 하하!”
그들은 곧 나와 라누벨을 발견했다.
건강한 수컷이기 때문일까?
내 누추한 여동생의 몸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그녀 옆의 나를 보는 순간, 다들 가운데 꼬리를 내리고는 슬금슬금 물러났다.
“...이 먼지들이 사람 열 받게 하네.”
나랑 라누벨은 커플 같은 게 아니다.
그런데 눈앞의 비루한 떠돌이들이 멋대로 오해하는 것 아닌가? 이놈들을 살려두면 “얼레리 꼴레리! 둘이 사귄대요!” 같은 끔찍한 소문이 날 터.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탁-!
파아아앗!
나를 기점으로 성스러운 파동이 누추한 마을을 뒤덮었다.
그걸로 상황이 종료됐다.
몰살F→몰살E
▶체념: 전설의 연못에서 성검을 획득하고 돌아온 용사님의 데뷔전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래?
나는 성검2를 소환했다. 그리고 외쳤다.
“내가 바로 용사다!”
용병들이 싹 죽는 바람에 소문은 안 나겠지만, 전개상으론 아무런 문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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