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화
[6회차] 최강의 성검
용병.
돈 받고 일하는 무법자들.
판타지 세계의 모든 인간을 총집합한 것 같은 직업군이다.
전설의 용사를 동경한 소년, 신분 상승을 꿈꾸는 사내, 연약한 여인이길 거부한 규수, 정략결혼이 싫어서 가출한 공주, 노예 낙인이 찍힌 요정, 정체를 감춘 영웅….
여기엔 온갖 군상이 다 모여있다.
자본주의와 약육강식을 따르는 용병들이 벌이는 야만적인 행동에 고통받는 건 언제나 힘없는 마을주민이다.
돈 없는 용병은 대범한 날강도고, 힘 있는 용병은 움직이는 시한폭탄이다. 용병은 인성 더러운 귀족보다 악질이고 숫자도 많다.
이런 해충들을 대체 왜 놔두는 걸까?
▶난감: 그건 편견이에요. 좋은 용병도 있어요.
좋은 용병? 풋!
교생 아가씨. 발견하면 꼭 소개해줘.
나의 성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 백여 명의 용병은 마을주민들이 처분했다.
제법 값나가는 옷과 장비 등을 홀딱 벗긴 용병의 알몸뚱이들을 마을 변두리에 쌓아놓고 대충 화장(火葬)했다.
아무도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다.
그 뒤처리만 할 뿐.
“용사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은 사례금입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찰랑.
마을 촌장이 두둑한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온종일 들어도 지겹지 않은 금화(金貨)의 맑은소리만큼은 아니지만, 동전과 은화가 뒤섞인 소리도 싫진 않다.
일단, 무게감이 마음에 든다.
“촌장. 누군가 물으면 용사가 그랬다고 해. 그리고 다음 상행이 마을을 방문하면 내가 주도적으로 용병들의 물건을 처분할 테니, 잃어버리지 말고 한곳에 모아놓도록.”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내가 처리한 용병대랑 협업하는 단체나 배후가 없다는 보장이 없다.
그들이 보복한다면 이 마을은 쓸려나갈 것이다.
용병들의 유품을 내가 판매하려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마을주민이 끼어들면 공범으로 몰릴 수 있다.
이건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내 1회차 경험이 말해준다.
동료들이 멋대로 행동한 후에 뒷수습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불행해진 사람, 마을, 도시, 나라가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는 책임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늙은 촌장이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내 의도를 이해한 얼굴이다.
1회차 때, 내 동료들은 죽인 용병들의 물건을 “여러분! 피해복구비용으로 쓰세요!”라면서 천진난만하게 떠넘겼다.
순진하고 무식한 주민들은 그걸 또 고마워했다.
약 1년 뒤, 그 마을은 잿더미가 되어있었다. 피해복구는커녕 세상에서 아예 지워진 것이다.
▶침울: 슬픈 일이네요.
교생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
이후에 내가 싹 복수해줬거든.
꼬리의 꼬리를 물은 모험은 나라의 주인마저 바꿨다.
*
나는 마을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상단을 통해서 용병들의 유품을 정리한 후, 그 수익의 절반을 촌장에게 몰래 넘겨줬다.
내가 선심 쓰듯 주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러면 돈을 세탁한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촌장이 그 돈을 독식해도 나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촌장이 어리석지 않다면 그런 무모한 과욕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누추한 마을에서 개인이 소화하기엔 너무나 큰 액수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도리는 다했다.
“오빠를 다시 봤어!”
당연하다는 듯이 마을 밖까지 쫄래쫄래 따라온 라누벨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나를 칭찬했다.
나로선 콧방귀가 절로 나왔다.
“건방진 소리는 됐고, 연못이나 얼른 안내해.”
“응!”
순서가 살짝 뒤바뀌긴 했지만, 전설의 연못에서 ‘최강의 성검’을 구경하면 교육과정을 준수한 셈이다.
이러면 채점관도 나중에 딴소리 못 하겠지.
라누벨은 거침없이 숲길을 나아갔다.
도중에 길을 잘못 들었다고 말하면 엉덩이를 힘껏 걷어차 줄 생각이었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무난하게 전설의 연못에 도착했다.
“흠. 뭔가 있을 법하게 잘 꾸며놨네.”
연못 주변에는 다양한 꽃들이 만개했고, 따스한 햇볕을 받은 수면(水面)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스르릉-
나는 성검2를 오른손에 쥔 채 천천히 전진했다.
연못에 산다는 인어가 공격해오면 바로 회 뜰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오빠. 너무 경계하는 거 아니야?”
연못가에 먼저 도착한 라누벨이 내게 핀잔줬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인어가 뒤에서 목을 꺾거나 깨물기 좋은 각도로 서 있네.”
“히익?!”
내 말에 놀란 라누벨이 연못에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바로 그 직후였다.
보글보글- 촤아아!
연못 중앙에서 물거품이 일더니 정말로 인어가 튀어나왔다. 간발의 차이였다.
“봐봐, 라누벨. 죽을 뻔했지?”
“안 죽여요! 당신은 인어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죠?!”
인어가 빽 소리 질렀다.
“인어 말이야? 어머니 손 외에는 잡아본 적 없는 순진한 남자를 꼬셔서 단물 쪽쪽 빨아먹는 악랄한 종족. 강한 수컷만 보면 꼬리지느러미를 주체 못 하는 음탕한 인어도 많이 봤지.”
“표현이 지나치게 부정적인데요?!”
“틀린 말은 없잖아?”
인어의 사랑법은 인간에게 재앙이다.
방금까지 사랑을 속삭이던 인어가 ‘레벨 더 높은 수컷’을 보자마자 지느러미 뒤집듯 태도를 싹 바꾼다고 상상해보라.
물고기 대가리의 한계다.
“으으…. 인어를 박대하는 인간이 있다는 소문을 몇 번 접하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충격적이네요.”
“잡소리는 됐고, 성검이나 꺼내와.”
후딱 보고 여행을 떠나야 한다. 멍청한 물고기에게 발목 잡혀있을 만큼 나는 한가하지 않다.
“성검은 용사만 소유할 수 있어요. 당신이 용사에 합당한 인물인지 시험해보겠습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돌연변이 도롱뇽 한 마리가 살고 있어요. 놈을 쓰러트리고 머리의 뿔을 잘라오시면….”
“봐라. 성검이다.”
나는 인어에게 성검2를 보여줬다.
애초에 직업부터 ‘용사’라고 떡하니 쓰여있는 나를 물고기 따위가 시험해보겠다니? 참으로 건방지다.
게다가 시험 내용도 용사랑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악마나 천사도 아니고 돌연변이 도롱뇽? 지나가던 사냥꾼A에게 시켜도 될 만큼 하찮은 임무다.
“...어떻게 용사가 되신 거죠?”
기적을 목도한 어린 금붕어처럼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인어가 진지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물고기 주제에 심오한 질문을 하는군.
“아무튼, 용사다.”
“그, 그렇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퐁당!
그래도 못 주겠다고 지껄이면 죽인 후에 내가 직접 챙겨갈 생각이었는데, 인어는 곧장 연못 속으로 잠수했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라누벨이 내 소매를 손끝으로 당기면서 귀여운 척했다.
“너는 또 왜?”
“용사가 간절히 바라면 다른 성검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해주려 했어. 그리고 오빠. 귀여운 여동생이 부르면 헤벌쭉 웃어줘야지! 끔찍한 혐오식품처럼 쳐다보면 안 돼! 천벌 받…. 저기, 오빠? 듣고 있어?”
촤악.
인어가 다시 물가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빈손의 알몸뚱이가 아니었다.
해룡(海龍)의 푸른 가죽으로 만든 고풍스러운 검집이랑 한 세트의 검 한 자루를 소중히 껴안고 있었다.
검의 디자인 또한 신경 쓴 티가 역력했다.
이것이 바로,
“최강의 성검이에요!”
인어는 멍청한 물고기 대가리답게 앞뒤 설명 다 자른 채 성검을 소개했다.
무작정 최강이라고 하면 어쩌라고?
“최강이라는 근거는?”
“아주 좋은 질문이에요! 이 성검에는 아름답고 고결했던 고대 용사님의 영혼이 깃들어 있어요! 후대 용사를 위해서 죽어가는 자신을 성검에 봉인하셨죠. 그분의 지식과 조언을 언제든지 들을 수 있어요. 목소리 또한 신사분의 마음을 사르르 녹일 만큼 감미롭죠. 정말 굉장하지 않나요?”
에고소드(Ego sword).
영혼 깃든 검.
설산M에서 오토매틱 성검1을 옮겨놓은 줄 알았는데, 아예 새로운 버전의 성검인 듯했다.
교직원 일동이 머리 좀 굴렸군.
“영혼이 들어있고 또 뭐가 있어?”
“더 뭐가 필요한가요?”
인어가 고운 이마를 찌푸리며 되물었다.
“다른 기능 말이야.”
“아름답고 고결했던 선배 용사님에게 온종일 1대1 교습을 받을 수 있어요. 최강이 되는 지름길이죠. 여기서 더 무언가를 요구한다면 도둑놈 심보 아닐까요?”
꾀꼬리 같은 여자 목소리 기능.
사교성 없는 왕따를 위한 성검인 듯했다.
자신만만하게 퐁퐁한 가슴을 펴며 우쭐대는 인어에게, 진정한 용사의 성검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기로 했다.
“우매한 물고기. 잘 봐라.”
나는 성검2에 깃들어 있는 영혼을 소환했다.
뿅!
“우웅…. 주인님. 여긴 어딘가요?”
용사 페스티벌 이후부터 쭉 동면(冬眠)해있던 성녀H가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며 내게 질문했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성녀H도 조건반사처럼 내게 몸을 기댔다.
“내 성검은 전투능력 외에도 부드러운 핫팩과 특수능력 부활이 탑재되어 있지. 마왕도 못 쓰러트리고 뒤져버린 한심한 용사의 목소리 기능 따위랑 비교하지 마라.”
“아….”
방금까지 우쭐대던 인어는 반박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이해했으면 그 고철은 도로 연못에 넣어놔.”
나는 성녀H의 소환을 해제하며 말했다.
멍청한 인어 앞에서 잔뜩 허세 부리긴 했지만, 이 훌륭한 핫팩 기능은 없는 셈 쳐야 한다. 성녀H를 소환하면 무한E의 효과가 해제되는 탓이다.
하지만 인어의 자신감을 찍어누르기엔 충분했다.
“정말 죄송해요. 최강은 무슨….”
시무룩해진 인어는 방금까지 소중히 껴안고 있던 성검을 물가의 돌멩이처럼 연못 속에 휙 던졌다.
퐁당!
버림받은 성검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고뇌: 강한수 생도님. 이래도 괜찮은 걸까요…?
교생 아가씨. 아무런 문제 없어.
내 성검의 성능이 압도적으로 좋다. 스포츠든 공부든 좋은 환경에서 더 좋은 성적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이치다.
그나저나,
“메인스토리 진행이 끊겨버렸네.”
역시, 순서가 뒤집힌 게 문제였던 걸까?
바뀐 교육과정에는 익숙해졌다.
거슬리는 라누벨이 여동생이란 충격적인 상황설정마저도 슬슬 자포자기하고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르렀다.
지금이라도 마왕을 잡고 새로 시작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마왕의 성이 있는 중앙대륙까지 가는 것도 일이지만.
▶제안: 성검의 영혼이 단서를 갖고 있지 않을까요?
오! 교생 아가씨. 천잰데?
“인어야. 연못에 빠트린 성검 좀 다시 건져봐.”
“그 골동품은 왜요?”
새초롬한 얼굴로 묻는 인어의 태도전환은 소름 돋을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이게 인어란 종족의 원래 습성이다. 더 마음에 드는 남자가 보이면 전 남자는 헌신짝처럼 버린다.
열정적인 사랑과 함께한 추억?
3초면 까먹는 금붕어 팔촌에게 뭘 기대하는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어머머! 자기가 좀 예쁘다고 비싸게 굴다가 어영부영 죽어버린 노처녀의 유언을 들어주시려는 거군요? 성스러운 용사님답게 자비로우시네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퐁당!
멋대로 착각한 인어가 금방 성검을 가져왔다.
“오빠! 얼른 뽑아봐! 얼른~”
“재촉하지 마. 연못에 그 시끄러운 주둥이를 처박기 전에.”
“너무해!”
칭얼대는 라누벨을 무시한 나는, 새로운 교육과정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에고소드, 성검3의 손잡이를 쥐었다.
곧바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현시대의 용사님. 제 이름은….)
자기소개는 됐어.
지금부터 너는 성검3이야. 알겠어?
나는 만질 수 없는 여자의 신상정보 따위 관심 없다.
목소리만으로는 여자란 보장도 없고.
지구에서도 어머니 주민등록번호와 도용한 사진으로 암컷인 척하는 수컷들이 적지 않았다.
인터넷상에선 모두가 무성(無性)이다.
이 성검도 예외는 아니다.
(저기, 용사님이 맞으시죠…?)
성검3. 잠꼬대 그만하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이 용사님이 앞으로 해야 할 임무나 업적들을 쭉 읊어봐.
(아, 네. 그러면 지금부터 수련을 시작할게요. 이 성검을 효과적으로 다루려면 고등검술과 기초체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매일 종베기와 횡베기를 500회씩 하세요. 숫자는 제가 세겠습니다. 처음에는 낯설고 힘들겠지만, 용사는 성장이 빠르니 조급해하지 마세요. 우선은, 일격에 나무기둥을 베는 걸 목표로….)
촤좌자작!
나의 성스러운 일격이 숲을 갈랐다.
(어? 어라…?)
다음 수련은 뭐야? 그냥 전부 읊어봐.
56